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3화 〉 327 산란못 미궁
* * *
비상은 400kg에 달하는 짐을 들어주는 역할과 비상시 탈출 역할 외에 다른 하나의 역할로 일행 1인분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바로 예리한 적의 감지 능력으로 야영 시에도 이형종의 접근을 불침번 중인 인원보다 더 빨리 캐치해 알려주었던 것.
4일차인 현재 휴식과 야영을 포함해 습격받은 횟수는 하루 평균 2회.
오늘도 새벽 5시경에 습격해온 이형종을 비상의 경고 덕에 사전에 파악하고 여자친구들과 함께 퇴치한 환인은 작게 한숨을 쉬며 잠자리를 정리했다.
모닥불에 장작을 더 넣고 뒤적여 불씨를 키우자 달빛조차 닿지 않아 어두컴컴한 미궁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침범한다.
마녀의 손가락처럼 자란 나무들로 인해 기괴한 그림자가 춤추지만, 환인과 안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모닥불에 장작을 보충한 뒤 망토를 모포처럼 두른 환인이 비상에게 등을 기대자 한층 더 커져 안정감이 높아진 비상이 날개로 환인의 몸을 포근하게 감싸준다.
긴 목을 움직여 자신의 무릎 위에 머리를 올린 비상을 쓰다듬어주던 환인은 야영지를 둘러보았다.
저쪽에는 이형종의 사체가 열 구 넘게 쌓여있고 이실리테는 이형종을 퇴치한 뒤 곧바로 정화포 마스크를 쓴채 모포를 몸에 감고 애벌레처럼 잠에 빠져든 상태.
자신의 불침번 때 습격받았던 안느는 성수포로 손을 닦고 열선 플레이트에 찻물을 올리고 있었다.
잠시 후 차를 내려 은제 컵에 담아온 안느가 환인에게 내밀며 물었다.
=도령. 더 안 자?=
“잠이 달아나서. 잘 마시지.”
=응.=
환인의 옆에 앉은 안느는 자신의 컵을 두 손으로 쥐고 쓰쓰쓰쓰 귀를 간지럽히는듯한 풀벌레 우는 소리를 듣다가 중얼거렸다.
=미궁 안에도 실베짱이가 살고 있네…….=
“개방형 미궁이라 흘러들어온 곤충이겠지.”
=그러려나.=
“…….”
뭔가 할 말이 있는 느낌에 안느를 돌아보자 은색 눈동자에 모닥불의 불빛이 드리워져 반짝이는 모습이 환인의 망막에 맺혔다.
아름다운 여자는 일상이 화보라는 말, 역시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며 명화를 감상하듯 안느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보기 좋은 혈색의 입술이 오물거리다 멋쩍은 미소를 띤다.
=왜 그렇게 봐?=
“불빛이 비친 네 눈이 아름다워서 감상하고 있었다.”
멋쩍은 미소 위로 민망해하는 감정이 덧씌워진다.
=진짜 도령한테 평생 듣지 못했던 말을 다 듣는 기분이야.=
“그런가. 이제 내가 아니더라도 아름답다고 해줄 사람은 많을 텐데.”
배시시 웃은 안느가 부끄러운 듯이 컵을 쥔 손을 꼼질 거리며 중얼거렸다.
=임자있는 여자한테 누가 그래. 그리고 내 미모는 도령……… 이니까…….=
“마지막이 잘 안 들렸다. 다시 말해다오.”
=……내 미모는 도령 전용이라고. 도령 덕분에 바뀌었으니까.=
부끄럼이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한 안느는 부끄러운 말을 여러 번 하게 시킨다며 작게 투덜거렸다.
그리고는 얼굴을 굳히더니 조금 시무룩해져서 사과한다.
=미안해, 도령.=
“……너에게 사과를 들을만한 일은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어제 말이야.=
어제? 어제뿐만 아니라 미궁에 들어왔을 때부터 생각해봤지만 그녀가 사과할 이유를 찾지 못한 환인은 대답을 요구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 때문에 도령이 말을 바꾼 거지? 미궁 심부를 찾아가는 이유.=
……그건가.
사람의 마음과 진심을 선천적인 종족 능력으로 쉽게 알게 되는 플뢰여서 눈치챈 거군.
호감 관리를 위한 표면적인 대답은 그녀의 설명을 듣자마자 떠올랐지만, 환인은 드물게 말을 꺼내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도령만큼은 우리를 신경쓰지 않고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 말을 숨기지 않고 해줬으면 좋겠어. 만약 우리 때문에 도령이 참고 억누르면 그건…… 우리에게 큰 슬픔이 될 거야.=
“…….”
=도령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무슨 말을 하더라도 우리는 도령을 믿고 이해할 거니까…….=
아래를 내려다본 환인은 비상이 크고 맑은 눈을 뜨고 깜빡거리는 걸 볼 수 있었다.
환인과 시선이 마주친 비상은 눈치껏 환인의 무릎에서 머리를 치웠고, 환인은 흉갑만 벗고 튜닉 차림인 안느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가슴 옆에 닿는 감촉이 평소 그녀의 가슴답지 않게 탄력이 강하게 느껴진다.
안느가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걸 느끼며 환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희의 반응에 원래 하려던 말을 두고 다른 말을 꺼낸 것은 맞다. 하지만 그건 너희들의 남자로서 갖춰야 할 언행이었을 뿐이다.”
=응?=
“괜히 들어서 기분 상할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안느가 과거를 추억하다 체격으로 기분 상한 일을 떠올리곤 우울해할 때 근육 돼지라고 장난치는 것과, 평상시에 그런 장난을 치는 것은 의미가 전혀 다르다.
후자는 마음 넓은 안느여서 너무하다는 둥 못됐다는 둥 같이 장난으로 웃어넘길 수 있지만, 전자는 마음에 상처로 남을 수도 있는 일.
“그때 내가 하려 했던 말은, 희생자의 영혼을 발견할 수 있을 터이고 영혼에게 정보를 얻어 탐색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당시에 그 말을 들었다면 이형종의 행태에 분노하고 있던 너의 마음에 한 점 얼룩이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
“그렇다고 해서 탐사 결과가 달라지는 일은 없다. 과정은 다르나 결과는 같을 테니까.”
안느는 자신들을 배려해주었다는 이야기에 왠지 가슴 속이 간질거리는 걸 느끼며 다리를 모아 끌어안는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너희에게 딱히 숨기는 일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거다. 숨기는 게 생기면 생길수록 관계는 어색해지거나 딱딱해질 테니까.”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녀들에게 환인도 그에 대한 예의로 자신의 비밀을 전부 보여주었다.
정신이 일반인과 다르다는 것,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 자신의 직업이 평범한 영혼사와 다르다는 것까지.
이러한 마당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주는 그녀들 앞에서 굳이 가식적인 언행을 보일 이유는 없다.
=그렇구나……. 다행이야. 난 또 우리 때문에 도령이 그런 줄로만 알았거든.=
“좋아하는 여자가 심적 고통에 시름하는 것을 보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일이지.”
또다시 고백과 비슷한 말에 안느는 얼굴이 삽시간에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도령은 평소에 전혀 안 그러다가 무심결인 것처럼 가슴 두근거리는 말을 툭툭 던진단 말이야.
그때, 안느는 자신의 가슴으로 다가오는 환인의 손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리고 안착하는 그 손에 뒤늦게 움찔 놀라며 두 팔로 가슴을 가렸다.
=왜, 왜?!=
“어쩐지 가슴 느낌이 평소보다 단단하더라니. 결국 만들었군.”
뽕을.
“헬루멘에서 만든 건가.”
=으, 응! 정령의 동굴을 탐사하고 받은 용돈으로……… 이, 이상해?=
“감촉은 조금 마음에 들지 않지만 외관은 과하지 않아서 마음에 드는군.”
안느는 환인의 감상에 훗,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애초에 목적이 환인의 눈에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였으니까. 감촉이야 잠자리 때는 벗어두니 상관없고.
문득 그의 눈빛이 탐구심을 띄는 걸 느낀 안느는 슬금슬금 그의 품에서 떨어져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렇게 봐도 안은 보여주지 않을 거야.=
“아쉽군.”
환인은 피식 웃으며 확실히 커진 안느의 가슴을 감상했다.
뽕을 착용하자 훌륭한 골반과 함께 몸매의 라인이 두드러지는 느낌이다.
튜닉의 트인 앞섬 사이로 가슴골도 뚜렷해졌고 말이다.
미궁 가장자리를 벗어나 안쪽으로 접어들자 상황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나타나는 산란못의 숫자가 급격히 늘었으며 그 크기도 축구장 넓이를 훌쩍 뛰어넘어 작은 호수라고 할 정도가 수시로 튀어나왔다.
=우와, 도령 말대로 작은 게 연못 수준이고 큰 건 호수잖아!=
산란못이 커지니 이형종의 숫자도 늘어 한 번 전투에 20~30마리를 상대하는 게 보통이 되었고, 많이 튀어나오면 40마리까지 덤벼왔다.
물가에 나와 있는 것 외에 물속에 숨어있던 놈들까지 쏟아져나오는 것이다.
평범한 파티였다면 매번 괴물방이나 다름없는 전투를 벌이다 힘이 떨어져 몰살당했겠지만, 환인과 이실리테, 안느는 셋 다 희귀 직업자이자 혼합 직업자.
환인은 공격과 지원에 특화되어있고 안느는 방어와 회복, 이실리테는 근, 중거리 공격과 공격력에 특화되어있다.
덕분에 겹치지 않는 특화 분야로 세 명이 협동해서 힘을 합쳐 싸우니 셋이서 아홉에 가까운 힘을 발휘해 일행은 큰 상처를 입지 않고 이형종을 정리해 나갔다.
그렇게 하루종일 전투와 휴식, 전투를 반복하며 12개의 산란못을 정리한 일행이었지만, 중간에 위기도 한 차례 있었다.
=자, 잠깐! 저쪽에 또 한 무리가, 아앗?! 저기 한 무리 더 오고 있어! 양쪽 다 합치면 70마리!=
때때로 크고 작은 산란못이 붙어있는 장소가 나타나곤 했는데 한 번은 전투 소음에 인근의 산란못 두 곳의 이형종이 이끌려 70마리가 넘는 이형종이 몰려왔던 것.
기존에 싸우고 있던 것을 포함하면 100마리나 되는 숫자였다.
거기다 미궁 중심부로 향하며 환인이 정찰 중 두 번만 목격했던 멕시코 도롱뇽을 닮은 이형종도 출몰하기 시작한 상황.
수중에서 생활하는 괴물이라서일까. 멕시코 도롱뇽 괴물의 크기는 기생촉수 두꺼비를 훌쩍 뛰어넘어 덤프트럭 사이즈였는데 이 괴물의 공격 방식은 두 가지, 물대포와 꼬리치기였다.
=안느, 조심해! 두 마리가 물대포를 쏘려고 해!=
이실리테의 경고 직후 멕시코 도롱뇽이 동족을 잡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주둥이를 벌려 머리 크기만 한 물폭탄을 쏘았다.
퍼벙!!
그러나 코앞에서 이루어진 영혼 폭발의 간섭에 물폭탄은 맥없이 폭발했고, 오히려 물대포를 발사한 멕시코 도롱뇽 근방의 이형종이 큰 피해를 본다.
원래라면 목적지에서 반경 10m는 날려버리는 공격이지만, 환인의 견제에 오히려 피해를 뒤집어쓴 멕시코 도롱뇽 괴물이 뀨루루룩! 화를 내며 바로 앞의 안느에게 가시가 삐죽삐죽 난 꼬리를 휘둘렀다.
부아앙
물대포는 환인이 견제할 수 있다지만 꼬리치기는 다르다.
톤 단위의 무게에 가속도가 더해진 공격은 물리력도 무섭지만 꼬리 끝에 삐죽삐죽 나 있는 가시가 더 위험하다.
가시가 몸에 박히면 치명상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이다.
저것을 저지할 기술이 환인에게는 없다. 하지만 두 여자는 다르다.
환인에게 최고급 방어술을 매일 전수받는 이실리테와 안느의 무기는 대형 병기였고 산란못 미궁에 입장한 뒤 치른 수십 차례의 전투로 경험도 풍부해졌다.
=흐압!=
쿠쾅!
안느는 꼬리 치기를 피하는 게 아니라 천벌의 망치로 반격해 정확히 뼈가 있는 부분을 후려쳤고, 육중한 자이언트 워해머의 일격에 꼬리뼈가 ㄱ자로 뚝 부러진 멕시코 도롱뇽이 고통의 포효를 지르며 몸을 뒤튼다.
꾸루르르륵!
그러는 멕시코 도롱뇽의 머리 위로 떨어진 것은 비상의 지름 2.5m짜리 바람 폭탄.
뀨삣!
귀여운 울음소리와 동시에 뭉쳐진 녹색 구슬이 멕시코 도롱뇽의 머리에 떨어졌고, 펑 터지며 70여 개의 바람 칼날이 쏟아져 멕시코 도롱뇽은 물론 주변에 있던 이형종도 난자해버린다.
살이 쩍 갈라지고 팔다리가 날아가 체액을 뿌리며 괴성을 지르는 이형종들.
=비상아, 잘했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이형종의 포위망 일부가 무너지자 이실리테가 그쪽으로 뛰어들어 다중 검기로 빛의 검을 형성, 레드릭과 빛의 검으로 칼날의 폭풍을 일으키며 포위망을 더욱 무너트려 나간다.
환인도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지 않았다.
가시 두꺼비는 보일 때마다 터트려 죽였고 이형종의 다리 관절을 노려 영혼 화살을 수시로 날려 이형종에게 부상을 입힌다.
여자친구들이 공격하기 편하게끔 상황을 조율해주는 것이다.
비상도 유독 이형종이 몰린 곳, 그리고 이실리테와 안느가 싸우지 않는 곳에 환인의 기술을 흉내 낸 바람 화살과 바람 폭탄을 슝슝 던져 이형종의 혼을 쏙 빼놓는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아무 적에게 날리다가 안느의 등을 맞추곤 환인에게 함부로 공격한다고 혼났었다.
그랬는데 환인이 방벽 패널을 이용해 공격하면 좋은 상황, 좋은 장소, 좋은 타이밍을 가르쳐주자 지금은 가장자리의 적이라거나 아직 안 죽고 살아 움직이는 적, 혹은 슬금슬금 물러나는 적을 공격하는 센스를 발휘해 전투를 돕고 있다.
그렇게 죽어나가는 이형종이 많아지면 국면이 한차례 전환된다.
환인이 보다 풍부해진 영혼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해 소탕에 들어가는 것.
“저주를 뿌리겠다.”
수집한 영혼으로 아직 멀쩡한 개체에 저주를 내리고 중첩 영혼 폭발과 중첩 영혼 화살로 피해를 누적시키는 한편 평온의 파동을 쏘아 이형종들의 어그로를 뒤흔들기도 한다.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100여 마리의 이형종을 약간의 피해만으로 쓸어버린 환인의 여자들은 자신들의 실력, 파티의 팀워크에 한층 더 자신감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3~5급인 100여 마리의 다양한 대형 이형종을 쓸어버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
13번째 산란못에서 27마리의 이형종을 정리한 이실리테와 안느는 땀투성이 모습으로 숨을 헐떡이며 환인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흐아~. 힘들다아.=
=후우…….=
좀처럼 힘든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두 여자의 토로에 환인이 그녀들을 돌아본다.
실제로 안느의 은발은 땀에 절어 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몰골이고 이실리테도 훤히 드러낸 어깨, 복부, 허벅지가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포니테일로 묶어 드러낸 목덜미도 땀이 흥건하다.
환인은 원기 방출 기술로 그녀들의 기력 회복을 도와주며 말했다.
“수고했다. 둘 다 지친 것 같으니 잠시 쉬었다가 이동하도록 하지.”
=엉. 휴우, 도령의 원기 방출이 없었으면 진짜 못 버텼을 거야. 무진장 빡세.=
호흡이 진정된 안느가 혹시 모를 독과 질병을 우려해 해독, 질병 치료의 성술을 자신과 이실리테에게 건 뒤 이실리테와 함께 위상석을 찾으러 사체로 걸어간다.
환인은 수첩을 꺼내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회색빛 물안개 같은 것이 끼어 시야를 가리는 구릉지 비슷한 지형. 그리고 곳곳에 위치한 크고 작은 산란못들.
저 안개 너머에는 얼마나 크고 많은 산란못이 있을까. 그리고 얼마나 더 많은 양서류 이형종이 있을까.
‘삼림형 미궁은 나름 신사적인 곳이었군.’
이곳은 말만 개방형 미궁이지, 이형종을 한가득 몰아놓은 이형종의 우리나 다름없다. 만약 자신이 이런 곳에 트립했었다면 하루도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수첩을 열어 주변 풍경을 지도에 기입하던 환인은 자신들이 정리한 산란못의 개수를 세어보았다.
‘26개.’
그중 축구장 사이즈는 14개, 축구장 절반만 한 사이즈는 4개, 축구장을 서너 개 합친 것만 한 산란못은 8개다.
적지 않은 숫자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느낌이다.
파라라락
수첩을 넘기며 그려온 지도를 확인하던 환인은 지도가 지저분해서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거슬렸다.
그때그때 지도에 표기 요소를 추가해나가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잠시 생각하던 환인은 수첩 다음 장에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축척 비율을 제대로 적용해 전체 지도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신경써서 지도를 정리하고 있으니 잠시 후 돌아온 안느가 잡색?色 2급 위상석 4개를 환인에게 넘겨주며 물었다.
=도령. 얼마나 쉬었다가 출발할 거야? 땀 좀 닦고 옷이랑 속옷도 갈아입고 싶은데.=
매일 밤 야영 때마다 성수포로 팔다리, 땀이 많이 나는 목덜미나 겨드랑이 등을 닦으며 청결에 신경 쓰고 있지만,
오늘처럼 체력을 많이 쓰는 전투가 이어져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면 답이 없다.
거기다 현재 진행 중인 미궁은 대낮임에도 먹구름이 낀 것처럼 햇볕이 거의 들지 않는데다 습도도 매우 높고 심한 물비린내까지 나는 장소.
자칫 썩은 내까지 날 수 있는데 그걸 주인님/도령이 맡는다고 생각하면 사고가 잠시 중단될 정도인 그녀들이었다.
“비상, 주변에 이형종이 느껴지나.”
쿠우? 후으응.
환인의 질문에 주위를 둘러본 비상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든다.
“네 위상력과 이실리테의 체력도 50% 내외일 테니 30분 정도 쉬었다 가지.”
그러자 잘됐다며 비상의 등짐 하나를 내린 안느는 즉시 구세의 빛을 벗고 옷까지 훌렁훌렁 벗어 던졌다.
달빛처럼 시린 은발이 나풀거리고 달빛을 튕겨내는 듯한 하얀 피부가 어두컴컴한 숲 속에서 홀로 빛나는 듯한 착시를 준다.
다소 투박한 흰색 탱크탑과 손바닥만 한 흰팬티는 흠뻑젖어 본래의 색보다 진해져 있었는데 그래서 더욱 관능적인 느낌이다.
삽시간에 속옷 차림이 된 안느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옆에서 입을 살짝 벌린 이실리테가 물었다.
안 부끄럽냐고.
=뭐 이런적이 한두 번도 아닌데. 그리고 우리 몸매가 부끄러워할 정도는 아니잖아. 도령을 봐.=
진지한 얼굴로 안느를 응시하는 환인의 모습은 불쾌하다거나 불결한 것을 보는게 아니라 예술품을 보는 자세다.
그에 용기를 얻은 이실리테도 천상의 장막과 가슴 고정용 상의에 속옷까지 벗어 알몸으로 돌아간다.
안느도 환인의 눈치를 잠깐 살피다가 재빨리 탱크탑 속에서 하얀 젤리 형태의 뽕을 꺼내 옷 틈에 숨겨두곤 속옷까지 벗어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
환인은 소리 없이 감탄했다.
호박색 포니테일의 거유 미녀와 은발의 다소 슬렌더 느낌의 미녀. 그런 두 미녀가 나신으로 서있으니 마치 한밤중에 물가로 놀러 나온 님프를 보는 기분이다.
자신의 머리보다 더 큰 물방울 모양의 예쁜 가슴을 들어 밑가슴을 성수포로 닦는 이실리테.
늘씬하고 긴 다리를 들어 서혜부와 사타구니 안쪽을 닦는 안느.
무심결에 여자친구들의 알몸을 관음하던 환인은 이러다간 넋놓고 계속 볼 것 같아 몸을 돌렸다. 왠지 보란듯이 몸을 닦고 있지만, 이렇게 계속 보는 것도 매너에 맞지 않는듯하고.
여자친구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환인은 가까운 산란못 근처에서 지도를 마저 그려나가다가 물웅덩이로 시선을 주었다.
탁한 물속을 한가로이 헤엄치는 주먹만 한 괴물 올챙이들과 바닥에 가득 가라앉아있는 괴물 개구리알.
그것을 응시하다가 한 가지를 떠올린 환인은 아직 알몸인 안느에게 물었다.
“안느, 미궁의 심핵이 파괴되면 미궁은 어떻게 되지.”
쪼그려앉은 덕분에 드러난 뽀얀 엉덩이골 사이로 은빛 음모가 가꿔주는 뒷음부가 환인의 눈에 고스란히 보인다.
자기 자세가 어떤지 꿈에도 모르는 안느는 갈아입을 속옷과 옷을 꺼내다가 환인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응? 음, 지하 미궁은 매몰되어서 사라져. 거기에 걸리는 시간은 대충 하루에서 이틀 정도?=
“등급이 높아 수십 층 되는 미궁을 부수러 들어갈 때는 탈출용 마도기를 챙겨야겠군.”
=그건 7급 정도 되는 미궁 이야기야. 보통은 지도로 내부가 전부 밝혀진 곳이라서 빠르게 이탈하면 하루 만에 탈출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개방형 미궁은 평범한 숲으로 되돌아간다고 배웠어.=
“…이 미궁은 공간이 왜곡된 것처럼 안쪽이 보기보다 더 넓지 않나. 미궁이 소멸하며 내부에 있던 사람들이 공간 진동에 휘말려 다친다거나 죽는 일은 없나.”
=그런 내용은 없었는데……. 기록 열람에는 개방형 미궁이 닫힐 때 그냥 땅이 한차례 흔들린 정도로 끝난다고 봤거든.=
“…….”
교육을 받았다지만 환인은 안심되지 않았다.
이 세상의 정보는 지구의 집단 지성처럼 여러 곳에서 공유하고 서로 보충해 완성시키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의 경우에는 짐을 버리고 비상과 함께 날아서 빠져나는 것도 고려해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환인은 유혹에 넘어간 모습으로 그녀들이 옷을 입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경했다.
휴식 시간을 끝낸 환인은 그녀들의 표정이 밝아지고 편해진 것을 보고 다음 목적지를 지정했다.
“5시 방향 산란못을 정리한 뒤 9시 방향으로 이동하도록 하지.”
=응. 생각 이상으로 이형종이 많으니까 일단 눈에 보이는 곳은 다 정리하면서 가는 게 좋겠어.=
주변 산란못의 어그로가 크게 끌리면 한 번에 70~80마리가 몰려들 수도 있음을 알게 된 안느가 찬성표를 던진다.
그렇게 이동한 다음 산란못은 이때까지 보았던 산란못 중에서도 역대급으로 컸다.
거의 여의도의 절반이 들어갈 정도.
이만한 크기라면 이형종도 엄청난 숫자가 모여있을 거라고 직감한 환인은 영혼 시야로 먼저 눈에 띄는 이형종을 세기 시작했고.
‘보이는 것만 90여 마리.’
물 속에 들어가 있을 것들까지 더하면 이 숫자의 두 배는 될 것이다.
여자친구들을 둘러보자 무기를 단단히 움켜쥐고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전의가 충만한 그녀들을 확인한 환인은 하급 정령 강령을 먼저 걸어준 뒤 이실리테를 앞세운 다음 눈에 띄는 방벽 패널을 소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형종을 향해 투척했다.
꾸겍!
엉덩이에 유사 빛의 검이 꽂힌 기생촉수 두꺼비가 몸을 돌려 화를 내려다 이실리테를 보곤 멈춰서서 그륵, 구륵, 작은 소리로 운다.
그리고는 소리를 지르지 않고 환인을 향해 어기적어기적 다가오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별것 아닌 피해에 크게 소리질러 동료를 부르기보다, 암컷을 독차지하기 위해 혼자 다가오는 모습이다.
물론 주변에서 그걸 본 다른 이형종도 이끌려오지만, 그 숫자는 아홉 마리 남짓.
중간까지는 그렇게 천천히 유인해가며 이형종을 정리해나갔지만.
=윽, 죄다 몰려온다!=
계속 이어진 전투의 소음에 예민해진 이형종이 한 번에 몰려들었기에 환인은 강령과 저주, 비상의 속성 공격 난사까지 동원해 어찌어찌 120마리를 피해 없이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욱….=
=…….=
“…….”
산란못 미궁에서 처음으로 붙잡혀온 여자를 볼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