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320화 (320/813)

〈 320화 〉 314 촌락 ­ 올남 외 세 곳

* * *

올남 촌락을 나온 뒤 길을 따라 엿새. 환인은 총 세 곳의 촌락을 더 방문해 성불행을 진행했다.

방문한 그날 밤 성불행을 진행하고 다음날 출발하는 다소 빡빡한 일정.

두 곳의 촌장들은 극구 쉬었다 가시길 간청했지만.

“저와 일행이 길게 머무르면 촌장께서는 큰 잔치를 몇 번이고 벌이시겠지요. 그리하는 것은 여러분의 삶과 생활에 적지 않은 부담이 될 겁니다.”

물론 촌락의 주민들은 잔치를 특별한 자극 없는 무미건조한 일상의 한줄기 감로수로 느낄 것이다.

하지만 환인에게는 귀찮고 성가실 따름인 작은 이벤트다.

촌장의 간청을 완곡히 거절하며 두 번째 촌락을 빠져나온 환인은 마부석에서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영도의 일로 마음의 여유가 사라지는 건가.’

잠시 자기 자신을 관조한 환인은 자그마한 잔치 같은 것도 편히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자신의 마음에 여유가 없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좋지 않은 현상이다. 여유가 사라진다면 행동이 조급해지고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커지니까.

그 때문에 세 번째 촌락에서는 인묘족 여촌장의 적극적인 간청에 못 이긴 척 하루를 더 머물기로 결정을 내렸고 그 결정은 그의 여자들도 반겼다.

환인이 알아차린 것처럼 그의 여자들도 환인이 알게 모르게 서두른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도령을 해치려는 사람은 없으니까 다소는 마음 느긋하게 먹어도 되지 않을까? 있더라도 나랑 이슬이랑 율이 언니가 지켜줄 거고.=

「나랑 비상은 왜 빼?」

=앗.=

그렇게 하루를 더 머무르기로 하자 촌락 주민 백여 명이 자발적으로 모여 소와 돼지, 양을 도축하고 각자 집에 아껴놓은 술과 음식을 꺼내와 잔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백여명이 촌장의 지시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니 해가 질 무렵 공터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가득 차려지게 되었고 공터의 중앙에는 커다란 장작불이 활활 불타올랐다.

그리고 촌락 주민들 모두가 참여한 잔치가 시작되었다.

잔치는 꽤 흥을 돋우는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환인은 느꼈다.

그저 맛있는 음식과 술을 잔뜩 마련하고 공터 한가운데 커다란 장작불을 피운 뒤 웃으며 춤추고 먹고 마실 뿐인 잔치.

장작불을 빙 둘러 춤추는 주민들의 성비는 남자 1, 여자 4로 극심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지만 주민들의 얼굴에는 진심에서 드러나는 웃음이 맺혀있었고, 안느와 유르파도 만개한 웃음을 감추지 않고 연신 술을 들이켜며 즐거워한다.

이실리테도 드물게 미소를 띤 얼굴로 장작불 주변을 돌며 춤추는 사람들을 구경 중이니 분위기는 좋을 것이다.

문제라면 자신은 그런 흥겨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일까.

하지만 술은 마음에 든다.

=율이 언니, 우리도 추자!=

=뭐어? 앗!=

바지 모험가 복장 차림의 안느가 드레스 같은 로브 차림의 유르파와 붙어 춤추니 잔치 분위기가 한층 더 달아오르며 왁자지껄해진다.

환인은 가장 상석에서 촌장과 나란히 앉아 그 장면을 지켜보며 조용히 술과 음식만 들었다.

잔치의 주류는 맥주였다. 홉의 진한 향기와 탄산이 고스란히 살아있는데다 알코올 도수도 준수한 물건.

거기다 지하 냉동고에서 차갑게 얼려놓은 것이어서 만족을 더한다.

여기에 한쪽에서 실시간으로 구워지는 바비큐의 가장 좋은 부위와 싱싱한 작물로 정갈하게 만든 음식이 접시가 비워질 때마다 채워지니 환인은 앉은자리에서 맥주 10리터와 음식을 3인분가량 먹어치웠다.

비록 나와서 춤을 추진 않지만, 촌락의 자랑인 술과 음식을 남자답게 호쾌하게 먹고 마시는 환인을 향한 촌락 주민의 호감도가 대폭 오른 것은 당연한 수순.

환인은 자신의 뒤쪽 자리에서 다리를 쭉 뻗고 퍼질러 앉아 수백 리터 크기의 통에 가득 담긴 과일과 야채를 맛나게 먹고 있는 비상, 그리고 잔치가 벌어지는 공터의 하늘을 날아다니며 놀고 있는 환연까지 확인한 뒤 이실리테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실리테. 너도 나가서 놀아도 된다.”

=아니에요. 저는 주인님 곁에서 구경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니까요.=

어두운 밤, 커다란 장작불에서 흘러나오는 노란빛에 물든 이실리테가 예쁜 미소를 짓는다.

실상은 만약의 사태를 위한 자신의 호위겠지. 잔치가 시작된 순간부터 술은 입에 대지 않고 물과 과일 주스만 마시는 것을 보면 확실할 것이다.

자신이 술을 입에 대서겠지. 하지만 그렇게 신경쓸 필요는 없는데.

이 이상한 세계로 트립한 이후 식사량이 3배~5배가량 폭증한 뒤 주량도 그만큼 늘었다.

이전에도 소주를 4병은 마셔야 조금 취기가 올라오는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모르긴 몰라도 10병을 마시고도 멀쩡할 것이다.

지금 마신 맥주도 도수가 15도는 넘는듯한데 10리터 가까이 마시고도 멀쩡한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환인은 손을 내밀어 자신보다 한 단 낮은 곳에 앉아있는 이실리테를 왼쪽으로 끌어올렸다.

그 순간 오른쪽에 앉아있던 40대 초반의 원숙한 미녀 인묘족 여촌장이 아쉬움을 드러내는 것을 포착했지만, 환인은 관심도 주지 않았다.

해 질 무렵인 오후 6시 즈음에 시작된 잔치는 자정이 넘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환인은 피곤하다는 것을 핑계 삼아 어쩌면 촌락마다 귀빈용 주택에 대한 규격이 정해져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비슷비슷한 내부 환경의 주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입에서 달콤한 과일 주스 향기를 풍기는 이실리테와 같은 침대에 들어갔다.

원래는 안느와 몸을 섞을 차례지만.

=윽, 싫어. 나 지금 속에서 술 쓴내가 올라오고 있어…….=

“나도 술을 적지 않게 마셨다만.”

=도령의 숨결은 술 냄새가 섞여도 흥분되니까 괜찮아. 그렇지만 난 썩은 내 나서 안 돼.=

“오울링에서 술을 수십 병 마셨을 때는 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그때는 그때고!=

…라며 이유를 알 수 없는 거부를 행사했고, 유르파는 진짜 입에서 냄새가 나는지 두 손으로 하관을 가린 채 하얀 머리카락이 둥실둥실 떠오를 정도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 결과 이실리테를 먼저 안아 그녀의 뱃속 깊은 곳에 두 차례 파정한 환인은…….

“…….”

자신이 조금 취했다는 것을 인정하며 안느와 유르파가 있는 방으로 쳐들어갔다.

=앗?! 도령 아, 안돼! 안돼안돼 안돼 안…… 돼♡=

이후 허락의 뜻이 담긴 거절을 내비치는 안느와 예스걸 유르파(키스만은 결사적으로 막았다)와도 몸을 섞은 뒤에는 그녀를 좌우에 끌어안고 정말 꿈도 꾸지 않을 만큼 푹 잠들었다.

그리고 상쾌한 기분으로 잠에서 깬 환인은 의아함을 느꼈다.

몸이 전날과 비교하면 매우 가벼웠고 정신적인 피로감도 대폭 해소된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무엇이 이렇게 개운한 아침을 맞이하게 한 걸까.

일과로 보자면 어제 하루는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하루였다.

아침에 훈련과 대련, 아침 식사 후 정신 집중과 감각 확장 훈련, 영혼 구슬의 핸들링과 근처를 돌아다니며 하급 정령의 수집, 비상과 잠시 놀아준 뒤 점심을 먹는다.

오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자기 계발 훈련.

환연의 도움을 받아 중급 정령을 감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테스트를 진행하고 방벽 조작과 자기 자신에게 저주를 걸어 상태 이상에 익숙해지고 위상류로 저항하는 훈련도 한다.

상태 이상 내성 및 저항 훈련은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았다.

헬루멘의 친선 시합을 관전한 환인은 좀 더 자기 자신의 단련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자신의 체질인 위상류의 조율과 상태 이상 계통의 내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안느와 유르파의 참관 아래 시작한 훈련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하급 정령의 저주 효과를 확인, 자신에게 저주를 거는 것이다.

주로 감각을 혼란스럽게 하는 청각, 시각, 후각, 촉각, 미각의 오감 봉인에 어지럼증과 구토 유발 등의 저주도 건다.

이러한 감각을 알고 당하는 것과 모르는 채 당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 나니까.

아무튼 이런 일과를 제외한다면 즐겁지도, 그렇다고 기분 나쁘지도 않은 잔치 하나만 남는데 이게 정신적 피로감이 감소한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술?’

있다면 술 뿐이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이실리테 ­ 안느 ­ 유르파로 이어지는 섹스 릴레이를 펼쳤지만, 피곤하긴커녕 그녀들의 자궁에 정액을 뿌릴 때 평소보다 선명한 쾌감이 느껴졌었다.

거기다 쾌감에 겨워 작게 몸을 떨며 헐떡이는 이실리테, 아랫배에서 시작된 오르가슴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가며 희열어린 얼굴로 자신을 꼭 끌어안고 눈물을 글썽이는 안느, 개처럼 엎드린 자세로 박히며 헉헉 기쁨을 드러내던 유르파.

세 명 모두 몸짓과 행동 하나하나가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다고 생각했었다.

“진짜 술 때문인가…….”

=응? 뭐가 술 때문이야?=

밤의 정사 흔적을 씻고 나오던 여자친구들 중 안느가 발랄한 분위기로 묻기에 솔직하게 대답해주었다.

“성교할 때의 너희 몸짓과 행동 하나하나가 평소보다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었다. 그게 술의 기운 덕분인가 했지.”

=뭐, 무무무뭐뭣……!=

=……!=

=아…….=

얼굴이 빨개져서는 허둥거리다 도망치듯이 자기 방으로 달려가는 여자친구들. 환인은 그녀들의 수건 한 장만 두른 몸매를 구경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어젯밤만큼 술을 마신 적은 오울링에서 하루뿐이었지.’

평소에는 많아 봤자 도수가 거의 없다시피 한 와인 몇 잔이 전부였다.

다음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되면 술을 적당히 마셔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벌컥, 문을 열고 여자친구들이 옷을 갈아입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도, 도령?!=

“난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라.”

그리고 대놓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여자친구들의 환복 장면을 구경했다.

고작 하룻밤 사이 관계성이 부쩍 좋아진 촌락 주민들의 배웅을 받으며 세 번째 촌락을 떠난 환인은 그날 저녁, 유르파에게 여러 줄을 꼬아서 만든듯한 형상인 그리모암의 완륜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유물 감정이라는 희귀한 경험 덕분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어.=

“그랬습니까. 잘됐군요.”

=응응. 그때문에 시간이 좀 많이 걸려버렸네. 미안해.=

“괜찮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여성용 폭이 가느다란 뱅글, 여자가 끼면 느슨할 것 같은 팔찌지만 자신이 끼니 손목시계처럼 착 달라붙는 완륜을 다시 착용하며 물었다.

=완륜의 기본적인 기능 외에 다른 부차적인 요소는 검출되지 않았어. 감리스법, 올펜시우어법으로 교차 검사했는데도 완륜의 반응성 패턴과 다른 건 검출되지 않았으니까 95%는 정확해.=

“나머지 5%는 있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뜻이군요.”

=응. 자화자찬 같아서 조금 부끄럽지만…… 비술 부여 분야에서 내 실력은 헬루멘에서도 한 손에 꼽을 거라고 생각해.=

=에이, 율이 언니 수준이면 도시급이 아니라 대륙급이지.=

옆에서 듣고 있던 안느의 아부에 유르파가 배시시 웃는다.

=그렇게 칭찬해도 뽕은 그냥 안 만들어 줄 거야.=

=칫.=

아직도 뽕브라를 못 받은 건가. 입술을 삐죽 내미는 안느를 보고 피식 웃은 환인은 설명을 시작하는 유르파를 돌아보았다.

=성에도 영주님 직속 5급 부여술사가 있었지만, 그녀의 실력은 나보다 확실히 떨어졌었어. 그리고 그 도시에서 그녀가 가장 실력 좋은 부여술사라고 들었는데 그런 그녀가 완륜에 술법을 추가했다면 그녀가 제작한 마도기 위상력 패턴을 알고 있으니까 금방 발견했을 거라 생각하거든?=

“무슨 뜻인지 알겠군요. 그리고 유물이니까 함부로 술식을 부여할 수도 없겠지요.”

=맞아. 자칫 잘못하면 유물이 손상될 수도 있으니까.=

그정도라면 안전하다고 봐도 되겠지. 그게 아닌 5%에 포함되는 쪽이라면 알아낼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고.

“고맙습니다. 그리고 수고했습니다.”

=흠흠. 그러면 검사하면서 내가 알아낸 완륜의 용도를 알려줄게. 일단 혁대처럼 완륜은 정신력을 올려주는 대신 마력을 낮추는 게 확인됐어. 그것도 완륜처럼 발동식이 아니라 착용하면 계속 발동하게 되는 유지식이야.=

“마력입니까. 생소한 단위군요.”

니오네브레스의 에너지 단위는 대부분 위상력으로 통일된다.

사람이 쓰는 초능력의 에너지원도 위상력, 마도구와 마도기가 쓰는 에너지원도 위상력, 위상석에 충전되어있는 에너지도 위상력이다. 그런데 갑자기 마력이라니.

=니오네브레스 위상학 학계에서는 자존심 때문에 인정하지 않지만, 위상력 외에 다른 에너지가 존재하는 건 이미 여러 곳에서 관측되고 있어. 이블 팩션의 주술사들이 쓰는 주술력이라던가 세외 소수 야만 종족이 쓰는 초능력 같은 거.=

“제가 쓰는 영혼력도 거기에 포함되겠군요. 하지만 딱히 힘이 감소하는 느낌은 없습니다만.”

시험 삼아 환연의 주변을 둥실 거리는 최하급 정령들 열다섯을 끌어당겨 영혼 화살, 영혼 폭발, 영혼 방패를 7발, 4발, 4장 동시에 형성해본다.

마력 감소가 제대로 발동되었다면 감소되는 훈기의 양이 이전에 비해 확 늘었을 거다. 하지만 감소되는 훈기는 이전과 비슷한 양이다.

혹시 기술의 위력이 낮아지는 쪽일까 싶어 패널 한 장을 꺼내 영혼 방패를 툭툭 때려봤지만 내구도가 낮아졌다는 느낌도 없다.

=그러니? 내가 시험삼아 착용해봤을 때 위상력 최대치가 감소하는 건 확실하게 느꼈는데…… 어떻게 된 거지.=

“감소폭이 어느 정도였습니까.”

너무 적어 자신이 눈치채지 못했을 가능성을 떠올리는데 돌아온 대답에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최대치 30%가 감소했어.=

“……이상하군요. 5% 정도라면 저도 가늠을 실수했다고 여기겠지만 30%라니.”

=도령, 나도 껴봐도 돼?=

“그래. 착용해보고 감상을 말해다오.”

안느가 착용해본 뒤에는 이실리테도 완륜을 껴본다. 그 결과 한자릿수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체로 30%가량 위상력 최대치가 감소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위상력 제어 능력이 등급에 맞지 않을만큼 뛰어난 그녀들이다. 잘못 알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환인은 곰곰이 생각했다.

“……일단 감소 효과는 확실할 겁니다. 그리모암의 유물 자체 기능은 숨기고 말고 할 것 없이 유명하니까요. 그러니 마력 감소 효과는 에너지원의 종류에 따라 감소 효과에 차이가 있는 거겠지요.”

=응. 나도 같은 생각이야. 영혼사의 힘에 미치는 패널티는 거의 없나 보다.=

=그러면 좋은 효과만 남는 거네요?=

조용히 듣기만 하던 이실리테가 살짝 반색하며 묻자 안느가 곧장 끼어들어 지적한다.

=잠깐만. 그렇게 보면 그리모암의 모자는 마력을 올려주고 체력을 낮추는 유물이잖아. 그 마력 상승효과도 못 받는 거 아냐?=

=상승과 하락의 요소는 일견 상반되니 하나로 묶어 보지만 실상은 전혀 달라. 유시폴 마그람이 찾아낸 검증법에 따르면 상승에는 양적 기운이…….=

=윽, 율이 언니가 말로 정신 공격한다.=

이과의 원리 설명에 질색하는 문과처럼 안느가 표정을 찡그리자 한숨을 폭 내쉰 유르파가 간단히 요약해준다.

=……그러니까 결과만 말하면 감소랑 상승은 같아 보이지만 구조와 발생이 전혀 달라. 마력 감소 효과가 통하지 않는다 해서 마력 증가 효과도 통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어.=

=착용해봐야 안다는 거네?=

=말하자면 그런 거야. 아무튼, 단점은 그건데 장점은 이게 또 대단한 게~.=

신나하는 유르파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이실리테와 안느의 표정이 황당함에 물들어간다.

=상태 이상 공격에 큰 폭의 저항력을 주고 행동에 가산점이 붙어?=

=응. 정신력이 강해진다는 것은 불굴의 의지와 비슷해지는 거야. 단단해진 정신력은 외부의 자극에 흔들리지 않는 거지. 왜, 큰 상처를 입어서 고통이 심해지면 사람은 생각을 방해받게 되잖아? 그런 게 완화돼. 여기에 우리 자기한테는 위상류가 있잖니.=

입을 살짝 벌린 이실리테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상태이상과 정신 공격에는 거의 면역급 내성을 갖추겠네요.=

=정답. 내가 착용하고 스스로 봉안술이랑 봉청술을 펼쳐봤는데 저항률과 내성치가 30% 가까이 상승한 걸 확인했어. 자기가 쓰면 면역이나 다름없을 거야.=

환인은 확인을 위해 유르파에게 일순간 시력을 봉인하는 술법을 걸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나온 결과에 자신의 저주로 여러 가지 상태 이상을 경험해본 환인은 물론 술법을 건 유르파와 지켜보던 이실리테와 안느도 황당해했다.

다섯 번, 여섯 번 술법이 반복해서 걸릴수록 그 표정이 짙어진다.

=이게 안 통하네.=

=주인님 대단하세요…….=

=자기, 술법에 걸렸는데 풀린 거니 아니면 아예 안 걸린 거니?=

“처음에는 주문이 위상류를 뚫고 들어왔지만 저항한 느낌입니다. 시야가 순간적으로 아주 약간 어두워졌다가 돌아오더군요. 두 번째는 위상류가 뚫렸지만 걸리지 않은 느낌이고 세 번째부터는 위상류도 못 뚫었습니다.”

유르파가 두 손으로 자기 뺨을 감싸고 하얀 미간을 한껏 좁히며 중얼거린다.

=자기의 위상류가 정신력에 강화된 거 같은데, 맞니?=

“예. 위상류도 강해지는 게 확실합니다.”

환인은 대답해주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방금 정신 집중으로 느낀 위상류의 변화 감각에 집중했다.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니라면…….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된다.

허리춤에서 자신의 애병이 된 천칭을 꺼내 들었다.

곧게 뻗은 2m가량의 스틱을 꾹 쥐었다가 한 바퀴 웅­ 회전시킨 환인이 유르파에게 요청했다.

“유르파. 사출형 공격 술법을 저에게 쏴보시겠습니까.”

=으, 응? 왜??=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한 환인이 유르파에게서 10m 정도 거리를 두고 선 뒤 신호를 보냈다.

=쏠게. 수속성 탄환을 발사하는 수탄이야.=

환인의 능력을 믿는 유르파는 잠깐 당황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기초 공격 술법을 준비한다.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유르파의 모든 행동에 집중했다.

눈의 움직임. 손끝의 방향, 몸매를 절반가량 드러내는 재질의 로브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근육의 작용.

그때였다.

완륜을 착용한 오른쪽 손목이 잠깐 찌릿함을 느낀 환인은 시야가 한 꺼풀 벗겨진다는 감각과 함께 영혼 시야가 발동, 유르파의 몸이 적외선 투시기로 본 것처럼 연녹색 인영人? 형태로 변하더니 그녀의 몸 안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흐르는 것을 목격했다.

‘이건 또 뭐지.’

그 기운이 손끝에 맺히더니.

‘온다.’

퓻­!

손 끝에서 떨어져나온 푸른 기운이 자신을 향해 쇄도해왔다.

크기는 주먹만 한 구슬. 속도는 화살 정도. 궤적을 살짝 읽기 어렵지만 표적에 맞추기 위해서는 궤적이 제한되니 그점에 착안하면…….

핏­

흘리기는 쉽다.

환인이 위상류를 천칭에까지 늘려 뒤덮은 뒤 날아온 수탄의 궤적을 천칭으로 흘려보내는 모습에 그의 여자들이 놀란다.

=아?=

=어?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유르파, 계속 부탁합니다.”

=으, 응!=

그 뒤로 유르파는 물과 바람, 불의 세 종류 기초 공격 술법을 환인에게 쏘았고, 환인은 그 모든 것을 흘려내다 못해 회전의 묘리를 살려 유르파쪽으로 되돌려보내기까지 했다.

환인이 테스트를 끝내자 유르파가 후다닥 달려와 환인의 손을 잡고 물었다.

=자기! 방금 어떻게 한 거니?! 술법은 발사 직후에는 다른 어떤 간섭도 허락하지 않아서 일정 밀도 이상의 물체에 닿으면 무조건 폭발하거나 터지는데! 상쇄하거나 지우는 건 방법이 있지만 그걸 흘리거나 되돌려보내는 건 들어본 적도 없어!=

“위상류 덕분입니다.”

위상류의 특징은 위상력에 관한 개입과 간섭을 모두 흘려보낸다는 것에 있다.

술법에 강한 힘이 담겨있다면 위상류를 뚫고 들어오지만, 그게 아닐 경우 술법은 바위에 부딪힌 푸딩이나 달걀처럼 겉을 타고 흘러내린다.

환인은 그점을 착안해 위상류가 자신의 정신 집중에 따라 머리 쪽으로 모이는 것을 느끼곤 혹시나 하며 마도기­천칭을 꺼내보았고, 위상류가 천칭까지 뒤덮는 걸 확인한 뒤 술법을 흘려 내본 것.

이 설명에 멍해진 여자친구들을 내버려두고 환인은 영혼 시야의 변화에 집중했다.

‘영혼 시야가 갑자기 변화한 이유는 뭐지.’

그리모암의 완륜을 벗고 영혼 시야를 다시 열자 평소와 다름없이 원래 모습에 색을 덧입힌듯한 여러 색의 세상이 펼쳐진다.

눈에 힘을 주고 정신을 재차 집중하자 또다시 시야가 한꺼풀 벗겨지는 느낌과 함께 아까 본 그림자 형태와 색만 보이는 세상으로 변했다.

“…….”

이건 기존의 색계통 분별에 위상력의 흐름을 더해서 보여주는 건가, 하고 비상의 머리 위에 앉아 이쪽을 구경하는 환연을 본 순간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무지개색 기운이 몸 안에 가득 차있는 환연과 은은한 회백색 연기가 자신의 몸 안에 가득 차있는 것을 본 순간 완륜의 성능이 가리키는 그 ‘마력’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

완륜이 마력을 감소시킨다는 점이 머릿속에 떠나질 않는다. 이건 완륜 덕분에 얻은 능력인건가.

“유르파. 이번에는 즉발식으로 부탁합니다.”

=……으응?! 안돼, 그건 너무 위험해!=

“딱히 제가 대상이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저기 바위가 좋겠군요.”

=그, 그런 거라면…….=

유르파가 주문을 외워 즉발형 공격 술법을 펼치는 모습에 환인은 술법의 동작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었다.

‘대상의 공간 주변에 위상력을 재배열해 술법을 발동시키는 거군.’

확장된 영혼 시야로 그 광경을 유심히 지켜본 환인은 두 번째 발사에서 위상류로 뒤덮은 천칭을 휘둘러 모여드는 위상력을 후려치자 유르파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술법이 깨졌어!?=

나쁘지 않다.

술사들의 전투법은 파르히스트 토너먼트와 헬루멘 친선 시합에서 여러 번 목격했었다.

그리고 술사의 공격 위치와 방식은 가늠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술사와의 전투는 될 수 있는 한 피하려고 마음먹었었다.

위상류가 있다곤 해도 근접 직업자들에 비해 위험성이 너무 높았던 것이다.

하지만 확장된 영혼 시야와 위상류 조율 능력이 있다면 술사도 어느 범주까지는 상대하기 쉬울듯하다.

‘위상류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겠어.’

환인은 자신을 우러러보는 여자친구들에게 작은 미소를 보내주며 생각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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