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5화 〉 329 숲 옆 마을 크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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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 숲 옆 마을 크라빈
탈출은 어렵지 않았다. 3일 차에 일행이 한 번 지나가며 이형종을 쓸어버린 장소였고 아직도 이형종이 새로이 자리 잡지 않았으니까.
‘이형종의 번식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지 않은 건가.’
이정도라면 조금 여유를 가지고 공략해도 될 듯하다고 생각한 환인은 곧장 미궁의 밖과 안을 나누는 나무 벽을 뚫고 탈출했다.
=와, 햇빛이다…….=
시간은 이제 오전 11시 정도. 두 팔 벌려 따사로운 햇볕을 마음껏 충족하는 안느를 이실리테가 조금 황당하다는 눈으로 묻는다.
=겨우 5일이잖아. 다른 데서는 보름 넘게 지내도 멀쩡했으면서.=
=길게는 3주 가까이 있어본 적도 있었는데 여긴 특히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곳 같아.=
=……확실히 피곤하게 만드는 요소가 많긴 해.=
“잠깐 쉬고 있어라.”
여자친구들에게 그리 말한 환인은 비상의 등을 타고 날아올라 현재 위치를 가늠했다.
미궁의 위치, 입장했던 장소와 현재 빠져나온 곳.
그리고 수첩의 지도를 펴 자신이 작성한 미국 지도를 바탕으로 탈출한 위치와 형태를 대조해 미궁의 대략적인 축척을 계산해본다.
‘입구와 출구의 좌표적인 위치는 얼추 맞다. 그러나 내부가 실제보다 1.8배가량 넓군.’
게다가 환시??라도 숲 전반에 걸려있는지, 내려다보고 있는 미궁 외관은 그저 푸르스름한 기운으로 뒤덮인, 나무가 조금 무성하게 자란 평범한 숲이다.
산란못 미궁의 안쪽에는 이형종 개구리들이 싸돌아다니며 죄다 부러트리고 깔아뭉개서인지 멀쩡한 나무가 거의 없었다.
몇 그루 있긴 했지만 하늘을 덮고 지상을 가릴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결국 외부에서 미궁 내부의 자세한 정보를 얻기란 불가능한 거군.”
확인을 끝내고 지상으로 내려오자 이실리테와 안느가 비상의 등에서 내려놓았던 짐가방 몇 개를 챙겨 들고 있었다.
뭐하는 거냐고 묻자 이실리테가 대답한다.
=비상이 지고 있던 짐 일부는 저랑 안느가 짊어질게요. 주인님은 비상이를 타고 따라와 주세요.=
=미궁 안에서 식량하고 식수를 좀 소비했잖아. 거기에 짐 좀 뺐으니까 비상이도 도령을 태울 수 있을 거야. 좀 더 빠르게 돌아가기 위해서니까.=
확실히 자신이 비상을 타면 이동이 훨씬 빨라진다.
오는 길에 2시간 반 정도가 걸렸으니 되돌아가는데 1시간이면 충분하겠지.
비상은 환인을 등에 태우고 싫은 기색 없이 수풀과 나무로 무성한 숲을 가뿐히 달렸고, 환인의 여자들도 그리 힘든 기색 없이 비상의 뒤를 따라 달려 일행은 1시간 만에 크라빈 마을로 복귀할 수 있었다.
프라버 통신 수정 관리부서장의 의뢰로 크라빈 마을에 도착한 팔마 파티의 롬디스=팔마는 지난 5일간 무던히도 골치를 썩였다.
=후우…….=
같은 마을 출신에 고족 신분의 동생이 친 사고 때문이었다.
인성도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고 성격도 무난하다. 실력은 4급 궁엽사로 화려함을 좋아하는 공작 계통 조인족의 특징답게 꽤나 훌륭한 편이다.
다만 아무리 지적을 하고 리더의 권한으로 지적하고 혼내고 달래도, 예쁜 여자만 보면 참지 못하고 껄떡거리는 그 성벽 탓에 종종 사고를 쳤다.
싫다는 여자를 억지로 건드리거나, 직업자를 연인, 애인, 남편으로 둔 여자를 건드리거나, 여행 중 방문했던 마을 고족 아가씨를 함부로 건드려 분쟁을 일으켰다.
그래서 몇 번 싸움으로까지 번졌었는데 이번에도 같은 사고를 쳤다. 아니, 죄질로 따지면 이번이 더 심각한 일이다.
‘하필이면 성자의 영혼 기사에게 그런 짓을…….’
롬디스=팔마도 남자였기에 동생이 한 행동은 나름 이해가 갔다.
이번 상대는 남녀 가리지 않고 엄청나게 색을 밝힌다는 흡정족이었다.
성과 관련된 범죄에서 가해자 쪽이든 피해자 쪽이든 빠지지 않는 종족이 흡정족이다. 니오네브레스에서 종족 인구의 7할 이상이 성과 관련된 분야에 종사 중이라고 알려진 흡정족인 거다.
이런 취급은 사회적 현상으로 당연시되는 일. 여기에 유르파, 흡정족인 그녀는 보편적인 종족적 성 취향을 가진 자신도 살짝 마음이 동할 정도의 미녀였다.
저 높고 푸른 하늘의 구름처럼 하얀 머리카락. 저 설산의 고봉처럼 햇빛을 받아 빛나는듯한 하얀 피부.
비록 날개는 없지만 하늘의 일부를 닮은 그 모습이 정말로 매력적이어서, 하룻밤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금화 한 닢 정도는 낼 의향이 있었던 것.
하지만 그녀는 백화 현상 중인 흡정족이었고 성자의 파티에 소속된 영혼 기사였다.
그게 뜻하는 것은 성자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그녀가 성자의 성처리 담당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
롬디스=팔마는 그런 사실을 추리하고 성욕을 억눌렀고, 파티원들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할 거라고 여겼다.
아니었다.
동생은 유르파라는 흡정족에게 =직업자인 내 정액을 얼마에 사줄 거냐.=는 희대의 개병신 소리를 지껄였고 성자의 일행이라는 요정족의 격노를 샀다.
여기서 자신은 두 번째 오판을 저질렀다.
환연이라는 이름의 요정, 솔직히 아우라도 없어서 성자 일행의 마스코트 정도라고 생각했었다.
실제로는 보기드문 요정 정령사였고, 중급 정령을 다루는 굴강한 요정이었다.
자신이 마을의 유일한 책임자인 고족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그런 요정과 파티원들간에 짧은 대립이 벌어졌고, 아무리 자신이 빠졌다지만 4급 미궁도 돌파하는 믿음직스러운 파티원들이 무력하게 쓸려나갔다.
뻐꾸기 특유의 귀여운 무늬 깃털이 불에 그슬린 채 날아온 연인의 경고에 쏜살같이 날아가지 않았다면 동생은 통닭이 되었을 위험천만한 상황.
자신도 나름 5급 전사였고 비싼 전투 마도기를 다수 보유 중이었기에 간신히, 말 그대로 정말 아슬아슬하게 요정의 불의 정령을 막아내고 소리쳤다.
성자를 언급, 성자가 없는 곳에서 성자의 일행이 다른 사람을 살해하면 크나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소리쳐 동료의 사망이라는 최악의 사태는 틀어막은 것이다.
기지를 발휘해 참사는 틀어막았지만 롬디스=팔마는 마음이 불편했다.
분노한 요정이 유르파라는 흡정족을 데리고 돌아가면서 「개새끼들, 환인이 돌아오면 다 일러바칠 거야! 두고 봐!」 협박했기 때문이었다.
정황상 그 환인이라는 사람이 성자일게 틀림없는 상황.
=롬…….=
여기에 연인이 해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롬디스=팔마는 차라리 동생 새끼가 죽는 게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저 새끼가 요정에게 죽었다면 그나마 자신은 책임을 면피하고 요정의 살인죄를 두고 성자와 거래라도 할 수 있었을 테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2급에서 4급 사이의 이형종 900여 마리를 고작 사나흘 만에 모두 처단했다는 이야기를 이 마을 고족 아가씨에게 들었다.
날아서 지나가는데 몇 시간은 걸릴 듯이 넓은 이 숲에서 고작 사나흘만에 족히 천여 마리 가까이 잡았다고?
거짓말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을 관청 주변에는 증거품인 기생 두꺼비의 생식기 수백 개가 뜨거운 태양빛 아래 바짝 말라가는 중이었다.
=롬……?=
그 말은 자신들의 수색 능력을 뛰어넘는 탐지 능력을 가졌고, 범접할 수 없는 실력자들이라는 말.
하긴, 중급 정령사인 요정과 6급에 다다르는 비술사가 일행인 성자다. 그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겠지.
그리고 자신은 그런 사람들과 분쟁을 빚게 생겼고!
자신의 뛰어난 기지에 동생이란 새끼는 살아남았고 덕분에 자신도 자칫 연좌제로 묶일 상황이 되었다.
‘썩을. 망할. 빌어먹을.’
프라버의 통신 수정 관리부서장 알칸=드람은 성자에게 절대 무례하게 굴지 말라고 이야기했었다.
왜 좀 더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나. 새삼 그에게 원망이 치솟는다.
아니, 그건 아니다. 아무리 하급이라지만 프라버의 호족이 그리 당부했다. 자신이 좀 더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는데……!
=롬!=
어떻게 해야 이 일을 무마할 수 있을지 머리 깃털이 뽑힐 정도로 고민하고 있던 롬디스=팔마는 연인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그녀의 표정이 불길하다.
=시엘라. 무슨 일이지?=
=성자님이 돌아오셨대….=
올게 왔다.
한숨을 푹 내쉰 롬디스=팔마는 거금 40금화를 주고 산 자신의 애병, 삼절조三??를 발에 끼우고 천년두루미의 깃털로 짠 깃털 코트를 몸에 걸치며 물었다.
=호멘 그 자식은?=
=아직은 방에 얌전히 있어.=
밖을 돌아다니다 요정이나 흡정족의 눈에 재차 띄면 내가 직접 눈알을 파버리겠다고 소리쳤던 게 효과가 있었던 걸까.
답답함에 재차 한숨을 푹 내쉰 롬디스=팔마는 조인족만 들을 수 있는 고주파 소리를 내 빌어먹을 동생 새끼와 렉탈을 불러들였다.
라비올라가 업무를 볼 때 쓴다는 마을 관청, 그곳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걸으며 환인은 마을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지원으로 고작 4명이 도착했다니.’
그것도 5일 전의 이야기다.
프라버가 크라빈을 버렸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라비올라를 찾아가던 환인은 비상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저택 쪽을 돌아보는 모습에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물었다.
“왜 그러지.”
쿠응, 쿠읏.
……누군가가 누군가를 급히 부르고 있다고?
환인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기에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옆에서 걷고 있던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물어봤지만, 그녀들도 듣지 못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조류의 가청음으로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났다는 건가. 그렇다면…….
청각이 뛰어난 안느는 못 들었는데 조류인 비상만 들었다는 것. 프라버에서 직업자 넷이 찾아왔다는 것. 그리고 그 직업자가 전원 조인족이라는 것.
마을 입구 경비병에게 들은 것과 자신이 돌아왔을 때 저택 쪽에서 그런 소리가 났다는 것의 연관성을 점지은 환인은 관청이 아니라 저택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실리테, 안느. 저택에 먼저 들르지.”
=네.=
=응. 그나저나 고작 4명 밖에 안보내다니, 프라버가 마을을 버렸다는 걸까…….=
=조인족 직업자로만 이루어진 파티라고 하잖아. 선행으로 먼저 도착한 게 아니야?=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5일 전에 도착했다잖아. 뭔가 이상한데.=
이야기를 나누며 가로수가 나란히 심어져 있는 길을 따라 이동한 환인 일행은 얼마 안 가 라비올라의 저택 마당에 들어설 수 있었고, 저택 입구에 나와 있던 네 명과 시선이 자연스레 얽혔다.
=조인족이네. 저 사람들이 프라버에서 먼저 도착했다는 지원인원인가보다.=
=……그런데 안느, 우릴 보고 당황하는 거 같지 않아?=
=그러네. 뭔가 점점 수상해.=
여기서 이쪽과 마주칠 줄 몰랐는지 당황하는 네 명의 모습에 이실리테와 안느는 수상하다는 시선을 네 명에게 보내기 시작했지만.
‘전투의 흔적이군.’
환인은 그녀들과 다르게 마당에 옅게 난 몇 가지 흔적, 불에 탔다거나 땅이 뒤집힌 여파를 억지로 치운듯한 흔적을 발견하곤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는데 라비올라의 저택 앞마당에서만 전투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좋은 일이 벌어진 흔적은 절대 아니다. 더욱이…….
그의 시선이 아직 당황하고 있는 조인족 남녀 네 명에게 향한다.
전사, 전사, 성술사, 엽사인 4명. 그중 흑갈색 수리 머리의 남자만 5급이고 나머지 전사, 성술사, 엽사는 4급이다.
대규모로 불을 일으킬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 말은 환연이 불의 정령을 불러들였다는 뜻.
‘환연이 화를 낸건가. 저들이 무례한 짓을 저질러서?’
자신의 성격 일부를 닮은 환연은 분노와 짜증의 역치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안느가 귀엽다며 환연을 인형처럼 만지고 더듬어도 에휴, 못 말린다는 얼굴로 몸을 내어줄 정도다. 평범하게 모욕을 당했다고 중급 정령을 불러들일 만큼 화를 내는 상황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
화를 낸다면 자기 일보다 다른 일.
‘예를 들어 친구가 심각한 모욕을 당했을 경우.’
그런거라면 정령을 불러들여 공격할 만큼 분노하는 게 이해된다.
환연의 친구는 자신의 여자친구들과 비상 뿐. 그리고 마을에는 유르파 밖에 없었다.
흡정족인 유르파. 니오네브레스에서 이미지도, 처우도 나쁘기 그지없는 종족. 그말은…….
추리가 정답에 다가갈수록 환인의 눈빛이 서늘해지고 날카로워진다.
환인의 시선이 얼어붙어 가는 가운데 네 명 중 가운데 하얀 깃털 코트를 입은 수리 머리의 조인족 남자, 롬디스=팔마는 경고종이 머릿속에서 미친 듯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미친, 미친! 저 갑옷은 땅신 교단 고위 성투사의 갑옷이잖아! 그리고 저거, 뒤에 있는 저건 성수급이라고 알려진 녹색 쿠에 성체?!
옆의 호박색 머리카락의 어마어마한 미녀는 또 수백 금화는 될법한 아름다운 갑주와 비싼 마수가죽 망토를 두르고 있다.
그리고 6급에 달하는 아우라 농도까지.
=야, 너희들은 누구야?=
안느의 경계심 섞인 질문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롬디스=팔마는 눈앞의 일행이 미궁을 파괴하러 떠났다는 성자 일행이라는 걸 깨닫고 자기 자신에게 속으로 윽박질렀다.
‘롬, 긴장하지 마라. 실수하면 죽는다.’
느닷없이 집 앞에서 마주쳐 놀라긴 했지만, 어차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롬디스=팔마는 적당한 거리에서 한쪽 팔을 가슴에 올리며 살짝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프라버와 알류겔 호수 서북부를 기점으로 활동 중인 팔마 파티의 롬디스 팔마입니다. 고명하신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님을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자신이 5일간 마을에 머무르며 보고 들은 성자 일행의 무력 수준이 혹시라도 과장된 것은 아닐까, 요정이 했던 말이 허언은 아니었을까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었는데 전부 부질없는 짓이었다.
저정도면 어지간한 직업자 파티는 저들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허리를 숙이는 것도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허리를 들던 롬디스=팔마는 심장이 멈추는듯한 두려움을 느꼈다.
“반갑다고 답사를 드려야 하는 상황이지만, 왠지 지금 상황은 그런 말이 어울리지 않을듯합니다.”
검은 머리의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을 한순간 숨이 턱 막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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