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323화 (323/813)

〈 323화 〉 317 숲 옆 마을 크라빈

* * *

※R18+ 고어 묘사 주의※

=샤헨. 영혼사님을 모신 뒤에 돌아올 테니까 그때까지 경계 잘해.=

=어엉.=

방책 안으로 들어온 라비올라는 동생에게 철저하게 경계를 지시한 뒤 환인 일행을 마을 안으로 안내했다.

=…….=

텅 비다시피 한 시장을 가로지르며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환인의 안색을 힐끔힐끔 살폈다.

상급 영혼사 씩이나 되는 분이니 당연히 마을의 유지 가문인 우리 집에 귀한 손님으로 모시는 게 맞다.

맞는데 보통 영혼사님들은 향응 같은 것을 거부하시는 편. 혹시 저택으로 안내하면 향응으로 받아들여 불쾌해하시지 않을까 걱정이다.

게다가 이제는 귀빈을 맞이할 어머니도 안 계시니 자신이 해야 하는데, 솔직히 어머니처럼 능숙하게 귀빈을 접대할 자신이 없다.

특히 아까 방책 앞에서 환인이 슬쩍 내비친 기세에 심장이 조여드는 걸 느꼈던 라비올라는 다시 실수해서 영혼사님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여쭤보자. 불편하시다면 마을 여관 별채를 안내해 드리고 괜찮다고 하시면 집에 모셔야지.’

결심한 라비올라가 마악 입을 열려 할 때 환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을의 분위기가 침체되어있군요.”

라비올라의 안내를 받아 마을 안으로 들어온 환인은 마을을 휘감고 있는 진득한 패배감을 느낄 수 있었다.

길을 드문드문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보이는 불안과 두려움, 공포와 분노.

그리고 환인의 눈에만 보이는 많은 수의 영혼들.

유독 남자들이 불쾌감과 분노에 불안을 많이 느끼고 있다는 것에 환인은 의구심을 느꼈다가 곧 이해했다.

자신이 살아가는 터전을 공격받았다는데서 영역 의식이 강한 루크랑 남자가 분노를 드러내는 것은 당연하다.

힘이 없으니 이형종의 공격을 받았다는데서 불안을 느끼는 것도 이해한다. 불쾌감은 기생촉수 개구리가 여자의 몸 안에 알을 깐 것에서 유래된 거겠지.

그래서인지 영혼의 남녀 성비가 독특하다.

영혼은 대다수가 남자 영혼이고 여자 영혼은 거의 없다. 거기다 남자 영혼들 또한 극심한 정신적 고통과 분노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 영혼의 숫자만 대로를 걸으며 30명을 목격했다.

‘기생촉수 두꺼비는 여자만 끌고 가고 남자는 현장에서 죽여버리는 건가.’

마을 상태를 지적하는 환인의 질문에 잠깐 당황한 라비올라는 곧 기가 죽은 모습으로 고양이 귀를 뒤로 눕히며 대답했다.

=……후우. 영혼사님도 오시면서 그 개구리들을 많이 해치우셨으니까 아마 짐작하셨으리라 생각해요. 마을에서 북서쪽으로 20km 정도 가면 여신산이 나와요.=

까마득한 오랜 옛날, 하늘에서 상처 입은 여신님이 내려와 피곤에 지쳐 대지에 몸을 누이셨고 그대로 산이 되어버렸다는 설화가 전해지기에 여신산이라고 부르는 장소.

그 산의 산자락 부분에 개방형 미궁이 발생했고 그곳에서 흘러나온 기생촉수 두꺼비로 인해 마을이 큰 피해를 입고 있다는 이야기가 라비올라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저희도 그 미궁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마을 주변은 기생촉수 두꺼비가 포위했고 근처에 미궁까지 개방되었다면 상당히 심각한 사태인데,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지구 나이로 치면 이제 20대 중반일까. 라비올라가 살짝 흔들린 눈빛을 지었다가 고개를 작게 숙였다.

=하긴 했지만 망할 개구리 때문에…….=

고와서 욕설과 안 어울리는 얼굴로 아까부터 내뱉는 망할 개구리라는 단어에 라비올라가 느끼는 감정이 모두 집결되어있음을 환인은 느꼈다.

“기생 두꺼비 변종이 여자를 납치해 모판으로 사용하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환인의 발언에 그의 여자들이 흠칫 어깨를 움츠리고 떨었다.

아무리 대량으로 번식하는 파충류 개구리과의 이형종이라지만 비정상적으로 많은 숫자가 몰려다니는 이유도 그런 거라면 이해된다.

여자를 모판으로 사용해 번식하고 잡아먹어 영양분을 확보해 급속하게 성장하는 식으로.

=아, 아까 신체 검사가 필요하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어?=

안느가 소름 끼친다는 표정으로 묻자 라비올라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르파도 이제 이해된다며 중얼거린다.

=어쩐지 생식기와 흡사한 돌기가 주둥이 안쪽에 붙어있길래 이게 뭘까 의심했는데 그런 용도였구나. 촉수로 여자를 마비시키고 입에 집어넣은 뒤에 안쪽의 돌기로 여자 뱃속에 찔러넣어서…….=

=윽. 율이 언니, 상상되니까 자세한 설명은 하지 마.=

=미안.=

=맞……아요. 망할 개구리들은 공격해올 때마다 여자들을 촉수로 붙잡아 납치해가요. 그리고 몸 안에 알을 까서 번식하죠. 밖에서 오신 분들이라 혹시 당한 걸 숨기고 있다가 마을 안에서 괴물이 나타날까 봐…… 죄송해요.=

하지 말랬는데 결국 설명하는 라비올라에게 안느가 으~ 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유르파가 께름칙한 얼굴로 라비올라에게 이해심을 발휘한다.

=뭐, 아가씨 마음 이해해. 이런 상황이면 오만 게 다 의심스러울 테니까.=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알게 됐니?=

=…정말 우연히 붙잡혀가던 여자 순찰대를 구한 덕분이었어요.=

구해왔더니 가죽 갑옷이 거의 부식되어 젖가슴과 하반신이 훤히 드러나 있었고 배가 임신한 것처럼 부풀어있었던데다 유방 안에 뭐가 움직이는 것처럼 꿈틀거렸던 것.

사람들은 그 끔찍한 모습에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그렇게 사람들이 얼어있는 사이 정신 차린 여자는 자신의 몸 상태에 비명을 지르다가 스스로 배와 가슴을 퍽퍽 내려쳤고, 그 충격에 자신의 음부와 항문에서 개구리알 같은 것과 괴물의 올챙이가 뭉텅이로 쏟아지고 유두가 찢어질 듯 벌어지며 괴물 올챙이가 흘러내리는 것을 목격하곤 쇼크사해버리고 말았다.

이야기를 들은 환인의 여자들은 충격받은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풀이 죽어있던 라비올라는 아, 이게 아니지. 하고 정신차린 뒤 환인의 질문에 대답했다.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을 쓰고 사람도 몇 차례 내보내긴 했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전부 실패한 거 같아요. 다른 이유라기보다 그, 망할 개구리가 너무 많아서…….=

잠시 입을 다물었던 환인은 라비올라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미궁이 발생한 정보는 어떻게 입수했느냐, 기생촉수 두꺼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느냐, 공격을 언제부터 받았느냐, 외부에 어떤 도움을 청했느냐.

한 번에 많은 질문이 쏟아져서 라비올라는 허둥거리다 하나씩 대답했다.

=이변을 느낀 것은 두 달 전 여자들이 하나둘씩 행방불명되면서였어요. 다섯 번째 행방불명된 여자가 생겼을 때 수색을 위해 마을 사도님이랑 어머니가 순찰대원들과 함께 마을 주변을 순찰했죠.=

그러다 개방형 미궁이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 라비올라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보를 대가로 사도님이랑 제 어머니는 돌아오지 못하셨어요. 개방형 미궁이 확인되자마자 수정구로 프라버에 도움을 청했지만 그게 5주 전의 일이어서…… 망할 개구리들은 사나흘마다 한 번씩 쳐들어오고 있는데 점점 그 숫자가 많아지고 있어요. 매번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남자들은 죽고 여자들은 끌려가고…….=

=5주나 지났는데 아직도 지원이 안 왔다고?! 다시 통신 수정으로 연락 안 해봤어?=

안느가 어이없어하며 묻자 라비올라는 화낼 여력도 없는지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 쓴 게 마지막 횟수였어요. 여분도 없었고 긴급 지원 요청을 넣었으니까 내일이면 오겠지, 모레면 오겠지 하면서 기다렸는데…….=

그게 5주나 지났다는 이야기였다.

대화하며 계속 이동한 결과 환인은 라비올라의 자그마한 저택에 도착하게 되었다.

라비올라의 집은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한 세 개의 창고와 두 개의 곳간, 하나의 별채가 붙은 저택이었는데 크기로 따지면 마을에서 가장 큰 수준이었다.

이만한 부자니까 자식을 비술사로 키울 수 있었던 거겠지.

환인은 저택에 머무르는 손님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라비올라의 은근한 권유를 받아들여 저택의 별채에 머물기로 했다.

=본채에 머무르셔도 되는데, 그쪽이 더 편하실 거예요.=

“아닙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이쪽이 저희에게는 더 편합니다. 그보다…….”

양식 구조의 별채 거실로 자리를 옮긴 환인 일행은 라비올라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농산물을 따로 생산하는 것 같지는 않더군요. 두 달이나 격리되었으면 식량 사정이 나쁘지 않습니까.”

=아. 저희 마을은 땅속에 특화 작물을 키우고 있고 집집마다 자라고 있는 나무에서 꾸준히 열매가 맺혀서요. 만약을 대비해 비축해둔 식량으로 버티는 중이에요. 역겹지만 망할 개구리 고기도 있고요.=

기생촉수 두꺼비는 사람을 번식용 모체로 사용하고 사람은 기생촉수 두꺼비를 죽이고 잡아먹는 기이한 순환이다.

=식량 사정보다 아직도 지원 소식이 없어 마을 사람들이 더는 견디기 힘들어하는 중이에요.=

=마을 방위 병력은 어느 정도인데?=

=직업자는 절 포함해서 열여섯 명이고요, 순찰대원이랑 자경단원, 수비대원 다 합치면 45명 정도예요.=

=마을을 지키기 위한 숫자치고는 좀 적네요…….=

=원래 100명 정도였는데 5주 동안 계속 줄어서…….=

=으음. 미궁을 공략해볼 생각은 못했어? 직업자가 열여섯이나 되면 힘이 꽤 있는 편인데.=

안느의 질문에 유르파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열여섯은 얼핏 많아 보이지만, 전방위적으로 공격받는 마을을 지키기에도 급급할 거야. 사람을 떼어내서 미궁 공략에 넣는 건 어렵다고 봐.=

=네. 유르파 기사님 말씀대로예요. 직업자인 애들을 중심으로 괴물을 퇴치하는데 모든 힘을 쓰고 있는 판국이라서…….=

처음 질문을 던지고 여자친구들과 라비올라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환인이 입을 열었다.

“정신적인 불안 때문에 제 실력을 내지 못하는 것도 이유겠지요. 그 불안이 해소된다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습니까.”

=식량은 좀 아껴먹고 틈을 타서 마을 근처의 과일과 야채를 수확해오면 두 달은 더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망할 개구리도 이제는 조금 익숙해지기도 했고 마을의 힘 세고 건장한 남자 여자가 훈련을 받고 있기도 하니까요.=

적어도 할 일은 다 하고 있으면서 버티는 중이라는 이야기에 환인이 결정을 내렸다.

“좋습니다. 우선 마을 사람들 전원을 마을에서 가장 넓은 공터로 모으십시오.”

=네?=

뭘 하려고? 그런 의문이 묻어나는 눈빛에 안느가 씩 웃으며 말했다.

=라비 아가씨, 혹시 녹색 성자의 소식은 들어봤어?=

=아, 아뇨. 안느 기사님이 말씀하실 정도라면 대단한 분이신거 같은데 어떤 분이신가요?=

라비올라의 반응에 안느는 순간 뻘쭘해하다가 말을 돌렸다.

=우리 도령이 크라빈 마을을 도와준다는 말이야. 우리 도령은 혼재도 정화하는 상급 영혼사고 이쪽의 미녀는 혼자 6급 이형종하고도 싸우는 엄청나게 강력한 희귀 직업자야. 나도 6급 성투사고.=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오면서 해치운 그 망할 개구리만 150마리가 넘는다고 했었지!?

라비올라는 이 유모를 희망이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즈, 즉시 사람들을 모을게요!=

라비올라가 하인, 하녀들과 흩어져 마을 사람들을 모으는 사이 환인은 비상을 타고 마을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피핏­

꾸그르륵!

꾸에겍!

눈에띄는 7마리 무리의 기생촉수 개구리를 향해 하급 정령의 영혼 화살을 난사해 도륙낸 뒤 상처가 가장 적은 두 마리를 노끈으로 묶어서 비상이 쥐고 날아오르게 시켰다.

쿠, 쿠웃!

무, 무거워!

기생 촉수 개구리의 체고?高는 사람 키 정도지만 앞뒤로 두껍다 보니 한 마리의 무게가 500~600kg은 된다.

그걸 두 마리나 챙기고 환인까지 태워 날고 있으니 힘겨운지 아등바등하는 느낌으로 나는 비상이다.

쿠궁!

=으헉!?=

=괴, 괴물 두꺼비다!!=

=진정해! 이거 죽은 것들이야!=

마을로 돌아와 공터,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시체를 떨어트리자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얼굴로 웅성이다 근처에 갑자기 떨어진 기생촉수 개구리에 기겁했다가 진정한다.

환인은 다시 마을을 빠르게 돌아다니며 영혼을 빠짐없이 불러들였다.

하나하나 말로 부르기 귀찮았고 그렇다고 평온의 파동을 쏴대는 것은 결정적인 장면 연출에 영향을 줄 것이기에 일단 모두 끌어들여 영혼구슬로 만든다.

그렇게 마을 전체를 살펴서 서른다섯의 영혼을 구슬로 만들어 돌아온 환인은 광장을 가득 채운 인파에게 항의받는 라비올라를 볼 수 있었다.

=라비 아가씨! 갑자기 이렇게 불러모은 이유가 뭔지 좀 알려주쇼!=

=불러놓고 아무 말도 안 하니까 불안하다고!=

=아까 저기 하늘에서 갑자기 좆같은 개구리 새끼가 떨어졌는데 방어벽이 뚫린 거 아닙니까?!=

여기저기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소리에 환인의 여자들과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던 라비올라가 이마에 핏대가 솟을 정도로 바락 고함질렀다.

=다들 조용~!! 조용히 해요 좀!! 아무 일도 없는데 부른 게 아니고!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서 부른 거니까요!!=

그녀 본래 성격도 꽤나 괄괄한지 반쯤 흥분하려던 대략 700명 가량 되는 마을 사람들이 주춤하면서 입을 다문다.

저만한 성질이 있으니 마을의 경비병들과 순찰대를 이끄는 거겠지. 암울한 상황과 환인의 직업 탓에 기가 죽어있었던 거겠고.

하지만 모을 때 이유 정도는 알려줄 법도 하지 않나.

그리 생각했던 환인은 자신이 어떤 이유로 모아달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후, 모이라고 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알고 계신 분도 있겠지만 조금 전에 상급 영혼사님께서 영혼 기사분들과 함께 우리 마을에 방문하셨어요. 그리고 우리의 사정을 들으시고는 연민하시며 도움을 주시겠다고 하셨죠.=

=아니 거 라비 아가씨 그리 안 봤는데 참 못됐구먼! 성자님이 무슨 힘이 있으시다고 그분께 도움을 요청한 거요?!=

=맞아요! 우리 불쌍한 아이들이 헤매지 않도록 성불을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네, 네? 아니 그게…….=

=라비 아가씨, 영혼사님을 위험에 빠트리지 마시고 얼른 보내드려요!=

=옳소!=

=영혼사님께 큰일 나면 오히려 우리가 천벌을 받을 거라고!=

설명도 없이 모았을 때보다 더한 반항이 터져 나와 사람들이 왁왁거린다.

삽시간에 자신만 나쁜 년이 된 라비올라는 울상으로 그게 아님을 해명하려 했지만, 아까의 흥분에 이번의 일까지 더해지자 라비올라도 더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돌입하려 했다.

=라비 아가씨, 도령 왔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어버버거리던 라비올라가 안느의 속삭임을 듣고 고개를 번쩍 들자 마을 주민들도 뭐지? 하면서 고개를 들었다가 비상을 타고 하늘을 날고 있는 환인을 목격했다.

환인은 웅성이는 소리를 들으며 라비올라의 옆에 내려선 뒤 어림잡아 700명은 될법한 인파를 눈에 담았다.

뭐야? 누구?

영혼사님인가? 그런데 아우라가 없잖아.

잘생겼다……. 플뢰 종족이신가?

귀가 짧은데?

방금 쿠에, 하늘 날고 있지 않았어?

갑작스러운 환인의 등장에 놀라 조용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웅성거림이 커진다.

환인은 그 웅성임을 들으며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렸다. 구슬로 만든 영혼들이 해방되어 제모습을 찾아가는 가운데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자신에게 쏠린 것을 느낀 순간.

파아앗??

평온의 파동을 발사했다.

들어올린 손에서 평소보다 짙고 강한 회백색 빛이 해일처럼 퍼져나가 15만평 가량의 마을을 단숨에 휘감고 사라진다.

그것으로 점차 시끄러워져 가던 광장은 다시금 고요한 침묵에 휩싸였다.

800명이 넘게 모인 광장이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해지고, 환인은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응시하는 사람들에게 입을 열었다.

“상황이 좋지 않지만 이런 상황에서나마 여러분과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크라빈의 주민 여러분.”

꼴깍.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귓가에 선명히 파고든다.

마을 주민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1m 높이 단 위에 서 있는 사람을 응시했다.

“저는 과분하게도 많은 분에게 녹색 성자라 불리고 있는 영혼길의 순례자, 환인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환인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자신들도 황급히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숙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마을이 직면한 불합리하고 불행한 상황에 울화와 분노가 가슴 속에 가득했었는데, 지금은 평화로웠던 몇 달 전처럼 가슴속이 편안하고 따뜻하다.

아우라가 없었지만 알게 뭔가. 평온의 파동을 쓰셨는데!

그런데 승령천제 때 몇 번 겪은 다른 영혼사님의 축복이랑은 좀 다른 거 같은데?

“두 달동안 자력으로 이형종의 공격과 침입을 막아낸 영웅과도 같은 여러분을 라비올라 양에게 부탁해 한자리에 모이도록 한 것은, 여러분들의 긴장으로 팽팽히 당겨진 이성을 걱정해서입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목숨의 위협이 며칠 이어진것만으로도 극심한 정신적 피로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그것은 성격마저도 일부 변화시킬 수 있는 위력이며, 트라우마가 되어 한평생 잊지 못할 상처가 되기도 한다.

마을 주민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모이게 된 이유를 깨달았다.

그야 당연하다. 평온의 파동을 받기 전과 받은 후가 이렇게나 다른데.

만약 여기에 오지 않았더라면 오늘 밤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마음 편히 숙면을 취할 수 있겠지.

환인은 대외적으로 보일 때면 으레 짓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께서 저에게 보여주신 걱정은 감명 깊었습니다. 자신들이 힘든 상황임에도 타인을 걱정하는 마음씨를 발휘하기란 어지간해서는 하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더할 나위 없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에 평온의 파동이 주는 효과를 실감하며 손을 들어 단 아래로 옮겨진 기생촉수 개구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 선량한 마음을 지닌 분들이 이런 괴물에게 더 고통받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삶의 시련이란 신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미력한 인간인 제가 확답을 해 드릴 수는 없지만, 약속은 드리겠습니다. 이 이상 상황이 심각해지지 않도록 온힘을 다하겠다고 말입니다.”

=오오오…….=

=성자님, 성자님…!=

=하 하지만 성자님은……!=

“몇몇 분들께서 싸움과 관계없는 영혼사가 어떻게 이형의 괴물들과 싸우겠느냐고 걱정하시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급 영혼사는 마냥 무력한 존재가 아니며, 저에게는 수십 마리의 기생촉수 두꺼비를 상처 없이 도륙하는 강한 기사가 있으니까요.”

환인이 옆으로 손을 내밀자 이실리테와 안느가 몸에 두르고 있던 망토를 활짝 펼치며 은빛 갑주를 드러내는 동시에 환인의 좌우에 선다.

찬란하게 빛나는 특별한 아우라와 수려하고 화려한 은빛 갑주를 몸에 두른 여신과도 같은 미녀들.

마을에서 최강입네 최고입네 거들먹거리던 2~3급 직업자와는 차원이 다른 두 강력한 직업자의 등장에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설마……? 하는 마음이 단단한 믿음으로 변화하며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환인은 그런 마음에 기름을 끼얹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희귀 직업자인 검희 이실리테와 저 먼 종족 연합 국가 메리아놀의 종교, 땅신 교단의 6급 성투사 안느가 여러분들을 지키고 원래의 평화로운 삶을 되찾아줄 것입니다.”

우와아아아아­!!!

광장이 마을 사람들의 함성 소리로 가득 차올랐다.

그후 이어진 35명의 영혼을 마을 사람들 앞에서 성불시키는 것을 보여주었을 때, 마을 사람들의 환인을 향한 믿음은 수백 년간 마을을 지켜온 유지 가문을 향한 것보다 더욱 단단하게 형성되었다.

라비올라=크라빈의 저택으로 돌아온 안느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환인에게 말했다.

=도령 진짜 대단하네. 35명이나 되는 영혼을 일시에 성불시킬 줄 진짜 상상도 못했어.=

“마을 주민들이 나에게 믿음을 보여준 결과일 뿐이다.”

영혼은 대중의 감정에 크게 휘둘리는 편이다.

평온의 파동으로 미리 정신을 깨워놓고 마을사람을 선동해 환호성을 지르게 한 것으로 영혼들은 자신에게 큰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거기서 자신들을 죽게 만든 이형종을 쓸어버리겠다는 약속은 그들이 품은 한을 내려놓게 했던 것.

말로만 했다면 어려웠겠지만, 자신이 잡아온 두 마리의 기생촉수 두꺼비의 사체와 강한 힘을 증명하는 여자친구들의 존재 덕분이다.

=그, 그러면… 성자님? 저는, 저희 마을 자경단은 무엇을 하면 되나요?=

눈앞의 영혼사가 예상보다 더 대단한 분이라는 걸 눈치챈 라비올라의 태도가 굉장히 공손해졌다.

“평소처럼 적의 습격을 대비해 경계하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마을 근방을 돌아다니며 숲에 흘러넘치는 기생촉수 두꺼비의 숫자를 줄이려 하니 크라빈 숲을 잘 아시는 분을 소개해주면 좋겠습니다.”

=네! 안내자를 바로 뽑아두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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