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310화 (310/813)

〈 310화 〉 304 영웅의 도시 헬루멘

* * *

웅성웅성.

환인은 자신이 5층을 나오자마자 경연 쪽 주최자인지 몇 명이 당황한 모습으로 달려오는 것을 목격했다.

영주만을 위해 마련한 특별석의 손님이, 영주의 특별 초대장을 가지고 방문한 손님이 경연 중간에 퇴장했기 때문.

그러나 그들은 환인과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루티아=아슬리드에게 막혀 안달복달하다가 못내 불안한 얼굴로 환인을 곁눈질하며 되돌아갔다.

그후 말없이 중층 휴식 공간으로 내려온 환인은 루티아=아슬리드가 조심스레 꺼낸 이야기에 걸음을 멈추었다.

=성자님, 저기……. 혹시 성자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나요? 말씀해주시면 주최 측에 전달해서 고치도록 전달하겠어요.=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던 경연과 달랐지만, 그것은 문제 되지 않는 일이지요. 다만.”

자신이 중간에 빠져나온 것은 출품작 목록에서 이실리테에게 기능적으로 어울릴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루티아=아슬리드는 영민한 눈치로 환인의 감정을 읽었다.

사치나 다름없는 출품작 목록에 시간을 버렸다는 불쾌한 감정. 루티아=아슬리드는 그 감정에 공감해주며 작고 앵두 같은 입술을 살짝 삐죽 내밀었다.

=사실 저도 조금 보기 그랬어요. 갑옷은 보기 좋은 것보다 성능이 중요한 법인데 여성용 갑옷은 이번에도 역시나 성능보단 겉치장에 신경 쓴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

=어어. 아까 나온 수영복 갑옷은 그, 가슴이랑 여기를 다 보여주는 거 보고 놀랐다니까.=

안느도 가슴과 사타구니를 가리키며 놀란 모습을 감추지 못했고 유르파도 조금 걱정인 투로 말을 덧붙였다.

=디자인이 조금 획기적이긴 했지만 그보다 난 기능이 더 걱정이었어.=

=무엇이 걱정이셨나요?=

=역장은 굉장히 좋은 기능이에요, 아가씨. 발동하면 일단 물리 피해든 술법 피해든 모두 기능의 출력에 따라 위력을 감소시켜주니까요. 하지만 그걸 방어구에 적용하지 않는 이유는 직업자가 자신의 위상력을 쓰면 역장 기능과 상충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 점에 대해서는 설명도 안 나와 있고 질문도 없이 사는 걸 보니까 조금…….=

=율이 언니가 그렇게 지적할 정도면 그건 여잘 물건처럼 꾸며서 곁에 끼고 놀겠다는 말밖에 안 되는 거 같은데…….=

=…남성용 갑옷은 멋진 게 많던데 여자용은 왜 그런 것들 뿐인 걸까.=

가만히 듣고 있던 이실리테가 중얼거리자 안느가 눈을 반짝 빛냈다.

=아. 중간에 생각나? 흑색 바탕에 금색으로 선을 그려서 윤곽을 강조하고 가슴에 사자 문양을 새겨넣은 판금 갑옷. 그거 도령하고 엄청나게 어울릴 거 같더라.=

=아. 나도 그 생각 했어. 보자마자 주인님을 위해서 만든 게 아닐까 싶었는데.=

그게 230금화에 판매되는 것을 보고 기함했었지. 미궁을 115번은 들어가야 용돈으로 모을 수 있는 돈이었으니까.

여자친구들의 대화를 듣던 루티아=아슬리드가 휴우, 조금 불만스러운 듯이 한숨을 토해내며 뺨을 살짝 부풀리고 말했다.

=언니들도 그렇게 생각하셨죠? 정말, 그게 다 지지난번 무구 경연 때문이에요.=

=응? 무슨 일이 있었는데?=

안느의 질문을 기다렸단 듯이 루티아=아슬리드가 설명했다.

저저번 경연 때 비키니 아머라고 이름 붙은 여성용 갑옷이 대형 공방의 이름을 달고 세 개가 출품되었다는 것.

그 획기적인 디자인에 반한 남자들이 전부 300금화 넘는 가격에 구매해갔다는 것.

기능적인 면이라면 20금화도 아까울 성능이었다는 이야기.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방어구보다 대충 만든듯한 옷 쪼가리 같은 게 몇 배나 비싸게 팔리자 저번 회차에 여성용 갑옷의 비키니 아머 출품 비율이 대폭 늘었고 판매율도 덩달아 높아졌는데.

=그러더니 이번에는 여성용 갑옷은 전부 비키니 아머로 나온 거예요! 노출도도 높아지고요!=

안느가 인상을 썼다.

=남자가 적은 라드세아라서 그런 건가 여성용 갑옷도 남자를 위해 만들다니, 말도 안 돼.=

=라드세아는 남자가 지배하고 이끌어가는 사회니까…….=

“아무튼, 남은 방어구들도 그것과 비슷한 컨셉 위주였기에 더 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말 그대로 시간 낭비다. 차라리 그 시간에 헬루멘의 공방을 돌아다니며 이실리테가 쓸 갑옷을 찾아보는 게 낫지.

행사 중에 나오는 것은 예의 이야기가 나올만한 행동이지만, 환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끝까지 남아있다면 사치품 경매에 참석한 영혼사라는 좋지 않은 시선이 집중됐을 거다.’

청렴하다는 영혼사의 이미지에 맞지 않아 의아함과 의구심을 품을지도 모르지. 부패한 영혼사가 아닐까, 하고.

환인의 방문 목적을 확실하게 파악한 루티아=아슬리드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자님. 그러면 제가 괜찮은 곳을 알고 있는데, 안내해 드릴까요?=

“괜찮은 곳이라 하면?”

=헬루멘에도 파르히스트 가문이 투자하고 있는 무구 공방이 있어요. 제법 규모도 큰 공방이고 매번 경연에 준수한 성적을 내는 장인이 모여있는 곳이죠.=

이번에는 참가하지 않았는데 아무튼 만든게 여성용 갑옷이라는 이야기였다.

=루티아. 그 말은 비키니 아머가 아닌 다른걸 준비했다는 거야?=

어느새 말을 놓고 이름을 부르는 안느에게 루티아=아슬리드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분류로 보면 경갑옷이에요. 장담하건대 이슬이 언니에게 굉장히 잘 어울릴 거예요!=

=오. 영애께서 그렇게 장담할 정도면 진짜 좋다는 이야기잖아.=

=가문이 투자해서라거나 이득손실을 계산하지 않고 진짜 순수하게 점수를 매겨보면 역대 경연에서도 한 손에 꼽을 정도의 완성작이에요. 신체 부위 몇 곳의 파츠를 떼어낸 대신…… 아니다, 비전문가인 제 이야기보다는 직접 두 눈으로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이번에 대세 기술로 보고 있는 역장 생성 기능을 일부 도입한 거라 진짜 자신작이에요.=

진심이 엿보이는 답변에 안느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렇게 자신하는 작품인데 왜 출품하지 않았어?=

=지금 분위기는 비키니 아머가 대유행인 흐름이에요. 괜히 흐름에 역행하는 작품을 냈다가 혹평받고 유찰되기라도 하면 공방에도, 작품에도 안 좋은 딱지가 붙으니까요…….=

=비키니 아머 붐이 지나가고 난 뒤에 출품할 생각이었다는 거네.=

=네.=

“그런 제품을 우리에게 소개하신다는 것은 판매할 의도가 있다는 말씀이신데, 괜찮으십니까?”

우리에게 팔면 경연 출품으로 얻을 명성과 이익을 놓치지 않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아무리 영혼 기사가 착용하는 무구라는 어필이 있더라도 호족가 사교장에서 이야기가 오가며 생기는 인지도 같은 무형적 이득은 얻기 어려울 테니까.

그러자 루티아=아슬리드가 재깍 알아듣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검희이신 이슬이 언니가 1호 제품을 사용한다고 알려지면 경연을 통하는 것보다 더 큰 영예일 거예요.=

루티아=아슬리드가 이렇게나 장담하는 마도기란 이야기에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는 물론 환인의 코트 안주머니에 들어가 있던 환연마저도 궁금증을 드러냈다.

“…….”

환인은 그 가격이 궁금했지만, 가격 질문은 호족 영애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꺼낼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예상 이상으로 그 제품이라는 것의 가격이 높아 예산치를 초과한다면…….

‘폭군룡의 미궁에 다시 들어가 돈을 벌든가 해야겠지.’

돈이 부족하니 사지 않겠다고 하면 이 영민한 소녀는 무슨 핑계와 수단을 써서라도 그 장비를 안겨주려 할 것이다.

시하 영주의 제안을 거절한 마당에 루티아=아슬리드에게 수백 금화의 물품을 지원받는다면 영주도 형평성을 들먹이며 자신의 호의를 받아들이라 조를 테지.

그리되면 환인이 세운 기준에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나게 된다.

환인은 걱정하지 않았다.

만약 작품이 마음에 들고 돈이 부족하다면 폭군룡의 미궁도 있고 유르파가 보름 동안 제작한 마도기도 있으니까.

현재 여유 자금은 350금화이니 500금화까지는 노력한다면 어떻게 한 달 안에 마련할 수 있을 거다.

짧게 판단을 내린 환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루티아=아슬리드는 환한 얼굴로 수행원에게 마차를 준비하라 지시했다.

백화점 중층에서 음료를 마시며 잠시 기다린 환인 일행은 루티아=아슬리드가 준비한 마차를 타고 헬루멘 남쪽 공방 밀집 거리로 향했다.

헬루멘과 역사를 같이 하는 유서깊은 공방 거리……라지만 이런 공방 거리는 도시라면 어디에나 있는 법이라 특출나진 않았다.

중세 유럽 판타지의 도시 풍경이라 환인에게 색다른 감회로 다가오긴 했지만.

잠시 후 일행은 대장간이라기보단 소형 수공예 공방 같은 장소에 도착했다.

소형이라곤 했지만 3층 높이에 석조와 목조가 적절히 혼합되어있는, 돌의 차가움과 나무의 따스함이 공존하는 멋진 건물이다.

일행이 루티아=아슬리드의 안내를 받아 공방에 들어가자 키 140cm 정도 되는,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단단한 남자가 인사해왔다.

=루티아 아가씨? 아직 경연 중일 텐데 어찌…….=

작은 키, 두꺼운 팔다리와 손가락, 덥수룩한 갈색 수염에 민머리. 짐승의 형태는 없고 온전한 사람의 모습이다.

‘저 종족이 프라우드인가.’

지구의 여러 매체에서 접할 수 있는 판타지 양대 종족 중 하나와 매우 닮은 모습에 환인이 관심을 보이고 있을 때 루티아=아슬리드가 웃으며 작게 손을 흔들었다.

=중요한 손님을 모셔왔어요. 푸렌 공방장님, 그 ‘작품’ 잘 보관되어있죠?”

=물론입니다. 지하 금고에서 엄중히 보관하고 있습니다만……. 혹시 그 뒤에 계신 분은……?=

=네. 성자님? 이분이 푸렌 공방의 공방장이신 푸렌 님이세요. 푸렌 공방장님? 이쪽은 요즘 헬루멘에 가장 큰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녹색 성자님과 그분의 호위 기사님들입니다!=

“반갑습니다. 환인입니다. 이쪽은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입니다.”

=허, 어서들 오시오. 영혼사에 검희와 성투사라니, 내 생전 이렇게나 화려한 파티를 마주할 줄은 생각도 못 했소.=

공방장의 감탄사에 80평 남짓한 공방 이곳저곳에서 흩어져 작업하던 장인들이 뭐야뭐야, 무슨 일이야 하면서 모여든다.

=어허! 쓰읍! 루티아 아가씨의 귀한 손님들이니 무례한 짓 하지들 말고 하던 일이나 계속해라!=

모여들던 사람들을 기백으로 단숨에 해산시킨 푸렌 공방장은 바로 환인 일행을 자신의 사무실로 안내했고, 금방 작품을 가져오겠으니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다시 밖으로 나가버렸다.

허례허식은 일절 없는 그의 행동에 루티아=아슬리드가 대신 사과했다.

=죄송해요. 공방장님한테 중요한 것은 작업이랑 작품이랑 그 작품을 착용할 구매자의 능력뿐이라서…….=

“장인에게는 그런 특유의 고집이 있다고들 하지요. 괜찮습니다.”

공방장의 사무실은 말이 사무실이지 책이나 종이는 한 장도 없었다.

벽에 걸린 탄광 입구 그림 한 점과 곡괭이, 톱, 망치, 정을 조각한 벽걸이를 제외하면 인테리어는 전무.

가구도 공방장의 책상과 손님들이 앉을 의자와 탁자뿐인데 이것들은 물론 바닥과 천장, 벽까지 전부 돌로 만들어져있었다.

그런데 그 퀄리티가 매우 훌륭하다. 돌이면서 나무의 질감까지 표현한, 말 그대로 예술품들.

환인은 물론 이실리테와 유르파도 석조 공예품이라 할만한 내부를 둘러보며 작게 감탄하는데 안느만 조금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환인이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그러지.”

=아니, 순혈 핀겔 프라우드도 이렇게 온통 돌로 안 꾸미는데…….=

알고봤더니 풀이나 나무가 하나도 없는, 말 그대로 돌? 뿐인 이 방 환경이 불편했던 것.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공방장이 자기 키를 훌쩍 뛰어넘는 커다란 석재 상자를 들고 들어오면서 말했다.

=내가 돌과 광산에 한이 맺힌 사람이라서 말일세. 플뢰인 어린 아가씨한테는 불편하기도 하겠구먼. 하지만 어쩌겠나. 여긴 내 사무실이고 아가씨는 손님이니 아가씨가 이해해주어야지.=

=아냐. 내가 미안해. 수목화 중이라서 좀 신경질적이었어.=

=허어? 그러면 불편할 만도 하지. 어이, 꽃이 담긴 꽃병 몇 개 좀 들고 들어와라.=

밖에 누군가를 통해 지시한 공방장은 환인이 앉아있는 곳 근처로 와서 폭 80cm, 높이 2m, 두께 50cm의 돌상자를 조심스레 세운다.

=공방장님 여기…….=

=어어. 그거 이리 주고 나가서 일 봐.=

=네에…….=

소심해보이는 접힌 강아지 귀의 여자가 건네주는 꽃병을 받아든 공방장은 그걸 안느에게 넘겨준 뒤 묵묵히 석재의 봉인을 풀어나갔다.

그 침묵이 불편한 듯 루티아=아슬리드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공방장님. 질문할 거 없으세요?=

=아가씨가 하시는 행동에 이유가 없었던 적은 없었지요. 이 늙은이는 아가씨를 믿을 뿐입니다. 어잇차, 됐군요.=

봉인을 풀고 커다란 돌판 뚜껑을 열어 꺼낸 것은 오직 은색으로만, 색이 진한 은색에 색이 옅은 은색으로 명암을 살린 한 벌의 여성용 경갑주였다.

어깨를 노출하고 목에서부터 갈비뼈까지 빈틈없이 가리는 여성용 체스트플레이트chestplate.

프론트 오픈 스커트처럼 부드러운 라인으로 골반에서 허벅지까지 가리는 체인벨트 스커트chainbelt skirt.

무릎 위 허벅지부터 발끝까지 가리는 레그 플레이트leg plate.

팔꿈치 위에서부터 손끝까지 빈틈없이 가리는 암플레이트 건틀릿armplate gauntlet.

자연스럽게 이실리테가 저것을 착용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얀 갑주에 놓여진 미려美?한 여신 세공은 이실리테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얼굴선과 잘 어울렸고, 훤히 드러내는 어깨선과 허벅지, 그리고 복부는 여성미를 한껏 드높인다.

거기에 검희의 아우라가 더해지니 말 그대로 검의 공주라는 느낌.

여자들이 모두 홀린 듯이 갑옷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안느가 갑옷에 가까이 다가가며 소감을 입에 담았다.

=우와…… 이건 갑옷이 아니라 예술품이네. 구세의 빛보다 더 훌륭한걸.=

안느의 순수한 감탄에 공방장이 뿌듯해하는 얼굴로 코밑을 훔친다.

=역시 플뢰라서 그런가 뭘 좀 아는군.=

=이거 아저씨가 만든 거야?=

=그래. 소재 조달에서부터 작은 조각 하나까지 전부 내가 만들었다.=

환인도 자리에서 일어나 갑옷 걸이에 가까이 가자 여자들도 그 주변에 모여들었다.

=……진짜 굉장한데? 금속 느낌이랑 나무, 돌 느낌도 거의 없어. 대체 뭘로 만든 거야?=

플뢰라서 그런 걸 느낄 수 있는 건가. 환인은 그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푸렌 공방장의 반응이 심상치 않아 환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너…… 수목화도 그렇고 평민이 아니군?=

=공방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가씨, 평범한 플뢰라면 나무의 기운까지는 쉽게 감지합니다. 우리 프라우드가 돌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죠. 그리고 혈통이 뛰어날수록 느낄 수 있는 기감이 다양해집니다. 순혈 프라우드라면 돌과 흙에 보석, 광물까지 감지할 수 있습니다. 저 처자가 방금 입에 담은 걸 보면 가문…….=

“푸렌 공방장님이 홀로 이만한 작품을 제작하셨다면, 프라우드 족 장인분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을 갖추고 계시다는 뜻이겠군요.”

환인이 말을 끊고 들어가자 푸렌 공방장이 말하다 멈추고 환인과 안절부절못하는 안느를 번갈아 본다.

=…크흠! 그렇소. 내 종족연합 국가 주도의 거장이란 놈들 못지않다고 자부하지.=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 계심에도 이곳에 있으시다는 것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는 거겠지요.”

=허허허. 뭐 떳떳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거장이란 새끼가 하도 좆같이 굴어서 망치로 대가리를 깨버렸지. 그 때문에 배상한다고 전 재산을 내놓고 여기까지 흘러들어왔지만 뭐, 내 행동에 한 점 후회 없소.=

씩 웃은 공방장은 그 옆의 안느를 힐끔 본 뒤 환인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느 아가씨가 이 작품을 착용할 거요? 참고로 위상력 전도율을 최대한으로 올렸고 금속의 사용도 극도로 낮췄기에 술사도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거요.=

안느의 정체가 아니라 본 목적인 갑옷으로 관심을 옮기는 모습에 안느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환인은 못 본 척하며 대답했다.

“검희가 쓸 예정입니다. 이실리테.”

환인의 부름에 뒤에 서 있던 이실리테가 약간의 욕심과 다소의 부담감, 그리고 기대와 설렘이 묻어나는 얼굴로 앞으로 나선다.

그런 이실리테를 위아래로 살펴본 푸렌 공방장은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체격과 팔다리의 밸런스가 아주 훌륭하군. 일단 설명부터 드리지. 이 갑옷의 이름은 천상의 장막, 보다시피 내 180년 인생의 정수를 녹여낸 불굴의 역작이오. 기능은 다섯 가지.=

기능이 다섯 가지라는 말에 환인이 느낀 가격 부담이 확 뛰어올랐다.

안느가 쓰는 구세의 빛도 네 가지 기능으로 최상격의 마도기라 하는데 다섯 가지라니.

=위상력 감응, 위상력 증폭, 신체 최적화, 형상 기억, 내구 수복이오. 사용한 소재는 별의 조각을 가루내어 월석 가루와 기타 비장의 광물을 섞은 뒤 녹인 다음 단조한 거요. 단순 소재 내구성으로만 강철을 능가하지.=

=처음 듣는 조합식이네요. 푸렌 공방장님 비전인가요?=

유르파의 질문에 흐, 웃은 푸렌 공방장은 갑옷을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한다.

=기능을 설명하지. 위상력 증폭은 진주색 위상석과 다르게 말 그대로 체외로 끌어낸 위상력의 양을 늘려주는 거요. 비율은 계산대로라면 1.2배요. 신체 최적화는 아무리 춥고 더운 곳에 있어도 신체를 최적의 상태로 유지해주는 기능이오. 약간이지만 독과 질병에도 효과가 있소.=

“형상 기억과 내구 수복은 장비의 파손 시 수복 기능이겠군요.”

=그렇소. 소재 자체 방어력이 강철을 능가한다고는 하나 기능에 경도 강화가 없으니 직접적인 공격을 허용하면 파손이 쉬이 발생할 수 있소. 하지만 형상 기억과 내구 수복 덕분에 위상석과 위상력만 있고 부위별 형태가 절반 이상 남아있다면 시간이 걸리긴 해도 완전히 수복될 거요.=

그런 것은 이실리테에게 문제되지 않는다. 근 1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환인의 맨투맨 대련으로 빠르게 방어술을 체득하고 있어 무기 막기와 회피, 흘리기의 숙련도가 빠르게 늘고 있으니까.

=이 천상의 장막의 핵심 기능은 위상력 감응이오.=

=저도 부여 술사로서 최근까지 마도 기능 동향에 관해서 계속 공부하고 있지만 그런 기능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혹시 그것도…….=

=본인의 걸작이지.=

유르파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씩 웃은 푸렌 공방장은 흉갑을 떼어내 가슴이 닿는 부분 쪽의 맨들맨들한 부분을 가리킨다.

=이곳에 그 기능이 새겨져 있는데, 위상력 감응의 주요한 효과를 설명하자면 사용자 본인의 위상력을 활용해 역장 기능을 원할 때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과, 위상력의 제어를 도와주어 원활하게 흐를 수 있게 해주는 거요.=

“……갑옷의 면적을 줄이고 관절부를 사출세공으로 짜 넣어 보강한 이유가 그 때문이군요.”

=그렇소. 성자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복부를 가리는 갑옷은 내장을 보호한다는 갑옷으로서 가장 큰 기능을 담당하오. 하지만 그만큼 두께와 무게가 동작의 자유를 제한하지. 그런 것을 위상력 감응 기능으로 대신한 거요. 가동성은 물론 무게 감소에 따른 기동성 증가를 최소 8%는 기대할 수 있소.=

갑옷 걸이에 흉갑을 다시 건 푸렌 공방장이 묻는다.

=검희 아가씨에게 묻지. 아가씨의 전투법은 어떤 식이오? 내 걸작을 활용할 실력은 있으시오? 말해두지만 영웅직을 가지고 있다 해도 실력이 없다면 나는 내 새끼를 넘겨주지 않을 거요.=

=그렇다면 천상의 장막을 이 도시에서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주인님을 제외하면 제가 최고라고 말씀드리겠어요.=

이실리테의 호언장담에 푸렌 공방장의 눈이 이채로 빛났다.

=호오, 그렇게나 장담한다고?=

=물론이야. 우리 이슬이는 영웅 기사단의 서열 4위도 이긴 실력자니까. 그리고 2위와 3위는 남자고.=

=오.=

안느의 보장에 이실리테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소형 아공간 주머니에서 지금까지 입어왔던 판금­사슬 갑옷 세트를 꺼내놓았다.

열심히 기름칠하고 손질했지만 녹고 얼기를 반복하며 녹슬고 휘어져 흉하게 변해버린 철갑옷.

푸렌 공방장이 인상을 쓰면서 한숨을 토로한다.

=세상에. 이렇게나 고생한 아이라니! 대체 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요?=

=제가 지금까지 입고 다닌 장비예요. 정령의 동굴 5층에서 일주일간 사냥한 결과지요.=

=……여기와 이곳, 여기저기에 살짝 스치긴 했지만 직격은 한 대도 없군.=

=그것도 지하 3층에서 검희로 각성하기 전, 전사로서 정신 침해 탓에 잠깐 부진할 때의 상처예요.=

=흐으음……. 주무기는 뭐요?=

이실리테는 말없이 중철대검 레드릭을 꺼내 보여주었고, 그 묵직하면서도 거대한 위용에 크으! 푸렌 공방장은 거친 탄성을 질렀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전사의 무기지! 좋소, 성자 양반! 이 무기의 손질과 보강까지 본인에게 맡긴다면 그대의 기사에게 천상의 장막을 양도하리다!=

환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한 달이 아니라 두 달은 폭군룡의 미궁에서 지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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