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4화 〉 328 산란못 미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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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18+ 고어, 비위 주의※ 중간부터 보셔도 됩니다
환인이 발견한 미궁의 중간 지점, 3시 방향에서 발견한 산란못은 초특대 규모였다.
그 크기만큼이나 많은 이형종이 모여있었고, 환인은 1시간에 걸친 유인과 토벌로 수백 마리의 양서류 괴물을 겨우 소탕할 수 있었다.
전투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니 중간에 안느가 =이것들이 언제까지 몰려오는 거야?!=라고 소리쳤을 정도.
이때문에 환인의 여자들은 일시적으로 시야가 전투에만 집중되었다.
주변을 둘러볼 여력이 감소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은 환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녀들이 싸우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에서 전투의 흐름을 주시하다가 그녀들이 미처 눈치채지 못한 이형종의 공격을 포착하면 영혼 화살과 영혼 폭발로 커트해준다.
이형종이 과도하게 밀집된 곳은 비상과 힘을 합쳐 광역 영혼 & 바람 폭발을 떨어트려 피해를 주고 어그로가 끌린 몇 마리가 이쪽을 향해 돌진해오면 평온의 파동을 펼치고 4중첩 영혼 화살로 머리통을 날려버린다.
유독 덩치가 크고 힘이 세보이는 이형종은 저주를 걸어 무력화시키고 급격히 난전으로 치닫는 상황에서는 평온의 파동을 펼쳐 순간적으로 어그로를 초기화해버린다.
그러면서 주변의 또 다른 이형종 무리가 이끌리고 있지 않은지 주변을 확인하고 이형종이 몰려오는 것을 발견하면 그녀들에게 알려주는 식이라 전투 외 다른 상황에 신경을 쏟을 틈이 없었던 것.
그때문에 1시간에 걸친 전투를 끝냈을 때도 환인과 그의 여자들은 이상을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은 이실리테였다.
=……!=
자신들이 죽인 이형종의 사체에서 위상석을 찾기 위해 탐지 도구를 들고 돌아다니던 이실리테는 기생촉수 두꺼비 네 마리가 절단되어 죽어있는 장소에서 눈앞이 아찔해지는 광경을 목도했다.
절단되어 죽은 기생촉수 두꺼비의 벌어진 입안에서 흘러나온 듯, 상하체로 잘린 채 죽어있는 여자.
이실리테는 손이 살짝 떨렸다.
죽은 사람을 보아서 충격받은 것은 당연히 아니다.
도적으로 활동할 적에 죽은 사람은 수두룩하게 보았고 도적단끼리의 마찰로 수십 명의 명줄을 자기 손으로 끊어놓은 적도 있는 이실리테다. 이 정도 일에 정신적인 충격은 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가 충격을 받은 이유는, 자신의 다중 검기에 죽은 것이 확실했고 영혼 기사란 영혼사님의 명령 없이는 함부로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절단면으로 신선한 피를 아직도 울컥울컥 흘려보내고 있었다.
자신이 죽인 것이다.
내, 내가 한 짓으로 주인님이 피해를 보시면 어떡하지?
패닉에 빠졌던 것도 잠시, 이실리테는 스사가 멋모르는 천둥벌거숭이 시절의 자신에게 한 가장 큰 충고를 떠올렸다.
=명심하십시오. 당신은 머리가 좋지 않아요. 스스로 판단하지 말고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선보고 후조치, 영혼사님께 먼저 알리는 겁니다. 그리고 상명하복, 영혼사님이 내리는 지시를 성실하게 따른다면 이실리테 씨가 영혼사님께 버림받는 날은 오지 않을 겁니다…….=
=…….=
머릿속에 스사의 말이 메아리치는 것을 느끼며 작게 심호흡한 이실리테는 떨리는 목소리로 주인님을 불렀다.
=주인님. 여기 좀 봐주세요.=
환인은 이실리테가 힘없이 부르는 소리에 널린 기생촉수 두꺼비, 독화살 개구리의 사체 사이에 선 그녀에게 다가가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명치를 기점으로 상하로 나뉜 여자가 그녀의 발치에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상하로 나뉜 몸뚱이의 상태는 꽤 심각했다.
가죽을 벗긴 꼼장어 같은 시뻘겋고 길쭉한 살덩어리가 시체의 몸을 휘감은 채 끊어져 있었고 가슴은 이실리테의 I컵에 가까운 가슴만큼이나 부푼 상태인데, 가슴 안에 뭐가 들어가 있는지 수시로 꿈틀거리고 울룩불룩해지며 흔들리고 있었다.
하체는 더욱 심각했다.
배가 네 쌍둥이 만삭 임산부처럼 믿을 수 없을 만큼 나와 있었고 성인 남자의 팔뚝만 한 살덩어리가 여자의 항문 깊이 파고들어 가 있었는데 그 탓에 음부까지 빠끔 열려있다.
환인의 시선이 여자의 배로 향한다.
시퍼런 핏줄이 두드러지고 배꼽이 밀려 나올 만큼 팽팽하게 부푼 상태인데다 가슴과 마찬가지로 안쪽에서 울룩불룩 움직이는 게 보인다.
평범한 여자라면 보고 졸도해버릴 정도로 끔찍한 모습.
환인은 주변에 베여 죽은 기생촉수 두꺼비들의 사체를 둘러보고 낯빛이 파리해진 채 여자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실리테를 보았다.
대충 그녀가 무엇을 우려하고 있는지 눈치챈 환인은 여자의 시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실리테를 품에 끌어안고 다독였다.
“네 잘못이 아니다.”
=하, 하지만 제가 죽인 거나 다름 없어요. 배 속에 여자가 잡혀있다는 걸 생각하고 싸웠어야 했는데.=
“바보 같은 소리. 넷이서 수십 마리 이형종과 싸우는 마당에 그런 것까지 신경 쓰라는 것은 죽으라는 소리와 다름없다.”
=그렇지만…….=
환인은 장갑을 벗고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이실리테의 머리를 상냥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기억해둬라. 우리는 미궁에 잡혀간 여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미궁을 닫고 800명의 마을 사람들에게 평온한 삶을 주기 위해 온 거다.”
=…….=
“네가 소극적인 공격을 펼치다가 당하기라도 하면 그것이 더 큰 문제가 된다. 명심해라.”
=네…….=
=뭐야? 무슨 일 있…… 우웁.=
뒤늦게 찾아온 안느가 여자 시체를 보자마자 토악질을 할뻔하곤 고개를 홱 돌렸다.
라비올라의 설명만으로도 속이 메슥거려 고생했었는데 실상을 목격한 안느는 도무지 제정신으로 여자 시체를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죽은 자에 대한 예우가 아니다.
안느는 필사적으로 울렁이는 속을 억누른다. 그리고 눈조차 감지 못하고 죽은 여자의 눈을 감겨준 뒤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자비로운 대지의 주인이시여, 땅에서 태어나 땅에서 살아가던 한 여성을 다시 땅으로 되돌려 보냅니다. 부족하고 약한 자의 육신은 이곳에 묻히지만 영혼은 주인님의 정원으로 돌아가 정화되어 모자람 없고 강한 영혼이…….=
안느의 청아한 목소리가 조그맣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여자의 시신에서 영혼이 빠져나온다.
“…….”
잠시 후 몸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여자 영혼은 멍하니 자기 몸뚱이의 몰골을 바라보다가 무표정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한다.
자해하듯 몸을 긁는 두 손. 의미 불명인 움직임을 보이는 두 다리.
명백하게 제정신이 아닌 모습이다.
“정신 차리십시오. 괜찮습니까.”
환인이 강제력으로 말을 걸며 영기를 살짝 흘려 넣어주자 여자 영혼이 그제야 발작을 멈추고 환인을 돌아본다.
어떻게 자신을 볼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가는 듯한 표정이 잠시 이어지다 눈물을 왈칵 흘리며 환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영혼사님, 영혼사님이신가요?!」
“그렇습니다. 크라빈 마을의 소식을 듣고 미궁을 닫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여자 영혼이 환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며 눈물과 함께 애원하기 시작한다.
「제발, 제발! 영혼사님, 제 몸 안의 괴물을 전부, 전부 빼주세요! 이렇게 몸이 더럽혀진 상태로는 신님의 정원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 제발… 제발……. 흑흑…….」
여자 영혼이 괴로움에 흐느껴 울기 시작하니 급기야 시체처럼 젖가슴과 배가 괴물을 임신한 것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시체의 상태가 영혼에게까지 영향을 주는 그 모습에 환인의 여자들이 흠칫 놀라고, 환인은 혼재의 전염 현상과 흡사하다고 생각하며 단검을 꺼내 들었다.
“알겠습니다. 안느, 비켜라.”
=어, 어!=
“괜찮겠습니까.”
「네!! 난도질해도 괜찮으니 제 몸에서 괴물의 새끼를 하나도 남김없이 빼내주세요, 제발요!」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여자 영혼의 요구에 남산처럼 부푼 여자 시체의 배를 갈랐다.
명치에서부터 아랫배까지 단숨에 그어내리자 한계까지 팽창된 자궁이 찢어지며 투명한 괴물 개구리 알, 반쯤 부화한 괴물 올챙이 등이 찢어진 구슬 주머니의 구슬처럼 좌르륵 소리를 내며 주위로 쏟아진다.
=……!!=
=…….=
그 끔찍한 모습에 이실리테와 안느가 흠칫, 어깨를 떨었지만, 환인은 고기를 손질하는 것처럼 아무런 감흥 없이 여자의 자궁을 좀 더 찢어 속에 든 괴물 올챙이와 개구리 알을 꺼낸다.
그 압박에 질을 통해서도 뭉개진 알들이 삐칠 거리며 새어나온다.
환인은 그걸 본 순간 괴물의 알과 괴물 올챙이가 자궁에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차렸다.
자궁을 옆으로 치우자 직장과 창자가 마치 억지로 속을 채운 순대처럼 찢어질 듯이 부푼 게 보인다.
여자의 항문에 박혀있는 기생촉수 개구리의 생식기를 쥐고 잡아당기자 쀼르르륵 소리와 함께 1m는 되는 살덩어리가 점액질과 함께 쑴풍 빠져나왔다.
그와함께 벌어져 닫히지 않는 항문으로 으깨지고 뭉개진 괴물 올챙이와 개구리알이 멀쩡한 것들과 섞여 대변처럼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웁. 아, 난 안돼…….=
안느가 결국 포기하고 몸을 돌린다.
환인은 여자의 딱딱해진 내장을 만지다가 고개를 젓고는 창자와 직장을 끊고 통째로 들어냈다.
그냥은 속에 든 것을 꺼낼 방도가 없다.
그 뒤 개복된 여자의 배를 닫고 이어 젖가슴을 만져보며 단단하게 느껴지는 곳을 단검으로 찌른 다음 손가락을 밀어 넣고 좌우로 벌렸다.
「아아아…….」
가슴 속에 들어가 있던 괴물 올챙이가 찔려죽은 채 흘러나오는 모습에 여자 영혼이 다시 흐느껴 운다.
그 소리에 돌아서 있던 안느가 후우, 심호흡한 뒤 여자 영혼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저기…… 우리 도령은 혼재도 정화하는 성자님이거든? 이 상황이 괴롭고 힘들겠지만…….=
「아니, 아니에요. 아니에요…….」
환인은 뒤의 이야기 소리를 들으며 시체를 부검하는 의사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여자의 시체에서 괴물의 찌꺼기를 제거해나갔다.
양 젖가슴 속에 들어가있던 괴물 올챙이를 모두 제거한 환인은 괴물 개구리알의 점액질이 흐르는 상체의 절단면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예상대로 위장이 크게 부풀어있다. 그걸 짜내자 여자의 구강과 아래쪽 절단면으로 반쯤 소화되다 만 개구리 알과 괴물 올챙이의 잔해가 울컥거리며 밀려 나온다.
잔인한 장면은 적지 않게 보았던 이실리테도 이 모습에는 희미하게 눈가를 떨었을 정도.
동물 시체를 부검하는 의사처럼 여자 시체를 다루며 정보를 얻고 있던 환인은 그것을 보고 이해했다.
‘이러니 최소 6일, 최대 2달을 살아서 버틴 거군.’
마지막으로 여자가 잡혀간 게 6일 전이라고 들었던 환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었던 건가 의문이었는데, 기생촉수 개구리가 개구리알과 올챙이를 억지로 먹여 살려놓았던 것이었음이 시체를 통해 드러났던 것.
그후 여자 시체를 만지며 몸 상태 등을 마저 확인한 환인은 너덜너덜해진 여자의 시체를 수습했다.
“이실리테, 응급처치 도구에서 실과 바늘을.”
=네, 주인님.=
크게 가른 배를 다시 꿰매고 상체와 하체로 분리된 곳도 이어붙인다. 젖가슴의 찔린 곳도 꼬매고 2리터들이 물통에 성수를 섞은 뒤 몸에 뿌려가며 이물질을 씻겨낸다.
그렇게 조치가 끝나자 여자 영혼은 그제야 원래의 날씬하고 예쁜 모습으로 돌아가 눈물을 흘리며 환인에게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혼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환인은 눈물을 흘리며 빛무리로 변해가는 영혼을 보면서 속으로 골치 아프게 됐다고 중얼거렸다.
라비올라에게 듣기로 끌려간 여자는 사망자 200명 중 어림잡아 140여 명. 그중 절반만이라도 살아있다면 그 숫자만 70명이다.
만약 여자를 구하게 된다면 한두 명씩 끊임없이 늘어날 테지. 그리고 그 여자들은 제정신일 가능성이 낮다.
몇 주간 기생촉수 두꺼비의 몸속에서 강간당하며 괴물을 출산해왔을 텐데 이성이 유지되고 있을 리 없다. 그런 여자들을 챙기려면 지금 이 인원으로는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이실리테와 안느가 전투를 소극적으로 펼칠 수도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
고민하던 환인의 눈에 승천한 여자 영혼이 남긴 상당한 숫자의 빛구슬이 들어왔다.
다른 평범한 영혼들에 비해 족히 10배는 많은 양.
‘직업자 영혼은 빛구슬을 더 많이 남기는 건가.’
골치아픈 일이 늘어난 가운데 드는 강한 의문 하나.
직업자의 영혼이 지금처럼 자의로 성불하며 빛구슬을 남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직업자여서 빛구슬이 훨씬 많이 남았다는 것은 이해했다.
의문은 평범하게 재난으로 사망한 직업자의 영혼이라 해도 일반 영혼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
그렇다면 자신이 삼림형 미궁에서 구해온 류히의 언니, 루아는 뭐였을까.
그녀의 영혼은 직업자처럼 아우라를 두르고 있었다. 이전에는 직업자의 영혼일까 했지만 그간 자신이 죽인 직업자의 영혼을 보며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상황.
‘카턴마을에서 알드헬름에게 살해당해 악령화하려던 그 여자도 검은 아우라가 있었지. 시더도 반쯤 혼재화하며 아우라 같은 것이 흘러나왔고.’
그럼 루아의 그 현상은 혼재의 반대 현상이었나.
혼재의 반대 현상이라면 뭘 말하는 거지?
‘영도에 가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지금은 궁금증을 풀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환인은 의문을 접어두고 40여 개가 넘는 빛구슬을 거두어들였고.
“…….”
영혼 구슬의 최대 갯수가 3개나 더 증가했다는 걸 알게 된 환인의 눈이 한차례 번뜩였다.
환인은 승천한 여자의 이목구비를 수첩에 그린 뒤 지푸라기색 머리카락 한 움큼을 잘라 묶어 유품으로 짐가방에 챙겼다.
그리고 산란못에서 떨어진 땅에 시신을 매장한 뒤 표식을 남긴 다음 여자친구들을 돌아보았다.
=…….=
=…….=
삽을 든 채 멍하니 여자를 묻은 장소를 내려다보는 이실리테와 안느.
자신의 시선에 어색하게 웃는 안느와, 애써 기운을 내려고 하지만 힘이 잘 나지 않는듯한 이실리테의 모습에 환인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
“5일차인 현재 미궁의 1/3은 탐색이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응? 응…….=
“심핵과 중핵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이형종을 확인한 것과 다름없다고 본다. 이정도면 미궁의 생태도 파악이 끝났다고 판단해도 될 거다. 그러니 이때까지 해왔던 것처럼 못할 거 같다면 지금 말해라.”
제 실력을 내지 못할 것 같으면 지금 말하라는 이야기에 안느가 살짝 손을 들어 묻는다.
=만약 못할 거 같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데……?=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눈치 보며 묻는 모습에 환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한다고 해서 너희에게 실망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너희가 느끼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니까.”
정식 단어는 아니지만 은어와 합성어로 군사 쪽에서 사용하는 모랄빵이라는 단어가 있다.
사기치가 바닥까지 내려가 지시도, 명령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행동과 판단력 및 능력까지 대폭 감소하게 되는, 이를테면 정신적 상태 이상을 말한다.
안느는 크라빈 마을에서부터 모랄이 조금씩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었었다.
사람간의 친화력이 강한데다 남들의 감정과 마음을 느낄 수 있는 플뢰족인만큼 타인이 겪은 재난과 불행에 쉽게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실리테는 직전까지 행동에 한치 흠도 없이 훌륭했지만, 살아있는 여자의 허리를 베어버려 죽게 만든 것으로 자신에게 피해를 주게 됐다는 사실에 모랄이 흔들리고 말았다.
지금은 그럭저럭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여기는 미궁이다. 정신침해가 일어나는 장소.
저 상태에서 또 한차례 실수를 저질렀다간 사기가 대폭 감소할 테고, 비상을 포함해 넷이서 수십 마리의 이형종과 싸우는데 그러한 정신 상태는 큰 사고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환인은 타박하거나 구박하지 않고 천천히,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못 하겠다면 마을로 돌아가서 너희는 휴식, 환연과 교대한 뒤 비상과 나, 환연 셋이서 나머지 구역을 탐색한다. 비상의 짐을 대폭 줄이면 날아서 마을과 미궁을 왕복할 수 있을테니 낮에는 미궁을 탐사하고 밤에는 마을로 돌아가 쉬는 일정이 될 거다.=
그렇게 미궁 탐사가 완료되어 중핵과 심핵만 남긴 상태가 되면 다시 둘을 불러 미궁의 공략을 진행하겠지.
말이 끝난 직후.
짝!!
입술이 찢어지고 입안이 터진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양손으로 자기 뺨을 때린 이실리테가 양 볼이 빨개진 얼굴로 눈에 불이 들어온 것처럼 빛내며 말했다.
=전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안느는 눈을 감고 심호흡하더니, 환인을 비 맞은 강아지처럼 바라보며 부탁한다.
=난 잠시만 안아주면 안 돼? 그럼 괜찮아질 것 같은데.=
환인은 자신을 위해 힘을 내려는 그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가 안느의 흉갑만 벗긴 뒤 체온이 전달되도록 품에 꼭 안아주었다.
뒷머리도 쓰다듬어주고 등도 토닥여주어서일까, 안느는 환인의 목덜미 체취를 크게 들이마시고는 상태가 호전된 모습으로 =응, 이제 괜찮아!= 웃으며 말했다.
이어 이실리테도 꾹 안아준 환인은 자신도 안아달라는 듯이 뒤에서 서성이는 비상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기운을 차린 여자친구들에게 말했다.
“마을로 돌아간다.”
=엣.=
=엥?=
돌아간다는 환인의 결단에 잠깐 멍해졌던 이실리테와 안느가 화들짝 놀라 매달렸다.
=도령! 나 진짜 괜찮아졌어!=
=저, 저도요 주인님.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잘할 수 있어요!=
=어? 이슬이 너 코피난다.=
=…앗, 아앗.=
아까 뺨을 때리며 기합을 넣었던 게 과했는지 뒤늦게 코피를 흘리는 이실리테가 황급히 손수건으로 코 밑을 훔친다.
=아무튼 우리 진짜 괜찮다니까?!=
=네! 진짜 괜찮아요!=
“알고 있다. 알고 있으니 진정해라.”
환인은 좌우에서 자신의 팔을 붙잡고 흔드는 여자친구를 진정시켰다.
“그렇게 기합을 넣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정신적 피로도가 높아졌다는 증거다. 기합을 넣었으니 일시적으로 기운은 나겠지만, 미궁의 정신 침해도 그렇고 또 여자가 희생된 장면을 보면 그때는 어쩔 셈이지.”
=도, 도령…… 혹시 여자들이 다 죽은 뒤에 돌아오려는 거야……?=
그건 아니지? 하고 묻는 안느를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평온의 파동을 발사했다.
회백색 빛의 파동에 휘말린 여자친구들이 흠칫했다가 어깨를 이완시킨다. 환인은 그런 안느의 말랑보들한 볼살을 주우욱 잡아당기며 나지막이 말했다.
“무슨 비약적인 생각을 했는지는 묻지 않도록 하지.”
=아, 아아! 미, 미앙행~.=
좀 더 잡아당겨 보고 싶은 찹쌀떡 같은 안느의 볼살을 놓아준 환인은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 뺨을 문지르는 안느를 바라보다가 안개에 가려진 산란못 미궁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라비올라 양은 끌려간 여자를 대략 140명 정도로 추산했다. 이 가혹한 환경에 버티지 못하고 절반이 죽었다 해도 70명. 10%만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14명이나 된다. 만약 구출하게 되면 그녀들을 케어해야 할 텐데 우리만으로는 불가능해.”
정신이 나갔다거나 체내에 괴물의 씨앗을 품은 여자는 말 그대로 짐 덩어리다. 그런 여자들을 하나둘도 아니고 십수 명을 끌고 다닌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
그 인원을 관리하고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다.
=아, 그럼?=
“돌아가서 하루 쉬고, 복귀할 때 우리를 지원할 인원을 차출해서 온다. 정신을 차렸으니 하루 정도 푹 쉬면 다시 기운이 나겠지.”
=응!=
환인의 계획을 들은 이실리테와 안느가 아까보다 더 환한 표정을 짓더니 좌우에서 환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좌우에서 풍겨오는 그녀들의 체취와 딱딱하고 차가운 갑옷의 감촉을 느끼며 환인은 자신을 설득했다.
이게 지금 내릴 수 있는 가장 나은 선택지다.
물론 지원으로 뽑아온 인물들이 사망할 가짓수가 있긴 하지만, 그건 미리 경고해준 뒤 지원자를 뽑는 것으로 충분하겠지.
‘프라버에서 파견한 지원 병력이 지금쯤 도착해있을 수도 있고.’
그들과 공략 마찰이 빚어질 수 있지만, 환인은 자신들에게 우선권이 있음을 충분히 피력할 자신이 있었다.
만에 하나 그걸 위해 수첩에 미궁의 정보를 전부 기입해왔던 것이니까.
쏴아아아……
호수처럼 거대한 산란못 수면이 흔들리며 동물들이 시체처럼 둥둥 떠다니는 것을 잠시 응시하던 환인은 여자친구들을 이끌고 가장 가까운 미궁 외벽으로 향했다.
(산란못 미궁 5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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