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7화 〉 311 프라버로 가는 길
* * *
짹짹짹
이른 새벽, 작게 열린 창문 사이로 흘러들어온 새 소리에 환인은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창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
옆을 보니 곤히 잠든 이실리테와 그녀의 가슴골이 자기 침대인 것처럼 누워있는 환연이 눈에 들어온다.
하얀 이불 위에 어지럽게 흩어진 호박색 머리카락을 잠시 만지작거리던 환인은 기척 감지로 거실에 누군가가 있음을 한발 늦게 깨달았다.
이불을 여자친구의 어깨까지 끌어올려 주고 옷을 챙겨입은 뒤 방에서 나간다.
=일어났군요.=
불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거실, 소파 하나를 차지한 채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는 여성을 보곤 기척 감지와 감각 확장을 함께 펼쳤다.
안느와 유르파는 자기 방에서 이상 없이 수면을 취하고 있다.
환인은 거실에 들어와 있는 불청객이라고 해야 할지, 집주인의 앞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어째선가요?=
“술과 달을 벗 삼아 밤을 지새우는 것은 풍취를 즐긴다는 핑계가 통하겠지만, 불도 켜지 않고 주스를 마시며 밤을 꼬박 보내는 것은 정신 상태를 의심받을 테니까요.”
와인잔에 담긴 포도 주스를 홀짝이던 시하는 환인의 꾸밈없는 직설적인 발언에 조그맣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당신뿐이에요.=
“이상한 점을 지적해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니 다행입니다.”
탁자 위에 늘어진 포도주스 세 병을 보며 말하자 시하는 입맛을 다시며 남은 포도주스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기척이라도 내지 그러셨습니까.”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는데, 그냥 관뒀어요.=
진득한 미련과 아쉬움이 느껴지는 표정과 행동에 비해 목소리와 말투는 평온하기 그지없다.
환인은 아직 내용물이 남아있는 주스 병을 들어 빈 그녀의 잔에 따라주고 나머지는 자신이 병째로 들고 마셨다.
시큼하고 달콤한 액체가 위장으로 흘러들어오니 빈속의 허기를 자극한다.
=…….=
그냥 보면 버릇없고 없어 보이는 행동인데 저 모습마저도 잘생겨 보인다고 생각한 시하는 자신의 콩깍지 상태를 의식하곤 자조 어린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나도 참, 어쩌다가 저런 남자에게 빠져서는.
소파에서 일어난 시하는 환인에게 가까이 다가간 뒤 일어서라고 손짓했고,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겨 등을 끌어안았다.
따스한 체온. 단단한 몸. 자신의 여성성을 상기시키는 체취.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안심되는 남자의 품 안이다.
오늘 이후 두 번 다시 느끼지 못할 것들이라 생각하니 시하는 눈시울이 조금 뜨거워졌다.
환인도, 자신도 말로 꺼내지 않았지만 시하는 예견하고 있었다. 오늘이 지나면 이 남자와 다시 볼 수 없을 거라고.
그녀가 파악한 환인의 성격에 이계인인 그의 정체, 거기에 현재까지의 행적과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해보면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그 결과 여정의 목적을 달성하든 달성하지 못하든 그를 더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성공한다면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 버릴 테니까. 실패한다면 목숨을 잃을 테니까.
그래서 지난 일주일간 시하는 몇 번이나 속내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틀어막느라 애를 썼다.
떠나지 말라고. 내 곁에 있으라고. 불편함 없이 돌봐주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줄 테니 자신의 곁에 있으라고.
하지만 말하지 못했다. 그 말을 꺼냈다간 바로 떠나버릴 남자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시하는 그의 큰 손이 자신의 뒷머리를 쓰다듬는 걸 느끼다가 떨어져나와 몸을 돌렸다.
=배웅은 안 할 거에요. 조심해서 가요. 당신의 앞날에 짐승신님의 가호가 있길 빌게요.=
어째서인지 목이 아프다. 눈 밑도 뜨겁고 코도 찡하다.
“시하.”
=……?=
“아들이면 연우, 딸이면 여운이 좋겠습니다.”
자신이 낳을 아이의 이름을 말한다는 걸 깨달은 시하는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가 우는 듯한 얼굴로 웃었다.
=바보. 곁에 있어주지도 않을 남자의 말을 들어줄 것 같나요?=
“예.”
=……진짜 바보에요, 당신은.=
=하으암…….=
덜컹, 돌출된 블록을 밟아 작게 흔들리는 마차의 마부석, 이실리테와 나란히 앉은 안느는 양 볼을 찰싹찰싹 때려 잠기운을 쫓았다.
=졸리면 안에 들어가서 눈 좀 붙여도 되는데?=
=그 정도는 아니니까 괜찮아.=
대답하며 뒤를 돌아본 안느는 하늘 가득 내리는 눈 사이로 점차 사라져가는 위르트 성을 눈에 담으며 중얼거렸다.
=뭔가 기분이 묘하네.=
=어떤 점이?=
회색 후드 망토의 앞을 여미며 고삐를 당기는 이실리테의 질문에 안느는 새벽이라 인적 드문 대로를 살피며 말했다.
=영주님은 도령을 엄청 좋아하는 느낌이었잖아. 혹시 도령을 붙잡진 않을까, 혼자서라도 배웅하러 오지 않을까 했는데 설마 배웅은커녕 인사도 없고 가문의 아무도 안 나올 거라고는 예상 못 했어.=
=아…….=
확실히 그건 그랬다. 자주는 못 봤지만 가끔 주인님과 함께 있던 시하 영주님의 표정은 매우 부드럽고 여성스러웠었다.
처음 봤을 때는 남자가 여자의 탈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비상을 타고 마차의 곁에서 이동하고 있던 환인이 그 의문에 대답해준다.
“너희가 자고 있던 이른 새벽에 영주가 찾아왔었다.”
=어, 진짜?=
“그래. 그때 작별 인사를 나누었지. 그 이전에도 요란하거나 많은 사람의 배웅은 불편하니 막아달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었고.”
그때문에 친선 시합을 끝내고 이리저리 인사하러 다니긴 했지만, 이 조용한 상황은 시하가 손을 써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아니었다면 인파라고 해야 할 만큼 사람들이 모여들었겠지.
쿠엣, 쿠흥~.
오랜만에 자신을 태워서 기분 좋은 비상의 목을 어루만져주던 환인은 북문으로 향하는 대로에 인접한 고급 호텔을 발견하곤 일행에게 천천히 가고 있으라고 한 뒤 비상을 그쪽으로 몰았다.
입구에 비상을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가자 호텔 안내원이 단정한 웃음을 띠고 다가와 말한다.
=죄송합니다, 손님. 숙박 체크인은 3시간 뒤부터 개시하오니 혹여 쉬실 곳이 필요하시다면 호텔 부속 라운지에서…….=
“숙박이 아닌 다른 용무로 방문했습니다. 이 호텔 5층의 루드베키아 실에 루티아 아슬리드 양이 숙박 중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남기려 합니다만.”
=아, 그러셨군요. 남기시는 분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환인입니다.”
=예, 환인님. 만약 받으시는 분께서 수취를 거절하실 경우 편지가 전달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편지의 반송은 어떤 식으로 하시겠습니까?=
“그때는 편지를 파쇄해주시면 됩니다. 부탁하겠습니다.”
안내 데스크의 컨시어지에게 팁으로 열동화 1닢과 함께 작은 쪽지 편지를 건네준 환인은 호텔을 나와 비상의 등에 올라탔다.
뒤따라나온 컨시어지가 비상을 발견하곤 뒤늦게 헉, 놀라는 소리가 들린다.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듯하니 편지가 버려지는 일은 없겠지.
그렇게 작별 인사를 담은 편지를 루티아에게 전달한 환인은 앞서 가고 있는 일행의 뒤를 쫓았다.
북문에서 가벼운 검문을 거치고 빠져나온 일행은 짙게 내리는 눈발 사이를 헤치며 길을 따라 나아갔다.
비상은 하얀 눈이 가득 쌓인데다 지금도 펄펄 내리는 눈발 속에서 환인을 등에 태우고 돌아다니는 게 신 나는지, 길을 따라 달리는 마차를 두고 이리저리 싸돌아다니며 한참을 달리고 날고 달리고 날기를 5시간이나 반복했다.
아무리 마수 방한 코트를 입고 있고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아 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다지만.
큐삐잇~!
고오오오!
비상의 비행 자체가 강풍을 동반했기에 환인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 정도로 몸이 차가워지고서야 비상을 다독여 마차로 돌아왔다.
조명으로 환한데다 훈훈한 마차 내부는 두텁게 낀 눈구름 탓에 햇빛이 비치지 않아 회색으로 물든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으와! 도령 몸이 얼음장 같아! 얼른 코트 벗어! 얼른!=
구세의 빛 대신 가벼운 가죽옷 차림으로 뜨뜻한 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던 안느가 깜짝 놀라 코와 귀가 빨개진 환인의 후드 망토와 방한 코트를 벗긴 뒤 끌어안고 모포를 몸에 감는다.
키가 195cm에 달하는 그녀가 뒤에서 꼭 안아주니 몸 전체가 따스해지는 느낌에 환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느가 환인의 손을 잡으며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몸이랑 손이 완전히 얼음장이네. 이러다 또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지금까지 비상이랑 어울린 거야.=
“일주일 동안 놀아주지 않았더니 삐치려는 기색이더군. 안느, 위상류를 거뒀으니 지금 질병 치료와 회복을 부탁한다.”
=어.=
=자기, 여기 핫초코야.=
그사이 뜨거운 우유에 초콜릿을 녹인 것을 환인의 손에 쥐여주는 유르파다.
“고맙습니다.”
등에 닿는 안느의 몽실몽실한 가슴 감촉에 핫초코가 주는 온기를 느끼며 환인은 창문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큐잇~! 쿠쿠웃!
파닥파닥. 파다다닥
눈발 속에서 비상이 지치지도 않는지 활기차게 돌아다닌다. 치타보다 빠르게 우다다 달려갔다가 파다다닥 날아서 돌아오더니 독수리처럼 하늘 높이 올라가서 선회한다.
그 모습에 환인은 후, 작게 웃음을 흘렸다.
저렇게 활발하고 기운찬 녀석이 그 사육장에 일주일이나 있었으니 좀 몸이 쑤셨을까. 그럼에도 말썽 피우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니.
거의 발광하듯 싸돌아다니는 비상을 구경하던 환인은 갑자기 벼락처럼 땅으로 내려꽂히는 모습에 눈을 가늘게 떴다.
“……?”
=어, 쟤 뭐야. 짐승 사냥해온 거야?=
키의 차이로 뒤에서 환인을 끌어안고 같은 걸 구경하던 안느가 기막혀한다.
땅에 내려꽂혔다가 다시 날아오른 비상의 두 다리에 말코손바닥사슴 같이 생긴 동물이 목뼈가 꺾인 채 붙들려있었던 것.
자기 몸집보다 족히 1.5배는 더 큰 것을 잡고 날아오는 모습에 환인이 작게 감탄했다.
“저 정도면 족히 800kg은 넘을 텐데 그걸 붙들고 나는군.”
=그러게. 쟤가 도령의 바람 정령의 기운을 흡수한 지 두 달 넘었나?=
“파르히스트에서부터 매일 빠짐없이 해줬으니까. 파르히스트에서 오울링과 비자룩스를 다 합쳐 35일 정도, 비자룩스를 떠나 오늘까지 한 달 조금 넘었으니 대충 70일째다.”
=그 정도면 밀짚 쿠에는 성체가 되고도 남는 시간인데 아직 마지막 성장을 안 하네. 녹색 쿠에는 뭔가 다른가?=
잠시후 쿠웅! 마차 밖에서 수백 킬로그램이 높은 데서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마부석과 연결된 작은 창문에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똑똑
[주인님. 비상이가 마수를 잡아왔어요. (쿠에~! 쿠우웃!) ……구워달라고 보채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렇게 뛰어다니며 놀았으니 배가 고플 법도 하지. 조금 일찍 점심을 먹을까.”
[네. 바로 준비할게요.]
눈발도 많이 그쳤으니 밖에서 음식을 해도 괜찮을 것이다.
덜컹, 마차가 갓길에 멈춰 서고 이실리테가 2급으로 분류되는 말코사슴을 닮은 마수의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정리한다.
=유리 언니, 거기 비늘 가방에 음식 있으니까 꺼내서 펼쳐주세요. 탁자는 마차 뒤쪽 짐칸 보관함에 있어요.=
=응~.=
=이슬아. 고기는 어떻게 할 거야?=
=절반은 볶고 절반은 구울까 하는데…….=
“그럼 바비큐는 내가 준비하지.”
=앗, 네.=
그사이 환인은 안느와 함께 근처 길가에 쓰러져있는 나무를 부수고 잘라 세로로 길쭉한 모닥불을 만든다.
이어 나무 삼발이 두 개를 세워 이실리테가 잘라준 뒷다리와 갈비, 등심을 돌려가며 굽기 시작하자 이실리테도 옆에서 화력을 높인 모닥불에서 큐브 모양으로 썬 고기를 무쇠 웍에 호쾌하게 볶았다.
촤아악 촤아악, 화르르르르!
웍의 흔들림에 따라 파도 모양으로 웍 내부를 물결치던 고기 큐브에 이내 노란 불이 붙어 확 타오른다.
쿠에~
「오오~.」
조금씩 내리는 눈마저 증발시키는 화려한 불꽃. 그와 함께 강렬한 고기 기름 냄새가 확 퍼져 나가니 비상과 환연이 이실리테의 옆에서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탄성을 질렀다.
나무 핸들을 천천히 돌리며 뒷다리 두 개를 골고루 구워나가던 환인은 웍을 마치 부채처럼 가볍게 흔드는 이실리테의 가느다란 손목을 응시했다.
‘손목 관절부도 강해진 건가.’
무쇠 웍은 지름이 약 50cm에 두께만 1cm에 달할 정도다. 무게가 8kg에 가까울 테고 웍 안에 든 고기 무게까지 더하면 10kg이 넘을텐데 손목은커녕 손가락에도 부하가 가지 않는 모습.
그걸 보던 환인은 친선 시합 때 본 6급과 7급, 8급 직업자들을 떠올렸다.
6급 직업자의 전투력은 안느를 상대하며 어느 정도 파악되어있기에 기습당하더라도 이길 확률은 95%가 넘는다고 장담할 수 있다.
7급 직업자. 이실리테와 시합한 영웅 기사단 서열 4위는 확실히 대단했다.
신체 내구력은 무대의 돌판이 박살 나며 시속 100km 넘는 속도로 날아온 돌덩어리에 이마를 얻어맞았어도 생채기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순발력은 순간 가속으로 1초에 35m에 달하는 속도를 낼 정도였고 힘은 강철을 가볍게 압착할 정도.
위상력 제어로 한순간 폭발적인 속도와 힘을 낼 수도 있고 위상력을 검에 뭉쳐 날리는 식으로 응용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날린 위상력은 웨이포드 미궁 앞 호프집에서 수집했던 정보대로, 중전차의 포격이라는 느낌이었다.
‘지금이라면 7급 직업자와 싸워 이길 수 있다.’
이 7급도 작정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한다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웨이포드 당시에는 마도기는 커녕 제대로 된 마도구조차 없었다. 믿을 거라곤 신체 능력을 1.2배가량 올려주는 최하급 정령강령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힘을 순간적으로 5배 가까이 늘려주는 그리모암의 혁대도 있고 하급 정령 강령도 있다.
영혼 화살과 영혼 폭발은 슬슬 총알과 수류탄 느낌으로 변해가는 중이고 정령으로 저주를 걸면 상태 이상을 걸 수도 있다.
방벽 패널이라는 공격 보조 수단도 있고 이 모든 것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전투 한정 초단기 미래시의 존재까지.
이 모든 걸 동원하면 승급하지 못한 7급 전사와 1:1이라면 충분히 이길 자신이 생겼다.
하지만 8급은 이야기가 다르다.
8급은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수준이라 들었기에 단단히 무장한 전투기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결승전 때 이실리테가 붙은 8급 미승급 직업자를 본 감상은 그정도는 아니었다.
7급보다 좀 더 단단하고 좀 더 힘이 세고 좀 더 위상력 보유량이 많은 수준. 그리고 '좀 더'라는 부분이 메꿀 수 없는 격차를 벌려놓았다.
어떻게든 노 룰 배틀을 벌인다면 7급과 싸워 이길 자신이 생겼지만, 8급은 그마저도 불가능하다고 느낀 것이다.
아무리 잔재주와 기예를 끌어와도 메꿀 수 없는 신체 능력의 차이를 느꼈다고 할까.
동체시력과 반사신경은 이쪽이 뛰어날지언정 신체 능력은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도 따라가지 못한다. 약점을 보고 찔러도 이쪽의 속도와 힘이 부족한 탓에 상대가 ‘보고’ 피하는 게 가능할 테지.
이럴진데 승급자가 상대라면 승리할 가능성은 일말도 사라진다.
‘강함으로 따지면 승급한 7급 전사, 무성인 시하가 더 강하게 느껴졌지.’
몸을 섞은 뒤 필로 토크에서 시하는 승급할 경우 자신만의 필살기가 생기며, 자신의 경우에는 초가속이라고 이야기해주었었다.
순간적으로 10배의 속도를 낼 수 있는 기술.
초가속을 하게 되면 세상이 느려지고 그 속에서 자신만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고 했는데 그 설명에 환인은 초가속의 위험성을 간파했다.
사고 가속이 신체 가속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은 남들보다 몇 배나 더 빠르게 움직이고 더 빠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전투에서 치트나 핵hack과 다름없다.
그와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환인은 더 잘 알 수 있었다.
=승급과 비승급의 차이는 명확해요. 내가 기사단 서열 1위라는 이야기는 들었죠?=
“예. 8급인 가르통 씨가 2위라고 들었습니다.”
=내가 영주이고 가주여서 1위를 양보한 게 아니라 내가 가르통보다 더 강해서 1위인 거에요. 10번 싸우면 10번 모두 이길 정도죠.=
“그만큼 승급과 비승급의 차이가 심하다는 거군요.”
=맞아요. 희귀 직업의 분류가 원초 기술 하나의 유무로 갈라지니까요. 제가 하나 장담할까요?=
“어떤 장담 말입니까.”
=가르통은 이실리테도 이기기 어려울 거에요. 그가 승리할 확률은 40%에 불과할까요.=
“……희귀 직업은 승급으로 취급하고, 5급 승급자는 8급 미승급자와 겨룰 정도라는 거군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천상의 장막이라고 했죠? 그 방어구가 그녀의 직업과 너무 잘 어울려서 승률을 대폭 끌어올린 거죠. 결착이 난다면 빛의 검 때문일 거에요. 팔 하나가 잘리는 것으로 승부가 갈리겠죠.=
결과적으로 시하의 분석은 정확했다. 이실리테가 이겼고 가르통은 왼팔이 잘리며 패배를 선언했으니까.
아무튼.
환인은 친선 시합의 우승 상금 100금화나 친선 시합을 통해 얻은 그녀들의 자신감 상승 같은 결과보다, 7급과 8급의 전투력을 시합 관전으로 대강이나마 가늠하게 되었다는 걸 더 크게 쳤다.
‘지금 내가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승급하지 못한 7급 직업자까지.’
자신의 강함을 다른 사람과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는 건 행동 범위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사항이다.
자신의 강함이 어느정도인지, 어디까지 통하는지 덕분에 정확히 가늠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앞으로 조금 더 대담하게 움직일 수 있을 터.
=주인님?=
그녀의 손목을 너무 빤히 바라보고 있어서일까. 자신을 돌아보며 눈을 끔뻑이는 이실리테에게 환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더 기다리게 했다간 비상이 날뛸 거 같으니 그만 식사를 시작할까.”
=네.=
비상이 잡아온 사슴 마수와 이실리테가 미리 만들어둔 샌드위치, 과일과 채소 샐러드에 볶고 구운 고기로 점심을 해결한 환인은 이실리테가 내려준 커피를 마시며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이 그쳤네.」
쿳, 쿠에~.
「뭐? 싫어. 네 바람은 난폭해서 막 휘둘리잖아. 춥기도 하고」
유르파가 만들어준 털장갑에 털부츠, 털 목도리와 털옷으로 중무장한 환연이 비상을 향해 눈썹을 찡그린다.
쿠으? 킁! 쿠엣!
「……그럼 그럴까?」
비상과 숙덕거리던 환연이 비상의 머리 위로 올라가자 비상이 도도도 달려가다가 훌쩍 하늘로 날아오른다.
눈발은 그쳤지만 여전히 회색 구름에 뒤덮인 하늘을 비행하는 선명한 녹색 쿠에. 환인은 잠시 그 모습을 구경하다가 식사 뒷정리를 다 끝낸 여자친구들을 불러들였다.
간이 탁자를 꺼낸 뒤 그 위에 시하에게 받은 지도를 펼치자 여자친구들이 오, 와아, 작게 탄성을 흘린다.
=니오네브레스 전도네. 시하 영주님한테 받은 거야?=
“그래.”
=그런데 지도가 너무…… 작아요.=
B4 사이즈다보니 대략적인 윤곽만 겨우 알 수 있는 정도다. 이실리테가 눈을 조금 가늘게 뜨고 지도를 들여다보는 모습에 환인이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세계 지도는 이 종이 크기 이상은 법으로 소유하지 못하도록 정해져 있다더군. 원래 사이즈는 이 종이의 50배 크기라고 들었다.”
환인은 그 위에 다른 지도를 한 장 꺼냈다.
이번에 꺼낸 것은 갈롯에게 받은 지도와 비슷한 크기다. 안느가 그걸 보고 관심을 드러낸다.
=이건 라드세아랑 라드세아하고 인접한 이블팩션 전체 지도네. 이정도 크기면 고위 호족들만 얻을 수 있는 건데 이거도 받은 거야?=
“여행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며 선물로 주더군. 아무튼, 우리 다음 목적지는 알류겔 대 호수 서쪽의 대도시, 프라버다. 가는 길에 여기, 동 로아팅스 정글에 인접한 마을과 촌락 대부분을 거치면서 프라버로 향할 예정이다.”
저번에 한번 말했던 일정이기에 의문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친구들을 보며 환인이 말을 덧붙였다.
“혹시 일정에 더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신경 쓰지 말고 이야기해라. 큰 문제가 없는 한 일정에 추가할 테니까.”
=저는 없어요.=
=나도 없어.=
먼저 이야기한 이실리테와 안느가 유르파를 돌아보자 유르파가 눈을 깜빡인다.
=왜 그렇게 보는 거니?=
=아니, 언니는 아는 게 많으니까 혹시 방문하고 싶은 곳이 있나 해서.=
=아냐~. 난 따지면 집순이 성격이라서 딱히 구경하고 싶은 곳은 없어. 오히려 여러 곳을 여행 다닌 아가씨들이 다시 찾고 싶은 곳이 많지 않을까?=
유르파의 이야기에 이실리테가 머쓱하니 포니테일의 끝을 매만지며 웅얼거린다.
=저는 그, 먹고 살기 위해서 나쁜 짓만 하며 돌아다녔기 때문에 딱히…….=
=으응. 나도 좀 평범한 여행이랑은 거리가 멀었어. 그런 몸뚱이였던 탓에 주변에 별로 관심도 안 가졌었고.=
유르파를 제외하면 둘 다 떠돌아다닌 세월이 년 단위임에도 추억 하나 없다는 사실에 여자들이 멋쩍게 웃는다.
참 삭막한 삶이 아닐 수 없지만…….
‘남 말 할 처지가 아니군.’
속으로 중얼거린 환인은 오른쪽 팔목에 차고 있던 뱅글을 풀어서 지도 위에 올렸다. 그러자 예상대로 유르파가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기며 호기심을 보인다.
=어머, 이건 뭐니? 상당한 위상력이 느껴지는데.=
“시하 영주가 이거라도 받지 않는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쫓아오겠다더군요. 그리모암의 완륜이라고 했습니다.”
=와, 그럼 도령 벌써 유물을 두 개나 모은 거야? 이러다가 다섯 개 전부 금방 모으겠네.=
=역시 헬루멘의 주인이구나. 유물을 이렇게 간단하게 찾아서 선물까지 하구.=
여자들이 헐, 하고 놀라워한다. 영주가 뒤쫓아오겠다는 것보다 팔찌의 정체에 더 놀란 눈치다.
환인은 그게 조금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하며 여성용에 가까운 묵빛 팔찌를 유심히 살펴보는 유르파에게 부탁했다.
“아무튼 유르파, 이 뱅글을 조사해서 특이점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예를 들자면…….”
=위치 추적 술법이라던가?=
“예.”
이게 가짜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르파의 말대로 위치를 추적하는 술법이 걸려있을 수도 있는 일.
유르파가 맡겨달라며 묵빛 팔찌를 챙겼고, 환인도 지도를 접었다.
혹시라도 분실하면 이래저래 문제가 되니 자신이 잘 보관할 생각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