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2화 〉 306 영웅의 도시 헬루멘
* * *
=주인님.=
“…….”
소유자 각인 절차를 끝내고 천상의 장막을 착용한 채 돌아온 이실리테의 아름다움은 환인도 한순간 시선을 빼앗겼을 정도였다.
흘러내리는 아우라의 빛을 은색 갑주가 희미하게 반사한다.
어깨에서부터 상완까지 드러난 살결은 희고 부드러워 보였으며 흉갑 아래로 드러난 뚜렷한 복사근이 잘록한 허리선을 부각한다.
실처럼 가늘게 뽑은 특수 금속을 천처럼 짜서 골반에 두른 전면 개방형 체인벨트 스커트는 혹시 모를 후방의 하체 공격을 방어하는 기능과 치마라는 여성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자칫 성적으로 보일 수 있는 둔부를 맵시 있게 가리고 있다.
그리고 허벅지에서부터 발끝까지 감싸는 레그 플레이트는 허벅지라는 매력을 드러내는 동시에 신마?馬의 다리처럼 강인하면서도 날렵한 각선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성능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착용자의 여성미를 한껏 끌어올리는 갑주가 검희의 아우라와 더해져 이실리테를 순결한 전장의 여신처럼 바꾸어놓았던 것.
‘그러고 보니 조금 칙칙한 갈색 머리카락이 어느샌가 호박색으로 물들었군.’
기억을 되새겨보았지만, 변화가 언제부터였는지 딱히 집어서 말할 수가 없다.
=주, 주인님……?=
환인의 뚫어질 듯한 시선에 이실리테가 수줍은 몸짓을 보이자 환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군. 마치 널 위해 태어난 갑옷으로 느껴진다.”
=역시 성자가 보는 눈이 있으시군. 자, 받거라.=
어느새 사무실로 돌아온 푸렌 공방장은 들고 온 레드릭을 이실리테에게 넘겨주었다.
=아? 검의 형태가…….=
=그렇지않아도 뛰어난 강철로 제작해 내구도가 무식하게 높던 특대검인데 괴물의 힘을 흡수해 변모한 게 또 일체화에 경도 증가 특상 기능이더군.=
공방장이 조정하겠다며 가져갔던 레드릭은 형태가 꽤 변해있었다.
감옥 미궁의 중핵을 해치우며 그 힘을 흡수해 마도기화한 중철대검 레드릭은 그 형태가 연필심처럼 두껍고 끝만 살짝 뾰족한 형태였다.
어느 만화의 광전사가 쓰던 대검처럼 검이라기보단 쇠몽둥이였던 거다.
그것을 어떻게 가공했는지 외형이 검극으로 향할수록 폭이 좁아지며 예리함까지 머금게 되었다.
이전이 남성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상남자의 대검이었다면, 지금은 여성미를 더해 이실리테에게 더욱 어울리는 형태가 된 것이다.
푸렌 공방장이 설명한다.
=무기는 경도가 높을수록 좋다지만 레드릭은 그게 너무 지나쳤소. 너무 단단하면 오히려 충격에 쉽게 부러지는 것처럼, 충격이 고스란히 검신에 스며들어 수명이 빠르게 감소하는 거지.=
그래서 날을 세우고 폭을 조금 좁혀 힘을 흘리기 쉽도록 재조정했다고 말한다.
=그로 인해 경도가 약간 낮아졌지만 그건 미미한 수준이니 염려는 놓으시오. 경도는 여전히 검면으로 금강석을 깨부술 정도니까.=
조정 전이 넘치는 경도로 내구도가 190/100 오버에 소모율이 1.6배였다면, 조정 후에는 내구도 150/100에 소모율을 1.1배로 낮추는 대신 타격 속성 무기에 절단 속성과 함께 공격력을 추가했다는 이야기다.
=와……. 잡기도 더 쉬워졌어요.=
=무게 중심도 조율했으니까. 아무튼 이것도 가져가라.=
=네? 앗.=
오다 주웠다는 듯이 무심하게 툭 던져주는 것을 받은 이실리테는 그게 헤어벤드 타입의 로터스lotus 패턴 티아라임을 알아보곤 입을 살짝 벌렸다.
섬세한 세공도 그렇고 돈 받고 팔아도 비싸게 팔릴 거 같은데?
=별건 아니고 위상력 회복 속도를 소폭 늘려주고 신체 내구성을 약간 올려주는 머리띠다.=
게다가 마도기야?
=아니에요. 이런 비싼 걸 함부로 받을 수는.=
=예전에 어쩌다 만들어놓고 처박아둔 채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던 거니 부담 갖지 마라.=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신체 방어력 증가에 위상력 회복 속도 증가 티아라라면 외모에 신경 쓰는 여자 직업자들이 웃돈을 주고서라도 사려는 물건이다.
푸렌 공방장의 깍쟁이 같은 태도에 이실리테는 당황해서 환인을 돌아보았고, 환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공방장님. 천상의 장막하고 티아라, 아껴서 소중히 쓸게요.=
=크흠.=
푸렌 공방장의 연륜이 진 입가에 억누르지 못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모습에 환인이 목례했다.
“고맙습니다. 이실리테가 오늘 큰 선물을 받았군요.”
=무얼. 내 새끼들이 그에 걸맞은 주인을 만나 떠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보니 때때로 진한 회의감이 들곤 했소. 저 녀석마저 그랬다면 그만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나려 했는데 저렇게 훌륭한 주인을 만났으니……. 오히려 내가 고맙지. 허허허.=
장비를 조정하러 갔을 때 이실리테의 실력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듯한 모양새.
환인도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푸렌 공방장님이 보여주신 마음은 저 북쪽의 히스론드에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멀리 가시는구먼. 여행 순례길에 짐승신님의 안전과 가호가 있길 빌겠소이다.=
그로부터 사흘.
이실리테는 친선 시합 전까지 새로 장만한 방어구와 재가공된 레드릭에 적응하기 위해서 안느와 시도때도없이 훈련에 훈련을 더해나갔다.
주요 훈련 포인트는 다중 검기의 활용과 천상의 장막의 피격 면적 확인 및 역장 생성 기능의 적응.
후자는 금세 익숙해졌지만 전자는 쓰면 쓸수록 활용법이 무궁무진해 이실리테는 머리가 살짝 복잡해질 지경이었다.
타다닷!
콰각! 캉! 드득!
=이잇!?=
빛의 검을 발판삼아 허공을 디디며 반쯤 날아다니는 이실리테의 맹공에 안느가 비명을 지르면서 대인전용 방패, 광휘의 빛으로 레드릭을 막아낸다.
=그거 사기야!=
=아직! 부족해!=
=익!=
깡! 카각
타다당, 까강! 챙, 쾅!
방패 위를 두드려 중심을 흩트려 놓나 싶다가도 뒤를 돌아가려는 이실리테를 쫓다 보면 어느새 방패를 밀치고 있고, 그 힘에 대항하려다 힘의 방향이 반대로 바뀌며 자세를 흔든다.
레드릭의 공격 타이밍에 맞춰 천벌의 망치를 휘둘러 무기를 쳐내려 해도, 가뜩이나 대검 힘 전사였던 이실리테의 근력이 검희가 되며 뻥튀기되어 자신에게도 그다지 꿀리지 않는 힘을 지니게 되었다.
콰아앙!
대검과 자이언트 워해머가 충돌하며 피부가 찌릿 거리는 충격파가 터져 나온다.
그런 충격파가 연신 터져 나오자 주변 무대에서 이실리테와 안느의 대련을 흘끔거리던 영웅 기사단의 기사들 표정이 안 좋아졌다.
저 훈련 괴물들. 대체 몇 시간씩 훈련하는 거지?
짐승신님, 친선 시합 때 제발 저 괴물들하고 만나지 않게 해주세요.
이후 안느와 공방을 십수 번 주고받던 이실리테가 십여 미터를 훌쩍 뛰어 안느의 공격 범위에서 물러나며 말했다.
=후우, 후우우! 이제 좀 익숙해지는 거 같네.=
=어휴, 손 떨리는 것 좀 봐. 진짜 장난 아니네.=
안느는 방패를 매고 있던 팔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 혀를 내둘렀다.
이실리테의 공격을 모두 막은 것도 아니고 흘릴 수 있는 건 다 흘렸는데도 팔에 충격이 누적되어 수전증 환자처럼 덜덜 떨린다.
레드릭이 바뀐 뒤로 예리함이 더해져 더욱 위협적이 된 느낌이다. 저기에 검기가 더 늘어나면 이동 패턴은 물론 공격 방식도 늘 테니까…….
안느의 머릿속에 한가지 광경이 그려진다.
검희로 각성하며 우월해진 신체능력, 거기다 위상력의 흐름을 가속해 신체 능력을 더더욱 끌어올리면 벽을 거꾸로 달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허공에 다섯 자루의 검기를 띄워놓고 하늘을 땅처럼 달리며 빛의 검으로 사방을 공격하고 힘을 써서 레드릭으로 찍어누르며 압박해오는 이실리테.
안느는 몸서리를 쳤다.
=으,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머리로는 이실리테와 더 대련하기 싫은데 가슴은 우습게도 이실리테를 더욱 바라고 있었다.
그녀를 상대하며 자신의 방어 기술도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하는 것을 느낀 탓이다.
안느가 학을 떼며 자신을 괴물 취급하는 모습에 시녀가 가져다준 물을 마시던 이실리테가 입술을 삐죽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도 만만치 않게 끔찍하거든?=
=내가 뭐가 끔찍해?=
=너랑 비무하는 영웅 기사단 분들이 뭐라는지 알아? 움직이는 성채라고 해. 아무리 공격해도 방어가 무너지질 않는다고. 좋게 말해서 성채지 살아 움직이는 수백 킬로그램의 쇳덩어리랑 다를 게 뭐야?=
=…….=
=나도 다른 기사분들 상대하는 것보다 널 상대하는 게 몇 배는 더 힘들어. 어느 방향을 어떻게 공격해도 다 막아버리잖아. 공중 기동을 쓰기 시작한 것도 너 때문인데.=
=그, 그랬어?=
자신의 성장을 이실리테가 알아봐 주자 안느는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하긴. 지금 이슬이 수준은 어지간한 기사단의 단장도 그녀를 못 이길 정도긴 해. 그리고 이슬이랑 대등하게 붙고 있는 나도 단장급이겠지.
머쓱해진 안느는 흠흠, 헛기침을 주제를 돌렸다.
=근데 이슬이 너, 검기를 용케 그렇게 활용할 생각을 다 했다?=
=주인님의 기술을 흉내 냈을 뿐이야.=
=아. 확실히.=
방벽 패널을 밟고 순간적으로 회피를 펼치던 환인을 뒤늦게 떠올린 안느는 턱을 쓰다듬다가 무대를 내려가는 이실리테의 뒤를 쫓았다.
그러면서 슬쩍 주위를 둘러보곤 속으로 피식 웃었다.
방금 자신과 이실리테의 대련에 얼이 나간 분위기. 속으로 친선 시합 때 우리와 어떻게 싸울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긴.’
자신도 도령에게 배운 막기, 흘리기, 쳐내기 덕분에 방패의 내구도 감소를 억제하며 이실리테를 상대하는 거지, 아니었다면 삽시간에 무기나 방패의 내구도가 깎여나가 파괴되었을 거다.
방법이 안 보이겠지.
붙어서 싸우자니 저 공격력과 변화무쌍한 검기가 대단히 위협적이다. 그렇다고 이쪽 공격이 통하느냐면 또 그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공격은 막거나 피해버릴 테니까.
그렇다해서 떨어져서 공격하자니 공격 수단도 별로 없는데 이슬이는 반대로 빛의 검을 슝슝 날릴테니까.
‘기술이 하나만 늘었을 뿐인데 희귀 직업과 일반 직업 사이에 어마어마한 격차가 생긴 느낌이야.’
이러니까 검희를 영웅직의 대표로 꼽는 거겠지.
광휘의 빛과 천벌의 망치를 내려놓은 안느는 시녀가 준비해놓은 물 1리터를 단숨에 비워버린 뒤 천상의 장막을 벗어 부서지거나 흠집이 생긴 곳이 없는지 살피는 이실리테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야. 가르통 씨한테 비무 신청할 거야?=
가르통, 영웅 기사단 서열 2위이자 얼마 전에 8급의 초입에 들어섰다는 기사단 내 최고 실력자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그는 승급을 하지 못했다. 승급했다면 비기, 혹은 필살기라고 할법한 기술을 만들어냈을 테지만, 아직은 그러한 기술을 보유하지 못했다고 들었다.
때문에 서열 3위를 며칠 전에 이긴 이실리테는 다중 검기를 펼치면 이기진 못해도 무승부로 끌고 갈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사단 내 서열 1위인 시하 영주님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기사단의 최고 실력자.
비무를 신청하자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무리의 리더를 몇 번 해본 적이 있어서 이실리테는 리더의 무게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의 체면을 생각해 비무는 신청하지 않는 중이었다. 앞으로도 하지 않을 생각이고.
가끔 눈이 마주칠 때마다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미미하게 고마움을 드러내는 가르통의 행동을 보면 자신의 선택이 맞는 거겠지.
=친선 시합때도 가르통 씨가 내 상대로 배정될 일은 없을걸? 리더의 체면과 무게감은 지켜져야 하는 법이니까.=
=글쎄다. 내가 보기엔 시합은 토너먼트 방식으로 결정될 텐데 그때가 되면 어떻게든 붙게 될걸?=
=그때는 전력을 다해야지.=
주인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망설임 없는 대답에 안느는 그녀다운 대답이라며 속으로 웃었다.
그러다가 훈련장을 슥 둘러보곤 찾는 사람이 또 안 보인다는 걸 깨닫고 이실리테에게 물었다.
=그런데 도령은 어디 갔어? 요즘 한 시간, 두 시간씩 갑자기 사라지고 그러네.=
「환인은 영주랑 같이 있다.」
비상과 놀다가 방금 찾아와서는 훈련장에 상주하는 시중 시녀에게 푸딩을 받아 야금야금 먹고 있던 환연이 대답했다.
=영주님이랑? 뭐 협의 조절 같은 거 하고 있나.=
「그건 사흘 전에 끝났다. 지금은 영주랑 섹스하고 있어. 영주가 임신하고 싶어서 시간 날 때마다 환인이랑 구멍을 맞추는 중이야.」
=…….=
=…….=
두 여자는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자신들의 전담 시녀는 안느가 디저트를 요구해서 그걸 가지러 다시 사라진 상황.
다른 기사들은 어지간해서 30m 안으로 다가오지 않아 들은 사람은 없다.
안느가 샐쭉한 표정으로 환연에게 주의를 주었다.
=너 그거 함부로 말하지 마. 다른 사람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딴 사람이 없어서 말한 거거든. 나도 이제 남이 들어서 괜찮은 것과 괜찮지 않은 걸 구분할 줄 안다고.」
그러면서 비죽 웃는 게 꼭 바보라고 놀리는 듯한 표정이어서 안느는 말없이 마시고 남은 물을 환연의 옷 속에 흘려 넣었다.
「흐꺅!」
등줄기로 흐르는 얼음물의 차가움에 깜짝 놀란 환연이 허우적거리다 자기 덩치만한 푸딩에 머리를 박는다.
산산이 부서지는 투명한 푸딩과 그런 푸딩을 뒤집어쓰고 멍청하게 주저앉은 환연.
=푸흡. 아하하!=
「…….」
펑.
그 모습에 깔깔 웃던 안느도 환연이 불러낸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폭탄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무의식적에 왼팔을 들어 막으려 했었지만 방패는 저쪽에 내려놓은 상태.
=…….=
「…….」
푸딩조각을 뒤집어쓴 환연과 물에 홀딱 젖은 안느가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릉 거리는 모습에 살짝 한숨을 쉰 이실리테는 창밖으로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주인님은 괜찮으시겠지?’
여자한테 정에 이끌리는 분은 아니시니까 괜찮으실 거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