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1화 〉 325 산란못 미궁
* * *
환인은 크라빈 마을을 나오자마자 조사해둔 경로를 따라 미궁을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미궁까지 예상 소요 시각은 3시간.
속보와 경보 사이의 속도로 아직은 나무가 띄엄띄엄한 숲을 달리던 중 앞서 달리던 안느가 환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도령. 힘들면 언제라도 말해. 가방 들어줄 테니까.=
“이 정도는 문제없다.”
비상이 짊어진 짐은 400kg 정도로, 짐의 내용물은 평소의 야영 도구가 태반이다.
3인용 텐트에 보온침낭, 냉기차단매트, 기척 차단 오브제, 탈취 및 조명용 랜턴, 조리용 온열판 같은 마도구에 휴대식은 물론 음식을 해먹을 수 있는 경우를 대비한 도구 3인분 및 15일의 미궁 탐사가 가능한 식량과 식수 4인분.
여기에 청결용 성수포 100장, 갈아입을 옷, 이실리테와 안느의 장비 손질 도구와 200병들이 포션 보관함(성수 포함)이다.
물론 비상에게 전부 다 짊어지게 한 것은 아니다. 환인과 이실리테, 안느도 각자 소형 아공간 가방을 하나씩 멘 상태.
세 명의 가방에는 오랜 시간 보존이 가능한 건량과 식수 7일분에 각종 위급 상황을 대비한 물약 세트, 그외 응급처치 도구와 상비약이 들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통신용 소형 수정구 미궁 버전. 뿔뿔이 흩어질 경우를 위한 대비책이다.
여기에 마비와 독 저항 기능의 액세서리에 만약을 대비한 습기 제거 마도구에 오염된 공기일 가능성을 고려해 정화포로 만든 마스크까지 마련했으니 준비는 만반이라고 할 수 있다.
환연이 동행하면 무게와 부피 대부분을 차지하는 식수를 빼고 무게를 줄일 수 있겠지만, 환연은 유르파와 마을 쪽을 지켜야 한다.
아무튼, 가방을 짊어진 환인은 안느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남자로서의 자존심 같은 이유는 아니다. 목숨의 위협 앞에서 자존심을 세울 만큼 비합리적인 인물이었다면 환인은 지금쯤 파르히스트 성주의 데릴사위나 헬루멘 영주의 기둥서방이 되어있었을 테니까.
이 가방의 무게는 약 10kg으로 건량과 식수가 무게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정도 무게도 감당하지 못해서야 미궁 탐사는 당연하고 여행도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신체 능력이 그녀들과 비교하면 형편없음을 자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단련을 관두지 않은 환인이다.
특전사까지는 못 가더라도 직업군인 정도의 체력과 근력은 지니고 있기에 이정도는 괜찮다고 판단한 것.
그렇게 30분간 가볍게 달리고 10분간 걷기를 반복하던 환인은 1시간 반 정도가 지났을 무렵 주변 풍경이 점차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부엽토가 드러나는 숲에서 점차 밀림처럼 바뀌어 간다. 수풀도 점점 높아져 달리는 것을 방해하고 나무의 간격도 줄어들어 시야를 막는다.
촤작, 뚜둑. 짝
그나마 앞서 달리는 이실리테가 단검으로 늘어지는 나뭇가지나 옆에서 뻗어오는 나뭇가지를 쳐주는 덕분에 신경을 덜 쓰고 있지만…….
“후욱, 후우.”
환인은 점점 달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으로 변해가고 있는 탓에 핏빛 위상석의 재생 효과를 받고 있음에도 슬슬 숨이 차는 것이 느꼈다.
앞서가는 이실리테와 안느가 신경 써주고 있는데도 이러다니.
새삼 그녀들과의 신체 차이를 느끼며 환인은 지나가는 최하급 정령을 불러들여 몸에 강령을 펼쳤다.
호흡이 순식간에 안정되고 몸이 적당히 풀리며 등에 짊어진 짐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게 된다.
강령의 유지 시간은 79분. 이 강령 효과가 끝나면 미궁 근방에 도달할 거로 생각하며 환인은 달리는 것에 집중했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나무의 간격이 매우 뻑뻑해졌고 듬성듬성 난 수풀도 점점 억세진데다 다리를 휘감기까지 해 더는 달리기가 불가능해졌다.
이실리테가 가장 앞서 기사검으로 수풀과 앞을 가로막는 나뭇가지를 베어내면서 나아가고 그 뒤를 안느, 환인, 비상 순으로 나아간다.
안느도 뒤따라오는 환인과 비상을 생각해 이실리테가 미처 쳐내지 못한 나뭇가지를 손으로 부러트리며 중얼거렸다.
=숲이 많이 뒤틀렸네.=
뚜둑.
“이유가 뭔지 짐작이 가나.”
=미궁 때문이야. 미궁 안에서 사는 이형종이 나쁜 기운을 뿌리고 미궁이 땅에 영양을 과하게 주니까 오염되는 것처럼 비틀리는 거야. 원래 나무들은 광합성을 하기 위해 서로 간섭하지 않으면서 자라는 게 정상이거든. 그런데 위를 봐.=
우직.
위를 올려다보니 나뭇가지가 서로 간섭하다 못해 엉키는 곳이 곳곳에서 보인다.
=이파리랑 나뭇가지도 서로 얽히고 있고 나무도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뒤틀리고 있어. 이런 영향을 안 주는 미궁도 있지만, 여기 발생한 미궁은 그런 게 아닌가 보네.=
뚜두둑.
“……그렇군. 그런데 나무를 그렇게 부러트려도 괜찮은 건가.”
=응? 아, 난 플뢰인데 식물을 이렇게 함부로 다뤄도 되는 거냐고?=
“그래.”
=아하하. 도령도 참. 그런 거면 난 채식이 아니라 육식만 해야 하게? 초목의 원수! 하면서 초식동물을 막 잡아먹고.=
안느의 웃음에 환인도 피식 웃었다가 시선을 그녀의 어깨너머 숲 안쪽으로 던졌다.
무성한 나무 이파리로 인해 햇빛이 잘 닿지 않아 어두컴컴한 밀림 안쪽, 푸른 안개 같은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침 이실리테도 발견했는지 살짝 긴장한 목소리로 환인을 불렀다.
=주인님, 미궁의 안개 같은 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거의 도착했군. 외부 경계선에 도착했으니 10분 정도만 더 가면 본격적으로 미궁이 시작될 거다.”
=여기까지 올 동안 이형종을 하나도 못 만났네. 도령 엄청 열심히 이형종을 정리했나 보다.=
“환연의 도움이 컸지. 숲 같은 장소에서 특정 개체를 추적하는 것은 말도 안 될 만큼 편리하더군.”
환인이 허리의 벨트 파우치에서 정화포로 만든 마스크를 꺼내 쓰고 비상의 부리에도 걸어주자 이실리테도 기사검을 수납한 뒤 레드릭을 꺼내고 마스크를 쓴다. 안느도 마스크로 입을 가린 뒤 성벽의 방패와 천벌의 망치를 꺼냈다.
둘 다 이런 밀림숲에 어울리지 않는 대형 병기지만, 둘의 힘은 이런 나무 정도라면 수수깡 부러트리듯 박살 낼 수 있기에 문제 되지 않는다.
환인도 흑창과 천칭을 두고 고민하다가 천칭을 꺼내 쥐고 조용히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한동안 푸르스름한 안개로 가득 차 있는 숲을 향해 걸어가던 환인은 갑작스레 안개가 걷힌 것을 확인했다.
=이슬아. 지금부터 미궁이야.=
=응? 정말?=
변한거라곤 아무것도 없는데. 의아해진 이실리테가 주위를 둘러보자 안느가 설명을 덧붙이며 그녀의 앞으로 나섰다.
=주변에 미궁운이 다 사라졌잖아. 그게 미궁 안으로 들어왔다는 표시야. 이제 내가 앞장설게.=
=아…… 응.=
대열을 조정하는 그녀들 뒤에서 환인은 마녀의 숲처럼 어두컴컴한 밀림숲 내부를 둘러보았다.
(산란못 미궁)
‘하늘에서 본 것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이게 미궁을 감싸고 있는 기운과 장막의 효과인가.’
자연스럽게 그가 경험해본 다른 개방형 미궁의 기억이 떠오르며 비교된다.
삼림형 미궁의 안팎은 살갗에 와닿는 느낌 자체가 확연히 달랐었다.
그 미궁의 안은 자연스럽게 긴장하게 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숲도 밀림에 가깝긴 했지만 평범한 자연 생태계가 구축되어있었다.
하지만 여긴 조금 후덥지근하고 어두컴컴하며 나무가 기괴하게 자라있는 밀림숲,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스사는 그 삼림형 미궁을 6급이라고 했었고 폭군룡의 미궁은 7급이었지.’
미궁 내부의 정신적 압박감은 삼림형 미궁이 훨씬 강했다.
폭군룡의 미궁은 확장형 특수 미궁이었으니 다른 동급 미궁에 비해서도 위험도가 높은 곳이었을 텐데도 그렇다는 것은…….
당시의 자신이 약해서 그리 느껴진 것일까 아니면 삼림형 미궁은 6급이 아니었던 걸까.
‘당연히 후자겠지.’
=도령. 출발할게.=
“그래. 내가 말해주었던 이형종 외에 다른 것도 나올 수 있으니 주의해라.”
=응.=
우엉 우어엉
환인은 새인지 짐승인지 모를 울음소리를 들으며 을씨년스러운 밀림숲을 헤치고 나아가면서 생각했다.
6급 삼림형 미궁. 그리고 그 곁에 붙어있는 7급 호수형 미궁.
그 둘은 라드세아 북부, 이블 팩션 접경 지역 근처에 붙어있는 곳이다.
지리상 율캄이 가장 가까운 곳인데 율캄의 주민들은 그곳을 미답의 마경처럼 취급했었다. 스사도 그곳을 위험한 것처럼 이야기했었고.
그런 반응을 생각해본다면 모험가나 탐험가의 왕래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삼림형 미궁 주변은 원시림처럼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장소였고 마물과 마수, 괴물이 잔뜩 서식하고 있었다.
사람이 왕래하지 않았지만, 주변에 서식하는 괴물을 자연스럽게 포식하며 미궁이 적잖이 성장한 게 아닐까.
생각하던 환인은 고인 물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을 느끼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밀림숲이라 시야가 나빠 보이는 것은 없다.
“안느, 발밑을 조심해라. 고인 물냄새가 강한 것을 보면 습지나 늪지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
=어. 개구리하고 두꺼비 같은 놈들이니 근처에 이형종이 있을 수도 있…….”
우드득, 푸스스슥
말하기가 무섭게 1톤 트럭만 한 가시 두꺼비가 어두컴컴한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말하기가 무섭네!=
구륵!
안느가 튕기듯이 달려나가자 가시 두꺼비가 움찔, 뒷걸음치며 뾰족한 주둥이에서 산성침을 뱉었다. 그것을 위상력으로 뒤덮은 방패로 후려쳐 튕겨낸 안느는 삽시간에 접근, 천벌의 망치로 머리통을 내려찍었다.
퍼석.
공성 병기나 다름없는 자이언트 워해머에 얻어맞은 머리통이 수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박살 난다.
=응? 이거 바깥에 있는 것들보다 조금 더 센 거 같은데.=
구륵.
끄르륵.
구윽
안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숲 곳곳에서 기생촉수 두꺼비, 가시 두꺼비, 독화살 개구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숫자가 물경 13마리.
어둡고 뒤틀린 숲 깊은 곳에서 기어나오는 트럭 사이즈의 양서류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지만, 안느는 성벽의 방패를 세우고 냉혹하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시작부터 인사가 거창하네~.=
그리고 천벌의 망치로 방패를 두들겨 쇳소리를 내는 동시에 성술 발광?光을 펼쳐 섬광을 일으키니 이형종의 관심이 일제히 안느에게 쏠린다.
이실리테는 그 틈에 소리 없이 움직였다.
자세를 낮추고 기괴하게 자란 나무들 사이로 움직여 그 옆을 잡은 이실리테의 옆으로 빛의 검이 우웅 떠오르더니 어두운 밀림숲을 밝히는 한 줄기 빛이 되어 개구리와 두꺼비를 삽시간에 꿰뚫는다.
푸바바박
환인의 강령을 받지 않더라도 5급 이형종의 돌가죽까지 베어내는 빛의 검이다. 그런 빛의 검이 부메랑처럼 회전하며 지나가자 양서류 세 마리가 단숨에 반으로 갈라져 널브러졌다.
꾸륵?!
구어어억!
무리는 반으로 나뉘었다. 여전히 안느에게 어그로가 끌린 여섯 마리. 그리고 갈라져 죽은 세 마리의 근처에 있던 두 마리.
환인은 그중 가시 두꺼비 네 마리만 노려 영혼 폭발 구슬을 날렸다.
침을 보다 정확하고 빠르게 뱉기 위해 발달된 주둥이로 영혼 폭발 구슬이 빨려 들어가고 폭발.
뻐버벙!
그 충격에 눈알이 빠지고 살점이 터져 신체의 1/3을 차지하는 안면이 걸레 짝으로 변해 단숨에 빈사상태에 빠진다.
‘안 죽는군.’
단숨에 터트려 죽이도록 2중으로 중첩한 영혼 폭발 구슬이었다. 미궁 바깥의 가시 두꺼비는 이 공격에 그대로 폭사했었지만, 미궁 안의 가시 두꺼비는 빈사 상태가 되긴 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안느가 말했던 것처럼 바깥보다 조금 더 강한듯하다고 판단한 환인은 중첩을 하나 더 할까 생각했지만.
‘영혼 구슬 낭비다. 빈사가 되니 나머진 그녀들이 해치우게 두면 그만.’
그사이 이실리테는 나무 위로 뛰어올라 표범처럼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며 기생촉수 두꺼비의 촉수를 위주로 베어버린다.
안느는 방패의 방어 면적을 십분 활용해 도약해오는 독화살 개구리를 후려쳐 말 그대로 곤죽으로 만들어버렸다.
독화살 개구리의 돌진을 향해 위상력을 밀어 넣은 성벽의 방패를 휘두르자 북소리를 내며 뻥 터져버린 것.
높이 점프해오는 기생촉수 두꺼비도 키 195cm, 길이 2m의 말도 안 되게 긴 리치로 내려찍어 죽여버린다.
이형종이 모여있는 곳에서 5미터가량 뛰어오른 뒤 위상력이 가득 담긴 무기를 땅에 내려쳐 충격파를 일으키자 그 공격에 휩쓸린 네 마리의 기생촉수, 독화살 개구리가 전신골절을 일으키며 나가떨어져 체액을 쏟아낸다.
삽시간에 6마리를 처리한 안느가 온몸에서 빛의 아우라를 뿜어내며 남은 이형종을 향해 돌진하니 어두운 숲에 강림한 빛의 성기사처럼 보였다.
13마리가 정리되는 데는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후웅 방패를 강하게 휘둘러 방패에 묻은 체액과 독액 등을 털어낸 안느가 담담한 태도로 어두운 밀림숲을 둘러보며 말했다.
=꽤 소란을 피웠는데 몰려오는 이형종이 없네.=
=동족 의식이나 협동심이 별로 없는 게 아닐까?=
=일부러 조금 몰려오라고 큰소리를 냈는데 안 몰려온 걸 보면 그럴지도. 아니, 근데 개구리들은 귀가 없잖아. 소리 아예 못 듣는 거 아냐?=
=아, 진짜? 그럼 어떻게 적을 알아차리는 거지?=
“귀는 있다. 고막이 피부에 드러나 있지. 때문에 개구리나 두꺼비 종류는 원래 물 밖에서 작은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 반대로 물속에서는 매우 민감하고.”
=어, 진짜?=
=신기하네요.=
너무 작아 귀가 아예 없는 개체도 있긴 하지만, 거기까지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환인은 근처의 특징적인 나무에 흑창을 휘둘러 표식을 남기고 수첩을 열어 지도를 그리기 시작한다.
여자들은 그런 환인의 지식을 신기해하면서 위상석 탐지 도구로 위상석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빈털터리인 걸 확인하곤 혀를 차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슬아. 얘들은 챙길 거도 없다고 했지?=
=응. 눈알이나 쓸개, 혓바닥, 점액질 같은게 돈이 되긴 하지만 보관이랑 뒤처리까지 생각하면 동화 수준의 푼돈 밖에 안된다고 했어.=
=그럼 챙기지 말자. 부피도 하나같이 큰데 짐만 되겠어.=
=응.=
그녀들은 손을 털고 아직도 수첩을 들여다보고 있는 환인에게 다가갔다.
=도령, 위상석은 안 나왔어. 그런데 뭐해?=
“지도를 만든다.”
=내가 도와줄 거 있어?=
“없다. 손이 필요해지면 부탁하지.”
엽사 조합에서 제작하는 지도는 걸음걸이를 기반으로 산출한 거리를 계산해 축적하는 것이다. 정확함이 특징이지만 제작에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지금 환인이 하는 것은 특징적인 부분만 대략적으로 표시해가며 진행방향에 따라 확장하는 방식. 그만큼 정확성은 떨어지지만 제작이 쉽다.
환인은 수첩을 접고 여자친구들에게 말했다.
“놈들이 온 방향을 되짚어가 보지.”
이 미궁에 들어온 목적은 어디까지나 미궁 중핵을 죽이고 심핵을 파괴해 미궁을 없애는 것. 개방형 미궁이니만큼 숲의 중앙으로 나아가면 그곳에 십중팔구 심핵과 중핵이 있을 것이다.
즉 미궁 중심부로 나아가면 최단시간의 돌파가 가능하겠지만, 그전에 미궁의 생태 정도는 확인해두고 싶은 환인이었다.
=어째서?=
“혹시모를 위험 요소를 줄이기 위해서다.”
자신들을 찾아온 이형종은 다가온 길에 물이 흥건할 정도로 몸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방금까지 물에 들어가 있었다고 볼 수 있겠지.
=응.=
그게 왜? 라고 묻는 안느에게 환인이 되묻는다.
“양서류가 어떻게 번식하는지 알고 있나.”
=물에 알을 낳는 거 아냐?=
“그래. 그런데 저것들은 숙주를 찾아 몸에 알을 까지. 그런데 물에 젖어있었다. 단순히 양서류의 습성 때문인지, 아니면 산란장도 만들었는지, 이 숲에 물의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도 확인해보고 싶다.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는 놈들이 온 길을 되짚어가는 게 가장 간단하겠지.”
바깥으로 이어져 오가는 통행이 잦은 곳에 강한 이형종이 똬리를 틀었을 가능성은 낮다.
무작정 중심부로 향하다가 위험과 맞닥트리는 것보다, 입구 근처에서 차근차근 미궁의 정보를 수집하는 쪽이 한결 안전할 터.
여자친구들을 이해시키며 이형종들이 찾아온 방향, 북서쪽으로 나아가던 환인은 우거져 숲을 이루던 나무가 갑자기 거리를 벌리며 넓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이건…… 이형종이 지나다니며 길을 만든 거네요.=
=응. 바닥에 나뭇조각하고 파편이 가득 깔렸어. 여기서 싸울 때 발밑을 조심해야겠다. 자칫 넘어질 수 있으니까.=
환인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게. 이실리테와 안느는 둘 다 중갑옷에 판금 부츠를 신고 있다. 나뭇조각 따위야 체중을 실어 밟으면 다 부서져 나간다.
다소 걷기 불편한 환경 속을 이동하던 환인 일행은 얼마 안 가 축구장 사이즈의 물웅덩이와 마주할 수 있었다.
여자들은 눈앞에 드러난 광경을 보곤 눈쌀을 강하게 찌푸렸다.
=윽, 이거 뭐야. 멧돼지랑…… 물소?=
=말도 있어.=
물웅덩이에는 동물 열댓 마리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는데 개중에는 살아있는 것도 있었고 죽어서 부패가 진행되고 있는 것들도 있었다.
그것들의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을 꼽자면 배가 눈에 띄게 크게 부풀어있다는 것.
“산란못이군.”
=여기가 산란장이란 말이야?=
“그래. 웅덩이 바닥에 괴물의 유생이 움직이는 게 보인다.”
=어? 정말이네.=
물에 그림자가 비치는 것을 바라보던 안느가 예쁜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중얼거린다.
=딱히 사람만 번식에 쓰는 게 아닌가 본데.=
=크라빈 숲에 사는 동물이려나…….=
=그렇지 않을까? 와, 저기 백호도 있어. 저 신령한 동물을…… 이런 천벌 받을 놈들 같으니.=
=이미 천벌을 받아서 이형종이 된게 아닐까?=
=그거 말되네. 비상아, 주변에 이형종이 있는거 같아?=
쿠응.
=없다고? 그럼 여기에 있던 이형종이 다 몰려온 건가 보네.=
여자친구들과 비상의 대화를 들으며 이형종의 적 감지 수단을 생각하던 환인은 영혼 시야를 켜 물웅덩이를 재차 살폈다.
적갈색을 띄기 시작한 물 속에 연회색의 주먹만 한 점이 무수하게 보인다. 올챙이 형상과 뒷다리가 나고 있는 것도 있다.
=주인님. 기름병 던지실 거예요?=
“아니. 미궁이 얼마나 넓은지 모르니 당장은 아끼고 싶군.”
그리고 성체가 아닌 이상 딱히 처리하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크라빈 숲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미궁이 발생해 개구리가 비정상적으로 번식했기 때문이다.
미궁을 닫고 이형종을 대부분 정리해놓으면 저것들은 생태계의 일부에 포함되어 자라다 포식자들에게 잡아먹혀 자연 소멸하던가 숲에 정착하든가 할 터.
자신이 떠난 뒤 또다시 돌연변이가 발생해 재난이 벌어질 수 있지만 그건 환인이 알 바 아니었다.
‘그땐 프라버나 크라빈 마을이 알아서 할 일이지.’
=그런데 안느, 여기에 불을 질러도 괜찮을까? 만약 숲에 불이 번지면…….=
=비상이가 있잖아. 바람으로 조절하면서 정리하면 돼.=
=아.=
쿠우? 쿠으응. 쿠에~
그때 비상이 아성체일 때보다 부드럽고 고와진 소리로 예쁘게 울었다. 그런데 소리와 내용이 어울리지 않아 환인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10대 후반, 혹은 20대 초반 아가씨가 예쁜 목소리로 30대 아저씨처럼 투박하게 말한다고 할까.
“동쪽에서 이형종 무리가 다가오고 있다.”
미궁 입구에서부터 이런 꼴이라면 미궁 전체가 이런 산란못으로 이루어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중핵을 찾았는데 전투 소리에 주변의 이형종이 죄다 몰려들거나 해서 포위되는 일은 사양이다. 일단 미궁 가장자리를 돌며 미궁의 넓이를 가늠하는 동시에 발견하는 이형종은 모두 죽이도록 하지.”
=응.=
=네.=
환인의 여자들은 다시 무기를 빼들고 마악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양서류 괴물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산란못 미궁 지도 1일차)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