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2화 〉 326 산란못 미궁
* * *
산란못이라 부르게 된 미궁에 들어온 지도 이틀째.
환인 일행은 나무들이 벽처럼 얽혀 도무지 지날 수 없는 곳을 돌아가며 미궁 가장자리를 따라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무작정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보다는 일단 외곽을 따라 움직이며 미궁의 넓이를 대강이나마 추측하고 미궁의 생태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산란못을 쉴 새 없이 만났고 전투도 쉼 없이 벌어졌다.
물 냄새를 따라, 혹은 이형종이 찾아온 방향을 따라 움직이면 어김없이 여러 크기의 산란못이 나타났고 산란못 주변에 머물고 있던 이형종, 혹은 뒤늦게 전투 소음을 따라 찾아온 이형종과 다시 전투가 발생했던 것.
그 결과 축구장 사이즈나 그보다 조금 작은 수준의 크고 작은 산란못을 8개나 정리했고 군데군데 막다른 골목 같은 곳에 모여있는 이형종도 90마리에 가깝게 처리했지만, 일행은 미궁의 모서리에 도달할 수 없었다.
=언니가 만들어준 이 마도구 고장 난 건 아니겠지?=
=유리 언니가 그런 걸 주인님한테 드릴 리 없잖아.=
=그건 그래.=
무조건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 마도구를 이용해 이틀 내내 동쪽으로 이동했지만 아직도 벽이나 가장자리가 나타나지 않았던 거다.
쿠쾅!
침을 뱉으려 준비하던 가시 개구리의 주둥이 속으로 영혼 폭발 구슬이 한치의 실수 없이 빨려 들어가는 동시에 펑 터지며 피와 살점을 뿌린다.
“가시 두꺼비는 끝이다.”
=넵!=
=알았어! 흐아압!=
마지막 가시 개구리의 폭사와 동시에 약간 소극적으로 움직이던 환인의 여자들은 즉시 태세를 돌변, 기생촉수 두꺼비, 독화살 개구리를 향해 돌진해 말 그대로 도륙해나갔다.
어제 저녁, 7마리의 이형종과 붙고 있을 때 9마리의 이형종이 추가되어 난전이 벌어졌었다.
그리고 한차례 위험한 상황이 벌어졌는데, 총 16마리의 이형종과 뒤섞여 싸우던 중 이실리테가 하마터면 독화살 개구리의 돌진에 얻어맞을 뻔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각자의 능력을 믿고 판단을 전부 맡겼었다.
환인은 그녀들의 능력이라면 3급~4급인 기생촉수 두꺼비, 가시 두꺼비, 독화살 개구리 정도는 10마리가 모여있어도 혼자서 충분히 쓸어버릴 수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하지만 두 명이 각자 프리롤을 하며 싸우다 보니 한데 뒤섞여 전투를 벌였고, 자연히 사방에서 공격을 받는 빈도가 늘었다.
보통 파티는 미궁에서 멤버 숫자의 2배 이상 되는 적은 상대하지 않는다.
비슷한 급의 적이라면 당연히 위험해서, 급이 파티 수준보다 낮더라도 수에서 압도당하면 예측불허의 상황이 벌어져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
미궁 경험이 많은 안느도, 환인과 함께 다닌 경험이 전부인 이실리테도 이렇게 많은 숫자를 상대로 싸우는 경험은 적었다.
때문에 1일차에 약간의 잡음이 발생했었지만, 이틀째부터는 환인이 나서서 전투를 조율해주었고.
“이실리테! 좌우와 등 뒤를 신경 써라! 적은 하나가 아니다!”
=넷!!=
“안느! 적 무리의 후위가 흩어지고 있다! 이대로 놓칠 거냐!”
=미안!!=
“무모하게 적의 무리에 돌진하지 마라!”
“독화살 개구리의 돌진 선상에 다른 적을 세워둬라!”
“적의 움직임이 아니라 무리의 움직임에 주목해라!”
일 대 다수의 전투에서도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끔 뒤에서 지시를 내려준 결과, 이실리테와 안느는 빠르게 일 대 다수의 전투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16마리 중 마지막 이형종을 베어죽인 이실리테가 터지고 베이고 잘려서 널브러진 괴물들을 둘러보곤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님, 고생하셨어요.=
“수고했다.”
=안느도 수고했어.=
=응, 너도. 잠시만 기다려. 해독의 성술 걸어줄게.=
아직 살아서 꿈틀거리는 독화살 개구리의 머리통을 내려쳐 박살 내고 돌아온 안느가 이실리테에게 해독의 성술을 걸어주고 자신도 성술의 효과를 받는다.
고맙다고 살짝 고개를 끄덕인 이실리테가 물었다.
=위상력 잔량은 괜찮아? 오전에만 4번째 전투인데.=
=응. 오울링에서 말빈 씨한테 보답으로 받은 위상력 재생 반지 효과가 좋아. 아직 60%정도 남아있어. 넌 안 지쳤어?=
=나야 주인님이 매번 원기를 보충해주시니까.=
마도기구원에서 흘러내리는 원기를 이실리테에게 주입해준 환인은 여자친구들의 대화를 들으며 수첩을 펼쳐 지금까지 기록해온 지도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예상 이상으로 미궁이 넓다.’
이틀을 전투와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 전부 이동에 투자했는데 아직도 벽에 도달한 느낌이 없다.
만약 이동이 시계 방향으로 이루어졌다면 미궁이 원형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굴곡이 있긴 해도 거의 직선으로 이동 중이다.
“…….”
환인의 시선이 마도구 나침반으로 향했다가위상석 탐지 도구로 시체 밭에서 위상석을 찾는 그녀들로 옮겨간다.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는 그녀들의 행동에서 피로가 강해진 느낌이 전해져온다.
육체적 피로가 아니라 어두컴컴한 밀림 숲, 습기도 높고 썩어가는 물웅덩이의 불쾌한 냄새와 끈적하고 질퍽한 양서류들을 상대하며 정신적 피로가 급격히 쌓이는 모습이다.
여기에 미궁의 정신 침해 효과까지.
‘이래서는 곤란한데.’
이틀째에 미궁 모서리를 확인하고 산란못 미궁의 내부 생태계와 환경을 확인한 뒤 탐사 속도를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시간에 이룬 달성률은 고작 절반. 미궁의 생태계 정도만 확인했을 뿐이다.
환인은 위상석 탐지를 끝내고 돌아오는 그녀들을 보며 평온의 파동을 발사했다. 그러자 둘 다 추운 날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것처럼 정신적으로 이완된 표정을 짓다가 정신을 차리곤 환인을 향해 미소를 지어준다.
“경로를 수정해야겠다.”
=응? 그래?=
“비상을 타고 하늘에서 본 것보다 내부가 더 넓다.”
환인이 입장한 곳은 푸른 안개로 휩싸인 숲의 중간쯤 되는 면이었다.
그렇기에 일행의 이동 속도를 생각했을 때 이틀 정도 각 잡고 이동하면 미궁의 모서리 부분이 나올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틀이 다 되어 곧 사흘째가 시작되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예상했던 것보다 1.3배는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데도.”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산란못 미궁의 넓이가 밖에서 본 것보다 3배 이상 넓다.
이래서야 일주일 안에 미궁을 전부 살피고 중핵과 심핵을 파괴하는 것은 무리다.
“미혹이 걸려있어 헤매는 것도 아니다. 중심부로 들어가면 더 강한 이형종도 나올 텐데 시간이 무제한으로 있는 것도 아닌 만큼 외곽을 돌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지양해야 할 듯하군.”
=뭐…… 개방형 미궁은 확장형 미궁보다 더 넓다는 게 거의 정론이니까. 4급 미궁이라고 한다면 일반적인 지하 미궁의 20층 넓이가 하나의 층으로 전개되어있는 식이잖아. 넓을 수밖에.=
“그래. 그래서 어느 정도 환경과 적의 종류에 적응했을 테니 지도의 빈 곳을 채우는 느낌으로 숲의 중심부를 향해 나아갈 생각이다.”
잠시 서로를 쳐다본 그의 여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딱히 뾰족한 수단은 없으니까.
환인은 나아가던 방향, 동쪽으로 움직이면서 자신의 추측을 기반으로 세운 계획을 그녀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본 산란못에는 대부분 짐승과 다른 마수들이 잠겨있었다. 사람은 없었지.”
=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런 이유에서 저 두꺼비와 개구리들은 여자를 선호한다고 읽을 수 있다.”
=어떤 이유인데?=
“주둥이에 온전히 담을 수 있고 그러면서 내부를 상처입힐 수 없을 만큼 연약한 대상.”
환인이 하려는 말을 눈치챈 이실리테와 안느의 표정이 굳어졌다.
=…위상력이 떨어지고 무기를 놓치면 육체가 허약하기 짝이 없는 여자가 적당하겠네.=
=남자는 억센 손톱과 발톱도 있고 어금니와 강한 치악력이 있으니까요…….=
사람 크기를 담을 수 있는 구내?? 공간이 있고 내부에는 번식을 위한 생식기가 달려있다.
이 두 가지에 남녀의 특성을 고려하면 그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에서 사람은 이 양서류들 사이에서 고급 숙주로 취급될 것이고, 당연히 약한 개체보다 강한 개체가 그러한 숙주를 당연하다는 듯이 차지할 거다.”
=강한 이형종은 미궁의 안쪽에 주로 서식하니까…….=
이실리테의 중얼거림을 안느가 받았다.
=이런 미궁 외곽의 산란장… 산란못에 사람이 없는 게 그 이유겠지. 안쪽으로 들어가면 산란못에 사람도 있겠네.=
분노로 인해 안느의 말투가 자연스럽게 딱딱해졌다.
그 목소리에 환인은 마악 하려던 말을 속으로 삼켰다.
거대한 절망과 고통, 괴로움에 직면한 사람은 죽어서 영혼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중심쪽으로 향하다 보면 틀림없이 희생당한 사람의 영혼이 있을 것이다.
그 영혼에게 평온의 파동과 영기 주입으로 정신을 차리게 하면 이 미궁에 대한 정보도 입수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환인이었지만, 대신 불확실성이 높아 한쪽으로 미뤄둔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그래. 미궁의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혹은 미궁에서 안락한 곳일수록 사람의 흔적이 많아지겠지. 미궁의 전체적인 형태를 알아내고 중심부를 찾아가는 것보다 그쪽이 좀 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거다. 미궁 가장자리를 돌며 빈틈없이 이형종을 다 죽여나가면 안전해진다는 측면도 있으니 나쁠 것은 없지만…….”
=아! 빠르게 가면 혹시 살아있는 사람도 찾아낼 수 있겠네요?!=
이실리테가 화색을 띤 얼굴로 대답한 순간 환인은 어두컴컴한 숲속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고 순간 입을 다물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구출은 가짓수에 올려두지 않았는데.
안전해진다는 측면도 있으니 나쁠 것은 없지만, 시간이 오래 걸려서 좋지 않다고 말하려던 환인은 조금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여자들이 최초로 끌려간 것이 두 달 전이다.”
=최, 최근에 끌려간 여자들은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겠지. 그리고 그런 여자들은 중핵의 근처에 있을 테고. 몇 명이나 있을지 모르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곧장 미궁 중심부로 향하는 것은 자살의 지름길이라고 본다.”
환인의 이야기는 듣기에는 냉정했지만, 미궁 탐사에 관해서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정론인 이야기였다.
미궁을 파괴하기 위해 돌입한 파티도 최심부에서 중핵과 싸우기 전, 주변을 먼저 정리하니까.
그게 1개 층으로 구성된 개방형 미궁이라면? 당연히 부담이 더 커진다.
끌려간 사람을 구출할 수 있다면 하는 게 좋다. 그렇다고 구출하기 위해 이쪽이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본말전도.
안느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했지만, 조금 침울해졌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군. 근처에서 야영하도록 하지.”
=응….=
미궁에 들어오고 두 번째 밤을 보낸 환인은 하룻밤을 보내서일까, 이실리테와 안느의 표정이 한결 나아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환인은 여전히 어제 자신이 보였던 행동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출발한다.”
=응. 이슬아, 옆을 부탁할게.=
=맡겨줘.=
환인은 앞서 나아가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미움받는 것이 싫은 건가.’
그때 자신이 생각한 최선의 방안을 내놓았다면, 산란못 미궁의 형태에 분노하고 있던 그녀들은 틀림없이 자신의 발언에 실망했을 것이다.
여태까지 인간적인 도리에서 벗어난 결정을 내린 적은 많다.
파르히스트에서 길레스=벡슬과 그 일행을 일방적으로 악이라고 단정하고 몰살시킨 것.
크라버리와 파르히스트의 분쟁을 유도한 것(헬루멘을 떠날 당시 파르히스트와 크라버리 사이의 분위기는 극히 험악해 당장 전쟁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라 들었다).
자신의 심기를 크게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비자룩스의 알드헬름을 암살한 것.
알드헬름을 암살하는데 시더의 영혼을 이용한 것.
스타에타를 구할 생각은 일말도 하지 않은 것(팔다리를 잘라놓고 강제력과 평온의 파동을 썼다면 어떻게든 살릴 수는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전부 영혼사의 성불행, 혹은 영혼사 활동의 연장선이었다.
이실리테와 안느도 그걸 이해하고 환인의 행동에 적극 협조했었다.
이 미궁 탐사도 넓게 보자면 크라빈 마을을 돕기 위한 일이지만, 그저 돕기만 하는 거라면 여기까지 들어올 필요가 없다.
프라버에서 지원이 나올 때까지 마을에 머물며 공격해오는 이형종을 격퇴하기만 해도 되니까.
하지만 자신의 욕심으로 미궁에 들어왔고 여기에 욕심을 이루기 위해 피해자의 혼을 이용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실리테와 안느가 실망할듯한 일이다.
환인은 실망한 그녀들이 자신에게 경멸과 모멸의 눈빛을 보내는 것을 상상해보았다.
……싫어하게 된다면 그 정도라고 생각할 뿐.
이것은 표면적인 감정이다.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불쾌함…… 아니, 그런 감정과 틀리다. 좀 더 근본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괴로움, 언짢음, 거부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 그런 감정에 앞서 상황이 오는 것 자체가 싫다는 생각이 뒤를 잇는다.
만약 그러한 상황이 닥친다고 가정할 경우 자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녀들과 불화를 빚게 된다면 자신의 성격상 이별을 고려하겠지.
그녀들과 헤어진다면 한동안 기분이 저조해지고 컨디션도 좋지 않아질 것임이 명백하다. 아니, 극심한 권태감과 귀찮음을 느끼며 모든 영혼사 활동을 내팽개치고 제멋대로 살 것이 틀림없다.
그녀들이 떠나더라도 자신의 곁에는 비상이 남을 것이다.
이제 3시간 넘게 비행할 수 있는 비상의 능력과 지금까지 얻은 지식과 기술을 활용한다면 이 세계에서 왕은 못되더라도 귀족으로서 떵떵거리며 호의호식할 수 있다.
직업자 노예를 구해 단단히 입을 봉한 뒤 적당히 미궁을 돌다니며 이형종을 잡아 돈을 벌고 저택을 산 뒤 시녀와 하녀를 구한다.
돈을 뿌려가면서 직업자인 첩을 계속 들여 영기를 흡수하고 자신의 지식으로 편리성을 추구하며 흥청망청 살아가겠지.
“…….”
하지만 그쪽은 내키지 않는 길이다.
=으응? 도령, 산란못이 나왔는데 그 너머 저쪽에 길이 막힌 거 같아.=
“…어제 지나쳐왔던 벽 같은 건가. 이번에는 뚫고 지나갈 수 있겠나.”
=한 번 해볼게.=
1미터 너머도 보이지 않을 만큼 나무들이 얽혀 만들어내는 살아있는 벽. 그곳에 도착한 안느가 천벌의 망치를 두 손으로 잡고 휘두르려 하자 뒤에서 이실리테가 말렸다.
=안느, 둔기보다 검이 길을 만드는데 쉬울 거 같으니까 내가 할게.=
=엉.=
안느를 뒤로 물린 이실리테가 빛의 검을 생성해내고 벽처럼 빼곡하게 자란 나무로 다가간다.
환인은 그녀에게 하급 정령 강령을 걸어주었고, 이실리테는 버프로 인해 강화된 다중 검기의 길이를 최대한 늘린 뒤 인정사정없이 나무를 베어넘기기 시작했다.
쓰악 쿠궁, 쿠구궁
한 번 칼질할 때마다 하얀 빛의 선이 허공에 그어지며 나무 대여섯 그루가 밑둥이 베어져 쓰러진다.
굉음을 일으키며 쓰러져 길을 막은 나무는 안느가 뒤따라오는 환인이 편하도록 힘으로 길을 만들어주었다.
환인은 그 뒤를 따라가다가 뒤에 바짝 붙어 자신의 등을 부리 끝이며 머리로 꾹꾹 누르면서 장난치는 비상을 쓰다듬었다.
보드라운 깃털의 감촉이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히지만, 환인은 그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과거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과거, 회사에 재직 중일 때 환인은 동기와 사수가 여자 문제로 웃고 화내고 짜증 부리는 것을 보며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일에 감정을 낭비한다고 생각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의 감정 하나 제어할 줄 모르는 한심한 사람이라고 평가절하했었는데, 막상 자신이 겪어보니 이 감정이라는 게 쉽게 제어할 수 있는 부류가 아니다.
감정을 떨쳐내고 마음을 비워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자리를 다시 차지한다.
‘그래서 그녀들의 감정을 고려해 최선이 아닌 차선을 입에 담은 건가. 그녀들과 지금의 관계성을 무너트리지 않기 위해서.’
지금까지 그녀들을 배려하거나 고려해 약간의 일정 조절이나 편의를 보아주는 일 등은 여러 번 해왔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효율보다 그녀들의 감정을 우선시한 적은 없다 보니 자신이 자신 같지 않은 느낌에 조금 곤혹스러웠다.
그러다보니 생각이 방어적으로 전개되려 했지만, 환인은 그러한 생각의 반사작용을 억눌렀다.
조금 혼란스러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기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여자 친구들은 자신에게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보낸다. 자신의 변화도 그런 마음에 보답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문제랄 것도 없이 간단히 해결되니까.
한 가지 의문이라면 자신이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건지에 대해서지만, 딱히 몰라도 상관없을 것 같다.
‘어쩌면 이 감정이 커져서 사랑으로 변할지도 모르지.’
환인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사랑이라니, 참으로 닭살 솟는 단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대되기도 한다. 사랑을 알게 되면 자신도 부모님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걸까, 하고.
앞에서 걸어가던 안느가 환인의 작은 웃음소리에 뒤를 돌아보았지만, 환인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어주자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린다.
환인도 쓸데없는 잡생각을 치우고 주변을 자세히 파악하고 감시하기 시작했다.
만약…… 만약에 환인이 마을에 머물고 있었거나 마을과 마을 사이를 이동하느라 시간이 많은 상태였다면 사색을 통해 자신이 변화한 원인을 어렵지 않게 알아냈을 것이다.
환인에게 있어 진정한 가족은 돌아가신 양친뿐이다.
그외에는 가까이 둬서 괜찮은 사람 / 죽든 말든 상관없는 사람 / 죽여야 할 사람으로 삼분 되어있다.
이실리테와 안느, 유르파도 그 삼분 되어있는 구분에 속해있었다.
머리로는 그녀들을 여자친구라고 생각했고 행동 또한 그녀들을 여자친구로 대해왔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녀들을 타인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
그랬었는데 부모님의 금실 좋은 한 때, 그리고 두 분의 아들로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선명하게 느낀 그날 저녁. 환인은 여자친구들에게서 가족이라는 향수를 강하게 느꼈고 그러한 향수가 환인의 무의식에 일부 변화를 주었다.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 집 밖에서 웃고 떠들던 환연과 비상까지. 그들을 무의식적으로 희미하게나마 가족이라 인식하게 된 것이다.
자기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자신에게 헌신하고 봉사하는 이실리테.
밝고 활달한 성격으로 리트리버처럼 친화력을 발휘해 진심으로 여자친구처럼 다가오는 안느.
이실리테와 비슷하게 무엇도 바라지 않고 몸을 내던져 헌신해오는 유르파.
만약 그녀들이 평소 쌓아온 언행이 아니었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헌신과 애정이라는 과정이 있었기에 믿음과 가족이라는 결과가 나오게 된 것.
언젠가 환인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인연은 지구가 아니라 이 세계, 니오네브레스에 있었다고.
=어? 주인님, 미궁운이 나타났어요.=
1시간 가량 길을 만들어 나아가던 환인 일행은 어느순간 푸르게 물들어 주변을 휘감고 있는 안개 구름을 발견했다.
미궁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선이다.
=그럼 여기가 미궁 동쪽 가장자리라는 거네?=
“어제 계속 움직였다면 2일차에 동쪽 벽을 발견했겠군.”
이정도면 오차 범위라고 할 수 있다. 환인은 수첩을 꺼내 다시 일정을 수정하며 여자친구들에게 말했다.
“아까 그곳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길을 만들기 시작한 곳으로 돌아온 환인은 벽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또 벽이네. 도령, 여기도 뚫어?=
“그래. 이제부터 북쪽 벽이 나올 때까지 직선으로 올라간다. 이실리테, 벽이 나올 때마다 부탁하지.”
=네, 주인님!=
환인 일행은 나무가 얽히고 또 얽혀 만들어진 벽이 나타나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뚫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와중에 일어난 소음으로 산란못의 양서류 3종이 공격해오기도 했지만, 여태까지 뒤에서 관망하는 식으로 행동하던 환인이 적극 나서서 이형종을 쓸어버리기 시작했기에 일행의 이동 속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빨라졌다.
그 결과 하루 만에 미궁 우측 벽의 북쪽 끝에 다다르게 되었고.
=어, 이렇게 계산하면 미궁 중심을 알 수 있다는 거야?=
“정확한 건 아니다. 대충 어림짐작일 뿐이지.”
환인은 삼각측량을 응용해 지금까지 그려온 지도와 기재해온 동서남북 방위 각도, 거리 및 마도구 나침반을 이용해 대강이나마 중심부가 있을 방향을 산출해냈다.
정확도는 대략 60%. 형편없는 수치지만 그나마 미궁이 사각형임을 확신하게 되었기에 낼 수 있는 결과였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으며 그 근방을 기점으로 2차 수색을 확정 지어놓았기에 문제없는 일이기도 하다.
지난 사흘간 소모한 소모품은 식량 3일치와 몸, 갑옷을 닦는데 쓴 성수포 16장 뿐.
성수포는 84장이나 남았고 식량은 12일치, 개인용 가방에 든 7일치 식량까지 더하면 19일분이나 남았으며 상태 이상을 대비해 준비한 물약과 회복제, 약초는 하나도 쓰지 않았다.
환인은 프라버에서 파견될 인간들을 생각하며 시간이 최대의 적이라고 판단했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도록 하지.”
그렇다고 서두를 생각은 없다. 미궁의 심핵을 구경할 기회가 이번만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현재 시각이 밤 9시임을 확인하고 야영을 선언한 환인은 다시 수첩의 지도를 들여다보다가 오늘 있었던 일을 조용히 수첩 한쪽에 적어나갔다.
(산란못 미궁 3일차)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