소설리스트

미궁기담-336화 (336/813)

〈 336화 〉 330 숲 옆 마을 크라빈

* * *

‘이, 건 무슨 위압감이야……!’

심장이 옥죄고 온몸의 깃털이 잡아 뽑히는듯한 두려움과 긴장감.

이만한 긴장감은 2급 전사일 때 4급 비행형 마수 알바트리온을 만났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돌이킬 수 없는 큰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연륜과 그간의 경험으로 깨달은 롬디스=팔마는 온몸을 긴장시켰다.

무휘광의 영혼사가 정말로 존재했군. 그보다 역시 남자다. 아니, 남자인게 당연하겠지. 6급 직업자들을 이끌고 있는 성자. 지금 화내고 있는 건가? 왜? 어째서?

혹시 동생 새끼가 저지른 일을 들었나? 하지만 라비올라 아가씨에게 부탁해 사람들의 입단속을 시켰는데.

의아한 것은 이실리테와 안느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던 주인님/도령의 기분이 갑자기 저조해졌다.

이유라면 저 사람들 때문일 텐데 왜? 저택에 도착하고 5초도 안 지났는데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어색하고 서늘한 분위기 속에 환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을로 들어오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프라버에서 오신 분들이라고 말입니다.”

=예? 예. 저희는 의뢰를 받고 선행 파견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저는 알고 계신듯하니 제 소개는 건너뛰겠습니다. 이쪽은 제 여자들이자 호위인 검희 이실리테, 그리고 땅신 교단의 성투사 안느. 그리고 제 발이 되어주고 있는 동료이자 친구, 비상입니다. 저택에도 두 명이 더 있습니다. 6급 비술사인 유르파와 요정 정령사 환연이지요.”

롬디스=팔마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눈치챘나? 눈치챘겠지? 눈치챘으니까 저렇게 차가운 눈을 한 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자신들과 마주친 몇 초 사이 저렇게 화가 났을 이유가 없다. 마지막에 동료를 따로 분리해 소개한 것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 챘으니 이실직고하라는 협박이겠지.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망했다. 지금은 무조건 사과하는 수밖에 없다.

성자와 6급 희귀, 혼합 직업자로 이루어진 파티와 마찰을 빚을 생각은 절대 없는 롬디스=팔마가 식은땀을 흘리며 무조건적인 사과를 하려던 순간이었다.

쿠우~!

뭔가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걸 눈치채긴 했지만, 환인을 믿는 마음에 별거 아니겠지 생각한 비상이 목소리를 높여 친구를 불렀고.

「……아아안­ 이이인?!!」

그와 동시에 환인을 부르며 쌩하니 날아온 환연의 모습에 롬디스=팔마는 숨기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안돼. 저, 저 요정이 떠벌이기 전에 이쪽이 먼저……!

=성자님……!=

「환인! 저 파란 새대가리 새끼가 유르파한테 자기 정액 얼마에 살 거냐는 개소리를 지껄였어!!」

등 뒤로 헤일로 같은 빛의 링을 띄운 채 날아온 환연의 외침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

=…….=

“…….”

1초가 10초처럼 느껴지는 침묵.

「그래서 저 파란 새대가리를 반 죽여놓으려니까, 저 갈색 수리 대가리가 뭐랬는지 알아?! 환인을 들먹이면서 이러면 환인이 크게 곤란해질 거라고 협박까지 하더라니까!!」

아, 안돼.

수다쟁이처럼 나불거리는 요정의 이야기에 롬디스=팔마는 저 입을 틀어막고 그게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잠깐 사이, 위압감이 깃털을 잡아뽑을 듯한 살기 섞인 기백으로 변해 자신들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진짜! 프라버에서 알칸=드람이라는 인간이 보내서 왔다면 지금 마을 상황이 어떤지는 대강 머릿속에 욱여넣고 거기에 걸맞게 행동해야 할 거 아냐?! 그런데 와서 유르파한테 정황을 듣자마자 어쩌려고 했는지 알아?! 유르파가 예의를 차려서 말했는데도 다 개무시하고 너흴 쫓아가려 했다니까!? 거기다 나온 말이……!」

요정이 나불거릴 때마다 자신들이 전부 달려들어도 한 명 상대하기 어려울 것 같은 영혼 기사들의 눈이 한없이 살벌해진다.

롬디스=팔마는 다 포기하고 그냥 날아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랬다간 의뢰주인 하급 호족 알칸=드람과 관계가 험악해지는 것은 물론, 성자와 마찰을 벌여놓고 도망치면 더 이상 모험가로서 활동할 수 없게 된다.

미칠 것 같은 심정에 롬디스는 속으로 애원했다. 제발, 제발 한 마디만이라도 변론하게 해줘! 제발!!

그런 애원이 통한 걸까. 견문으로만 들은 땅신 교단의 고위 성투사가 성자를 잠시 바라보더니 그를 대신해 앞으로 나선다.

=야. 거기 너희들, 환연이 방금 한 말 진짜야?=

덕분에 롬디스=팔마는 경직에서 풀려나 헉, 숨을 몰아쉬었다.

고위 성투사의 분노도 살 떨리는 수준이지만, 성자님의 분노에 비하면 산들바람과 폭풍만큼이나 차이 난다.

롬디스=팔마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머,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진짜라는 거네.=

성투사의 기백이 살기로 변한다. 그그긍­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자이언트 워 해머, 땅신 교단의 고위 성투사에게만 주어진다는 유물급 무기인 천벌의 망치가 하늘로 들어 올려진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다른 영혼 기사도 길이가 2m는 넘는 대검을 꺼내 쥐고 요정도 작은 지팡이를 꺼내 드는 모습에 롬디스=팔마는 수명이 1년은 줄어드는 걸 느끼며 황급히 날개를 퍼덕였다.

=자, 잠시만! 제발 잠시만! 조금이라도 좋으니 변론을 들어주십시오!=

=야.=

쿠웅­! 위상력이 넘실거리는 천벌의 망치가 땅을 가볍게 두드리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발밑이 흔들린다.

=경고하겠는데 되도 안한 대가리 굴리다가 걸려봐. 너흰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될 거야.=

그러지 않아도 롬디스=팔마는 성자님과 사이가 이 이상 험악해지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나름 고족과 호족하고 연이 있어 영혼사라는 이들의 사정을 잘 아는 편인 롬디스=팔마의 눈에 저들은 대륙을 순례하는 영혼사 일행 중 한 손에 꼽을 정도의 실력자로 보였다.

영웅급 영혼 기사를 거느린데다 성자라고 불리는 상급 영혼사와 척을 진다고?

게다가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인데 알고 봤더니 법도 저들 편이네?

그런 저들과 적대 관계가 된다니, 차라리 죽고 만다.

그리 마음먹자 놀랍게도 굳어있던 부리가 풀리며 말이 술술 나오기 시작한다.

=먼저! 요정 님이 말씀하신 협박은 틀린 말입니다. 혹시라도 성자님의 일행이신 요정님이 성자님께서 안 계신 자리에 고족 자제인 저 새끼를 죽이기라도 하면, 성자님이 곤란한 일을 겪지 않으실까 우려해서 말렸던 겁니다.=

레드릭의 자루를 움켜쥔 채 눈에서 서슬 퍼런 위상력의 기운을 흘리던 이실리테가 환연에게 묻는다.

=저 말이 진짜야?=

「응? 어…… 중의적인 의미로 보자면 저렇게 해석도 가능하긴 하지?」

중의적인 의미는 지랄이!! 내가 한 말 어디에 곡해할 부분이 있다는 거야!!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저희는 4급 정식 인가를 받은 평범한 파티일 뿐입니다. 저희 모두가 나서도 중급 정령사인 요정님 한 분을 당해낼 수 없을 텐데 어떻게 요정님을, 성자님의 영혼 기사님에게 협박하겠습니까?=

=확실히 그건 그렇지. 환연이의 정령술은 지연 시간 없이 막 쏟아지는데다 자기도 제약 없이 하늘을 날아다니니까. 너희들 수준으로 막는다는 건 불가능해.=

롬디스=팔마는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성투사에게 반할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자신의 파티를 변호했다.

=그리고 다른 분들도 아닌 성자님이시지 않습니까. 저희가 머리에 화살을 맞지 않은 이상 미쳤다고 성자님의 영혼 기사님께 무례한 소릴 지껄이겠습니까? 저도, 우리도 죽어서 신님의 정원으로 들어가고 싶은 그저 평범한 모험가일 뿐입니다.=

그 말에 환연이 약오른 얼굴로 바락 소리쳤다.

「야! 그럼 저 새끼가 유르파한테 한 말은 뭔데?!」

=그건 저 자식이 대가리가 정액에 절여진 미친놈이라서 그런 겁니다!=

「아. 진짜?」

=혀, 형님……?=

동생이란 놈이 자신을 부르는 걸 들었지만, 롬디스=팔마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한다.

=저 자식이 그런 말을 할 당시 저는 이 마을의 고족 아가씨에게 크라빈 마을이 왜 이렇게 됐는지 자초지종을 듣느라 자리를 비운 상태였습니다. 만약 제가 옆에 있었다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도록 했을 테지만…… 아니, 죄송합니다! 저런 성정을 드러내지 못하게끔 철저하게 교육을 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변명이 나오는 순간 성자님 쪽에서 날아오던 위압감이 강해진 것을 느낀 롬디스=팔마는 변명을 관두고 즉시 사죄했다.

그랬는데 직후 뒤에서 날아든 목소리에 빡치긴커녕 너무 무서워서 숨이 멈추는 줄 알았다.

=형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 잘못이 어디에 있다고요?! 전 창녀 종족한테 성매매를 제안했을 뿐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절 공격한 건 저 요정이었고요!!=

그냥 저 새끼를 내가 죽여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성자님 일행과 적대관계가 되는 것보다 그냥 살인죄를 뒤집어쓰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살인죄도 명예 살인으로 포장하면 처벌도 낮아질 거 같고.

성자님의 시선을 막아주던 성투사가 옆으로 물러나고, 성자님이 다가온다.

롬디스=팔마는 성자가 아니라 마왕이 걸어오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무감각, 무감정, 무표정. 사람이 아닌 무생물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다가오는 그 모습이 공포 그자체다.

=서, 성자님…….=

“시끄럽습니다.”

롬디스=팔마는 성자의 일갈에 부리를 딱 다물었다. 조류의 직감이 왱알왱알 울고 있다. 지금 말 한마디 잘못하면 자신은 죽는다고.

한마디로 롬디스=팔마를 닥치게 한 환인은 그를 지나쳐서 자신을 향해 성난 눈빛을 보내는 공작새 계통의 조인족 남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당신 이름은?”

=호멘. 로트클러치의 피코크입니다.=

“호멘. 제 여자에게 그 발언의 사과는 했습니까.”

=성자님. 한가지 충고 드리자면 흡정족은 곁에 둘 가치가 없는 더러운 종족입니다. 성자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셈이 되니 멀리하고 다른 종족을 곁에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자기 발언의 정당함을 한 치 의심하지 않는 당당한 태도.

롬디스=팔마와 그 일행은 숨을 멈추었고 환인의 여자들은 어이없어하며 입을 다물었다.

환인은 느릿하지만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군요.”

……? 일반화의 오류는 뭐지?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알아들은 사람이 없는 반응에 환인이 설명했다.

“제 고향에서 조류는 멍청함의 대명사입니다. 돌아서서 열 걸음이면 자기가 하던 일도 까먹는 부류라고 알려졌습니다. 당신도 조류이니 그렇게 멍청하겠군요.”

=……그런 모욕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멍청하지 않습니다!=

“이게 일반화의 오류라는 겁니다. 조류가 멍청한 게 아니라 제 앞의 호멘이라는 조인족만 멍청하다고 해야 옳은 말인 것처럼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됩니까.”

=……!=

이만저만이 아닌 모욕에 호멘의 주먹이 불끈 움켜쥐어지고 눈꼬리가 하늘로 치솟는다.

환인은 그걸 보고 약간 의아해졌다.

자신의 살기가 약해진 걸까. 아니 그건 아니다. 롬디스=팔마라는 남자와 그의 뒤에 서 있는 남녀는 지금 사색이 되어 벌벌 떨고 있으니까.

그냥 화려한 청색 깃털의 호멘이라는 이 조인족이 머저리라고 생각하며 환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여자, 유르파는 더럽지도 않고 제 이름을 먹칠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제 여자를 창녀이니 더럽다느니, 모욕이란 모욕은 모두 다 저지르고 있군요.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환인은 숨결이 점차 거칠어지는 호멘을 무감정한 눈으로 응시하며 물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제 여자에게 사과하셨습니까.”

으득, 부리를 깨문 호멘이 굳고 비틀린 표정으로 으르렁거린다.

=안 했습니다. 그게 사실인데 왜 해야 합니까.=

“사과하십시오.”

=거절하겠습니다.=

후, 작게 웃음을 내쉰 환인이 천천히 오른손의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제가 라드세아에 도착한 이래 가장 놀랐던 것 중 하나가 인처 명예 결투였습니다. 자기 여자를 모욕하거나 손을 댄 남자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율법이었지요.”

롬디스=팔마는 환인이 뭘 하려는지 눈치 채고 당황해서 나선다.

=서, 성자님! 안됩니다, 이자식의 직업은……!=

“…….”

환인은 시선만으로 롬디스=팔마의 입을 다물게 한 뒤 어이없어하는 표정과 비웃는 표정 반반을 짓고 있는 호멘에게 다가가며 왼손에 쥔 장갑으로…….

쫘악!!

고개가 팩­ 돌아가다 못해 부리 일부가 부서질 정도로 강하게 후려쳤다.

고개를 따라 몸이 돌아간 채 비틀거리는 호멘에게 환인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과 목소리로 선언했다.

“호멘, 당신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도망은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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