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6화 〉 300 시하=사이지=위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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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붉게 물든 채 잠든 영주를 안고 참모를 따라 7분 정도 걸은 환인은 저번에 한 번 와봤던 영주의 방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입니다.=
앞장서던 부관참모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간다. 환인도 뒤따라 들어가서 공주 느낌이 물씬 풍기는 캐노피의 커다란 침대에 영주를 내려놓았다.
부관참모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영주의 몸무게는 환인 체감에 대략 65kg 정도.
키 170대의 여성치고 몸무게가 조금 나가는 편이지만, 환인도 여자친구들과 꾸준히 대련하고 체력단련을 하며 근력을 키웠기에 이 정도 무게는 크게 부담되지 않았다.
정말 부담이었다면 강령을 했을 것이고.
다른 무엇보다 영주의 몸에서는 뭔가 꽃향기에 가까운 좋은 냄새가 났고 마주 닿은 살결도 부드럽고 말랑했기에 크게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흔히들 미남미녀는 상향 평준화가 이루어져 잘생긴 사람들은 다 비슷비슷해 보이고 못생긴 사람은 밑바닥이 없다고들 말한다.
환인은 니오네브레스에 와서 그 말이 맞다는 것을 몸소 체감했다.
미모가 일정 이상 되면 그때부터는 세세한 밸런스 문제가 되긴하지만 예쁘다는 범주에서 벗어나진 않는다.
물론 그중에서 밸런스가 하늘이 빚어준 것처럼 완벽해 여신처럼 아름다운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단순히 예쁘다 수준에서 그쳤다.
때문에 환인은 여자의 아름다움을 측정할 때 얼굴뿐만 아니라 몸도 보기 시작했다.
외모는 비슷할지라도 안아보면 모두가 느낌이 다르다. 속살도 사람마다 모두 다르고 젖가슴도 감촉이 크기만큼이나 모두 달라 미녀 / 추녀로 나눌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 영주는 부유하고 부귀하게 살아왔으며 꾸준히 몸을 단련했고 각성한 직업자이기 때문인지, 실제 나이와 신체 연령이 완전히 달랐다.
자식까지 본 나이지만 외모적 연령은 20대 후반, 신체 탄력은 오히려 더 젊어 20대 초중반으로 느껴질 지경.
당연히 몸매도 훌륭하며 젖가슴의 형태도 무너지지 않았고 몸에 튼살과 주름은 일절 없었다.
즉, 7분간 나름 힐링이 되는 시간이었다는 뜻.
미궁 5층에서는 추위 탓에 미궁 안에서 여자친구들의 살결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했었다.
영기 흡수라는 핑계도 있지만, 자칫 그 행위를 하다 감기에 걸리기라도 하면 큰 문제가 되니까. 때문에 약간이지만 욕구 불만 상태였는데, 영주를 안고 오느라 밀착하며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느낄 수 있었기에 힘들지는 않았다.
=으응…….=
익숙한 침대에 누워서일까. 작은 비음과 함께 몸을 뒤척이느라 옷차림이 흐트러지며 치마 아래로 머리카락색과 흡사한 팬티와 셔츠 깃 사이로 부푼 가슴골이 드러난다.
거기에 찰나의 순간 시선이 머물렀지만, =성자님.= 환인은 부관 참모가 부르는 소리에 자연스럽게 시선 처리를 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주제넘게 한 마디 말씀드리자면…… 부디 영주님을 미워하지 말아 주십시오.=
“…….”
=타인에게 베푸는 호의와 친절이 무조건 당사자에게 좋은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메마른 음식을 주는 친절, 눈이 좋은 사람에게 귀금속으로 장식한 화려한 안경을 선물하는 것은 의도가 없다면 무식한 것이고 의도가 있다면 간악한 행동이지요.=
“영주님이 무식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리 말할 수 있을 만큼 영주님께서는 태어날 적부터 높은 자리에 계셨기에 악의없는 친절에 무감각하다는 뜻입니다. 성품은 선량하시지만, 분위기를 읽고 남을 배려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기에 벌어진 실수이지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자면 수십 년 지기 불알친구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한 친구 병문안을 가서 과일바구니와 꽃다발을 던져주며 “이새끼 뒤지기 직전이라더니 멀쩡하네 ㅋㅋㅋ” 인사하는 것과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상대는 불알친구가 아니라는 것.
그렇기에 화나고 마음 상하는 게 정상이며 자신도 이해한다고 말하는 부관참모다.
=성자님에게서 이실리테 경을 빼앗으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영주님은 말 그대로 백지처럼 새하얀 이실리테 경의 성장지를 위르트 가문의 화려한 용지로 바꿔 드리려는 의도였을 뿐.=
경력서의 종이가 하품의 갱지??에서 고급 설화지雪花?로 바뀌었다고 소유자나 경력서의 기재 사항이 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차이를 아는 사람은 태도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함부로 다뤄도 되는 대상에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대상으로.
=영주님은 그 점을 위하여 움직이셨으나 과정이 나쁘면 결과도 나빠지는 법입니다. 영주님께서도 실례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으셨고 성자님께서 마음 상하셨다는 점 또한 인지하신 만큼…….=
부디 잠시만이라도 감정을 내려놓고 진솔하게 영주와 대화를 한 번 나누어 주십사하는 부탁이었다. 그러면 오해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여러모로 부관이 할 수 있는 발언의 수준이 아니었기에 환인은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에센셀 님은 평범한 부관이 아니시군요.”
=핏줄로 따지자면 영주님의 고종형제가 됩니다. 그 때문에 영주님께서 저를 가까이 두시는 것이지요.=
그리 대답한 부관은 의자를 가져와 침대 머리맡에 놓은 뒤 =부탁드립니다.= 환인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방을 빠져나갔다.
“…….”
기다려달라는 의미가 담긴 의자를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의자에 앉아 곤히 자고 있는 영주에게 시선을 주며 소리 없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있었던 훈련장에서의 일을 떠올려본다.
위르트 성에 복귀한 뒤 마주친 영주를 본 순간 위르트 가문에 있어 이실리테의 의미가 상상 이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관심이 극심해질 거라는 사실도.
이실리테에게만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여러모로 자신에게 이롭지 못한 현상이다.
그래서 방법을 떠올렸다.
호우가 내려 강물이 불어날 경우, 강이 일직선이면 유속이 극심해진다. 하지만 뱀처럼 구불구불하다면 유속이 비교적 감소하는 법.
이실리테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극심하면 다른데 신경쓸 거리를 늘어주면 될 일이지.
그들의 생각과 상식을 뒤흔들어놓을 요량으로 매일 치르는 훈련 일정에서 조금 더 자신의 실력을 드러냈다.
영주와 부관의 반응을 본다면 의도는 꽤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듯 하다.
=으응… 무울…….=
표정이 살짝 찡그려지며 물을 호소하는 영주의 모습에 환인은 침대 옆 작은 탁자에 마련된 화려한 은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컵을 영주의 손에 쥐여주었다.
하지만 물을 몸이며 침대에 다 흘릴 모양새라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영주의 등을 살짝 받쳐주며 입가에 잔을 기울여주었다.
꼴깍꼴깍, 물을 천천히 마신 시하=사이지는 차가운 물의 감각에 이성이 어느 정도 돌아오며 이마에 손을 올렸다.
머리야…….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여긴 내 방? 언제 돌아왔……?
문득 누군가 자신의 등을 받쳐주고 있다는 걸 깨닫고 돌아본 시하=사이지는 화들짝 놀라 침대 위를 한 바퀴 데굴 굴렀다.
그바람에 새하얀 치마가 밀려 올라가며 보드라운 느낌의 레이스 팬티가 드러났지만, 팬티를 노출했다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고 환인이 있다는 것에 놀라 손을 떨며 그를 가리켰다.
=서, 성자. 그대가 왜 여기 있는 거…….=
말하다 이전의 기억이 떠오른 영주는 두 손을 들어 머리카락색만큼이나 분홍색으로 물든 얼굴을 가렸다.
“다 생각나셨습니까.”
=……미안해요. 비무로 흥분한 상태에서 술을 마셨더니, 취기가 확 올라서…….=
성자의 앞이라고 무게 잡느라 와인을 딱 두 잔만 할 생각이었는데 설마 한잔에 만취해버릴 줄이야.
술로 분위기를 잡은 뒤에 좋은 분위기에서 서로 간에 생긴 갈등을 해결하고 검희의 서포트와 백업 종류 및 지원 방안 등을 논의할 생각이었는데 술 때문에 다 망쳤다.
시하=사이지가 여러모로 자괴감을 느끼는 모습에 환인은 부드럽게 웃는 얼굴을 꾸며내며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위르트 가문의 주인께서 보여준 귀여운 모습을 본 대가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긴가민가했지만 지금 확신했어요. 환인, 당신은 절 평범한 여자로 취급하는군요?=
“처음 뵌 그날 제 앞에서 모든 것을 드러내셨을 때부터 영주님을 여자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만…….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기분 나빴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저, 여자로 보여진 것이 얼마 만인가 싶어서.=
“이상하군요. 영주님은 누구보다 여성스럽습니다만.”
환인은 진심을 담아 그렇게 물었고, 두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시하=사이지는 어이없기도 하고 지금 이렇게 얼굴이 뜨거워진 것도 남사스러워 헛웃음을 흘렸다.
문득 아직 팬티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에 무릎을 모으고 치마를 정돈하며 말한다.
=7급, 그것도 승급한 직업자는 성별을 초월한 무언가로 보는 경향이 커요. 여기에 위르트 가문의 가주이자 헬루멘의 영주면 여자이기 앞서 가주, 영주로 먼저 인식하죠. 여자라는 건 저 아래 4, 5위쯤 될까요.=
“그렇습니까.”
=여자라는 자각을 잊지 않기 위해 구두와 드레스를 입고 다녔지만, 솔직히 말해서 초창기에는 체통을 차리라는 말을 더 많이 들었어요. 지금은 그저 유별난 취미를 가졌다고 치부되고 있죠…….=
술기운 때문일까. 솔직한 속내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좀전과는 다른 의미의 자괴감이 드러나는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니 시하=사이지가 문득 생각났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 그보다 제가 어떻게 여기에 온 거죠? 설마 당신이 절 여기까지 데려온 건가요?=
“예. 영주님의 부관분이 자신은 영주님의 몸에 손댈 수 없다며 대신 부탁하셨기에 안아서 모셔왔습니다.”
=…….=
그녀석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까지 생각하던 시하=사이지는 눈을 흡 떴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자가 손을 뻗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져주고 있었던 것.
아까 한바퀴 구르면서 엉망이 됐었나? 하지만 자신과 시녀를 제외하면 누구의 손도 닿지 않았던 머리카락인데…….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무감정한 손길이 아니라 감정이 깃든 타인의 온기를 마지막으로 느꼈던 게 언제였더라.
“남들이 뭐라 하든 신경쓰지마십시오. 시하, 당신은 누구보다 아름다우며 여성스러우니까요.”
=…….=
아련하게 풍겨오는 남자의 체취. 귀를 간지럽히는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 머리에 살짝살짝 느껴지는 손가락의 온기.
시하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건…… 무슨 향기일까. 남자 체취라고 보기에는 강도 높은 훈련 일정을 이어갈 때 남자 기사들에게서 맡아지던 불쾌한 냄새와는 다르다.
뭔가 청량하면서도 계속 맡고 싶어지는 그런, 가능하다면 향수로 만들어 계속 맡고 싶은 가슴 설레는 향기.
‘아.’
다시 아랫배가 욱신거리며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낀 시하는 눈썹을 팔? 자로 꺾었다.
이런 느낌은 생전 처음이라 적잖이 당황했다.
이게 정욕이 타오른다는 것일까.
남편이었던 자와 결혼에 사랑 같은 것은 없었다. 잠자리 또한 무미건조했으며 남편이라는 자에게 성적인 충동이 드는 일 또한 없었다.
그저 후손을 잇기 위해 조건에 맞는 남자를 데려와 결혼했으며 그저 대가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해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자식을 낳았다.
잠자리를 마지막으로 했던 것도 막내를 밴 27년 전 그날이 끝이었다. 그리고 2년 후 남편은 죽었고 자식은 유모들에게 모두 넘긴 뒤 재혼도, 애인도 없이 오직 훈련과 정무만을 껴안고 살아왔다.
이런 삭막한 삶 속에서 남녀 간의 사랑을 겪어본 적이 없었던 시하는 아랫배에서 올라오는 불가해한 충동을 술의 기운에 휩쓸려 사랑이라고 착각하기에 이르렀다.
“……!”
환인은 갑자기 자신을 덮치는 영주의 행동에 눈썹 끝을 살짝 세웠다.
침대에 눕게 된 자신의 위로 연분홍색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쏟아져 내린다.
좀전보다 더욱 붉어진 영주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작게 흔들리는 눈동자. 조금 거칠어진 숨결. 피부에 느껴지는 상대의 열기.
=…….=
“…….”
시하와 환인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잠시 후 시하가 흥분을 억누르는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 이대로 마음 가는 길을 따라가면… 실례가 되는 걸까?=
쉽군. 조금 건드렸다고 홀라당 넘어오다니.
다르게 말하면 자신의 가치가 8급 호족에게도 통한다는 뜻이겠지. 너무 큰 신분의 차이가 존재한다면 이성이 이런 본능적인 행동을 가로막을 테니까.
그리고 환인은 본능적으로 영주가 지극히 수동적인 섹스를 해왔고 그마저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헬루멘에 도착한 그날, 영주에 대해 알아보러 다니던 중 영주의 남편은 25년도 전에 병사했다고 들었다.
몸이 허약했다면 잠자리도 만족스럽지 않았겠지. 거기다 이런 성격의 여자라면 간혹 뜨거워진 몸도 훈련으로 풀어냈을 가능성이 클 터.
그렇다면 최소 25년, 최대 27년은 남자와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훗, 작게 웃은 환인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영주의 손목과 어깨를 잡고 가볍게 몸을 돌려 위아래를 바꾸었다.
삽시간에 밑에 깔리게 된 시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성자의 얼굴에 질끈 눈을 감았다.
쪽.
입술에 닿는 따스하면서도 이상한 감촉이 2초 정도 머무르다 떠나가고, 다시 눈을 뜬 시하는 어리둥절해했다.
이게 무슨 뜻이지?
환인은 살짝 웃음 지었다.
말 그대로 처녀나 다름없는 반응. 이정도라면 명예 처녀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리드하는게 저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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