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1화 〉 305 영웅의 도시 헬루멘
* * *
결과적으로 말해서 폭군룡의 미궁을 다시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400 금화만 받겠소.=
“…….”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반 이상 싼 가격에 환인은 루티아=아슬리드를 돌아보았다. 혹시 그녀의 입김이 닿아 가격을 대폭 깎은 거라면 거절하기 위해서였다.
천상의 장막은 이실리테는 물론 환인의 마음에도 들었다.
그간 이실리테의 스펙을 수치화하기 위해 알아본 결과, 검희가 된 그녀의 보유 위상력은 동급의 다른 직업자(술사 제외)와 비교해도 대단히 높은 수준이다.
그리고 위상력 감응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위상력이 필요하다.
위상력으로 역장을 생성해 피해를 감소시킬 수 있는 것이 위상력 감응의 주요 효과인 만큼 많은 위상력이 필수. 그리고 검희의 원초 기술인 다중 검기는 위상력을 소비하지 않는다.
거기다 신체 최적화는 컨디션에 따라 다중 검기의 위력이 달라지는 검희의 특성상 최적의 기능.
즉, 천상의 장막은 검희 직업에 특화된 방어구라 봐도 무방했던 것이다.
‘물론 다른 직업이 사용해도 적지 않은 효과를 보겠지만,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직업은 검희 뿐.’
때문에 다소 비싸더라도 구매할 생각이었다.
안느가 착용 중인 4기능 구세의 빛이 시세 평균가를 따지면 400 금화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문에 기능의 숫자가 품질의 격으로 정해지는 만큼 5기능인 천상의 장막은 최소 600 금화를 넘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800금화라고 해도 다섯 기능을 보유한 최상격의 마도기인만큼 그녀의 평생 장비로 활용하기 위해 살 생각이었는데 400금화?
환인의 시선을 받은 루티아=아슬리드는 다른 의미에서 당황하고 있었다.
=푸, 푸렌 공방장님? 작품의 가격 책정은 공방장님 권한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400금화는…….=
너무 비싸잖아요. 그리 말하려던 루티아=아슬리드는 푸렌 공방장의 성난 눈빛에 찔끔해서 안느의 뒤로 숨었다.
=장비 탓만 하고 자기 능력 탓은 하지 않는 머저리였다면 1200 금화를 받았을 겁니다, 아가씨.=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 루티아=아슬리드는 그 얼토당토않는 가격에 입을 살짝 벌렸다.
1200금화라면 대도시의 핵심 구역에 대저택을 지을 수 있는 돈인데!
환인은 그런 루티아=아슬리드와 푸렌 공방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400금화는 루티아의 입김이 가해진 게 아니라 장인 특유의 성정이 발동해 매겨진 가격이라는 건가.
이마저도 그녀의 계략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희미하게 토라진 기색을 보면 그건 아니겠지. 환인은 판단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사겠습니다.”
=잘 생각했소이다. 그야말로 내가 생각했던 주인 그 이상 가는 사용자가 나타났기에 이 가격을 매긴 거요.=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만 현금이 부족한 관계로 위상석과 정령석을 처분하고 와야 할듯하니 하루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현재 보유 중인 금화는 358닢에 열은화가 40닢, 은화가 503닢이다.
기존에 보유 중이던 267금화에 폭군룡의 미궁에서 획득한 부산물만 판매해 32금화, 유르파가 성에서 머물며 제작한 마도기를 판매해 올린 수익 43금화, 헬루멘 앞에서 자신을 습격했던 엽사가 이블팩션과 전쟁이 벌어지는 북부전선의 전쟁 노예로 팔려가며 행정관 계좌에 입금된 16금화가 더해진 것이다.
파르히스트를 나온 이후로 지출이 거의 없었기에 거금이 모였지만 그래도 부족하다. 위상석과 정령석을 일부 팔아서 400금화를 맞춰야 한다.
위상석과 정령석은 언제, 어디서든 쓰인다. 시하 영주에게 넘긴다면 제값을 쳐줄 거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푸렌 공방장이 붙잡았다.
=그런 거라면 우리가 정확히 시세대로 쳐 드리지. 그렇지 않아도 소재가 고갈되어 새로 구해야 하는 상황었으니 말이오. 부족한 것은 그것으로 갈음하는 게 어떻겠소?=
“좋습니다.”
푸렌 공방장은 곧장 정령석과 위상석 측정기를 가져왔고, 환인은 350금화에 더해 300g급 3개 총합 1176g의 정령석(33.8금화), 흔한 색의 4급 위상석 2개(15.9금화)를 내는 것으로 천상의 장막의 소유권을 획득했다.
‘지갑이 단숨에 쪼그라들었군.’
소지금이 8금화, 40열은화, 501은화, 181열동화, 847동화가 되었지만 환인은 걱정하지 않았다.
소지하고 있는 5급 위상석(37금화) 1개, 개당 7금화 남짓한 4급 위상석도 15개나 남아있고 정령석도 모두 팔면 100금화 가까이 나온다.
여기에 유르파가 가지고 있는 1급과 2급 위상석도 수십 개고 그녀가 매일 마도기를 1~2개씩 찍어내고 있으니 지갑은 다시 채워질 거다.
=그러면 소유자 각인 절차를 진행하겠소. 검희 아가씨의 가슴이 워낙 크니 흉부 치수 조절도 해야 할 테지. 따라오시오.=
=앗, 푸렌 공방장님. 저도 옆에서 견학해도 될까요?=
=으응? 비술사 아가씨가? 왜?=
=저는 부여 술사라서 이슬이 아가씨랑 안느 아가씨의 마도기는 제가 관리하고 있어요. 이후를 대비해서 천상의 장막에 새겨진 술법 회로의 보강 방식이라던가 구조를 확인해두고 싶어서요. 안될까요?=
=이몸의 형상 기억 기능은 술법 회로까지 복구해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하지만…… 뭐 취급 사항 정도는 봐두는 것도 좋겠지.=
=감사합니다.=
=할아범. 나도 구경해도 돼?=
=그러시든가.=
=고마워.=
여자친구들이 푸렌과 함께 공방장 전용 작업 공간으로 가버리니 사무실이 적막에 휩싸인다.
환인과 단둘이 남게 된 루티아=아슬리드의 눈빛이 기회를 포착한 아기 백곰처럼 반짝 빛난 순간, 환인은 그녀의 눈빛이 변한 것을 느끼고 먼저 선수를 쳤다.
=저…….=
“루티아 양. 위르트 가문에 언질을 넣어 저와 일행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손을 써주신 점, 그 외에 여러 가지를 배려해준 당신과 파르히스트의 조력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앗.=
시작도 못 해보고 대화의 여지를 차단당해버린 루티아=아슬리드가 당황을 드러낸다.
환인은 의도한 대로 루티아=아슬리드의 입을 먼저 봉쇄해버린 뒤 차분히 이야기를 덧붙였다.
“시하 사이지 영주님과 담화를 나누던 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성주님께서 제 영혼 기사 건으로 곤경에 처하지 않게끔 이야기를 해주셨다고요.”
=네…….=
“펜리 후스티오 성주님께서 저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멀고 긴 순례를 떠나야 하는 제 입장은 그러한 후의에 답해 드릴 수 없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루티아=아슬리드의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방금 이야기에서 이 이상의 지원과 조력은 완곡히 거절하는 것을 읽은 것이다.
억지로 이야기를 꺼내봤자 완곡한 거절이 딱딱한 거절로 돌아올 뿐이겠지.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자신의 가문이 얻을 무형적인 이득은 충분히 챙겼다.
헬루멘은 주도로 가는 길목이자 남부에서 손에 꼽히는 도시다. 그 말은 주도에서 남부와 중부로 가기 위한 길목이라는 뜻.
알류겔 대호수를 통해 주도로 가는 길이 아니면 육로로는 헬루멘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만큼, 여기서 시작된 소문은 대륙 전체에 뻗어 나간다.
오늘 자신과 함께 한 일, 그리고 며칠 뒤에 있을 헬루멘의 영웅 기사단과 녹색 성자의 영혼 기사들 간 친선 시합을 생각하면 녹색 성자는 파르히스트 가문과 적지 않게 친밀하다는 것이 전 대륙에 알려질 것이다.
녹색 성자의 명성이 알려질수록 파르히스트의 이름도 함께 대륙에 울려 퍼질 것이 틀림없다.
파르히스트 대축제를 통해 꾸준히 이름을 알려온 것보다 이번 한 건으로 더 큰 인지도의 증가를 이뤄낸 거다.
그럼에도 루티아=아슬리드가 포기를 못 하는 것은 추측하기로 헬루멘의 영주와 좀 더 깊은 사이가 되었단 걸 읽었기 때문이었다.
백화점까지 타고 온 마차, 초청장은 영주의 이름과 직인이 박혀있는 것이었고 좌석도 영주를 위해 마련해놓은 영주 전용석이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읽지 못할 루티아=아슬리드가 아니다.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면…….’
‘……이라고 생각하는 얼굴이군.’
환인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그녀에게 포기하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쪽을 선택했다.
7급 호족의 자녀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느니 저쪽이 알아서 생각해주는 것이 호의 관리 측면에 더욱 수월하니까.
환인이 루티아=아슬리드를 이리 대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루티아=아슬리드의 외모적 나이 때문이었다.
키 153cm. 머리 위에 난 동그랗고 복슬복슬한 하얀 곰 귀, 그 아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예쁘다기보다는 귀엽다는 느낌이고 체형에서도 어린 느낌이 물씬 풍겨온다.
한 마디로 환인이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두 가지 요소, 임자 있는 여자와 미성년자 중 미성년자에 속해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영기가 많은 직업자도 아닌 일반인. 명예에 목매는 것도 아니고 금에 눈이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환인이 그녀에게 손을 뻗을 이유가 없는 것.
스윽.
환인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끼고 다리를 살짝 꼬았다. 그리고 눈을 감는 것으로 이 이상의 대화가 이어지는 것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포기 못한 루티아=아슬리드는 몇 번이나 이야기를 꺼내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히잉.’
묵묵히 앉아 있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의지가 확고한 게, 마치 엄한 부친처럼 느껴져 끝끝내 입을 열지 못하고 말았다.
만약 오늘 이후 그를 만날 수 없다는 걸 알았다면 어떻게서든 말을 붙였겠지만.
‘내일은 꼭!’
미래를 읽는 힘이 없는 루티아=아슬리는 다음 기회를 노리겠다며 다짐할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