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305화 (305/813)

〈 305화 〉 299 영웅의 도시 헬루멘

* * *

=성함이…… 예, 이실리테 경. 경의 대련을 지켜보고 그만 가슴에 불이 붙고 말았습니다. 혹시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시다면, 저와 대련을 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는 전투 술사로 스승님과 전혀 다른 색다른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실례합니다. 저는 영웅 기사단의 서열 7위, 스아람 리레론드라고 합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대련 상대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제 주 무기는 성자님과 같은 창입니다.=

=저어… 안녕하세요? 저는 드아루 올머스라고 해요. 영웅 기사단 소속이고요. 아직 몸이 덜 풀리셨다면 저와 대련 한 번 해보시는게 어떨까요? 저는 검방전사에요.=

경쟁적으로 비무 요청을 하는 영웅 기사들의 모습에 이실리테와 안느는 순간 눈을 끔뻑였다.

왜 우리한테 비무를 신청하는 거지? 하면 더 강한 사람한테 해야 실력이 늘 텐데?

=아니, 누님 잠깐만요. 이러는게 어딨어요. 누님은 전투 술사잖아요. 지금은 검기 단련을 위해 동생한테 양보 좀 해주시죠?=

=동생아. 적이 상대의 타입을 가려가면서 찾아온다디? 꼬우면 먼저 움직이지 그랬어.=

=아 누님, 제발.=

=잠깐, 선배. 제가 먼저 왔다고요!=

=쓰읍. 드아루, 저번에 내가 핵심 소재를 선물로 준 거 기억 안 나냐. 좀 양보해라.=

=그건 그전에 제가 드렸던 선물의 답례품이었잖아요!=

그녀들은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무수한 비무 요청, 그리고 자신들과 먼저 붙어보려고 자기들끼리 다투는 모습에 환인을 돌아보았지만, 환인은 어느새 영주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깐 고민했지만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실리테, 직업은 5급 검희입니다.=

=잘 부탁해. 땅신 교단 본단에서 정식 인가를 받은 6급 성투사, 안느야.=

그렇지않아도 그녀들 또한 패배감에 찌든 이 기분을 어떻게든 하고 싶은 상태였다.

보름 가량 환경 때문에 대련하지 못하다가 오늘 좀 매콤한 맛을 봤더니 멘탈이 조금 흔들렸던 탓이다.

서로 아픈 곳을 보듬어주는 것처럼 차례대로 비무를 진행하는 자신의 기사들을 본 시하=사이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누구도 환인에게 대련을 신청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 자신처럼 눈앞의 남자에게서 넘을 수 없는 벽을 느꼈기 때문이겠지.

=영웅 기사들이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네요. 다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녀석들이라 그대한테도 비무를 부탁하지 않을까 했는데.=

챙, 채쟁­

타당. 쾅, 퍼버벅­

“영주님께서 옆에 있어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가주이지만 영웅 기사단의 기사단장이기도 해요. 단장이 옆에 있다고 하고 싶은 말을 참는 놈들이 아니라는걸 아니까 하는 말이죠.=

피식 웃은 시하=사이지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뜨거운 눈빛으로 환인을 응시하며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자. 피곤하지 않으시다면 한 수 지도 부탁해도 될까요?=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일입니다.”

=고마워요.=

저 녀석들은 그래도 된다. 무서우면 피하는 것은 살아있는 동물의 본능이니까. 하지만 그들을 이끌고 있는 자신까지 그럴 수는 없다.

그리고 최고급 방어술의 대가와 또 언제 붙어볼 수 있을까.

듣기로 파르히스트의 검은 노계가 최고급 방어술의 대가라 하기에 언제고 그와 붙고 싶었던 시하=사이지였다. 그리고 자신이 보기에 눈앞의 남자도 최소 최고급 방어술을 달인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남자다.

환인과 시하=사이지는 동시에 살짝 웃으며 비어있는 무대 위로 올라갔다.

=헉, 영주님이 성자님과 붙으신다.=

=비무중이지 않은 놈들은 모두 모여!=

=집합!=

무대 주변으로 영웅 기사단의 기사들이 먼저 둘러싸고 그들의 종자들이 층을 만들듯이 뒤에서 모여든다.

그중 서열 3위와 서열 5위가 긴장한 얼굴로 목검과 목창을 들고 와 두 사람에게 공손히 넘겨주었다.

목검의 그립을 쥔 시하=사이지는 불현듯 수십 년 전, 꼬맹이일적 처음 목검을 들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자신의 상대는 아버지였었지. 그때도 지금처럼 심장이 쿵덕거렸었는데…….

목창의 상태를 확인하는 환인의 얼굴에 온 신경이 꽂힌다. 주변의 소음이 차츰 사라지고 시야 한가득 남자의 얼굴만 들어와 다른 것이 안 보이는 생경한 기분.

“준비됐습니다.”

=…….=

시하=사이지는 긴장감에 목울대를 울렁였다.

얼핏 봐서는 초짜가 처음 창을 잡아본 모습이지만 이상하게도 빈틈이 안 보인다. 그리고 눈을 깜빡였더니 이번에는 온몸이 허점이다.

어딜 공격해도 통할 거 같은데 어딜 공격해도 막혔다가 반격받을 것 같은 미칠듯한 기분.

수미터 두께에 수십 미터 높이의 철판을 마주해도 이보다 덜 막막 할 거 같다.

=후우.=

짧게 숨을 내쉰 시하=사이지는 마음을 비우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 그리고 최고의 공격을 가했다.

수십만 번 반복해온 보법, 거기에 단순한 내려치기지만 수십 년의 세월 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수백 번 휘두른 검격.

그리고 자신을 승급으로 이끌어준 일검.

환인은 눈에 이채를 띄웠다. 평범한 내려치기라는 것은 자세와 근육의 움직임에서 읽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다가오는 영주가 마치 검과 하나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목검이 아니라 수백 배로 크기를 키운듯한 초 특대 검이 떨어지는 감각.

이것이 기백과 위압에 의한 심리적 위축 현상임을 단번에 간파한 환인은 상대의 8수 정도를 예측하며 영주의 손목을 찔러 들어갔고.

타다다닥­!

뻑!

삽시간에 반격에 반격, 그리고 반격의 반격을 가해 거머리처럼 붙으려 하는 영주의 검을 6수째에 창으로 꽈배기 만들듯이 꺾으며 튕겨낸 직후 왼쪽 젖무덤을 정통으로 찔렀다.

심장이 있는 위치, 실제 창이었다면 심장이 찔려 즉사했을 일격이었다.

=아…….=

시하=사이지는 천천히 물러나는 목창의 끝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목검을 내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단순한 목창, 그렇다고 압도적인 거력이나 위상력이 담겨있지도 않은 평범한 찌르기였기에 위상력으로 보호받는 육체에는 피해가 1도 없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패배라는 단어가 낙인처럼 찍혔다.

유사 빛의 검을 쓰지도 않고 기술 대결에서 졌다.

시하=사이지는 뿌득, 목검을 움켜쥐고 세우며 다시 말했다.

=한 번 더 부탁해요.=

위상력을 몸에 돌려 신체능력을 끌어올린다. 그녀의 몸을 휘감은 번개 같은 아우라가 두 배가량 빠르게 치기 시작하며 빛이 환해진다.

환인도 하급 정령을 몸에 강령한 뒤 목창을 세우고 유사 빛의 검 세 자루를 띄웠다.

“…….”

=…….=

3초 정도, 서로를 응시하며 나름의 수를 읽은 두 사람은 동시에 뛰어들어 서로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그리고 시하=사이지는 첫 합에 패배를 직감했다.

목창이 자신을 노리는 지점이 1초에도 무수하게 변화한다. 목, 오른쪽 가슴, 어깨, 무릎, 서혜부, 팔목, 정강이, 하복부, 이마.

그리고 헬루멘을 가로지르는 겨울의 헬라 강처럼 차갑고 무거운 얼굴. 그리고 그 얼굴 주위로 날아오르는 세 자루의 빛의 검.

시하=사이지는 방어 스위치를 올리고 이를 악물며 1초에 10번 넘게 쏟아지는 모든 공격을 막고 쳐냈다.

중간까지는 수를 읽고 계산했지만, 그 후부터는 아무 생각 없이 오직 여우의 본능으로만 무기를 휘둘렀다.

‘아. 이래서 검희와 성투사가 무념무상으로 무기를 휘둘렀던 거구나.’

대충 80번 정도 무기를 쳐냈을까. 빛의 검과 목창이 몸을 치고 때리는 횟수가 늘기 시작했다.

자신의 자세를 흔들려는 게 느껴지지만, 시하=사이지는 자세가 흔들릴만한 타격을 위주로 걷어내며 어떻게든 창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7급으로 승급하며 얻었던 기교, 위상력 가속을 써 평소의 10배 속도를 이끌어낸다면 저 공격을 모두 뚫고 들어가 공격을 넣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성자는 오직 기술만으로 자신을 상대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은 뭔가. 위상력을 돌려 신체 능력을 끌어올린 상태이지 않나.

지금도 패배감이 가슴에 진득하게 들러붙고 있는데 그런 짓까지 했다간 재기할 수 없을 거다.

=흐아압!!=

무아지경 속에서 쉬지않고 검을 휘두르던 시하=사이지는 어느 한 지점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환한 빛을 느꼈다.

무의식중에 그 점을 찌른 순간.

콰자작!

환인의 목창이 산산이 조각나 주위로 쏟아져 내렸다.

……….

숨죽인 기사들.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해진 훈련장.

환인은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느끼고 손을 뒤로 돌리며 웃었다.

“제가 졌…….”

그보다 한발 앞서 목검을 내린 시하=사이지가 쓴웃음을 머금은 채로 선언했다.

=제가 졌어요. 십년 내에 이만큼 집중했던 적이 있을까 싶을 만큼 물아일체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당신에게는 안됐군요.=

“…….”

=상황은 명백해요. 당신은 일격도 허용하지 않았고 저는…… 82번 공격을 허용했었나요? 전장이었으면 너덜너덜한 고깃덩어리가 되었겠죠.=

환인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일부러 빈틈을 보여주어 무기 파괴를 유도했고 그걸 빌미로 패배를 선언하려 했는데 설마 당사자가 패배를 선언할 줄이야.

시하=사이지는 담담한 남자의 모습에 불현듯 궁금증이 치밀었다.

=대답해줘요. 당신은 몇 수를 읽었나요?=

“…….”

환인은 대답 대신 작게 미소만 지었고, 시하=사이지는 그에게 기술적으로 최소 너댓 수는 떨어진다고 이해했다.

그랬더니 졌는데도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하다.

마악 입을 열려던 시하=사이지는 문득 피 냄새를 맡았고, 등 뒤로 돌린 환인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펴본 순간 얼굴을 굳혔다.

목창이 부서지며 충격이 손아귀에 전달되었는지 손바닥이 터지고 피가 흘러 엉망이었다.

=성술사.=

성술사를 호출해 환인의 손바닥을 치료하하게 시킨 시하=사이지는 비무의 여파로 달아오른 몸을 식히려 노력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약해도 너무 약한 육체야. 저런 육체로 그만한 기술을…….’

만약 저 허약한 육체를 보강하게 되면 얼마나 강해질까.

저 파르히스트의 검은 닭도 아마 하나에 수백 금화씩 하는 마도기를 온몸에 치장하고 있을 테니…….

치료받아 손바닥이 멀쩡해진 그에게 다가간 시하=사이지가 웃으며 물었다.

=긴장했더니 목이 마르는군요. 한 잔, 어떠신가요?=

“예. 저도 목이 마르던 참이었습니다.”

술렁이는 무대를 떠나 훈련장 한구석에 따로 마련된 바로 자리를 옮긴 환인은 털이 하얗게 센 인랑족 바텐더가 능숙한 솜씨로 와인을 따서 디캔팅까지 하는 것을 구경했다.

전용 잔에 전용 기구까지 있을 줄이야. 그런데 칵테일은 왜 없는 걸까.

자신의 잔에 1/3정도 따라진 와인을 단숨에 비운 시하=사이지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환인, 이름으로 불러도 되죠?=

“예.”

=절 이겼는데도 담담한 표정이군요. 어디든 가서 절 이겼다고 하면 즉시 기사로 채용되는 게 당연할 정도인데.=

환인도 피처럼 붉은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입 안에 신맛과 단맛, 떫은맛이 누구 하나 튀지 않고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비강에 이름 모를 꽃향기가 가득 차는 것을 느끼며 삼킨 환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비록 기술로 영주님을 이겼다곤 하나, 위상력을 끌어올리고 본 실력을 내면 지는 것은 저입니다. 승적을 좋아하기에는 염치가 없고 괴로워하기에는 의미가 없으니 그저 그럴 뿐인 일이지요.”

=……다앙신은 정말로 특이하군요. 후우, 이때까지 만나본 어느 영혼사와도 달라요….=

“저는 다른 영혼사를 먼발치에서 한 번만 봤을 뿐이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군요.”

=그러게요…. 뭐어가 다른걸까요오?=

“……?”

말장난인가싶어 옆을 돌아보자 시하=사이지의 얼굴이 그새 자기 머리카락색보다도 더 진하게 물들어있었다.

“……혹시 취하셨습니까?”

=아안취했그등요. 한쟌 더.=

=……영주님. 취하셨습니다.=

=앙치핶다니깡? 술 내나.=

“…….”

=…….=

고작 와인 한 잔에 취했다고?

근접 직업자로 각성해서 신체능력이 크게 올랐다고 해도 술에 엄청 강해지는 것은 아니라는걸 여자친구들과 대작하며 안 환인이다.

하지만 도수가 30도 정도 된다곤 해도 고작 한 잔에 취하는 것은 어떨까 싶은데.

환인은 바텐더와 말없이 시선을 나누었다. ‘영주님이 원래 술에 약하십니까?’, ‘아닙니다. 주량이 맥주 5잔에 와인 4잔이십니다.’, ‘그걸 두고 약하다고 하는 겁니다만.’, ‘죄송합니다.’

‘위상력을 돌려 혈류 흐름이 빨라진 상태에서 술을 마셔서인가.’

=슈울, 더어 내노으라니까아~.=

어서 술 내놓으라고 웅얼거리는 영주를 바라보며 그냥 두고 갈까 살짝 고민하던 환인은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갈색 여우귀에 꼬리가 하나인 인호족 여성.

단정한 제복 차림으로 조금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던 여자는 환인이 돌아보자마자 걸음을 빨리해서 도착하더니 가슴에 손을 올리고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성자님. 영주님의 수석 부관참모 에센셀 리타입니다.=

“예. 환인입니다. 영주님께서는…….”

=취하셨군요.=

“…….”

반쯤 바에 기대어 늘어진 영주를 담담하게 바라보는 모습이 의미심장하다.

=영주님은 원래 아이 입맛이신데다 술도 약해서 남들 앞에서는 입에 잘 대지도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렇습니까.”

=예. 송구한 부탁입니다만, 영주님을 부축해 방까지 모셔다 드리시면 안 되겠습니까. 부하이자 신하된 도리로 영주님의 옥체에 손을 대기 어려워서.=

그렇다기에는 자신의 앞에서 옷을 훌렁 벗고 시녀들에게 시중받아가며 갈아입기까지 하던데.

혹시 함정은 아닐까. 수작질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그런 수단을 쓰기에는 많이 늦은 상황이다.

무엇보다 방금까지 보여준 모습도 솔직 그 자체였고.

“알겠습니다.”

뭐, 이런 실수가 누적되고 중첩되면 중첩될수록 부채의식이 커질 테니까.

환인은 가볍게 마음먹고 어느새 반쯤 눈이 감긴 채 웅얼거리는 연분홍빛 머리카락의 미녀를 바라보다가…….

=오.=

영주를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리고는 부관참모를 돌아보았다. 오? 라니. 뭐가 오? 인가.

=남자다우십니다. 그럼 이쪽으로.=

“…….”

설마 잠자리를 유도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거라면 환인은 당당하게 응해주겠다고 생각하며 저쪽에서 걱정을 드러내는 유르파에게 걱정 말라는 뜻에서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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