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5화 〉 319 숲 옆 마을 크라빈
* * *
=아, 아아아. 어떻게 해. 어떠케. 아앗……!=
반쯤 패닉 상태에 빠진 라비올라가 혼이 나간 모습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어떡해, 어떻게 해를 반복해서 중얼거린다.
상대는 틀림없이 프라버의 높은 분일텐데 이렇게 분쟁을 빚다니.
유르파는 그런 라비올라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 상황을 계획한 것처럼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태연한 환인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와~ 저렇게 선민의식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사람은 오랜만이네.=
=유리 언니, 그 여자는 대체 뭐에요? 그 여자도 호족인가요?=
이실리테가 화난 듯 눈썹을 치켜뜨고 묻자 유르파가 으응~ 생각하다가 부정했다.
=아닐걸? 귀에 조인족의 깃털이 붙은 걸로 봐서 1급 호족 정도 되는 프라버 가문의 가신 직계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는데, 안느 아가씨는 어떻게 생각해?=
=그쪽 동네는 조인족이 사회 핵심 인사들이라고 들었어. 수정구는 아무나 관리하게 두지 않으니까 언니 짐작이 맞을 거야.=
여자친구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환인은 절망에 빠져 울먹이기까지 하는 라비올라를 진정시켰다.
“이 사태는 제가 정리할테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치만, 그치만…….=
“저의 신분을 보증해주는 두 분의 이름을 댄 이상 저쪽은 절대 가볍게 넘기지 못합니다. 만약 이 상황을 무시하려한다면…….”
그때는 미궁을 정리한 뒤 헬루멘으로 돌아가 이 사태를 알리고 방금 협박했다시피 공론화해버리면 그만이다.
도시 영역 내의 촌락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은 수도 없이 많으니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핑계가 먹혀도, 사도까지 파견해 관리하는 마을을 이따위로 대한다면 논란거리가 되고도 남는다.
시하에게서 폭군룡의 미궁을 다스리지 않는 이유를 들었다.
폭군룡의 미궁 앞 마을을 어째서 도시가 관리하지 않는가.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큰데 그런 문제로 말미암은 책임을 져서 명예가 실추되기 싫어서다.
그러할진데 크라빈 마을에 벌어진 일은 보통이 아니다.
근처에 미궁이 발생했고 마을 유지와 사도가 사망했으며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러는 와중에 5주간 그 어떤 연락과 조치도 없었다는 것은 충분히 태만의 증거가 된다. 명예가 실추될 일이라는 거다.
“영혼사가 끼어든 일입니다. 제대로 이 사태를 정리하고 크라빈 마을을 정상화하지 않는다면 휘하 마을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는 오명을 쓸 테지요.”
호족은 명예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그걸 수정구 통신을 관리하는 부서가 모를까.
“그러니 잠시 후면 상대 쪽에서 통신 연결을 시도해올 겁니다. 그때 나머지를 정리하면 되는 일입니다.”
=저, 정말요?=
“예. 그리고, 5주 전에 통신으로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하십니까.”
=기억하고는 있는데…….=
“방금 그 여자는 아니겠지요.”
=네. 아니에요.=
설득이 먹혔는지 한결 진정한 라비올라의 대답에 환인은 반대쪽이 훤히 비쳐 보이는 수정구를 조용히 응시했다.
5주전 보고를 받은 쪽이 방금 그 여자가 아니라면 지금 들고 있는 이 예감이 틀릴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5주 동안이나 소식이 없다는 것도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니…….
팔짱을 끼고 지금 들고 있는 예감이 틀리기를 바라던 중 수정구가 다시 명멸하기 시작한다.
그 현상을 라비올라가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의 빛처럼 여기는 모습으로 수정구에 달라붙었다.
=프라버에서 통신 요청이 들어왔다는 신호예요!! 성자님, 연결할까요?!=
“예.”
낑
저주파 소리가 한 차례 다시 울려 퍼지고, 환상으로 이루어진 화면이 공중에 떠오르며 이번에는 회색 갈매기 머리의 남자가 나타났다.
[신호 확인, 1015973570000. 여기는 프라버 성 상시 통신 수정 관리부서의 알캄 드란 부서장입니다. 남동 로아팅스 정글의 크라버 숲 마을 수정구 식별 확인을 요청합니다.]
=부서장님……? 아, 네! 남동 로아팅스 정글의 크라버 숲의 크라버 마을 통신 수정구예요. 식별 번호는 56435884351 입니다!=
[…확인.]
이번에는 듣기만 해도 정상적인 통신 절차라는 게 느껴진다.
환인은 저쪽이 자신을 볼 수 없는 곳에서 차분하게 남자의 대응을 응시했다.
[긴급 통신 수정구 사용을 확인하였습니다. 사용자의 신분 및 자초지종의 설명을 요청합니다.]
=어, 그… 그게…….=
자신을 힐끔 돌아보는 라비올라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2달간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핵심만 요약해서 전달한다.
비술을 배우는 사람이라서일까, 요약이 간단하고 간략해 사태를 파악하기 부족함이 없다.
묵묵히 설명을 듣던 갈매기 머리의 통신 수정구 관리 부서장은 5주 전 긴급 구조와 지원 요청을 넣었다는 대목에 표정을 눈에 띄게 일그러트렸다.
촤락, 촤라락
남자가 고개 숙인 화면 너머에서 종이가 빠르게 넘어가는 소리가 이어진다. 그리고 엿됐다는 표정을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짓는 것을 환인은 목격했다.
‘역시나군.’
라비올라가 전했다는 연락, 아마도 정규 통신절차를 통한 연락이 아니었기에 저쪽에서 씹었을 가능성을 점쳤던 환인은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지금 당장 지원병력이 출발한다고 해도 최소 사흘은 걸릴 것이다. 도시이니 이런저런 절차를 생각한다면 닷새일까.
[…크라빈 양. 당시 보고를 받은 수정구 담당관을 기억하십니까.]
=네? 그, 그분도 이름을 말씀해주지 않으셔서…… 하지만 얼굴은 기억하고 있어요!=
[……크라빈 양에게 미안한 이야기입니다만, 당시 보고 연락은 정식 절차에 따른 통신이 아니었기에……….]
“알칸 드람 부서장님. 갑자기 끼어드는 무례를 용서하시길.”
여기서 부서장이 사과하고 라비올라가 받아들이는 구도는 안 된다. 사과가 이루어지면 이후 문제로 삼기 어려워지니까.
환인이 라비올라에게 양해를 구하고 대화에 끼어들며 자리를 바꾼다.
건너편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알칸=드람은 남자의 인상착의에 속으로 ‘빌어먹을.’ 짧게 읊조리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잘못 본 것이라면 지적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혹시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이시자 검희 이실리테의 주인이신 환인 님이 아니신지요.]
“맞습니다.”
알칸=드람은 최악의 상황이 현실로 이루어졌음을 직감했다. 순간 눈앞이 아찔해져서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부하 직원의 무례와 적법한 절차에 맞지 않는 대응을 사과드리겠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부서장님과 관계없는 직원 개인의 독단이라 항의에 덧붙이도록 하지요.”
네 사과는 받아주겠지만, 항의는 거두지 않겠다는 말에 알칸=드람은 위장에 구멍이 수십 개 뚫리는 듯한 불안과 분노와 두려움이 불처럼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어진 성자의 말에 촌의 무지렁이가 영혼사로 각성한 것이 아닌, 제대로 교육받은 상위 귀족의 자제가 영혼사로 각성했으리라고 속으로 확신했다.
“5주전의 보고를 일축한 일을 지금 꺼내는 것은 경우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에 관한 건의 해결은 차후로 미루도록 하고, 지금 즉시 프라버의 긴급 지원을 요청합니다. 저와 제 기사들이 크라빈에 도착한 것이 이틀 전, 그리고 크라빈 숲에 들어온 나흘 전부터 이 시각까지 처리한 기생촉수 두꺼비의 숫자가 600에 달합니다. 미확인 개방형 미궁은 기생 개구리 변종의 소굴로 변했음을 추측 중이며…….”
마을의 피해 현황이 이러이러하며 여자들이 끌려가 이형종 번식의 모판으로 활용되고 있음도 정황상 드러나고 있다.
자신과 자신의 기사들이 마을의 안전을 위해 이형종을 정리하고는 있지만 이 안전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다고 알린 환인이 재차 요구한다.
“절차를 간소화한 지원이 시급합니다. 크라빈 마을은 이미 5주가 넘게 마음을 졸이고 있어 주민들의 상태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500마리에 가까운 이형종을 처리해서일까, 이틀간 마을은 단 한 번도 습격을 받지 않았다.
거기다 마을을 지켜주는 환인과 그의 여자들 덕분에 사람들은 안정을 되찾아 마을에 팽배하던 불안과 두려움이 거의 사라져 사람들의 얼굴에 약간씩이지만 웃음이 돌아오고 있었다.
이것을 솔직하게 말하면 지원이 늦어질게. 틀림없기에 슬쩍 말을 고친 환인이었다.
아주 거짓말도 아니다. 자신이 도착할 무렵만 해도 폭발 직전이었으니까.
[예.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였습니다. 절차를 단축해 보고서를 시급히 올려 크라빈 마을에 지원이 나갈 수 있도록 손을 쓰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이번에도 늦는다면 저는 통신 수정관리부서의 태만을 의심할 수밖에 없을듯하니까요.”
[…옛.]
핏
‘자, 그럼…….’
이제 프라버의 지원은 며칠 안으로 도착할 테지.
화면이 꺼질 때 알칸=드람의 표정이 구겨졌던 것을 보면 자신의 기분을 좆같이 만들었던 여자는 부서장이 알아서 조질 것이다.
눈치도 꽤 있는 편이고 바보라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적당히 협박했으니 자신이 무사하기 위해서라도 그 여자를 가만두지 않겠지.
그 여자의 본격적인 처리는 프라버에 도착한 이후 해도 될 일.
환인은 개방형 미궁 탐사에 필요한 것을 떠올리며 라비올라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 * * *
프라버 상시 통신 수정 관리부서.
쾅!!
=빌어먹을!! 리타 아르노혼!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통신이 종료되자마자 통신 수정 관리부서의 부서장이자 1급 호족인 알칸=드람은 쾅, 책상을 내려쳐 박살 내버리곤 얼어붙은 자신의 조카를 향해 분노를 토해냈다.
=사, 삼촌. 저는…….=
=직장에서는 부서장님이라 부르라고 했지!!=
불을 토해내는 듯한 노호성에 리타=아르노혼은 힉. 새된 비명을 지르며 어깨를 움츠리고 눈물을 글썽였다.
=내가, 내가 몇 번이나 주의하라고 경고하지 않았느냐! 마을에서 긴급으로 들어오는 통신은 어떤 일과 경우가 발생할지 모르니 정중하라고!! 네 머릿속에는 뇌 대신 구정물이라도 차있는 거냐?! 왜 말을 하면 알아 처먹지를 못해!!=
쾅! 쾅쾅쾅!!
강철처럼 단단한 날개질과 발길질에 리타=아르노혼의 책상이 쓰레기로 변해가고 부서장이 토해내는 격노에 서른이 넘는 직원들은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세라 잔뜩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츠린다.
알칸=드람이 분노에 거친 숨소리를 흘리며 다시 소리쳤다.
=이제 어찌할 거냐!! 저쪽은 명실상부한 7급과 8급 호족님의 비호를 받는 상급 영혼사이자 성자시다!! 그런 사람을 정중히 대하긴커녕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리다 분노하게 하다니, 가문에 불벼락이 떨어지게 생긴 이 일을 어떻게 할 거냐?! 응?!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죄, 죄송. 죄송해요. 부서장님, 죄송해요……!=
=……!!=
앵무새마냥 죄송하다는 말 밖에 않는 조카의 행동에 알칸=드람은 손을 들어 눈을 덮고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울화를 꾹꾹 억누른다.
자신이 모두 책임지겠다는 말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는 말이 고작 죄송하다는 것뿐이라니.
내가 이래서 형님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려 했건만. 부서에 배치되자마자 직원들과 연달아 마찰을 빚더니 결국 대형 사고를 쳤다.
안된다. 이건 자신도, 형님이라도 감쌀 수 없는 초대형 사고다. 본 눈이 많으니 소리없이 묻어버릴 수도 없다. 어떻게든 영주님에게 서류가 올라갈 일이다.
그러면 형님의 가문에 불벼락이 떨어지겠지. 그러면 그 가문에서 떨어져나와 있는 자신에게도 줄을 타고 불이 번질 거다.
냉정하게 계산을 마친 알칸=드람은 벌벌 떠는 조카를 얼음장 같은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리타 아르노혼.=
=네, 네.=
리타=아르노혼은 불을 토해내다가 갑자기 분노를 감추고 얼음을 토해내는 삼촌에게 두려움을 느끼며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님은 영주님께 직통의 진정서를 올릴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지닌 분이다. 그런 분이 너만을 찍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너라도 알거라 생각한다.=
=아…….=
=너에게 가문의 안위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짐승신님께서 너에게 내리는 시련과 벌이라 생각하고 꾹 참고 받아들여라. 그 외에는 네가 살아남을 길은 없다.=
살아남을 길이라고 했지만 절대 자신이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리타=아르노혼은 사색이 되어 삼촌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부, 부서장님! 삼촌!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이런 실수 하나로 죽는 건 너무 억울해요! 제발!!
억울하다면 처음부터 잘했어야지.
딱.
손가락을 튕겨 위병을 호출한 알칸=드람은 죄명과 자초지종을 적은 서류를 작성해 위병에게 건네준 뒤 도시범죄 수사국으로 데려가라고 지시했다.
=삼촌! 삼초온……!=
살려달라고 악을 지르는 조카의 아우성을 무시하고 자리로 돌아온 알칸=드람은 부서의 직원들이 내심 고소해하는 걸 느끼곤 신경질적으로 부리를 매만지며 자리에서 서성였다.
‘하필이면 둘째 아가씨가 자살해 분위기가 험악해진 이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현재 프라버 성의 분위기는 최악에 가깝다. 호족, 고족 가릴 것 없이 모든 가신들과 고용인들, 시중인들이 몸을 사리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 자신이 보전하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
알칸=드람은 이 상황을 최소한의 피해로 넘기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 내다가 으득, 부리에서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깨물었다.
‘하는 수 없다. 이건 최악의 상황이 닥칠 때 쓰려고 아껴둔 한 수지만, 지금이 그 최악의 상황.’
무려 4급과 5급인 조인족 인맥이다.
직업자의 특성과 조인족의 특성을 모두 지닌 비장의 수단을 자신의 실수도 아닌 일에 쓰려니 미치도록 아까운 알칸=드람이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알칸=드람은 수납장에 숨겨둔 소형 휴대용 통신구를 꺼내 들며 얼굴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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