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9화 〉 313 촌락 올남 외 세 곳
* * *
그날밤.
환인은 촌락에 들어서며 본 아홉에 더해 촌락의 구석에 있던 영혼 셋을 더 발견해 전원 성불을 도와주었다.
그 과정에 평온의 파동을 쏜 것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 밤이 되었을 즈음에는 영혼들이 이지를 되찾고 스스로 환인을 찾아와 자신의 신상을 이야기해주었기 때문.
성불은 공개된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원래 캐스테드 마을에서처럼 따로따로 집을 방문해 성불을 도와주려 했지만, 촌락은 그 규모에 있어 조용히 성불을 한다는 게 불가능했다.
집에서 창문 밖을 내다보면 촌락 전체가 보인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 어차피 모두 볼 수 있다면 각자의 집을 방문하며 성불행을 진행할 이유가 없다.
“우클라스 씨의 가족분들. 안로 씨의 자녀분들. 호루타 씨의 남편분. 은에일 씨의 부모 되시는 분들.”
촌락 주민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환인에게 놀라면서도 호명에 따라 순순히 그의 앞으로 나섰고.
=여…보?=
=아빠!=
=아들아……!=
흐릿하지만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가족의 영혼과 마주할 수 있었다.
「딸들아…….」
=아버지!=
=아빠…….=
「그날 아침, 너희에게 모진 말로 상처 입혔던 것이 줄곧 한으로 남았단다……. 이렇게 헤어질 줄 알았다면, 좀 더 사랑으로 너희를 아껴줄 것을…….」
=아빠아…….=
영기를 나누어주어 영혼들을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게 해준 뒤부터는 환인이 나설 일은 없었다.
영혼들과 그 영혼들의 가족이 이산가족 상봉처럼 알아서 해후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은 이들은 뒤늦게나마 가족과 작별인사를 나누며 눈물을 찍어낸다.
소중한 사람을 병으로 떠나보내느라 미처 마음의 정리를 못 한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소중한 사람과 마주해 마음속에 진 응어리를 풀어낸다.
그렇게 가족들의, 친구였던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하나둘 성불하는 영혼의 모습은 더없이 만족스러워 보였다.
이전에는 후련함과 미련을 해소해 승천하는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만족스러움까지 더해진 모습. 환인은 그게 평온의 파동 효과가 더욱 강해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정화와 성불을 돕는 평온의 파동이 영혼 그 자체가 가진 부정적인 기운을 해소하고 맑고 이성적인 상태로 가족들과 작별할 수 있게 도와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
그래서인지 성불에 걸리는 과정도 이전보다 절반 가까이 빨라졌다.
원래대로라면 정신을 차리게 한 뒤 가족들과 대화할 상황을 만들어주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그게 필요 없어진 거다.
「감사합니다, 영혼사님.」
「정말 감사드려요.......」
가족들과 인사를 나눈 영혼들이 환인에게 돌아와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차례대로 빛무리로 변해 하늘로 올라간다.
다시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는 눈발 사이로 먹구름이 벌어지며 달빛이 쏟아진다.
그 눈발이 흩날리는 달빛 속에서 빛무리가 환인을 중심으로 승천하는 모습은 사람들의 경외를 살 정도로 경건하고 성스러워 보였다.
다음날.
환인의 여자들은 여행 중 먹을 보존 주머니 보관용 음식을 만들랴 식재료를 모으랴 그걸 다듬고 손질하랴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는 와중에 촌락 주민들이 성의를 가지고 환인이 머물고 있는 주택을 찾았다.
=요, 요정님. 우, 우리 집에서 정성을 다해 가꾼 채소에요. 너무 보잘것없는 거라서 부끄럽지만…….=
「누가 보잘것없다고 했지? 정성 들여 가꾼 채소는 같은 무게의 보석과도 같아. 부끄러워하지 말고 얼른 가져와.」
=제가 가져온 건 마을 밖 숲에서 채취한 버섯을 말린 거예요. 마을로 가져가서 팔려고 소중히 손질한 건데 성자님께 선물로 드리고 싶어서 가져왔어요!=
「오. 대단한데? 칭찬해줄게. 물론 우리 성자님은 비싼 거라고 좋아하고 싼거라고 싫어하거나 그러지 않지만!」
=성자님.=
=요정님.=
=요정님!=
환연은 어느샌가 촌락 주민들을 능숙하게 휘어잡으며 그들이 가져온 선물을 따로 분류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갈무리해 환인에게 전해주겠다며 메신저 역할을 맡는 중이었다.
그시각 환인은 촌장집에서 촌장에게 촌락 주변 소식을 모으고 있었다.
올남 촌락 주변의 다른 촌락 유무, 근래에 있은 좋고 나쁜 소식들.
그러나 마차를 타고 헬루멘에서 사흘 거리의 마을이어서일까, 인근 촌락에 대한 정보는 헬루멘에서 자신이 수집한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고 소문과 소식도 대체로 자신에 관한 것들뿐이었다.
“프라버의 소식은 거의 닿지 않나 보군요.”
=예에. 올남은 헬루멘 영내라서 저 북쪽의 도시 소식은 여기까지 내려오지 않는 편입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동로아팅스 정글과 인접한 마을 하나가 나오는데 거기까지는 가야 프라버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해주는 촌장이다.
환인은 올남 촌락과 형제결연을 맺어 주기적으로 소식을 교환하고 물물 교환을 하는 다른 두 촌락의 위치를 재차 확인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며 정보 제공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다음 목적지는 그 촌락 두 곳이다.
=저, 성자님. 여기…….=
대화가 일단락되자 그가 방문했던 여느 마을이나 촌락처럼 올남의 촌장도 성의라며 두툼한 고급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는데, 그 안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열은화와 은화가 섞여 1.4금화에 달하는 돈이 들어있었다.
그냥 보아도 촌락의 운용비 전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볍게 생각해보아도 이걸 모두 챙기는 것은 심지에 불 붙지 않은 폭탄을 지고 가는 것과 다름없다.
행동만 바르게 한다면 불붙을 리 없는 폭탄이지만, 모종의 이유로 기화했다간 추가 피해가 크게 발생해 사태를 악화시킬 수도 있는 일.
환인은 말없이 주머니에서 열은화 4장만 꺼낸 뒤 나머지는 촌장에게 돌려주었다.
“이 기부금은 순례길에 마주하는 사정이 어려운 영혼을 돕기 위한 일에 쓰겠습니다.”
=아, 저 그것만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모두 가져가시는 것이.=
“죽은 자를 위해 산자가 고생하란 법은 없습니다. 마음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그럼에도 돈주머니를 쥐고 머뭇거리는 촌장과 일별한 환인은 주택으로 돌아가며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촌락까지 자신의 유명세가 흘러들어왔다면 프라버에는 이미 소문이 다 퍼졌을 것이다.
시하는 자신의 의지를 존중해서 자신과 개인적인 인연은 대외에 홍보하지 않았다.
자신이 시하와 몸을 섞었다는 것도 위르트 가문의 필두 가신 두어 명과 부관참모를 제외하면 아무도 모른다. 대신 홍보로 삼은 것이 위르트 가문과 당대의 검희 이실리테, 그리고 성자의 삼각구도.
그러한만큼 신분을 감추지 않고 프라버를 방문하면 그곳의 영주도 틀림없이 접근해올 테지.
헬루멘에서 벌어졌던 일은 이실리테의 과거라는 문제가 조명되었기에 일어난 것이다. 프라버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호족과 어울리기 시작하면 비슷한 일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유명세를 쌓아 안전을 확보하는 것은 호족과 어울리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호족과 어울릴수록 인맥이 넝쿨처럼 얽히고설켜 자신의 입지가 단단해지고 자신을 적대하는 자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반대급부도 존재한다. 자신도 그 넝쿨에 얽혀 자유로운 행동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
호족은 선민사상과 자긍심, 자존심 덩어리들이다. 어울리면 어울릴수록 ‘감히 나와 인연을 맺은 걸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놈들과 어울려?’ 이딴 식으로 나올 놈들이 분명히 등장한다.
시하와 시간을 함께 보내며 호족이라는 것들에 대해 알게 된 것을 바탕으로 내린 결론이다. 확실하다.
환인은 커다란 무게추가 머릿속에 들어찬 기분을 느꼈다.
‘피곤해.’
호족들은 어렸을 때부터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 현대의 사람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지식과 흐름을 읽는 눈을 갖춘다.
이는 등급이 높은 호족일수록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그러다보니 등급이 높은 호족과 다툴 일이 발생한다면 염두에 두어야 할 가짓수와 범주가 너무 많아지고 넓어진다.
방대한 범주는 적당한 폭력이나 힘의 우위를 보여주어야 좁아지는데 이쪽의 사회적 지위와 직업적인 특혜를 생각하면 그럴 수 없다.
결과적으로 상대적 약자의 스탠스에서 싸워야 하는데 이러면 생각하고 고려해야 할 가짓수가 죽을 정도로 많아진다.
사람과 두뇌 대결을 벌이는 것도 즐기지 않는 그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협박과 파괴 공작도 서슴치않고 저지르는 환인에게 있어 그러한 상황은 스트레스 덩어리.
여자 친구들의 스킨십이 주는 정신적 안정 효과는 이미 입증되었다.
이전에 자신이 경험했던 그 어떤 휴식 수단(혼술, 부시크래프트, 비박, 음악 감상)보다 피로 회복, 정신적 휴식에 큰 효과를 보인다.
그럼에도 문제가 발생하면 쌓이는 스트레스와 피로를 완전히 막지 못한다. 문제의 특성상 스트레스와 피로는 나눠서 오지 않고 한 번에 밀려오니까.
사회 최고위층, 국가의 최상위 지배계층과 충돌하면 그들이 가진 권력이 불러오는 눈사태는 자신의 역량으로 감당하기 어려워질 터.
피로가 쌓이고 스트레스가 누적된 상황에 헬루멘에서 시하와 처음 벌였던 마찰과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나면 자신은 짜증과 함께 본성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게 될 것이다.
고개를 저은 환인은 호족과 거리를 두고 활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이실리테 때문에 시하와 깊은 관계를 맺고 말았지만,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지.
다행이라고 할지, 명성과 유명세를 쌓을 수단은 하나 더 있다.
영혼사의 성불행이다.
성불행은 호족도 함부로 막지 못한다. 그리고 명성을 가장 쌓기 어려운 초기 구간은 녹색 성자이자 검희의 주인으로서 생략했으니 적당히 성불행만 진행해도 명성은 꾸준히 쌓이겠지.
‘도시를 방문할 때는 가급적 신분을 숨기고 촌락과 마을 위주로 활동한다.’
프라버에 도착하면 웨이포드에서 인연을 맺은 레심만 개인적인 친분을 명목으로 인사하고 바로 영도로 이동하자.
속으로 영도까지의 세부적인 행동 방침을 정하며 걷던 환인은 주택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촌락 주민들의 인파를 발견했다.
“…….”
저들 사이를 지나가려다 붙잡히는 장면을 떠올린 환인은 고개를 젓고 평온의 파동을 발사했다.
퍼져나가는 회백색 빛무리에 주민들이 화들짝 놀라 허리를 푹 숙인다.
환인은 그들 중 입김과 영향력이 강해 보이는 인묘족 퓨마 계통의 남자에게 부탁해 주민들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잠시 후, 조용해진 주택에 들어선 환인은 각종 음식과 식재료가 거실에 한가득 쌓인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게 시골의 인심인가.
환연이 그 주변을 날고 있다가 환인에게 자기 몸보다 더 큰 가죽 종이를 내밀었다.
「환인. 이거. 사람들한테 받은 목록이야.」
거기에는 누가 무엇을 주었는지 빼곡히 적혀있었다.
잠시 내역을 살펴본 환인은 두루마리처럼 말아서 돌려주며 물었다.
“글은 언제 배웠지.”
「헬루멘에 있을때 유르파가 가르쳐줬어.」
그래서 그런가 말투가 점차 부드러워져 가는 느낌이다.
별 의미 없는 기록이지만 뭐라도 하려는 행동이 기특했기에 환인은 환연의 머리를 검지로 톡톡 두드려주었다.
“잘했다.”
「헤헤.」
잠시 공물의 산을 살펴보던 환인은 인기척이 느껴지는 주방 쪽으로 약간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이실리테, 출발 준비는 어떻게 됐지.”
귀여운 앞치마를 한 이실리테가 주방에서 뛰어나온다.
=소지품은 전부 마차에 실었어요. 지금은 이동 중에 해먹을 식사 밑준비 중이에요. 유리 언니랑 안느는 옆에서 식자재를 다듬고 있어요.=
“점심 전에 출발할 수 있겠나”
=넷.=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주민들이 공물로 놓고 간 식재료를 채소과일기타로 분류해서 보존 주머니에 차곡차곡 담아 마차로 나르기 시작했다.
그것도 금방 끝났고 할 게 없어진 환인은 주택 정원으로 나와 잠시 서성였다.
주방 쪽 나무 창문을 통해 여자 친구들의 이야기소리가 들려온다.
훈련이라도 할까. 아니면…….
환인의 시선이 양지바른 주택 정원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 일광욕 중인 비상과 쿠에들에게 향했다.
“…….”
나름 스스로 손질도 하긴 하지만, 지난 며칠 눈발 속을 달려와서인지 깃털 곳곳에 때가 조금 묻어있는 게 보인다.
특히 비상은 밀짚색 쿠에들보다 두 배는 족히 긴 길다란 꽁지가 땅에 닿곤 해서 꽤 얼룩덜룩한 상태.
잠시 물을 담을 물통이 있나 찾아봤지만 적당한 게 보이지 않는다.
환인은 자신의 어깨에 앉아있는 환연에게 부탁했다.
“환연, 욕조 모양으로 이정도 되는 구덩이가 필요하다. 물이 고여도 흙탕물이 생기지 않을 만큼 단단했으면 좋겠군.”
「그건 뭐에 쓰려고?」
“아이들 깃털이 더러워서 좀 씻기려 한다.”
「그런 거면 그냥 물을 끼얹고 끝내면 되잖아.」
환연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본 환인은 그녀가 얼마나 못된 소릴 했는지 알기 쉽게 비유를 들어주었다.
“넌 목욕을 좋아하지.”
「응.」
“네가 목욕을 하려 한다. 그때 내가 "넌 작으니 접시 위에서 물 몇 번 뿌리면 되지 않겠나."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
뜨거운 물에 잠긴 여자친구들의 가슴 위에 드러누워 반신욕 하는 걸 가장 좋아하는 환연이 충격받은 표정을 짓는다.
“이 녀석들도 동료고 가족이다. 가축이 아니야.”
「응…….」
“부탁하지. 불과 물의 정령을 함께 불러서 미지근한 물도 담아주면 더 좋고.”
「응…… 알았어…….」
환연은 시무룩해진 얼굴로 흙의 정령을 부려 쿠에 네 마리가 들어가도 될 만큼 커다란 흙 욕조를 만든다.
그리고 내부를 단단하게 다지다 못해 땅속에서 돌과 바위까지 끌어와 흙이 물에 녹아내리지 않게끔 보강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을 수백 리터 받아놓았다.
환인은 적당한 물 온도에 고개를 끄덕이곤 뭘 하는 건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기웃거리는 비상을 손짓해서 부르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쿠에들도 불러들였다.
“비상, 쿠르티, 쿠핀, 쿠라. 목욕이다. 씻겨줄 테니 이리 와라.”
큐삣!
쿠에.
쿠우쿠우~.
씻겨준다는 말에 반색하며 다가오는 쿠에들의 모습에 환연의 얼굴이 죄책감에 물들었다.
환인은 그녀가 죄책감에 마음껏 고뇌하게끔 두고 쿠에 전용 깃털 먼지떨이로 비상의 몸에 묻은 먼지를 먼저 털어준 뒤 나무바가지를 들어 물을 끼얹어주며 쿠에 전용 솔로 깃털을 박박 문질러주었다.
솔질과 물칠이 이어질수록 선명한 녹색 깃털이 드러나니 씻겨주는 보람이 느껴진다.
쿠우~!
“좋으냐.”
쿠엣!
솔질에 기뻐하며 이곳도 긁어달라는 듯이 목과 날개 밑을 들이미는 비상을 깨끗하게 씻겨준 환인은 수건을 가져와 몸 곳곳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환인에게 온몸을 내맡겼던 비상은 온몸과 날개, 꽁지를 동시에 파닥거려 잔물기를 털어내고 쿠에~! 소리를 질렀다.
맑고 청아한 울음소리에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여실히 드러난다.
“환연. 바람의 정령에게 바람을 일으켜달라고 부탁해다오.”
「……응? 바람은 왜?」
“이 녀석들이 아무리 추위에 강하다지만 물기가 남은 채로 있으면 안 좋을 테니까.”
야외에서 강을 만나면 가끔 몸을 씻지만, 그건 깃털 겉만 씻어내는 식이다.
지금처럼 물을 뿌리고 솔로 문질러가며 씻기면 안쪽 솜털까지 젖기에 몸을 말릴 필요가 있다.
「아, 응.」
가장 먼저 목욕한 비상에게 다가간 환연이 불과 바람의 정령을 불러 훈풍을 만들어주자 비상이 온몸을 재차 털면서 꽁지를 살랑거린다.
쿠우, 쿠흥, 큐삐삣.
「비상아, 미안해.」
킁?
뭐가 미안하냐고 해맑게 묻는 비상에게 아무 말도 못하는 환연을 바라보던 환인은 얼른 자신도 목욕시켜달라며 머리를 들이미는 쿠르티, 쿠핀, 쿠라도 차례대로 정성들여 씻겨주었다.
그리고 목욕이 끝난 뒤 여물과 사료, 과일 및 고기로 이른 점심까지 먹였을 때 여자친구들의 음식 준비와 식재료 손질이 끝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럼 옷 갈아입고 출발하도록 하지.”
=네.=
환인과 이실리테가 먼저 방으로 사라진다. 안느도 자기 방으로 향하려다 창가 근처에 모여있는 쿠에들을 발견하곤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 되게 반짝반짝해졌다?=
쿠에~.
쿠엣쿠엥.
=도령이 씻겨줘서 기분 좋은 거구나. ……응?=
깨끗해진 몸을 자랑하듯 고개를 쭉 빼거나 날개를 파닥거리는 쿠에들의 모습에 다시 웃음을 짓던 안느는 희한하게도 탁자 위에 시무룩하게 앉아있는 환연을 발견했다.
=뭐야. 연이 너 왜 그렇게 풀죽어있어?=
「내가 종 차별주의자 같은 짓을 했다는 것에 자아비판 중이야.」
=……?=
종 차별주의자라니 무슨 말이지? 안느가 의아해하는 얼굴로 옆에서 앞치마를 벗는 유르파를 돌아보았지만, 그녀와 줄곧 함께 있던 유르파도 사정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구세의 빛으로 갈아입고 나온 안느는 먼저 나와 있던 환인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고 여전히 시무룩한 환연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래도 성실하게 자기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네.=
도령의 피에서 태어나 일부 성향을 이어받았기 때문일까, 자의식이 너무 강해 때때로 답답할 정도로 말귀가 안 먹히곤 하던 환연이었다.
그런데 자기 실수에서 고칠 점을 깨닫고 반성하다니.
그거야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는 일이지만, 그게 자신을 위한 반성이 아니라 타인…… 이 경우에는 타 동물을 위한 반성이라는 점 때문에 안느는 환연을 조금 다르게 보게 되었다.
심성이 악하다면 남을 위한 반성 따윈 하지 않을 테니까.
환인은 하룻밤 머문 주택을 마지막으로 둘러본 뒤 주택을 나섰다.
“…….”
일행이 출발한다는 소식이 퍼졌는지 촌락의 주민들이 배웅을 위해 모두 모여있었지만, 환인은 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촌장하고만 악수를 나눈 뒤 담백한 모습으로 올남 촌락을 빠져나왔다.
얼핏 봐서는 차갑다는 느낌이 드는 태도.
마차 지붕에서 촌락 사람들의 열렬한 배웅을 보던 안느가 마부석에 앉아있는 환인에게 물었다.
=도령 기분이 별로인 거 같네.=
“그 정도는 아니다. 단지…….”
=단지?=
“……앞으로 어떤 호족과 엮여 성가신 일이 벌어질까 생각했더니 피곤해졌을 뿐이다.”
안느는 환인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집을 떠나오게 된 이유도 그 잘나신 분들의 성가신 짓거리 때문이었으니까.
환인은 묵묵히 앞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특별한 일 없는 한 앞으로 촌락에서의 일정은 이런 식이 될 거다.”
도착한 날 밤 성불행을 진행. 도착 시각에 따라 다음날 바로 출발하거나 하루 쉬고 이튿날 출발.
=이틀 이상 안머무른다는 거야?=
“그래. 촌락과 마을은 많고 시간은 유한하니까.”
네 명 전부 잠자리는 가리지 않는 편이며 식사 또한 이실리테의 노력 덕분에 촌락의 주택에서 해먹는 것과 길가에서 마도구로 해먹는 것의 차이가 없다.
촌락이나 마을에서 머무르면 불침번을 안 서도 된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고작 하루 정도의 이야기다.
“그리고 도시에 입장할 때는 가급적 마차의 색과 비상의 색을 다르게 한 뒤에 들어갈 생각이다. 우리 마차의 형태가 알려질 경우 마차를 축소시켜 숨기는 쪽도 생각해봐야겠지.”
=호족이 귀찮게 굴 것을 경계하는 거니?=
안느의 옆에 앉아 불어오는 봄바람을 만끽하던 유르파가 이유를 눈치채고 물었기에 환인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보였다.
“호족과 어울리는 것이 명성을 쌓기 가장 좋겠지만, 그만큼 귀찮은 일도 벌어질 것 같아서 내린 결정입니다.”
환인의 대답에 유르파가 고개를 끄덕인 뒤 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큐삣!
쿠우~
쿠흥.
마차를 끄는 쿠에들과 비상이 쿠쿠거리며 대화를 나누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이어진다.
묘해진 분위기가 어색했는지 손가락을 꼼질 거리던 유르파는 그리모암의 완륜에 대해 마저 조사해보겠다며 마차 안으로 들어갔고, 안느는 경계 감시를 하겠다고 말한 뒤 누런 초목 사이로 파릇파릇한 새싹이 올라오는 대지를 돌아보기 시작한다.
마차는 완숙한 경지에 들어가는 이실리테의 운전과 쿠에들의 기운찬 달음박질 아래 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