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314화 (314/813)

〈 314화 〉 308+ 개통 준비

* * *

=…….=

머엉…….

안느와 유르파는 소파에 앉아 넋이 나간 이실리테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슬이 쟤 정신이 나가버렸네.=

=그럴 만도 하지 않겠니? 자기한테 대놓고 엉덩이 구멍에 박아달라고 한 셈이니까…….=

유르파의 이야기에 이실리테가 고개를 푹 숙인다.

발단은 이렇다.

친선 시합이 종료된 후, 영주가 우승자인 이실리테, 팔을 치료해 붙인 준우승자에게 상금을 수여한 뒤에는 예정되어있던 가든 파티가 열렸다.

참석자는 관객 49명에 친선 시합에 출전한 16명, 여기에 환인과 시하까지 총 67명.

유르파는 극구 사양해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고, 자신의 영혼 기사가 우승했기에 환인도 녹색 성자의 상징이 된 회색 후드 망토를 쓰고 파티에 참여했지만.

“…….”

접근하지 말라는 기운을 사정없이 뿌려대면서 녹색 정원에 꾸려진 파티장 한켠에서 조용히 도수 낮은 와인만 기울였다.

참석자들은 어떻게든 녹색 성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한 마디라도 나눌 수 있다면 여러모로 인맥과 명성에 도움이 될 것이 뻔했으니까.

‘내가 말이야, 위르트 성에서 개최된 친선 시합 이후 가든 파티에서 성자하고 이야기도 나누어봤는데…….’

……이런 식으로.

그러나 소개 없이 환인에게 말을 걸 수 있을 정도의 신분(상급 영혼사인 성자이자 영주의 연인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기에 말단 호족이나 고족은 예법상 먼저 말을 걸 수 없음)은 대부분 각성하지 못한 일반인이었고.

=으… 으음.=

=왜, 왜 이렇게 몸이 떨리지?=

각성하지 못한 일반인들은 가까이 다가가려 하면 심장이 벌렁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려 도저히 환인의 반경 10m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반대로 직업자는 그러한 환인의 기운을 이길 수 있었지만, 신분이 대부분 낮았기에 예법상 가까이 갈 수 없었던 것.

만약 시하가 환인의 곁에 있었다면 파티의 주최자이자 주인인 영주에게 인사를 올린다는 예법에 따라 그녀에게 인사한 뒤 환인에게 말을 거는 루트도 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시하는 이런 사회 고위층 인사와 쓸데없는 인맥을 형성하기 꺼리는 환인의 마음을 이해했기에 눈의 여신처럼 하얀 오픈숄더 이브닝드레스를 예쁘게 차려입고 참석자들을 하나하나 챙기는 척, 일부러 환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절벽의 꽃처럼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환인을 멀찍이서 보며 입맛을 다시던 사람들은 대신 환인의 영혼 기사인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결과 두 명의 주위에는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실리테와 안느는 30분간 참석자들의 등쌀에 시달리다가 견디다 못해 환인의 곁으로 피신했다.

=으아. 진짜 치가 떨리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몰라.=

=그래도 안느 넌 구세의 빛이라서 괜찮잖아. 난…….=

영혼 기사라는 직업상 터치는 없었지만, 드러난 맨살에 와 닿는 시선이 마치 피부 위를 송충이가 기어가는 느낌이었기에 이실리테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상류층의 파티라 그런지 여자보다는 남자의 비율이 높았고 그런 남자들 반수 이상이 기분 나쁜 시선을 보내왔기 때문.

=정 그러면 갑옷의 색에 맞춰서 타이트 셔츠랑 레깅스를 입어보는 건 어때?=

=응……. 생각해보고.=

타인의 시선에 불쾌함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여자들은 자신을 보며 부러워하고 선망하는 눈빛을 보내기도 했으니까.

무엇보다…….

‘주인님도 좋아하시니까.’

갑옷을 입고 움직이다 보면 가끔 주인님의 시선도 날아오는 걸 느꼈는데 그럴 때마다 이실리테는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역시 숨기는 건 관두자. 대신 주인님이 안 계실 때는 망토를 둘러야지.

환인은 포도 주스나 다름없는 와인을 마시며 여자친구들의 대화를 듣다가 이실리테의 머리를 자상하게 쓰다듬어주었다.

“잘했다. 설마 우승까지 할 줄이야. 네가 우승할 가능성은 절반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앗, 감사합니다, 주인님.=

“결승전에서 네가 보여준 기량은 훌륭했다. 평소보다 20%가량 높았던 것을 보면 그 갑옷과 무기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고 봐도 되겠지.”

그것은 자신이 시하와 시간을 보내는 사이 열심히 훈련한 결과일 것이다.

환인의 칭찬에 이실리테의 얼굴이 기쁨으로 물들었을 때 티 포크로 과일 조각을 사냥하고 다니던 환연이 환인을 향해 핀잔을 주었다.

「네가 영주랑 노는 사이에 이실리테하고 안느가 얼마나 열심히 훈련한 줄 알아? 하루에 밥 먹고 씻고 자는 시간 외에는 전부 훈련에 매진했어. 하루에 18시간 이상 말이야.」

“그랬나. 지켜봐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 아니에요. 주인님께서 제게 해주신 것에 비하면 이 정도 노력은 하찮은 수준인걸요…….=

“그건 아니다. 노력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하는 법이지.”

=맞아. 이슬이는 도령 앞에서는 유독 소심하고 기가 약해지더라. 무려 영웅 기사단의 톱을 이겼잖아. 자랑해도 되는 일이라구.=

=그건 전부 주인님이 안 계셨다면 이루지 못했을 일이야. 이 갑옷도 주인님이 아니었으면 구경도 못했을 거고. 그러니까…….=

안느는 이실리테의 반론을 못 들은 척하며 환인에게 말했다.

=그래. 도령, 이참에 이슬이한테 상으로 소원권 하나 주는 거 어때? 이슬이는 도령 한정 쫄보라서 큰 소원은 빌지도 못하고 용기 내서 작은 것만 겨우 할 테니까 딱 맞을거 같은데.=

“좋은 생각이군. 안느 너도 대진표 뽑기 운이 좋지 않아 준결승에서 탈락했지만, 충분히 준우승할 실력은 되었다고 본다. 너도 부탁 하나는 들어줄 테니 생각 있으면 말해라.”

=어 진짜?! 그럼 나 도령의 하루를 받고 싶어!=

1초의 고민도 없이 튀어나오는 부탁에 환인은 안느의 기대감에 찬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 하루를 받아서 뭘 하려고.”

=뭐긴~. 아침에 일어나서 도령이랑 온종일 데이트하는 거지. 아, 이거 밤도 포함이다?=

뭐,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니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안느가 환인의 옆구리를 끌어안으며 좋아라한다.

=언제가 좋을까? 내일? 아니면 모레?=

“당장은 무리겠지. 친선 시합도 끝났으니 며칠 내로 헬루멘을 떠날 생각이니까.”

=그래? 난 도시 데이트도 좋지만 숲 속 나들이도 좋아. 도령이 시간나면 말해줘.=

그러다 무언가 생각에 빠진 것처럼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는 이실리테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슬이 넌 무슨 소원을 빌건데?=

=…엉덩이 구멍으로……. ……?=

말하다 벙찐 안느의 얼굴과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의 환연이 시야에 들어온 이실리테는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안색이 파리해졌다.

=아니! 아니에요! 주인님, 그런 게 아니라!=

=프하하핫! 대박, 진짜 대박! 도령도령, 이슬이 소원이 엉덩이 처녀도 도령한테 바치는 건가 봐!=

「헐……. 청순하게 생긴 것과 다르게 속은 완전히 변태 치녀였군. 대단한데.」

=아, 아니야! 아니라니까! 그게 그러니까……!=

=아니면 뭐야? 엉덩이 구멍으로 뭘 어쩌고 싶은 건데?=

얄밉게 풉풉 웃는 안느의 행동에 이실리테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창피함과 민망함 사이로 분노가 언뜻언뜻 드러나는 모습이다.

안느 이게 내 마음도 몰라주고……!

그때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이실리테의 고막을 찔렀다.

“그게 이실리테 네 소원이라면…… 들어줘야겠지.”

=주인님?!=

“영주님이 날 찾는 것 같군. 그럼 오늘 밤에 일을 치르기로 하지.”

=앗, 주인님! 주인니임……!=

이실리테는 망연한 얼굴로 시하와 기타 호족들이 모여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는 환인을 향해 어정쩡하게 손을 뻗었다가…… 툭 떨어트렸다.

망했어…….

=어…… 음.=

안느는 고개를 푹 숙인 이실리테를 보며 우물쭈물하다가 슬그머니 이실리테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 안았다.

=미, 미안해. 그런 줄은 몰랐어.=

처음에는 이실리테가 정말로 도령에게 항문 처녀까지 바치고 싶은 마음에 그리 말을 꺼낸 줄 알았다.

하지만 가든 파티가 끝나고 객실로 돌아온 안느와 유르파는 어째서 그때 이실리테가 엉덩이 구멍이라는 말을 꺼냈는지, 그 자초지종을 듣고는 웃을 수가 없었다.

안느는 파르히스트를 떠났을 때부터 수목화가 끝나면 뒤로도 도령과 해보고 싶다고 종종 이야기를 꺼냈었다.

거기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야한 소설도 가져와 선행 학습이랍시고 이실리테와 유르파하고 함께 읽었던 적도 있었고, 유르파에게 부탁해 애널 플러그도 만들어 스스로 끼고 환인에게 자랑했을 만큼 그곳으로 하는 일에 관심이 높았다.

물론 안느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녀들도 관심은 있었다.

주인님/자기와 하는 잠자리는 무척이나 기분 좋고 행복한 일이었으니까. 할 수 있는 체위와 방식은 다 해보고 싶다고 할까.

하지만 청결 문제로 자신들은 환인 앞에서 그러한 티를 내지 못했다.

안느야 이미 몇 달째 채식과 선식을 하며 수목화가 진행되어 몸 안이 꽃처럼 깨끗해진 상태다. 평상시에 애널 플러그를 꽂고 빼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자신들은 다르니까.

아무튼, 그때 안느는 수목화한 몸 상태를 설명하며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었다.

하루를 통으로 환인과 데이트하며 한껏 분위기를 다잡은 뒤 달빛이 비치는 창가 아래 화려한 침대에서 그에게 엉덩이 처녀를 바치겠다는 계획.

그 계획을 몇 번이나 들었던 이실리테는 안느가 환인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 순간 자연스럽게 연상작용으로 애널 섹스 계획을 떠올렸고, 그러한 사고 와중에 안느가 기습적으로 질문을 던져 반사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단어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던 것이었다.

이실리테가 머리를 감싸며 극심한 고뇌와 번민에 빠져들었다.

=아… 나 진짜 어떻게 하지. 그냥 주인님께 하루 가까이서 봉사하고 싶다고 소원을 바꾸면 안 될까? 바꿔달라고 하면 주인님 화내시려나?=

그 모습에 유르파의 어깨에 앉아있던 환연이 뭘 그렇게 고민하냐는 투로 말했다.

「그냥 콱 해버리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이실리테 보면 가끔 별거 아닌 걸로 죽을 듯이 고민하더라.」

=요정 씨는 화장실을 안 가는 몸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란다? 만약 뒤로 하다가 그……런 일이 벌어지면 대참사도 그런 대참사가 없어.=

유르파의 설명에 환연이 「그거?」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가 귓속말로 작게 설명을 듣곤 얼굴이 핼쑥해졌다.

이실리테의 고개는 더욱 숙여졌고 안느는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자신이 옆에서 부추기지만 않았어도 말이 헛나왔다며 다른 소원을 빌 수도 있었을 텐데…….

두 아가씨의 고뇌와 죄책감을 지켜보며 반쯤 재미있어하고 반쯤 걱정스러워하던 유르파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개인 아공간 주머니에서 몇 가지 소지품을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유르파. 이건 다 뭐야?」

탁자에 늘어지는 물건들을 살펴보던 환연이 묻자 유르파가 조금 얼굴을 굳히며 대답한다.

=혹시 몰라서 준비해놓은 거. 이슬이 아가씨? 안느 아가씨 이야기를 듣다가 혹시 몰라서 준비해놓은 건데…… 이걸 하면 최소한 끔찍한 일이 생길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그게 뭔데요?=

유르파가 꺼내놓은 건 약간 보라색을 띄는 가루, 노란색을 띠는 엄지 손가락 크기의 약병, 그리고 500mL의 동일한 규격 수통 10개였다.

=아가씨가 가장 걱정하는 게 위생이랑 청결 문제잖니. 혹시라도 뒤로 하다가 대참사가 벌어질까 봐.=

=그렇죠…….=

=이 가루 약을 물에 타서 먹으면 위장과 내장을 자극해서 안에 있는걸 전부 빠르게 내보낼 수 있어. 뱃속에 아무것도 안 들어있으면 문제가 생길 일도 없지 않겠니?=

포만감은 집중을 방해할 뿐이라며 어젯밤부터 물 약간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은 이실리테다.

시합이 끝나고 가든 파티에 참석했지만, 주변에 호족도 많고 주인님이 보는 앞에서 실수할까봐 먹을 것은 입에 대지도 않은 상태.

=마침 아가씨는 어제저녁 이후로 물 말고 아무것도 안 먹었으니까 사용 조건은 충족한 상태야. 그냥 마시기만 하면 돼.=

=마실게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오는 이실리테를 보고 당황한 유르파가 그녀 손을 온몸으로 막으면서 설명한다.

=앗, 아앗! 잠깐만, 그전에 하나 알아둬야 할게 있는데 그거부터 들으렴!=

=네? 네.=

=아까 말했다시피 이 가루약을 먹으면 금방 반응이 올 텐데, 많은 양의 물과 함께 마셔서 강제로 내보내는 거라 좀…… 아니, 꽤 많이 힘들고 괴로울 거거든? 위험하기도 하구.=

=괜찮아요. 어떻게 하면 되나요?=

주인님 앞에서 깔끔하고 청결하게, 예쁘게 있을 수 있다면 힘들고 괴로운 게 뭐가 대수일까.

이실리테는 유르파의 도움을 받아가며 보라색 가루를 타고 노란 액체를 한 방울씩 넣은 물을 0.5리터씩 마셨다.

물을 마시는 게 뭐가 위험한지 모르겠지만, 유르파가 괜한 소릴 할리 없다고 믿고 유르파가 타주는 액체를 꿀꺽꿀꺽 마시는 이실리테.

시간을 둬 가며 마셨다지만 2리터나 마신 시점에 이실리테는 물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걸 느끼곤 수통을 내리며 조금 괴로운듯

=목까지 차올랐니?=

=…네. 숙이면 물이 쏟아질 것…… 같아요….=

=그럼 이제부터 시작이야. 코와 입을 꾹 닫고 마신다기보단 속에 밀어 넣는다는 느낌으로 먹으렴.=

유르파는 이제부터라며 수통에 물을 담고 가루와 액체를 섞어 흔든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말과 눈앞에 만들어지는 십수 리터의 액체에 이실리테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지만, 유르파가 알려주는 대로 물을 계속해서 마셔나갔다.

=이슬이 아가씨랑 안느 아가씨도 알지 모르겠는데, 원래 이렇게 물을 한 번에 많이 마시면 굉장히 위험해.=

=어? 정말?=

=목이 마를 때 물을 한번에 2리터 넘게 마시면 잠깐 어지럽거나 두통이 생길 때 있잖니? 그게 위험 신호야. 그래서 몸이 수분을 과도하게 흡수하지 않도록 이 쿨프 가루랑 수귀의 정제 척수액을 타는 거구. 이것도 조합률이 매우 중요하니까, 나 없을 때 함부로 조제해서 마시면 안 돼?=

=응, 알았어. 그나저나 세상에는 진짜 신기한 약이 다 있네.=

=병의 치료제라는 게 다 그런 거니까.=

안느와 유르파의 이야기를 들으며 꾸역꾸역 물을 삼켜나가던 이실리테는 그 순간 위장 아래쪽이 뭔가 열리는 느낌과 함께 차갑고 시원한 액체가 명치 아래로 쑤우욱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액체도 그에 따라 쭈우욱 내려가며 좀 더 물을 마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실리테의 뱃속에서 꾸르르르­ 물이 좁은 곳을 타고 흐르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은 유르파가 수통 네 개를 이실리테의 품에 안겨주며 말했다.

=이제 잠시 후면 배가 아플 거야.=

=네? 네……. 윽?=

배를 감싼 이실리테의 안색이 안 좋아지자 유르파가 이실리테의 등을 밀었다.

=신호가 왔나 보네. 일단 배가 터질 것 같을 때까지 참을 수 있을 만큼 참아. 그러면서 계속 마시고.=

=네헷…….=

수통 네 개를 들고 힘겹게 화장실로 사라지는 이실리테.

그리고 정확히 1시간 뒤, 온몸의 노폐물을 모두 내보낸 것처럼 화사해진 이실리테는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밤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물을 25리터나 마시고 내보내서 몸 안에 물의 길이 생긴 거 같았고 속도 쓰리고 아렸지만, 이만큼이나 준비했으니까 주인님 앞에서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다.

아픈것도 유르파가 준 범용 중급 회복제 덕분에 빠르게 사라져가는 중이었고.

=휴우…….=

목욕재계까지 한 이실리테는 알몸으로 거울 앞에 서서 몸에 보기 흉한 흠집은 나지 않았는지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시합때 유효타격은 단 한 번도 허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폭발 때문에 바위가 흩날리며 몸을 스쳤을 수도 있으니까.

=응, 완벽해.=

피부에 작은 흠도 나지 않았음을 확인한 이실리테는 환인이 마음에 들어 한 과일향의 향유를 꼼꼼하게 바르기 시작한다.

가슴골, 밑가슴 접힌 부분, 겨드랑이와 목덜미, 귀 뒤쪽.

그리고…….

=…….=

탈의실의 문이 닫혀있지만 그래도 주위를 두리번거려 확인한 이실리테는 의자에 한쪽 다리를 올린 뒤 향유를 손끝에 모아 엉덩이 구멍에 슬쩍 밀어 넣고 휘저었다.

검지와 중지가 항문을 벌리며 밀려들어 가는 것이 거울에 비쳐 보여 이실리테의 얼굴이 사르르 붉어졌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자신의 보지가 입술을 우물거리는 것처럼 움직이는 것도 야하고 손가락을 집어삼킨 항문도 야하다.

거기다 속을 자극하는 느낌, 그리고 찌걱거리는 소리가 마치 작은 주인님을 받아들일 때 거기서 나는 소리 같아 조금 흥분된다.

=후우.=

몇 차례 향유를 엉덩이 구멍 속으로 밀어 넣은 이실리테는 다리를 내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손가락 냄새를 맡아보았다.

‘아무 냄새도 안 나.’

나는건 은은한 과일향기 뿐.

유리 언니에게 받은 처방이 완벽하다는 걸 새삼 깨달은 이실리테는 길고 가느다란 한숨을 내쉰 다음.

=…….=

루티아=아슬리드의 도움으로 구입한 얇고 가느다란 끈 속옷을 꺼내 입었다.

좀 보기 흉하지 않은가 싶을 만큼 투명한 피부 위로 까만 끈이 어지럽게 가로지르는 게, 마치 알몸으로 포박당한듯한 모습.

속옷의 천 면적은 유두와 유륜, 그리고 음부만 살짝 가릴 정도라 더욱 야해 보인다.

이실리테는 자신의 음란한 모습을 전신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보며 생각했다.

‘주인님이 마음에 들어 하시겠지?’

심장이 콩닥거리는 것을 느끼며 탈의실에 준비되어있던 은은한 달빛색의 가운을 몸에 걸친 이실리테는 요즘 부쩍 색이 옅어져 호박색으로 변해버린 머리카락을 보기 자연스럽게 다듬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어깨를 흠칫 떨었다.

거실의 창가에 환인이 가벼운 차림으로 서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

자신이 씻으러 들어갈 때만 해도 거실에 안느와 유르파가 있었는데, 언제 오신 거지? 오래 기다리셨을까?

=주인님.=

“왔나.”

=오, 오래 기다리셨어요?=

“즐거운 기다림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려 괜히 가운의 옷깃을 여미며 환인에게 다가간 이실리테는 순간 심장이 펑, 하고 터지는 줄 알았다.

환인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살포시 품에 안고 목덜미에 코를 묻었기 때문이었다.

=앗, 주인님…….=

“향기가 좋군. 몸을 씻은 건 준비를 위해서인가.”

=네, 넷. 유리 언니가 도와줘서, 주인님이 눈살 찌푸리지 않도록 준비할 수 있었어요.=

“그렇군.”

솔직히 말해서, 환인은 그녀들이 아니었다면 애널 섹스를 해달라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거절하거나 없던 일로 했었을 것이다.

커널링구스나 애널 섹스에 대한 욕구 같은 것은 없는 환인이었으니까. 아니, 불결하다며 오히려 불쾌하게 여겼겠지.

그럼에도 이실리테의 소원을 수락한 이유는 자신의 앞에서 깨끗하고 아름답게 있고 싶어하는 이실리테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몸을 청결하게 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깨끗하게 못 했다면 이실리테가 먼저 없던 일로 해달라며 부탁해왔을 테고.

때문에 시하에게 불려가 헬루멘에서의 마지막을 정리하면서도 환인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실리테는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대답했다.

문제는 없다.

=읏, 주인님…….=

“…….”

환인은 자신의 품에 쏙 들어와 꼬물거리는 이실리테의 온기를 온몸으로 느꼈다.

완벽하게 했다는 준비가 무엇일까. 그 준비에 어떤 과정이 있었던 걸까. 환인은 이실리테를 현재 거대한 페로몬 덩어리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방금 씻어 촉촉한 피부. 자신을 응시하는 맑고 투명한 눈망울.

얼핏 황금으로 보일 만큼 밝은 호박색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찰랑이고 혈색 좋은 입술은 살짝 벌어져 하얀 치아를 수줍게 드러낸 채 색색 작은 숨을 몰아쉰다.

오전까지만해도 전장의 여신처럼 용맹하게 8급 전사와 싸우던 사람과 동일인물이 맞는지 의심이 갈만큼 가녀리고 연약해 보이는 모습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희귀 직업자이고 냉정하면서도 쿨한 검희지만, 자신에게만큼은 연약하고 맹목적인 사랑을 베푸는 절정의 미녀를 보고 있자니 소유욕이 한없이 충족되는 느낌이다.

“어떤 준비를 했는지 보여줄 수 있나.”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자 이실리테의 얼굴이 창피함에 물들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천장의 샹들리에에서 내려오는 샹들리에의 빛을 반사하며 반짝이는 게 무척 아름답다.

“왜 싫지.”

그녀를 좀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가슴에 닿아 뭉개지는 거유의 느낌을 만끽하니 이실리테가 이것만큼은 안된다는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 주인님께는 좋은 것만 보여 드리고 싶은걸요.=

“그런가. 아쉽지만 기쁜 이야기군.”

=주인님…… 응.=

자신을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로 올려다보는 이실리테의 분홍색 입술을 짧게 훔친 환인은 그녀를 품에서 살짝 떼어놓다가 약간 흐트러진 옷깃 사이로 드러난 이실리테의 속옷 차림 일부를 목격했다.

흠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라 무척 좋아하는 이실리테의 몸을 좌우로 가로지르는 까만색 엘라스틱 바디 하네스.

아니, 하네스harness처럼 보이는 끈 속옷이다. 극도로 적은 천 면적으로 유두와 유륜만 망사로 가리는 타입.

과연 이 가운 안쪽에는 어떤 광경이 펼쳐져 있을까. 환인은 기대감에 새끼 사슴처럼 빠르게 숨을 몰아쉬는 이실리테를 공주님처럼 번쩍 안아 들었다.

=꺅…!=

“그럼 갈까.”

=네, 넷!=

환인은 거실 탁자 위, 과일 바구니 속에 숨어있는 환연을 힐끔 본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은 자그마한 요정이 겨우 안으로 들어올 만큼만 열어두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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