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304화 (304/813)

〈 304화 〉 298 영웅의 도시 헬루멘

* * *

영혼사가 검희의 원초 기술인 다중 검기를 다룬다?

그 말은 성자가 영혼사가 아니고 검제라는 말이 되는데 검제라기에는 드러난 영혼사의 흔적이 너무 뚜렷하다.

너무 큰 충격에 시하=사이지의 머릿속이 고양이가 가지고 논 실타래처럼 엉켜들어가던 중, 옆에 서 있던 유르파가 그녀의 의문을 빠르게 해결해주었다.

=시하 사이지 위르트 영주님. 성자님이 쓰고 계신 기술은 다중 검기가 아니라 다변성 방어 장치를 극성까지 다루고 있으신 거랍니다.=

=…아, 아아. 맞아. 그렇군.=

뒤늦게 부관 참모에게 보고받은 사실을 떠올린 시하=사이지는 그럼에도 놀람을 가다듬지 못했다.

퍼버벅­빠각, 콱, 펑!

타다닥, 따닥­ 쾅! 부우웅­

화려한 보법 사이로 보기에도 예리한 공격이 2미터 길이의 두꺼운 중철 대검을 통해 펼쳐진다.

성자가 금방이라도 여러 조각으로 나뉠 듯이 위태로워 보이지만, 놀랍게도 성자는 슬쩍슬쩍 한 걸음, 혹은 반걸음만 움직이며 그 모든 공격을 흘려내거나 피하며 사이사이 반격을 넣는다.

최고급 방어술의 진수다.

=세상에…….=

자신도 막기와 쳐내기 단 두 가지만 상上­중급으로 익힌 사대 방어술을 전부, 그것도 전력을 다하는 검희를 상대로 하등 힘들이지 않고 펼쳐내다니.

얼마나 절묘한 타이밍에 흘려내고 반격하고 쳐내는지 세 가지 기술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예술적인 기교다.

퍼벅, 뻑!

=윽, 큭!=

세 자루의 패널을 공격과 방어, 그리고 견제에 유기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자 검희가 어쩌지도 못하고 시종 맞기만 한다.

시하=사이지는 손안에 땀이 맺힌 것을 느끼고 손수건으로 닦으며 검희의 자리에 자신이 선 모습을 잠깐 상상해보았다.

만약 자신이 저 자리에 있었다면 성자의 상대가 되었을까?

=핫!=

‘저런!?’

성자의 공격 후 자세가 돌아오는 절묘한 타이밍, 몸의 과부하를 감수하면서까지 순간 이루어진 검희의 쾌속 맹공 찌르기에 시하=사이지가 경악했다.

1초 후 성자의 몸이 반으로 갈라질 상황. 아무리 무대에 생존 보조 술법이 붙어있다지만 몸통이 갈라지면 죽고 말텐데……!

콰당!

=윽.=

...0.5초 후 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진 쪽은 검희였다.

등부터 떨어진 검희는 공처럼 튕겨 나가며 벌떡 일어섰지만, 충격에 폐가 놀랐는지 쿨럭거리며 기침을 격하게 토해낸다.

=……??=

=뭐,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

시하=사이지를 비롯한 두 명 정도만 뒤늦게 상황을 눈치챘다.

패널 한 장이 어느샌가 검희의 무게 중심축이 되는 발밑에 깔렸었고, 검희가 찌르기를 가하는 순간 그 패널이 움직여 자세를 흔들었다.

그에 따라 검의 궤적이 바뀌는 것을 성자의 봉이 검희의 몸을 어루만지듯 만져 완전히 비틀어버리는 동시에 등을 떠민 것처럼 쳐낸 것. 검희는 자신의 힘으로 땅을 뒹군 거다.

=세상에…….=

성자는 무슨 눈이 사방에 있기라도 한 건가? 아니, 그보다는 검희의 공격을 유도해냈다고 보는 게 맞는데?

하지만 유도해냈다고 조금 전처럼 예술적인 한 수를 펼칠 수 있나? 이건 숫제 미래를 보는 느낌이잖아.

환인과 이실리테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는 대다수 기사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최소 기술만으로는 영주님과 함께 들어온 저 검은 머리의 남자를 당해낼 수 없다고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대련이 계속 이어진다.

쿵, 콱!

=흑, 큭!=

“이실리테, 몸이 굳은 것 같군. 보름간 훈련을 건너뛰었다곤 해도 상태가 심각해.”

=죄송합니다!=

퍼버벅, 퍼걱.

=끅…!=

“재각성하며 신체 능력은 대폭 상승했지만, 반작용으로 세심함과 세밀함이 떨어졌다. 힘에 휘둘리는 게 훤히 보인다. 동작이 크다. 보폭이 쓸데없이 넓어지고 있다.”

세상 담담한 목소리. 봉을 휘두르면 몸에 힘이 들어가니 당연히 목소리도 떨리거나 커지고 격해져야 하는데 잔잔하기 그지없다.

그 말은 힘을 거의 쓰지 않고 있다는 뜻. 설마 상대의 힘을 이용해 몇 배로 되돌려주는 기법까지 터득했다는 건가?

기사들이 아연해하고 있을 때.

콱, 콰득.

횡베기를 하려다 슬개골을 강타당하며 공격이 풀린 이실리테는 아랫배와 명치를 연달아 찔리고는 한쪽 무릎을 풀썩, 꿇고 격통의 신음을 흘렸다.

“나는 이형종이 아니다. 기술도 모르는 무식하고 덩치 큰 이형종이라면 그 정도도 통하겠지. 하지만 지능이 있다면 그 단순한 공격에 금세 비웃음을 살 거다. 집중해라.”

=쿨럭. 넵!=

시하=사이지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대련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성자가 가르치는 건 검술도 뭣도 아니다.

최고급 방어술을 바탕으로 기술에 얽매이거나 연연해 하지 않고 짐승처럼 오감에 더해 육감으로 적을 상대하고 제압하는 극한의 실전 전투법.

기사단에서 교육하는 방식과 자신이 해온 수련 방식과는 대척점에 있는 야만 그자체인데, 비효율의 극치인 훈련법인데 어째서 성자를 이길 길이 보이지 않는 걸까.

성난 짐승처럼 날뛰는 검희를 상대로 흐르는 물처럼, 불어오는 바람처럼 모든 공격을 피하거나 흘리며 약점을 찌르는 성자.

어떻게든 성자에게 단 한 번의 일격이라도 먹이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 대검을 휘두르는 검희 모습에 자신의 모습이 덧씌워진다.

=하아아…….=

시하=사이지는 전신에 달리는 전율과 밑에 구멍이 난 것처럼 기운이 빠져나가는 탈력감을 동시에 느꼈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직업자와 비직업자의 차이점을 제거하고 순수한 육체와 기술로 붙는다면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다.

그렇다고 직업자의 어드밴티지를 모두 끌어와도 저 남자를 이길 수 있을까?

마치 손이 세 개 더 달린 것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유사 빛의 검. 그리고 모든 공격을 읽고 피하거나 흘리거나 반격을 넣는 본신의 기술.

방심하면 앗 하는 사이 목이 꿰뚫려 죽겠지. 방심하지 않더라도…….

“어딜 보고 있나.”

퍼벅!

=꺅흑….=

……검희처럼 신경 분산을 유도당해 드러난 빈틈으로 빛의 검이 꽂힐 것이다.

‘폭군룡의 미궁 앞에서 시비 붙은 5급 직업자의 목을 단숨에 쳐날 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어.’

검희는 땀범벅이 되어가는데 성자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전율이 사그라지고 무력감과 탈력감이 물러가자 그 자리를 기묘한 열기가 채우기 시작한다.

심장이 자궁으로 자리를 옮긴 것처럼 쿵쾅거리고 울렁거린다.

강한 수컷을 만나 깨어나는 암컷의 본능. 강한 씨앗을 품고 싶은 여자의 본능. 시하=사이지는 상상해봤다. 자신의 몸뚱이에 저 남자의 감각과 실력이 합쳐진다면?

만약 그런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는 틀림없이 대륙 최강이 될 테지.

이뤄질리 없는 망상이지만 ‘혹시?’. ‘어쩌면?’하는 생각이 상상의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럼에도 그녀의 두 눈은 환인의 동작을 0.1초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부릅뜨고 있었다.

15분간 환인과 개별 대련을 끝낸 이실리테는 기진맥진해져서 안느와 교대했고, 안느도 비슷한 몰골이 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니.

“자, 지난 폭군룡의 미궁에서 이형종들이 널 공격했던 걸 나 나름대로 어레인지해서 다시 펼쳐보겠다. 그사이에 네가 한 번이라도 공격을 시도한다면 오늘 훈련은 끝이다.”

어레인지? 도령이? 그걸 뚫고 공격을 시도하라고?

아니 그거 말이 안 되는데요. 이형종이 공격할 때도 반격할 엄두를 못 냈는데!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감이 뭉텅이로 깎여나갔고 그 결과 예정된 결말을 맞이했다.

15분간 단 한 번도 반격을 시도하지 못한데다 막는 것조차 제대로 못 해 방패가 흔들리고 틈으로 날아든 공격에 실컷 얻어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당장 성공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훈련의 목적을 달성해낸다면 넌 한 단계 더 성장하겠지. 그게 이형종 전투에서든, 인간형 전투에서든 말이다.”

=으응…….=

“그러니 당분간 이 훈련에 집중하도록 하지.”

안느는 환인의 상냥함이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그냥 좀 더 열심히 하라고 혼나는 게 덜 아플 거 같아.

“이실리테, 충분히 쉬었겠지. 올라와라. 실전 대련이다.”

=넵!=

=응…….=

그리고 부우웅­ 공기가 떨리는 소리와 함께 세 자루 더 출현하는 패널 블레이드.

소리없는 경악이 훈련장의 사람들 사이에서 번져나갔다.

저 유사 빛의 검이 세 자루가 아니라 여섯 자루였어?!

=세 자루로도 답이 없었는데 여섯 자루라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 사람을 이기는 방법이 생각 안 납니다. 선배는 저분과 비무해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겨? 몇 분이나 버틸 수 있는지를 재봐야 할 거다.=

아니나다를까 검희와 6급 혼합 직업자가 이를 악물고 합공하는데도 검은 머리 남자의 옷자락조차 스치지 못한다.

콰광, 콱.

퍽! 콰득.

투두둥. 콰광­

여섯 자루의 검과 한 자루의 봉으로 두 명을 시종일 압도하는 광경은 말 그대로 그들 모두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니, 저기서 저런 공격을 한 이유가 뭐지? 싶다가도 검희가 고관절을 얻어맞고 비틀거리며 자세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 뒤늦게 이해하는 식.

그나마 뒤에서, 옆에서 전투 장면을 한눈에 보고 있어서 알 수 있는 거지, 바로 앞에 있으면 뭐에 어떻게 맞는지도 모르고 땅을 뒹굴 것이다.

헬루멘 최고 무력 집단, 영웅 기사단의 기사들이 프라이드가 인정사정없이 깎여나가는 것을 느낄 무렵 저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누구인지 그 정체가 알려졌다.

=……상급 영혼사님? 저 사람… 저분이?=

=아니, 장난하지 말고.=

=진짭니다. 주군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님이십니다.=

=진짜냐…….=

무휘광의 7급, 8급 직업자가 아닐까 애써 자위했는데 그마저도 못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하지.”

=고,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했어…….=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어 기진맥진한 검희와 성투사의 모습과 정반대로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멀쩡한 성자의 모습에 기사들은 왠지 모를 패배감을 느끼고 탄식과 한숨을 흘렸다.

이건 뭐 어느 정도 차이 나야 ‘나도 저렇게 해보고 싶다.’ 같은 호승심을 불태우지, 뭘 어떻게 해야 저럴 수 있는지 기초부터 이해 안 되니…….

하지만 그들도 놀고먹어서 6급, 7급 직업자가 된 것이 아니다.

대련이 끝나고 환인이 무대에서 내려오자 그때까지 패배감에 휩싸여있던 기사들은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접근했다.

저 남자, 영혼…사님과 손을 섞고 싶은 생각은 죽어도 없다. 지금 붙었다가 나가떨어지면 멘탈을 추스르는 데만 반년은 걸릴 테니까.

그러니 상대적으로 만만해 보이는 그녀들에게 접근하는 기사들이었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