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9화 〉 303 영웅의 도시 헬루멘
* * *
라드세아 남부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무구 경연 대회가 열리는 백화점.
그 내부는 현대인인 환인이 보기에 현대의 최고급 백화점과 비교해도 절대 수준 낮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쪽이 더 세련되고 화려하다.
일정 간격마다 천장에 매달려있는 샹들리에가 내뿜는 환한 조명.
그리스 신전의 기둥처럼 화려한 느낌의 기둥만 세워진 드넓은 공간.
직원들의 복장은 정갈하면서도 세련된 제복이었고 방문객들의 복장도 현대와 비교해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쪽입니다, 성자님.=
1층은 크리스탈 파티션으로 부스를 나누어 비교적 돈 많은 일반인 손님을 받고 있다.
성자라는 이야기에 수많은 시선이 날아들었지만, 환인은 말없이 회색 후드 망토의 후드를 깊게 눌러쓰며 안내인을 따라 움직였다.
2층으로 올라간 환인은 지구의 명품관에 버금가는 화려한 매장들을 볼 수 있었다.
검은 광택이 고아해 보이는 외장재로 만든 매장 입구, 멋들어진 필기체로 휘갈겨 쓴 상호, 유리 너머로 진열된 각종 옷과 신발, 목걸이 팔찌 등의 액세서리들.
여성 명품관인지 여성용품이 압도적으로 많다.
허리에 기사검을 차고 환인의 뒤를 따르던 이실리테는 문득 눈에 들어온 빨간색 구두의 가격을 보곤 자기 눈을 의심했다.
=…안느.=
=응?=
=저기 유리창 너머에 신발 있잖아. 빨간색.=
=응. 슬링백, 저게 왜?=
=밑에 숫자가 가격표 맞지? 3금화나 하는데 어떤 마도기인지 알아?=
이실리테가 하는 말을 옆에서 듣던 유르파가 거길 보곤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이슬이 아가씨. 저건 자기 치장에 진심인 호족이나 고족 여자들이 신는 패션 아이템이야. 마도기나 마도구 같은 게 아니란다?=
=그, 그냥 신발이 3금화나 한다고요? 주인님이 입으셨던 마수가죽 방한 코트도 60은화였는데…….=
=유행이랑 패션이 다 그런 거니까……. 아, 그냥 평범한 신발은 아니야. 아마 발을 보호하거나 때가 타지 않는다거나 하는 작은 기능이 들어있긴 하겠지.=
이실리테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유행이 뭐라고 금화씩이나 하는 신발을, 그것도 걷기 힘들어 보이는 걸 주고 산단 말인가.
안내역의 부책임자는 무려 검희의 직업을 가진 여성에게 그 점을 설명하려 했지만, 환인의 소리 없는 제지에 입을 꾹 다물었다.
덕분에 안느와 유르파는 잠시 생각하다가 나름대로의 이유를 이실리테에게 설명해줄 수 있었다.
=저런걸 사서 신는 이유는 얕보이지 않기 위해서가 클 거야. 재력의 과시라고 할까. 우리는 이렇게 여유가 있다, 뭐 이런 걸 라이벌이나 견제, 상대 파벌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거지.=
=진짜 고급품은 저런 데서도 못산단다? 그런 고급품을 손에 넣는 걸로 권력의 측도 자랑하는 것도 없지않구.=
두 사람이 낸 결론은 안내인이 설명하려던 것과 대동소이했다.
이곳에 진열된 상품은 구매자의 품격에 맞추어 마련된 것이며 소유자의 매력을 한껏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이곳에 마련된 것들은 바깥에서는 구하지도 못하는 거라고.
하지만 이실리테가 생각하기에 어마어마한 돈 낭비가 따로 없다.
저 신발 하나 값이면 작은 촌락이 몇 년은 풍족하게 살 수 있을 텐데.
=경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걸 올바른 부의 순환이라고 하긴 하더라.=
=부의 순환이요……?=
부자가 비싼 돈을 줘서 물건을 산다. ▶ 그 물건을 만든 제작자에게 돈이 돌아간다. ▶ 제작자가 제작 재료를 구하기 위해 돈을 쓴다. ▶ 제작 재료를 구하는 사람에게 돈이 간다. ▶ 제작 재료를 구하는 사람이 그러기 위한 준비물을 갖추는데 돈을 쓴다. ▶ 그 준비물을 구비해두는 사람이…….
즉, 구두 하나를 만들어내는데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들어갔고, 구두를 사는 것으로 많은 사람이 돈을 벌고 먹고 산다는 이야기.
설명을 듣던 이실리테가 그런가? 하고 납득할 때 앞서 걷던 환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경제학 측면에서 깊게 들어가야 하는 이야기지만, 넓고 깊은 범주에서 보자면 그 주장은 틀렸다.”
여자들 뿐만 아니라 일행을 안내하던 부책임자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환인을 돌아본다.
=어떤 점이 틀렸다는 거니?=
“부자가 소비하는 품목은 특정한 상품들로 모이게 됩니다. 이를테면 몸을 치장하는 보석들, 값비싼 드레스와 정장들, 유달리 비싼 소재로 제작한 마차, 사치성 꾸밈용 물건들. 그것들을 경제학에서는 사치재라고 부릅니다.”
사치재는 성장잠재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부자들만으로는 소화할 수 있는 양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부자들의 그런 소비가 이어지면 사치재의 과잉 생산으로 이어져 공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
=…….=
=…….=
“개인이 소비할 수 있는 한계는 뚜렷하다. 부가 올바르게 순환되려면 비생산적 계층인 상류층보다 일반 시민들의 소비가 늘어야 한다. 한 명의 부자가 100금화를 쓰기보단 천 명의 시민이 1금화를 쓰는 것, 그것이 건강한 시장 형성의 핵심이지.”
머엉…….
주도의 학사전에서 라수비탄을 이끌어가는 학자들이나 생각하고 주장할법한 내용에 그녀들이 입을 벌리고 있을 때 이실리테가 순진하게 물어왔다.
=그럼 역시 저런걸 사는 건 낭비라는 거네요?=
환인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묻는 이실리테의 모습에 작게 웃었다.
“세상이 그렇게 옳고 그름, 정답과 오답으로 확실하게 정해져 있다면 사는 게 좀 더 편해지겠지.”
=어…….=
“묻지. 저 슬링백을 신은 너희가 보고 싶어서 내가 선물로 사주면 그것은 낭비일까.”
=소비의 측면에서 보면 낭비지.=
안느의 대답에 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가 그걸 신은 모습에 만족감을 느낀 나는 정신적인 피로가 해소되었다. 성불행에 보다 의욕이 생겨 영혼사로서 활동을 열심히 하게 된다. 이러면 너희들에게 구두를 사준 것은 낭비일까 아닐까.”
이번에는 안느도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이실리테는 혼란스러워하고 있고 유르파는 생각에 잠겨든다. 옆에서 덩달아 듣고 있던 부책임자도 고뇌하는 안색이다.
“부의 순환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저것을 구매하는 것이 낭비인가 아닌가는 개인의 자산과 목적에 따라 갈리는 만큼 속단할 수 없는 일이지.”
짝짝짝.
=정말 대단한 식견이세요.=
“루티아 아슬리드 양.”
조금 거리를 두고 기다리다 말이 끝나자마자 다가와 드레스 끝단을 살짝 들어 인사하는 처녀에게 환인도 놀라지 않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루티아=아슬리드가 방긋방긋 웃으며 묻는다.
=안녕하세요, 성자님?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니까 조금 더 친밀해졌다고 생각해도 될까요?=
“그렇겠지요.”
=그러면 성은 떼고 이름으로 불러주시면 굉장히 기쁠 것 같아요!=
환인은 새하얗고 동그란 백곰의 귀를 까닥거리는 루티아=아슬리드에게 작게 웃으며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루티아 양도 무장 경연 대회를 관람하기 위해 오셨습니까.”
=그런 것도 있지만, 사실은 성자님이 보고 싶어서…… 혹시 오시진 않으실까 백화점이 열리자마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러셨습니까.”
부드럽게 대답하는 환인에게 배시시 웃어 보인 루티아는 부책임자에게 짧게 시선을 주곤 환인에게 물었다.
=성자님만 괜찮으시다면 이제부터 제가 안내해 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앗, 부담되시면 거절하셔도 돼요!=
“루티아 양도 이곳의 손님이 아니신지.”
=아버님께서 이 백화점에 지분을 가지고 계서서, 저도 나름 관계자랍니다.=
‘과연 중부에서 제일가는 부자 도시의 주인이라 할만하군.’
파르히스트에서 천여 킬로미터는 넘게 떨어진 곳의 도시 백화점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니.
물류 유통과 운송 산업이 미약하기 짝이 없는 이 세계에서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아득한 부자들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면 부탁하겠습니다.”
환인의 허락에 부책임자는 꾸벅, 허리를 숙이고 사라졌고 그 자리를 루티아=아슬리드가 차지했다.
그리고 처음 보는 환인의 여자친구들에게 꾸밈없는 해맑은 미소로 인사한 뒤 안면이 있는 이실리테에게는 스스럼없이 손을 잡고 언니라고 부르며 친한 척을 해왔다.
=네, 네.=
=그때 언니가 말씀해주셨던 레시피대로 해서 마셔봤는데 어쩜, 정말 똑같은 맛이 나와서 놀랐던 거 있죠?=
=다행이네요, 아니 다행입니다.=
=으응. 그렇게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편하게 루티아라고 불러주세요. 말도 편하게 해주시구요!=
=영애께 어떻게 그런…….=
=아니면 동생이라고 부르셔도 되는데!=
그렇게 친근하고 친밀하면서도 결코 선을 넘지 않으며 부드럽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2층의 저기는 어떻고 또 저기는 어떤지를 설명하는 루티아=아슬리드.
말하는 법도 배웠는지 짧은 이야기 속에 필요한 정보만 담겨있다 보니 사람의 이목을 자연스럽게 모으는 화술이 펼쳐진다.
그렇게 3층으로 올라온 환인은 무심하게 3층을 둘러보았다.
3층은 중층처럼 휴식 공간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작은 도심 정원 컨셉으로 꾸며져 작은 새들이 날아다니며 쪼롱쪼롱 울고 분수에는 물이 흐르며 작은 개울 소리를 내고 있다.
그런 정원을 빙 둘러싼 각종 요깃거리와 간식거리를 판매하는 노천카페들.
‘촌락이나 마을은 지구의 중세와 다름없는 문명 수준이지만 돈이 많은 곳은 현대와 다를 바 없군.’
이정도면 빈부의 격차가 아니라 문화의 격차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환인이 보기에 이러한 차이는 혁명을 넘어선 그 무언가를 일으킬 것 같은데…….
‘기득권과 비 기득권층이 가진 무력의 차이는 지구의 격차보다 더욱 심각하니 혁명도 의미가 없겠지. 괴물과 미궁의 존재도 이유가 될 테고.’
정보교류가 발달하지 못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사고는 단순하고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이 봉기를 일으켜도 위협일 수가 없겠지.
만약 혁명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다른 기득권층이 기존의 기득권층을 끌어내리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종족 연합 국가가 이계인을 모아 사상의 확장과 전파를 막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환인 자신만 보아도 이 체제를 망가트릴 수단이 몇 가지 있으니까.
=이곳을 유지하는데 다섯 가지 속성의 술법사님들과 세 분 비술사님들의 힘을 빌리고 있어요. 불과 물과 바람과 땅과 어둠, 그 다섯 힘을 비술사님들이 조율해서 조화롭게 만드는 거지요.=
=어둠인가요? 어둠은 어째서?=
=네 가지 속성의 힘을 하나로 녹여 땅에 퍼트리기 위해서라고 해요.=
유르파와 루티아=아슬리드의 대화를 들으며 4층으로 올라온 환인은 순간적으로 지구에 돌아온 게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어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4층은 남성관 겸 최고 VVIP 회원 공간인지 사람 수는 적어졌지만 고급스러움은 더 증가했다.
플로어를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라드세아 명품관 히스론드 명품관 메리아놀 명품관 벨티칼 명품관으로 분류된 4층은 1~2층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고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중.
두께가 일관되어 울렁거림 없이 깨끗한 진열유리 너머에는 목각 마네킹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 컨셉별 세트 옷을 입어 일정 시간마다 자세를 잡고 있고 물건은 하나하나가 최소 금화 단위다.
이실리테는 쇼윈도에서 인견족 여성이 유두와 음부만 겨우 가리는 속옷을 입고 서 있는 걸 보곤 여러 가지 의미로 놀랐다.
사람을 마네킹으로 쓰는 것도 놀라운데 모두 모아봤자 천의 면적이 한 줌도 안될 것 같은 저게 5금화라고……?
기능을 읽어보니 오염 방지에 내구 회복 기능이 달린 마도구라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비싸다고 느꼈다. 저만한 사이즈라면 찢어지기도 쉬울 테니까.
‘하지만 주인님이 보고 좋아하시면…….’
자신들의 속옷 차림을 감상하길 즐기시는 주인님이다. 주인님이 좋아하신다면 비싸지만, 용돈을 모아서 살지도 모르겠다.
‘아.’
이게 주인님이 말씀하셨던 부의 순환인 건가?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때 루티아가 이실리테에게 팔짱을 끼며 귀에 작게 속삭였다.
=이슬이 언니. 저 속옷이 마음에 드시면 제가 사드릴게요.=
=네, 네?! 아니, 아니에요.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언니, 저 속옷은 이번 분기에 주도에서 대유행 중인 거예요. 남성관인 4층에 여자 속옷이 있는 이유가 뭐겠어요?=
은근한 루티아의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집중한 이실리테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나, 남자들이 좋아하니까…….=
=맞아요. 언니는 같은 여자가 봐도 반할 만큼 아름다우시니까 저걸 입으면 성자님도…… 우후훗.=
=…하지만 너무 비싸요. 이런걸 함부로 선물 받으면 주인님이 안 좋아하실 거예요.=
=앗, 그렇구나. 음 그러면 제 권한으로 브랜드 가치와 부가가치세를 제외한 원가에 드릴게요. 단돈! ……이라고 하기에는 좀 비싸지만 24은화인데, 어떠세요? 보기에는 엄청 약해서 몇 번 못 입고 버릴 것처럼 보이지만 벨리움 스파이더의 거미줄을 특수하게 가공해서 마도구로 만든 거라 물에 막 빨아도 하루 정도만 말리면 새것처럼 변해요.=
그러더니 주위를 살짝 둘러보곤 목깃을 살짝 열어 이실리테에게만 가슴을 감싸고 있는 속옷을 보여주며 은근한 미소를 짓는다.
=……!=
=저도 입고 있을 정도니까요? 사놓으시면 값어치는 충분히 할 거예요.=
=……부, 부탁드릴게요, 아가씨.=
루티아는 맡겨만 두라는 듯이 어깨를 피고는 뒤따라오는 수행원에게 손짓해 이실리테를 위한 밤의 속옷을 준비시켰다.
이어 고급 술을 증류주, 발효주 가리지 않고 모아놓은 셀러에 눈을 떼지 못하는 안느에게는 고급 술을.
방문객 중 VVIP급에게만 특별히 제작, 배포하는 최신예 마도 장비 열람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유르파에게는 분류별 마도 열람서를 원가에 제공하며 착실히 그녀들의 호의를 얻어나갔고.
=루티아는 고위 가문 영애라고 해서 좀 선입견이 있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착한 애인 거 같아.=
=호족으로서 특권 의식이나 선민사상도 없지 않니?=
=응. 애가 참 싹싹하네.=
오늘의 방문 목적인 5층에 도달했을 때 환인의 여자친구들은 루티아를 고위 가문의 영애이면서 착하고 싹싹한 아가씨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안보는 척, 모르는 척하고 있었지만 환인은 조용히 루티아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세계의 아이템은 전부 수제품 개념에 장인 제작이라 고가라는 인식이 박혀 있다.
때문에 가격이 높은 물건일수록 원가에 인건비만 포함할 경우 시세의 1/10까지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각종 비용은 뺀 원가에만 구매할 수 있는 혜택을 주는 것은 그녀에게 크게 부담되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으로 호의를 인식시키는 방법인 거다.
장수를 잡기 위해서는 말부터 쏘라는 속담처럼 여자친구들부터 먼저 공략하는 루티아=아슬리드를 보며 환인은 수완이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저러니 파르히스트 성주가 보낸 거겠지.’
5층의 지정석에 도착한 환인은 무장 경연 준비가 끝난 5층을 둘러보았다.
5층은 일종의 오페라 하우스처럼 2개층을 합쳐서 꾸며놓은 곳이었다.
가장 앞에 무대가 존재하고 무대 앞에는 심사위원들이 자리한다. 그 뒤에는 100여개의 객석이 띄엄띄엄 마련되어있고 이곳에 상단주, 일반 초대장으로 입장한 관객들, 고족들이 앉는다.
그외 영주의 소개를 받은 환인처럼 헬루멘, 인근 도시의 고위 인사들을 위한 특별석은 2층의 개인실 발코니 개념으로 만들어져있었다.
환인 일행의 자리는 그런 특별석 중에서도 정 중앙, 무대를 한눈에 내려볼 수 있는 장소였다.
웅성웅성.
객석에 자리 잡은 사람들의 대화가 백색 소음을 만들어낸다.
여자친구들이 옆에서 루티아=아슬리드와 작게 대화하는 것을 들으며 경연장 내부를 살펴보는 가운데 환인은 안주머니에서 무언가가 꾸물거리다 가슴을 타고 목깃 쪽으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자유행동을 해도 좋다고 허락했지만, 막상 그러려니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웠는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환인의 가슴 포켓으로 숨어버린 환연이었다.
그러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슬그머니 옷 사이로 빠져나오는 것이다.
옷 사이를 헤집으며 등반하듯 기어오르는 느낌에 겉옷을 잡고 틈을 만들어주자 「휴.」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목깃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환연이 「오.」 신기해하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무엇을 보는 것일까. 시선이 사방을 향하는 걸 보면 사람이나 내부 인테리어를 구경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여기에도 중급 정령이 있는 걸까.
환인이 그걸 물어보려 할 때 무대로 사회자가 걸어나오며 무장 경연이 시작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신사 숙녀 여러분. 올해 헬루멘 무장 경연 대회의 사회를 맡은 크라나딜 상단의 레오라 크라나딜입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참석해주신 고귀하신 분들, 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이어 무장 경연이 진행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준 사람들, 그리고 참석해 이 자리를 빛내준 신분이 높은 사람들을 치하하는 시간이 지나간다.
첫 번째로는 영주의 소개로 참여하게 된 환인이 ‘고귀하신 분’이라는 모호한 명칭으로 소개되었다.
이어 파르히스트의 둘째 영애인 루티아=아슬리드가, 그 뒤를 이어 차례대로 급수가 낮아지는 호족들이 소개된다.
대체로 발코니석에 자리잡은 사람들이다.
소개가 이어지는 중에 1층의 단체 좌석 쪽에서 호기심 어린 시선이 날아들었지만.
“…….”
환인은 후드를 좀 더 깊이 눌러쓰고 난간에서 조금 떨어졌다.
발코니석의 조명은 그다지 밝지 않다. 때문에 난간에서 약간만 멀어져도 아래쪽에서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구조.
thanks for의 시간이 지나가고 사회자의 경연 룰 설명이 시작되었을 때, 환인은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경연이란 개인이나 단체가 모여 예술이나 기능, 기술을 드러내며 실력을 겨루는 것을 말한다.
무장?? 경연 대회, 이름이 그러한 만큼 수많은 업체가 참가해 작품을 소개한 뒤 점수를 매겨 등수를 결정, 그렇게 등수가 결정된 작품을 사람들이 우선권이나 우대권 등을 써서 구매 신청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시작된 경연 대회는 경매나 다름없는 방식이었다.
부자들을 위한 유흥과 여흥에 가까운 의미의 경연 말이다.
=도르시안 공방에서 제작한 다가오는 봄의 소리를 형상화한 머리핀이 17번의 손님께 낙찰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짝짝짝짝
“…….”
마도기이긴 하지만 치장 용도인 마도기가 13금화에 낙찰되는 것을 지켜보던 환인의 눈빛이 차가워진다.
=경연이라기에 어떤 방식일까 궁금했는데 그냥 경매네.=
=그러게…….=
안느는 별 감흥이 없었지만 유르파는 조금 실망했다. 유명 도시의 경연이니까 뭔가 획기적인 기술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호족들의 취향에 알랑거리는 경매였다니.
=주인님. 여기 팸플릿이 있어요.=
이실리테에게 팸플릿을 받아 살펴보니 출품작의 스펙이 모두 상세하게 나와 있고 그 아래 특별 첨언으로 시작 입찰가도 전부 적혀있다.
가격은 10금화부터 500금화까지 다양하다.
=이번에 소개해 드릴 것은 주도의 장인공방 거리에서 300년째 이어져 내려온 유서깊은 공방의……!=
=지난 대회에서 크나큰 관심을 받아 일약 유명세를 탄 공방이 이번 대회에도 참가하여……!=
=고전은 어찌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것인가! 그 이유는 나가시 공방을 보면 알 수 있……!=
환인이 팸플릿을 살펴보는 사이 정장, 드레스, 구두, 부츠, 장신구, 액세서리 같은 것은 보기에도 화려하기 짝이 없는 받침대에 장식되어 차례대로 사람들 앞에 소개된다.
무기와 방어구의 경우에는 검증된 실력자가 착용하고 나와 기능 시범을 보였다.
갑옷 같은 경우에는 기본이 100금화였는데, 남성용의 경우에는 그나마 기능성과 미적 요소를 조화롭게 버무렸고 기능 또한 걸맞게 수준이 높았지만.
=으응? 색 변화 기능…?=
=피부 미백 효과? ……이런 게 전투에 도움이 되는 거야?=
=우왓, 율이 언니, 이슬아. 저 사람 갑옷 좀 봐. 젖꼭지랑 아래가 다 보이는데…?=
=갑옷 맞아? 속옷이 아니구?=
여성용의 경우에는 갑옷의 기능보다 곁에 두는 트로피로 삼기 위해서인지 살색의 노출 면적이 지대하게 높은 것들뿐이다.
안느가 보고 놀란 것은 3급 여전사가 입은 것이었다.
화려한 레이스 무늬 브래지어로 만든듯한 매우 얇은 흉갑에 T백 끈팬티 형태로 만든 하갑, 파레오 같은 반투명한 걸칠 것을 허리에 두르고 비치 샌달 같은 신발까지.
갑옷이라기보단 속옷, 조금 양보한다면 수영복 같은 디자인이다.
미적인 부분이라면 여성의 곡선과 매력을 한껏 살리는 디자인이어서 아름답긴 하다.
문제라면 여자 호위를 자신의 과시용으로 삼기 위해서인지 희미하게 유두와 유륜이 드러나는 것은 물론 음부를 가리는 천조각도 레이스라 희미한 윤곽이 보인다는 것.
이실리테가 조금 당황해서 유르파에게 물었다.
=언니, 저걸로 공격은 어떻게 막는 건가요?=
=여기 옵션을 보면 역장 생성이 있잖니. 착용하면 위상력 역장이 발생해서 신체를 보호하는 식일 거야. 으응, 전투가 아니라 관상이 목적인지 다른 기능도 미백이나 청결, 소취 같은 기능이네.=
그사이 20금화에서 시작된 입찰가는 100금화에 도달하고 있었다.
마침 위력 시범을 위해 제작자가 맞은편에서 여전사를 향해 화살을 쏘았고, 화살은 여전사의 피부 근처에서 푸르스름한 막에 튕겨 날아갔다.
외모를 아름답게 꾸민 금발의 인묘족 여전사가 모델 포즈로 서서 환하게 웃으며 관객석 쪽으로 손을 흔들자 가격이 단숨에 치솟기 시작했다.
=110.=
=130.=
=150.=
=200.=
푸르스름한 막이 발생하며 하얀 갑옷과 여자의 피부를 물들이는 장면이 매혹적이었을까, 가격이 두 배 치솟더니 마지막으로 200을 부른 인돈족 남자가 낙찰받는다.
다음에 출품된 여성용 갑옷은 그나마 전투에 신경 쓴 편이었다.
건틀릿과 부츠가 존재하고 흉갑은 가슴만 겨우 가릴 뿐이지만 확실히 전투를 상정해 선택한 소재다.
하갑은 타이즈 형태로 하반신의 굴곡을 고스란히 드러내지만, 마수 가죽으로 제작해 방어력을 확보한 모양새.
기능도 소재 효과 강화 중中, 외형 수복 중상中上, 역장생성 상上으로 전투에 조금이나마 신경을 쓴 기색이 있었지만.
=둘포레 공방의 장인이 제작한 초경량화 둘포리움 아머! 22금화입니다! 더 없으십니까?! ……네! 82번 손님께 낙찰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입찰 시작가에서 고작 2금화만 오른 시점에 낙찰되었다.
그걸 본 환인은 팸플릿을 내려놓고 반쯤 젖혀놓았던 후드를 다시 푹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지. 환연, 들어와라.”
그의 여자친구들과 루티아=아슬리드는 어쩐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환인의 모습에 서로 시선을 나누며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