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8화 〉 302+ 영웅의 도시 헬루멘
* * *
폭군룡의 미궁에서 복귀한 지 사흘째.
환인이 시하 영주와 몸을 섞은 이후 성내 분위기는 그가 신경 썼던 것이 무색할 만큼 평화롭게 흘러갔다.
먼저 영혼사의 호위 정도로 인식되어있던 이실리테와 안느의 위상이 대폭 높아졌다.
전원이 모일 경우 7급 미궁도 돌파할 수 있다고 알려진 영웅 기사단에서 이실리테와 안느가 각각 서열 4위, 5위와의 비무에서 승리하며 그들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실리테 경의 무위는 믿을 수 없군요. 5급이면서도 7급인 저에 뒤지지 않는 위상력 제어 기술과 위상력 보유량이라니, 7급 초입이라 해도 믿겠습니다.=
=안느 경의 막기와 흘리기는 이치의 끄트머리에 닿은 게 아닐까 싶어요. 그 어떤 공격을 해도 흔들리지 않다니, 정말 감탄했어요.=
자신들을 추켜세우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자신들이 강한 게 아니라 환인의 가르침이 뛰어났기 때문이라는 겸양이 그녀들을 더욱 인정케 하고 있었다.
유르파는 그녀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대신 환연의 존재를 굉장히 신기해하며 그녀의 협조를 받아 출신과 태생을 조사하며 그녀가 태어났다는 수정 가루를 연구했다.
환연도 맨날 싸우기만 하는 이실리테와 안느보다 유르파의 곁에서 자신에 대해 좀 더 알아나가는 시간을 선호했고.
「그러니까 나는 평범한 요정이 아니라는 거군?」
=응. 요정 씨의 몸은 육체와 정령력이 반반씩 섞여 있는 상태야. 아마도 육체를 얻을 당시의 상황, 그러니까 수정에서 흘러나온 정령력이 자기의 피를 핵으로 삼았기 때문으로 보여.=
다시말해 육체를 구성하는 세포와 세포 사이에 정령력이 스며들어있어 말 그대로 반인반령인 상태라는 것.
「내가 정령과 소통할 수 있는 것도 그때문인 건가?」
=여기 정령석이 아가씨랑 반응하고 있지? 이 정도 반응성은 상급에 해당하는 수준이야. 그래서 중급 정령이랑 하급 정령들이 요정 씨 말을 듣는 거라고 생각해.=
「상급으로 태어나기 위한 정령력이라 그런가 보네.」
=이걸 한번 잡아봐. 정령석을 작게 떼어내서 가공하고 요정 씨가 태어난 수정 가루를 뿌려 완성한 정령 지팡이야.=
끄트머리에 아주 작은 정령석을 끼운 가느다란 나무 막대기를 받아든 환연이 오오! 감탄사를 터트렸다.
「다른 정령들을 통해 보는 느낌이 더욱 선명해졌다! 오, 오오!? 하급 정령이 내 생각대로 움직여!」
=역시……. 공명으로 하위 정령의 지배력이 늘어났구나. 자, 이거 하나하나 쥐어봐. 요정 씨의 계통이 무엇인지 알아봐야겠어.=
유르파는 환인이 챙겨다 준 정령석 중 속성별로 조금씩 떼어내 만든 환연 전용 아기자기한 정령 지팡이를 그녀 앞에 늘어놓았고, 환연은 아홉 가지 색의 지팡이를 하나하나 쥐어보며 힘을 써보곤 고개를 갸우뚱했다.
「다 똑같은데?」
=……전부다? 불하고 물, 땅하고 바람, 빛하고 어둠 전부 같게 증폭돼?=
「응.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유의미한 차이라고도 볼 수 없어.」
=그 말은 전 속성이라는 건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전속성???이라는 건 그저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뜬구름 속의 이야기다.
주요 칠대 속성 외에 존재하는 수십 가지의 하위 속성을 모두 다룰 수 있는 자질이란 대체 어느 정도의 확률로 발생할까. 적어도 소수점 아래 스무 자리 정도는 내려가야 할 테지.
「혹시 환인 때문인건 아니냐?」
=자기가? 왜?=
「전에 보니까 환인이 정령의 힘을 쓰는 거 보고 물었는데 모든 정령을 다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난 그런 환인의 피에 태어나서 그의 친화력을 이어받은 거지.」
=그럴법한 이야기네…….=
유르파도 그건 알고 있었다.
환인이 정령을 속성 여부와 무관하게 영혼 구슬로 만든 뒤 그 구슬로 축복을 내리면 모든 속성을 다룰 수 있다는 것.
「아무튼! 이거 정말 좋구나. 이 정령장이 있으니까 중급이나 하급 아이들의 힘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어! 이거라면 나도 내 한 몸 지킬 수 있을 테니까 환인도 날 인정해주겠지?」
=잘됐네.=
「고맙다. 유르파, 너는 약해서 부드러운 가슴 말고 도움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너야말로 진짜배기였어!」
=…….=
아니, 칭찬하려면 칭찬만 하지 까면서 칭찬하는 건 뭐람.
‘하지만 귀여우니까 봐줬다.’
동화속에서 튀어나온 요정이 이렇지 않을까 싶을 만큼 작고 귀여운 아가씨다.
더욱이 환인처럼 검은 머리에 작고 동그란 귀, 짐승의 티가 나지 않으면서도 플뢰나 프라우드 같지도 않은 이계적인 외모가 더욱 그녀의 모성애를 자극한다.
이렇게 유르파와 환연이 유대감과 친밀도를 쌓고 있을 무렵 환인은 시하 영주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기에 적힌 것이 검희가 우리 가문의 명부에 이름을 올려주는 대가로 드릴 수 있는 거에요. 차분히 읽어봐요.=
“…….”
항목은 여러 가지였지만 그중에서도 주요 항목을 보자면 이실리테의 활동비, 신분 보장, 라드세아 지역 내에서 활동할 경우 병력 지원, 기타 소모품 지원 등을 꼽을 수 있다.
활동비 지원은 이런 식이다.
이실리테의 행정관 계좌로 매달 10금화의 품위 유지비 및 활동 지원비가 입금되며 분기별로 그만큼의 지원비가 더 추가되고 연말에는 활동한 내역에 따라 또 추가의 경비가 지급된다.
신분 보장은 범죄 활동이 아닌 한 위르트 가문과 헬루멘은 영혼사와 검희의 모든 활동에 대해 신분을 보장해준다.
신분 증명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하면 위르트 가문이 나서서 입증하고 보증해주는 식이다.
일례로 이실리테의 과거에는 이름 사용과 더불어 반드시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이실리테 양, 당신이 도적으로 활동할 시절 해쳤다는 호족 자제에 대해 알아봤어요. 하지만 해당 지역에 그런 가문은 없는 걸로 나오더군요. 정말 호족의 자제였나요?=
=…그때는 상대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어요. 그래서 고귀한 신분이라고 하기에 호족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요…….=
“당시 추적 규모는 어땠지?”
=직업자 세 명과 일반 병사 오십 규모 정도였던 걸로 기억해요.=
=그건 군대가 아니라 사병이라고 해야 하는 거에요. 진정 호족 자제가 살해당했다면 수십이 아니라 수백, 일천 단위의 군대는 물론 수십 명의 직업자가 동원되어 포위했겠죠.=
당연히 도망도 못 치고 사로잡혀서 목이 떨어졌을 거라고 말하는 시하 영주의 지적에 이실리테는 죄인처럼 고개만 숙였다.
=아무튼 호족은 아니고 고족, 어쩌면 조금 큰 상단의 자식일 수도 있겠어요. 해당 건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본 뒤 확인된 사실에 한해서 알려줄 테니 그때까지 조용히 지내세요.=
=감사합니다…….=
=신경 쓰지 말아요. 당신이 겪은 일은 뜻밖에 비일비재하고, 호족이 아니라면 문제가 될 일도 없으니까.=
이렇게 그녀의 신분과 과거에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이 벌어질 경우를 대비한 것.
그리고 병력 지원은 말 그대로 군사적인 의미에서의 힘이 필요할 경우 위르트 가문이 개인적으로 연이 있는 해당 지역 호족과 연계해 병력을 지원해주는 것이다.
환인의 요청에 해당 지역의 호족이 병력을 지원해주고, 그로 인해 소비된 군비를 위르트 가문이 플러스알파로 보충해주는 식.
기타 소모품 지원은 무기와 방어구, 여행이나 성불행 시 필요한 기타를 지원해주는 것.
나머지 여섯 가지의 항목이 더 있었지만, 대체로 금전적, 물질적인 지원에 환인 일행이 원하면 하급 호족 정도의 신분도 지원해주겠다는 것들이다.
환인은 항목을 꼼꼼하게 살펴본 뒤 시하 영주에게 종이를 돌려주며 말했다.
“신분 보장 지원만 받겠습니다.”
=……왜죠?=
시하 영주는 다른 의도나 감정 없이 순수하게 궁금해져서 물었다.
활동비 지원만 해도 매년 최소 240금화, 활동 내역에 따라 500금화 이상도 받을 수 있으며 무기와 방어구도 영웅 기사단이 사용하는 최소 상품의 마도기가 말 한마디에 무료로 지원되는데, 그걸 거절한다고?
마악 그점을 설명하려던 시하는 환인의 대답에 입을 다물었다.
“영혼사가 고정 스폰서를 잡고 활동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
스폰서가 어떻게 통역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환인은 그녀가 입을 다물고 미간을 살짝 찡그린 것을 보고 제대로 뜻이 전해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환인은 이실리테를 흉내 내 연분홍색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묶은 시하의 머리를 가볍게 어루만져주며 말했다.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정치적 중도를 지키고 싶습니다. 파르히스트의 성주님, 그리고 시하 당신의 우호적인 신분 보장까지는 활동의 안정성을 위해 한발 양보해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이상의 금전과 물질적인 지원은 앞으로도 사양할 생각입니다.”
전쟁도 원래 가벼운 이유로 시작된다.
‘이 돈 줄게 가져. 대신 내가 하는 부탁도 들어줘야 한다?’
‘뭐? 저놈이 주는 돈은 받으면서 왜 내가 주는 돈은 안 받아?!’
‘아 됐고! 기분 상했어!’
이런 식으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거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전투력이 뛰어난 파티이고, 이 능력을 바탕으로 수행을 겸하며 활동 자금을 모으고 있으니까요.”
그런게 아닌데. 이 남자는 내 마음을 몰라서 이러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엉뚱한 대답을 하는 걸까.
시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후자겠지.’
자신이 먼저 살짝 유혹했다고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와 몸과 마음을 뒤흔들어놓은 남자다. 멍청할 리가 없다.
시하는 그를 설득하려다 되려 설득당할 거란 예측에 입을 꾹 다물며 못내 속상해했지만…….
=하아아악! 흐읏…!=
객실 청소 시녀도 잘 지나다니지 않는 구석진 방의 비좁은 드레스 룸. 그곳에 숨어 환인의 굵고 거대한 자지에 뒤로 박히면서 속상함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윽, 나쁜, 사람! 이러려고 날…… 허억!=
뿌리 끝까지 들어와 자궁을 강하게 찌르는 일격에 시하는 폐를 쥐어짜내는듯 한 숨결을 토해내며 벽에 상체를 기댔다.
허벅지를 모은 채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있어서일까, 깊게 들어와도 너무 깊게 들어온다.
방금도 남자의 자지가 질 안쪽 끝까지 들어와 자궁까지 밀어 올려 순간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
언제나 치마 혹은 숏 스커트 드레스만 입고 다녀서 접근성이 너무 쉬웠던 탓도 있겠지. 그 때문에 삽시간에 끌려들어 와 개처럼 박히기 시작한 거고.
시하 영주는 상기된 얼굴로 비지땀을 흘리며 끙끙 앓았다.
자지가 깊이 들어오면 온 내장이 밀려올라가는 이상한 느낌이 들고 자지가 빠져나가면 온 내장이 딸려나가는 괴롭고도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말 그대로 숨쉬기도 힘들 정도의 쾌락.
환인은 하얗고 토실토실한 시하의 엉덩이를 골반으로 때려대며 살짝살짝 몸을 떠는 그녀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겨드랑이가 훤히 드러나는 오픈숄더 드레스의 탑은 허리까지 내려와 젖무덤이 옆으로 살짝 튀어나왔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스커트는 엉덩이 위에 걸쳐져 하트모양으로 굴곡진 사이로 기둥이 모습을 감추었다 드러내기를 반복하는 중이다.
환인은 흔들리며 겨드랑이 사이로 슬쩍슬쩍 모습을 드러내는 젖무덤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동시에 손가락 사이에 발기된 유두를 끼우고 강하게 꼬집는다.
=앗! 아, 아파……. 응윽!=
질주름이 지렁이처럼 꾸물거리며 자지를 강하게 물어온다.
그 쫀득쫀득한 맛이 귀두의 갓에 걸리는걸 느끼며 주르륵 빼자 시하는 벼락이 질에서부터 자궁을 지나 머리까지 관통하는 느낌에 엉덩이를 뒤로 쭉 내민 채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오르가슴이라는 해일이 밀려오는 전조다.
철썩철썩철썩, 두 손은 시하의 젖꼭지를 꼬집고 허리는 강약약 중약약을 반복하며 보지를 깊고 얕게 쑤시고 있으니 그녀의 숨이 금세 넘어갈 듯이 헐떡이며 허리를 활처럼 휜다.
=끄흡! 하악…! 잠깐, 그만, 나 갈것 같…… 읍으으응!=
강한 삽입에 밀려나는 만큼 몸을 밀어붙이는 환인.
아예 벽에 바짝 붙어버린 시하의 뒤에 바짝 붙어 보지를 파헤쳐버리듯이 박아대던 환인은 8급 호족의 고귀한 보지가 자지를 쥐어짜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 ……!!=
뻐끔거리는 분홍색 입술. 흐리멍덩해진 분홍색 눈동자. 멈춘 호흡.
시하가 절정에 올라 핑크색 구름 속을 노닐고 있다는 걸 눈치 챈 환인은 자지를 뿌리 끝까지 삽입한 뒤 아까부터 끓어오르던 정액을 그녀의 자궁에 뿌리기 시작했다.
=캬하앙……!=
푸츄우웃
자궁이 뜨거운 무언가로 덧칠되는 감각에 조수를 뿌리며 혀를 쭉 내미는 시하.
분홍색으로 물든 허벅지가 좌우로 살짝 벌어진 채 발발 떨리고 반쯤 흐려진 눈가에서 눈물이, 벌어진 입에서는 침이 흐르며 땀과 섞여 툭, 투둑, 가슴 위로 떨어져 내린다.
자궁에 뜨거운 정액이 흘러들어오자 반사적으로 환인의 정액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짜내려는 듯 보지가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며 자지를 조물조물 물어댄다.
그 감촉에 힘입어 만족할 만큼 시하의 뱃속에 씨를 뿌린 환인은 손을 내려 그녀의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그녀의 위쪽 여우 귀에 속삭였다.
얼굴 옆의 작은 귀보다 이 위쪽의 귀가 더 예민하고 민감하다는 걸 알기에 한 행동이다.
“오늘로 3일째군요. 매일 이 자그마한 자궁에 정액을 이만큼이나 채워주고 있으니 이 아기 방에 금세 아기가 들어서겠지요.”
=하악…….=
시하 영주의 하얀 꼬리 네 개가 정신없이 너울거리며 등 뒤에 바짝 붙은 환인의 몸을 휘감는다.
“우리에게 지원할 활동비, 그리고 관심과 애정은 제가 떠난 뒤 태어날 아이에게 모두 쏟아주면 좋겠습니다.”
=그…런건…… 당연한 거…… 잖아욧…….=
“그렇습니까?”
=날, 날 이렇게 만들어놓고. 누구도 가져가지 못했던 내 마음을 가져가놓고서는…… 내 호의도 받아주지 않고…….=
벽에 가슴을 기댄 채 색색 숨을 몰아쉬며 투정부리는 시하의 모습에 환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매끈하고 하얀 아랫배를 한 차례 더 쓰다듬었다.
“그 대신 이 안에 제 마음을 가득 채워주고 있지 않습니까.”
=…….=
말이나 못하면!
=…응하앗?!=
그때 자궁 입구를 슬슬 문질러지는 감각을 느낀 그녀는 헛숨을 삼켰다.
이제 겨우 숨을 가다듬었는데 이 짐승같은 남자는 또……!
=또, 또 하려는 건가요…?=
“아직 8급 호족님의 고귀한 보지 안에 여유가 있는 것 같아서요. 두 번 정도 더 하면 가득 찰 것 같고 저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사실은 오늘치 그녀의 영기를 흡수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없는 그녀는 자신의 얼굴 곳곳에 뽀뽀와 키스를 해주며 다시 허리를 흔들기 시작하는 환인을 흑, 윽, 신음을 흘리며 원망스레 흘겨보았다.
왜 이렇게 속절없이 그에게 끌려만 가는 걸까. 내 성격은 이렇지 않았을 텐데.
그게 이해되지 않는 시하는 그가 선물해주는 쾌감에 호응하며 보지를 꽉꽉 조여주었다.
얼른 싸고 끝내달라는 듯이.
=의외네. 영주님이 따라오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헬루멘의 무장 경연 대회가 열리는 날. 네 마리의 쿠에가 끄는 영주의 화려한 백색 마차를 타고 헬루멘 백화점으로 향하던 중에 안느가 입을 열었다.
그 이유를 알고 있고 또 그 이유를 제공한 주인공이 태연하게 대답한다.
“급한 일이 밀려서 어쩔 수가 없다더군. 이 초청장을 가져가면 자신이 동행한 것처럼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하니 영주가 없어도 문제는 없겠지.”
「흐흐흐. 그 급한 일이 과연 어떻게 생긴 것일까.」
산뜻한 마차 내부를 날아니며 의미심장하게 웃는 환연의 행동에 이실리테와 안느는 고갤 갸우뚱거렸고, 유르파는 대충 사정을 짐작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그가 여자를 안고 다니는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유르파다. 게다가 이야기를 꺼내면 괜히 아가씨들의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울 수도 있으니.
환인이 후드 망토 앞자락을 열어 가슴 포켓을 가리키며 말했다.
“환연, 나와 있지 말고 들어와라.”
「싫다. 유리가 만들어준 이 지팡이 덕분에 이제 내 한 몸 정도는 충분히 지킬 수 있게 됐어. 어제는 날 괴롭히려던 못된 고양이도 가볍게 퇴치했다. 이정도면 네가 말한 기준에 통과한 셈이 아닌가?」
위르트 성 상주 재봉사가 만들어준 회색 옷, 슬림 머메이드 원피스를 입은 환연이 이쑤시개처럼 가느다란 정령석 지팡이를 휘두르며 으스댄다.
그 모습에 안느가 눈살을 찌푸렸다.
=환연 너, 말투 자꾸…….=
「…요! 요요요!」
말투를 지적하는 안느와 거기에 반항심을 드러낸 환연이 서로를 째려보며 아르릉거리기 시작하자 환인이 손을 뻗어 환연을 감싸 쥐며 물었다.
“그 지팡이로 정령의 힘을 빌리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시간이랄 것도 없어. 그냥 생각하면 바로 정령이 힘을 빡, 쓰니까.」
그 말과 함께 회색의 초소형 정령석이 박힌 지팡이를 한 바퀴 돌리자 마차 안에 산들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고 정령도 없는데 어떻게?
‘중급 정령을 제어한 건가.’
폭군룡의 미궁에 있을 때도 그랬다. 아무 정령도 없는 데서 누군가와 대화하고 이것저것을 시키곤 했던 거다.
그때는 자연스럽게 중급 정령이라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이번 기회에 확인할 요량으로 묻자 예상한 대답이 돌아왔다.
「응. 바람의 중급 정령이다. 비상이를 특히 좋아하는 녀석이지. 그래서 비상이하고 대화하는 데 쓸 겸 내가 데리고 다니는 중이다.」
“그 정도라면 괜찮겠군. 상시 중급 정령을 데리고 다녀라. 그리고 내 주변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도 말고. 그러겠다면 자유행동을 허락하지.”
「알았다!」
신난다는 듯이 마차 안을 빙글빙글 돌던 환연은 문득 생각났다며 환인의 어깨 위에 앉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네 가슴 포켓이 싫다는 건 아니야. 아늑하고 포근하지만 거긴 쉴 때만 들어가고 싶다는 거지.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환인은 피식 웃으며 검지로 환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태어난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말투와 행동이 거울을 보는 것 같아 약간 불쾌감이 느껴지고 그랬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적지만 이것저것 구경하며 자의식을 갖추어나가고 있어서일까. 이제는 자신과 전혀 다른 개성이 묻어나는 중이라 불쾌감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다.
“……그러니 굳이 말투를 교정하지 않아도 된다. 저것도 나름대로 개성이라고 봐야겠지.”
=저 귀여운 얼굴로 저런 말투는 잘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뭐 그게 개성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지.=
“안느, 그동안 환연에게 이것저것 가르치느라 고생했다.”
=고생이랄 거 까지야.=
빙긋 웃은 안느는 창밖으로 저 멀리 보이는 5층의 적갈색 화려한 백화점 건물을 힐끔 보곤 환인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있잖아, 도령. 영주님이 제안했던 지원안 그거 말이야.=
“음.”
=활동비까지는 받아도 괜찮지 않아? 저쪽이 대가 없이 준다고 했고, 지원받은 사실로 다른 호족이 개입하려는 걸 우려한다면 아예 문서로 남겨달라고 해도 되잖아.=
정 돈을 주고 싶다면 대가 없이 그냥 내놓으라고 말이다.
“먹보 메타도 작정하고 하자면 나쁘지 않지. 하지만 이번 일로 느꼈다. 역시 호족과는 연관되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야. 그리고 우리에게는 유르파가 있지.”
조용히 이야기만 듣던 이실리테, 질문을 던진 안느, 환인의 어깨에 앉아있던 환연까지 유르파를 돌아보자 유르파가 뺨을 살짝 붉히며 두 손으로 볼을 감싸 쥔다.
“그러니 만약의 경우 패로 쓸 신분 보장 증명만 있으면 된다.”
=응. 도령의 결정에 반대하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어. 아, 도착했나 보다.=
일행이 탄 마차는 경연 대기자 및 관계자들, 경연과 관계없는 일반인으로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화려한 건물의 정문에 정확히 멈춰 섰다.
근처에 선 마차는 오직 환인이 타고 온 마차 하나뿐.
‘마차에 내려 목적지까지 걷는 걸음이 적을수록 높은 신분이라는 말이 있지만.’
설마 백화점 정문 바로 앞에 설 줄이야.
백화점 총책임자로 보이는 신사 복장의 여자가 수행원과 함께 대기하고 있다가 마차에서 내려서는 환인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인다.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님 일행의 방문을 당 백화점은 열렬히 환영합니다.=
웅성.
“우리는 무장 경연 대회 참관을 위해 방문했을 뿐입니다. 과한 예식은 삼가주시길 부탁하겠습니다.”
=시, 실례했습니다.=
환인은 여자친구들과 함께 고급스러운 복장을 한 자, 상인의 복장을 한 자, 모험가와 탐험가의 복장을 한 자 수십 명의 시선을 받으며 백화점 안으로 들어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