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318화 (318/813)

〈 318화 〉 312 프라버로 가는 길

* * *

마을과 마을 사이를 이동하는 것은 사실 꽤나 지루한 일이다.

수려한 자연경관에 감탄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게 몇 날 며칠이 되면 자극에 익숙해져서 금세 무덤덤해지는 것이다.

지구의 경우 특정 국가와 장소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안전한 여행길이기에 탈것이라는 수단이 있다면 그나마 편한 마음으로 이동이 가능하다.

도중에 잠을 잔다든가 책을 읽는다든가.

하지만 니오네브레스의 여행길은 노상강도의 습격, 괴물이나 짐승의 공격에 준비되어있지 않다면 매우 위험하며 그렇기에 주위의 경계 유지 및 최소한도의 전투의 마음가짐이 필수로 요구된다.

그렇다고해도 매일 매분 매 초가 위험한 것은 아니다. 그 때문에 마차를 통한 이동은 지루함이 쉽게 찾아온다.

환인의 여자들이 지루함을 달래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유르파의 경우 공부를 하거나 마도기를 제작한다. 안느는 마차 지붕에 앉아 풍경을 감상하거나 책을 읽거나 환연, 이실리테와 이야기를 나눈다.

이실리테는 마차를 몰면서 환인의 봉사에 대한 생각을 이어나가고, 안느가 대화를 걸어오면 그 봉사의 방식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이렇듯 각자 지루함을 달래는 방식이 다르지만, 유일한 공통사가 있으니 바로 환인이다.

=힉, 엉덩이가 그렇게 좋다고……?=

그리고 오늘은 이실리테의 애널 섹스 경험담이라는 싱싱한 떡밥이 주어진 상태.

안느가 떡밥을 그냥 넘어간다는 것은 배고픈 참새가 무르익은 논밭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아니! 말이 왜 그렇게 돼? 좋았다는 게 아니라……!=

=잠깐잠깐, 이슬이 아가씨? 그 방벽 패널로 자기가 뭘 어떻게 했다구……?=

=그게, 패널을 그 모양으로…….=

이실리테가 빨개진 얼굴로 두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 그때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 안느와 유르파의 얼굴이 홍조로 물들었다.

=세상에!=

=꺅, 그래서 앞뒤로 동시에 쑤셔졌다는 거구나!=

=…안느 너 지나치게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그래서? 느낌이 어땠는지 좀 자세하게 이야기 해줘 봐. 응?=

안느의 재촉에 그때 그 상황을 떠올린 이실리테는 자동적으로 자궁이 찌릿찌릿하면서 그곳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평범하게 흥분하는 게 아니라 비정상적인 쾌감을 기억한 육체가 저절로 반응한 것.

=……솔직하게 말하면 중간부터는 기억이 안 나. 하지만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어.=

=하나?=

=응. 위험해. 진짜로 위험해. 그런 거 몇 번만 더 경험하면…… 섹스밖에 모르는 바보가 되어버릴 거야.=

진지하고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이실리테의 모습에 거짓말이나 농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 여자들이 눈을 끔뻑이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사실 처음에는 느낌만 이상했지 평범한 잠자리처럼 거기가 기쁘고 행복하다는 느낌은 못 받았어. 하지만 주인님이 그, 앞으로도 하기 시작하니까 뭐라고 해야 하지? 막, 눈앞의 적에게 집중했을 때처럼 적 말고 다른 건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안 느껴질 때가 있지? 그때처럼 그냥……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실리테. 앞으로 애널 섹스는 거의 하지 않기로 하지.”=네……?=“네 몸은 애널 섹스에 맞지 않는 몸이다. 항문으로만 하면 너는 전혀 흥분하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만 받는다. 그렇다고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앞쪽을 자극하면 네 몸 안에서 무언가 화학 작용이 과다하게 이루어져 이성을 상실하게 돼. 그 증거가 조금 전의 일이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에 있나.”=아…… 아뇨. 아무것도 기억 안 나요….=“쾌락에 취한 것처럼 행동한 것과 이녀석이 네 클리토리스를 마음껏 가지고 놀게 허락해준 것도 기억 안 나겠군.”「헤헤.」=??!=

=……해서 아주 가끔, 정말 간절히 바랄 때가 아니면 뒤로는 하지 않기로 주인님이랑 약속한 거야.=

이실리테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안느는 조금 멍해졌다.

쾌락에 취해버린다고? 그런 게 가능한 일인가? 내가 봤던 소설에서도 그런 건 없었는데……. 없었나? 없었을 거야, 응.

……없는 게 당연할 텐데.

=그, 율이 언니.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는 거야?=

=음……. 난 이해가 가.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성적 취향이 있거든. 시체에다 하면서 흥분하는 사람도 있고 눈알을 핥으면 자궁이 확 뜨거워져서 몸이 정말 느끼기 쉽게 변하는 사람이 있고 소변이나 대변을 먹는 걸로 흥분하는 사람도 있어.=

=히익.=

기겁하는 안느에게 유르파가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쿡, 찔렀다.

=아무튼 엄청난 페티시가 많은 만큼, 이슬이 아가씨의 경우도 조금 드물긴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앞뒤로 동시에 자극받으면 정신이 나가버릴 정도로 좋아죽는 체질 같은 거로 설명되니까.=

=…….=

=…….=

=나도 피학 성향이 강해서 자기한테 거칠게 다루어질수록 강하게 흥분하는 성벽이 있거든? 특히 목을 졸리면서 자궁이 찌그러질만큼 강하게 박히면 그게 진짜 말도 못할 만큼 좋아서…….=

몽롱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유르파에게 안느가 호기심이 생겨 묻는다.

=그게 어떤 느낌인데?=

=목을 졸려서 머리가 몽롱해지는데 밑에서 오르가슴이 막막 올라와 몽롱한 정신이랑 뒤엉키고 섞이는 거야. 그냥 말로는 잘 설명 못 해.=

=우와아.=

=아무튼! 자기가 이슬이 아가씨의 첫 남자라서 다행이야.=

=응? 어째서?=

=세상에 나쁜 놈은 얼마든지 많아. 그리고 이슬이 아가씨 같은 체질은 남자가 충분히 나쁘게 이용해먹을 수 있는 부류기도 해.=

=아, 그런 뜻이었구나.=

그녀의 걱정이 느껴지는 이야기에 이실리테는 조금 부끄러워하면서도 부드럽게 웃었다.

안느는 그런 이실리테와 유르파를 엄마 미소로 보다가 속으로 작게 침음을 흘렸다.

막연하게나마 환상처럼 여겨왔던 애널 섹스의 진실된 경험담에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그때 환연이 말했던 것처럼 그냥 팍하고 나면 생각이 바뀔까?

안느는 비상을 타고 하늘을 날고 있는 환인을 올려다보며 자그마한 고민에 잠겨 들었다.

헬루멘을 나와 시작한 여행길에 큰 문제는 없었다.

겨울이 끝나가고 봄이 찾아올 무렵에 몰아친 눈보라 탓일까, 겨울에도 활동하는 몇몇 마수나 짐승을 제외하면 사람도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한가로운 여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정길 도중에 일행의 모습이 조금 바뀌었다.

=자기, 완성됐어~.=

“이게 그겁니까.”

얼핏 보면 가문 문장 같은 손바닥만 한 판과 동물용 목걸이다.

=응. 색 변화 정도는 간단한 술법이라 내가 조금 손을 써서 원하는 색으로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을 첨가한 거야. 판을 이렇게 마차에 부착한 뒤 이 부분을 조작하면~ 쨘!=

유르파의 귀여운 목소리와 함께 눈이 쌓인 탓에 설원으로 변해버린 길 위, 눈에 확 띄는 검은색 마차가 주변과 비슷한 눈색으로 변한다.

=오. 진짜 신기하네. 환상도 아니면서 한순간에 색까지 바꾸고.=

=이걸로 머리 색도 바꿀 수 있으려나…?=

=응? 이슬이 너 머리카락색 바꾸고 싶어?=

=너처럼 반짝이는 은색이나 언니처럼 하얀색도 좋고 금색도 화려한게 특별하잖아. 내 머리카락은 흔한 갈색이라서 조금…….=

=에엥? 흔한 갈색이라고? 내가 보기엔 엄청 부드럽고 포근해 보이는 호박색이라서 오히려 난 네가 더 부러운데.=

=그, 그래?=

환인은 유르파에게 받은 체인 비슷한 목걸이를 쥐고 비상을 불렀다.

“비상, 이리 와라.”

쿠우~.

요즘들어 더욱 활기차게 변한 비상의 머리와 부리를 쓰다듬어준 환인은 녀석의 목에 채워진 주인 인식용 목줄을 잠시 바라보다가 거기에 어울리게 목걸이를 걸었다.

그리고 목걸이에 붙어있는 로켓 같은 것을 조작하자 녹색이던 비상의 깃털 색이 밀짚색과 검은색을 오간다.

쿠엣? 쿠으?!

환인은 자기 깃털 색이 바뀌어서 놀라는 비상의 머리를 쓰다듬어 진정시키며 설명했다

“내가 녹색 성자로 불리게 된 이유는 네 깃털 색이 가장 큰 이유를 차지한다고 본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널 보자마자 내가 근처에 있다는 걸 눈치챌 수도 있겠지. 그게 쓸데없는 분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쿠우~.

자기 깃털 색을 바꿔서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걸 눈치챈 비상이 고개를 위아래로 까닥인다.

“그래. 그래서 유르파가 네 깃털 색을 바꾸는 마도기를 만든 거다. 물론 네 깃털 색은 그대로다. 보이는 색만 다르게 만들 뿐이지. 때때로 네 깃털 색을 바꾸고 마을이나 도시에 들어갈 일이 있을 테니 협조 부탁한다.”

쿠엣!

비상의 협조를 얻은 환인은 녹색 깃털을 밀짚색으로 바꾸었다.

다른 밀짚 쿠에들과 모습이 좀 다르지만, 북부 밀짚 쿠에와 중부 밀짚 쿠에의 모습이 조금씩 차이 난다고 하니 날지만 않으면 사람들은 이상함을 못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이게 색 변화 기능을 탑재한 망토야. 자기 건 후드 달린 거.=

“고맙습니다. 유르파가 없었다면 마도기와 마도구의 확보에 이래저래 큰 고생을 했을 겁니다.”

말하면서 이실리테와 안느가 보는 앞에서 유르파를 정면에서 찐하게 끌어안아 주었다.

=하윽, 벼, 별말씀을……. 응읍!=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유르파의 하얀 입술을 덮어 정기를 흡수하는 느낌으로 뜨겁고 강렬한 딥키스를 해준다.

몸뚱이가 철인을 넘어선 초인만큼이나 강하고 튼튼한 이실리테, 안느와 다르게 연약한 유르파는 그 억센 포옹과 키스에 반쯤 녹아내려 환인의 몸에 매달리다시피 늘어지고 말았다.

=우와~ 율이 언니 계 탔네. 킥킥.=

=언니도 귀엽네요.=

=언니 흥분해서 얼굴 하얘진 거 봐. 지금 언니가 홀랑 벗고 눈 위에 드러누우면 도령도 못 찾겠다.=

=……푸훗.=

그렇게 적지만 수수한 변화를 추가하고 위르트 성에서 시하와 어울리느라 많이 신경 써주지 못한 그녀들에게 애정도 보여줘 가며 사흘간 이동한 일행은 성불행의 첫 시작지점인 촌락에 도달할 수 있었다.

올남, 눈이 절반쯤 녹은 초원에 우뚝 선 인구 100명 남짓한 촌락으로 시골 냄새가 물씬 풍기는 목가적인 곳이었다.

며칠 사이 큰 눈이 내려서 인지 촌락 곳곳에 녹지 않은 눈이 쌓여있고 길은 질척하게 젖은 상태. 여러모로 고단한 시골 생활이 드러나는 풍경이다.

=이래서 도시에 오래 머무르는 게 싫어.=

갑자기 그렇게 중얼거리는 안느를 이실리테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본다.

=도시에 오래 머무르다가 촌락을 방문하면 내가 도시의 편안함과 안락함에 물들었다는 게 강하게 느껴지거든.=

=어떤 느낌인지 알 거 같네.=

환인도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비교하자면 율캄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낙후된 것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현대의 도시와 크게 차이점이 없는 헬루멘이나 비자룩스, 파르히스트에서 머물렀던 기억 때문이겠지.

=어, 어서 오십시오!!=

통나무를 세워 만든 목책에 도착하자 마을 자경단으로 보이는 인서족 햄스터 계통 남자가 척, 어수룩한 경례를 올린다.

경례하는 모습으로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게 시골 촌민의 어수룩함이 그대로 보이는 모습이다.

“…….”

훔쳐보는 모습에서 자신들을 알고 있다는 눈치가 강하게 느껴진다.

설마하며 목책의 문을 지나친 환인은 촌장으로 보이는 인서족 래트rat 계통의 노인이 촌락 주민 수십 명과 모여 벌벌 떨다가 진창이 된 길가에 무릎 꿇고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숙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노, 녹색 성자님의 방, 방문을 화, 화환영합니다…….=

이쪽의 접근을 눈치채고 모인 건가. 환인은 비상의 등에서 내린 뒤 가까이 다가가 진흙이 묻은 그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이러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저 세상을 순례하는 순례자일 뿐입니다.”

=그, 그…….=

겁먹어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촌장이라고 확신한 노인을 일으켜 세운 환인은 주변의 다른 주민들을 둘러보았다.

=힉.=

=으으….=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쩔쩔매고 무서워하는 사람들. 촌장과 비슷한 상태다.

환인은 일단 평온의 파동을 발사했다.

정신을 안정시켜주고 포근함을 느끼게 해주는 회백색 빛의 파문이 넓게 퍼져나가 마을 전체를 휘감고 사라진다.

=어.=

=오오?=

그러자 덜덜 떨리던 촌장의 왜소한 몸이 차츰 진정을 되찾고 허름한 옷을 입고 한 데 모여 두려움을 드러내던 촌락 주민들도 어리둥절한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행동에 두려움이 적잖게 가신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보던 환인은 의문을 품었다.

이 사람들은 어째서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꼈던 걸까.

환인은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경외심이 차지한 듯 자신을 우러러보는 촌장에게 말했다.

“노인장께 몹쓸 짓을 한 불량배가 된 기분이라 조금 당황스럽습니다만, 저는 정말로 별 볼 일 없는 순례자일 뿐입니다. 두려워 마시고 평범한 동네 청년처럼 대해주셔도 됩니다.”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성자님께 못 볼 꼴을 보여 드려서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으, 겨울 길을 오시느라 춥고 시장하실 터이니 쉬실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귀하신 분이 오실 때를 대비해 지어놓고 깨끗하게 관리해온 곳이라지만 허름하여…… 그, 그러나 촌락에서 가장 좋은 집입니다. 성자님의 눈에 차지 않으시겠지만…….=

“그저 비바람만 피할 수 있다면 충분합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염치불구하고 신세 지겠습니다.”

환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하자 촌장이 허둥거리며 고개를 꾸벅꾸벅 숙인다. 환인이 손을 잡고 있지만 않았다면 허리까지 숙였을 모습이다.

=아, 아닙니다. 성자님께 쉴 곳을 마련해 드리는 것은 우리 촌락의 크나큰 영광이니 그런 말씀 마시지요. 그, 촌의 여인들에게 시켜 준비하라 하였으니 지금쯤이면 다 준비되었을 겁니다. 이, 이쪽입니다…….=

털이 허옇게 센 인서족 노인을 따라가니 주민들이 자신의 그림자를 밟을세라 정말로 조심해서 따라오기 시작한다.

잠깐 생각해본 환인은 이들이 자신에게 두려움을 품은 원인을 알 것 같았다.

일단 자신은 촌락에 들른 적이 몇 번 없었다. 가장 마지막에 들렀던 곳이 인마족 집종촌이자 비탈에 형성된 마에스티그, 웨이포드와 파르히스트 사이의 작은 촌락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겉모습은 조금 비싸긴 해도 흔히 볼 수 있는 마수 가죽옷차림의 여행자였다.

아우라도 없으니 영혼사라기보다 그냥 좀 장비 잘 차려입은 일반인으로 보였겠지. 동행하던 이실리테도 흔하고 평범한 사슬­가죽 갑옷의 3급 전사였고.

그러다보니 좀 조심스럽게 대해야 할 영혼사이긴 해도 부담은 크게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누가 봐도 고족이나 호족이 입을법한 방한 마수 코트에 안에는 고가의 법사복 차림이다.

매일 유르파가 특별히 손써서 만들어주는 목욕 용품으로 몸을 씻고 머리카락도 근래에 들어 이실리테가 신경 써서 빗겨주고 다듬어주고 손질해주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요즘 자신의 외모는 현대에 있을 때와 다름없이 단정하고 깔끔함을 유지하고 있다.

시하는 이렇게 말했었다.

이국적인 외모도 그렇고 반듯하게 서 있는 자세라던가 움직임에 절제가 느껴지는 점, 전문적으로 관리 받는 듯한 모습은 당신을 중, 고위 호족으로 보이게 할 거라고.

여기에 자신의 탈것인 비상은 값비싼 장구류를 착용해 고위 귀족이나 탈법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일행인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는 촌락이 수백 년간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입을 수 있는 장비로 몸을 둘둘 감고 있는데다 아우라도 범상치 않다.

마지막으로 쿠에 세 마리가 끌고 있는 대형 최고급 마차까지.

성자라는 이름값도 이름값이겠지만 매년 수십 은화를 겨우 벌어들이는 촌락의 규모로 보자면 압도당하기에 충분한 모습이다.

“촌락의 분위기가 참 좋군요. 도심의 혼잡하고 잡스러운 기운도 느껴지지 않고 평온함이 감싸는 좋은 촌락입니다.”

=어이고. 너무나도 감사한 말씀입니다…….=

이런식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촌장이 느낄 부담을 줄여주던 환인이 도착한 곳은 마에스티그 촌락이나 에트브룩 촌락의 귀빈용 주택과 비슷한 외관의 집이었다.

집안으로 들어가자 내부를 청소하고 정리하던 소박하면서도 순수함이 드러나는 미소녀들이 꺅, 작게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뒷문을 통해 달아난다.

집에 들어선 환인은 촌장과 마주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이 오는 것은 어떻게 아셨냐고.

=우리 촌락은 헬루멘의 이어크래드 상단과 거래하고 있습니다. 소속 상인분이 오실 때마다 소식과 근황 등을 알려주시는데, 요 2달간 들려오는 소식 중 절반이 성자님의 소식이었지요. 가장 최근 날아온 소식은…….=

촌장의 시선이 환인의 뒤에 선 이실리테에게 향했다.

=성자님의 영혼 기사님이 그 검희 이실리테 님이시라는 거였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리고 목책 위에서 경비를 서던 그녀석이 성자님의 열렬한 추종자입니다. 시력도 좋은 녀석이어서 성자님이 저희 촌락으로 오고 계신 것을 발견한 것이지요.=

이야기가 끝난 후 촌장은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며 편히 쉬시라는 말과 함께 되돌아갔고, 주택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조처를 해주었다.

촌장이 나가자 이실리테가 마차에 실린 짐가방을 품 안 가득 들고 들어오며 묻는다.

=주인님, 그러면 저희는 짐을 풀게요. 올남 촌락에는 얼마나 머무실 예정인가요?=

“오면서 봤는데 영혼이 아홉 정도 보이더군. 오늘 밤 그들의 성불을 시도한 뒤 결과에 따라 내일 출발하려 한다.”

이실리테만큼이나 가방을 잔뜩 들고 들어오던 안느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래? 일정을 서두르는 거야?=

“아니. 올남 촌락에 오래 머물 이유는 없으니까. 우리가 머무르는 것도 그들에게 적지 않게 부담되는듯하고.”

=하긴…… 들어올 때 보니까 촌장 씨가 도령을 악덕 고위 호족 대하는 모습이었어.=

“내가 살던 곳에서 그런 오해를 간혹 받긴 했지.”

=아, 왠지 알거같아.=

킥킥 웃는 안느에게 눈을 흘긴 이실리테가 어깨로 그녀를 살짝 밀치고는 거실 한편에 가방을 내려놓는다.

쿠우~ 큐삣. 삐비빗?

「뭔가 좀 허름한 집이네. 전에 머물던 호텔이랑 성이 좋은 거였나?」

쿠흥.

「아 정말? 그게 되게 좋은 수준이었구나.」

주택 안으로 들어와도 되는지 기웃거리는 비상의 울음소리, 그리고 그런 비상과 대화하는 환연의 목소리 사이로 이실리테의 약간 서늘하면서도 묵직한 이야기가 파고들었다.

=이어크래드 상단이 주인님의 나쁜 소문을 퍼트리는 건 아닐까?=

=……왜 그렇게 생각해?=

=촌장님이랑 주민분들이 주인님을 보자마자 무서워하니까, 평범하게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잖아.=

=음…… 어쩌면 이 촌락 사람들이 나쁜 짓을 저질렀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야 그 상단 사람들이 ‘나쁜 소문’을 ‘일부러’ 퍼트릴 이유가 없잖아. 들키기라도 하면 상단은 물론 소문을 퍼트린 당사자까지 파멸할 일인데.=

되도 안한 음모론을 만들어내는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다가간 환인이 그녀들의 머리를 조금 강하게 쓰다듬었다.

“촌락 사람들을 음해하는 일은 관둬라. 그저 순박해서 우리들의 비싼 차림에 겁먹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으니까.”

=앗, 네에.=

=어어.=

“그리 알고 짐은 하루이틀 머무를 정도로만 풀어놔라. 그사이 나는 촌락을 잠시 둘러보고 오지.”

=우리 안 따라가도 돼?=

“그래. 비상, 가자.”

「나도!」

환인은 주머니에서 천칭만 꺼내 지팡이처럼 짚으며 1.3m 정도 높이의 돌담으로 둘러싸인 단층 주택을 나선다.

집 안에서 방이 두 개라며 어딜 자신의 방으로 할 거냐는 안느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목책으로 인해 약간 폐쇄감이 느껴지는 촌락을 비상과 함께 천천히 걸어 돌아다니기 시작하는 환인.

소식이 느린지 자신이 누군지 몰라 밭일하다 신기해하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소녀에게 작게 미소 지어주자 얼굴을 빨갛게 붉히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호미로 밭을 팍팍 갈기 시작한다.

이제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갈색 강아지 귀와 복슬복슬한 강아지 꼬리의 소녀를 바라보던 환인은 시선을 들어 촌락 전체를 훑었다.

‘특색 없는 무난한 촌락이군.’

평온의 파동 효과를 받아서일까, 이지가 조금씩 돌아오고 있는 영혼들과 감응을 해봐도 사람을 향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 영혼은 없었다.

사고로 죽은 영혼, 병에 걸려 요절한 영혼, 야수와 맹수의 습격에 사망한 영혼 등 아픔과 괴로움을 지닌 이들이 대다수.

환인의 기준에 착하고 순수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촌락 공터에 모여 놀던 아이들이 이쪽을 보며 우와, 와아, 히야 탄성을 지르는 모습에 비상이 개구쟁이처럼 쿠흥,콧김을 푹­ 내뿜는다.

큐삐잇­!

그리고 날개를 활짝 펼쳐 우다다 달려들자 깜짝 놀란 아이들이 도망가다 자빠지고 뒹굴며 난리가 벌어졌다.

휘오오­

그런 아이들을 바람으로 일으켜세운 비상이 놀자는 듯이 엉겨붙자 아이들도 금세 무서움을 떨쳐내고 까르르 웃으며 비상과 쫓고 쫓기는 놀이를 시작한다.

‘평화롭군.’

환인은 근처의 낮은 돌담에 걸터앉아 그 해맑은 광경을 지켜보며 무표정을 지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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