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303화 (303/813)

〈 303화 〉 297 영웅의 도시 헬루멘

* * *

그후 무언가 생각이 많아진 듯한 영주는 환인에게 푹 쉬라는 말을 건넨 뒤 가신들과 함께 돌아갔다.

“…….”

영주가 마지막에 살짝 드러냈던 것은 욕심이었다.

아주 찰나 간의 감정이었지만 예리하게 영주를 주시하는 중이었기에 눈치챌 수 있었다.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사람은 누구나가 크고 작은 욕심, 욕망을 품고 살아간다.

가볍게는 식사로 좀 더 맛있는 걸 먹고 싶다. 쉬는 날 좀 더 재미있는 걸 하며 보내고 싶다 같은.

영주가 보여준 것도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향한 미미한 욕심이었고 그마저도 금방 억눌렀기에 환인은 우려할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여자친구들과 함께 배정받은 객실로 돌아온 환인은 거실에서 마도기 제작 재료와 도구를 늘어놓고 작업 중인 유르파를 볼 수 있었다.

“유르파.”

=앗?! 자기~!=

하얀 천 위에 무릎을 모아 꿇어앉은 자세로 보석을 깎던 유르파는 환인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며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환인의 체취에 기분이 좋아진 유르파였지만, 반가움과 기쁨보다 우려가 먼저 들었다.

앞으로 일주일은 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벌써 오다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으우으.」

=?!=

마악 입을 열려하던 순간 자신의 젖가슴이 짓누르고 있는 환인의 포켓 쪽에서 누군가의 작은 비명이 들렸고, 유르파는 흠칫하면서 가슴을 가리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척이나 환인을 닮은 작은 요정이 그의 가슴 포켓에서 기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이거이거……. 가슴에 압사당할 뻔 할 줄이야.」

=어.=

「자, 준비는 됐으니 다시 와라. 두터운 옷감 너머로도 느껴진 그 감촉, 거기에 압사당한다면 한 줌 후회도 없으리.」

=자, 자기? 얘는…… 뭐니? 요정 같은데?=

자신이 그의 품에 안기면 정확히 가슴이 닿을 자리에서, 두 팔을 벌린 채 당당하게 말하는 자그마한 요정의 모습에 뒤따라 들어온 안느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도령의 피를 매개체로 태어난 요정이야. 원래 상급 정령이 되어야 했는데 어쩌다 보니 요정이 됐대..=

=이름은 환연이에요. 유리 언니, 우리 왔어요.=

=피의 요정……? 앗, 어서들 오렴. 자기도 어서 와. 고생 많았지?=

「잠깐! 한 번 더! 한 번 더 오라니까?! 에잇, 오지 않으면 내가 가겠다!」

유르파는 자신의 가슴골 사이로 살아있는 생물이 쏘옥 들어오는 그 느낌에 힉, 몸서리쳤다.

젖 사이에서 무언가가 살아 움직이는 그 느낌.

유르파는 당황해서 설명을 바라는 얼굴로 환인을 바라보았다.

얘는 뭐니?

“…이름은 환연입니다. 특기는 정령 소통으로 폭군룡의 미궁에서 만났는데 어쩌다보니 동료가 됐습니다.”

중요한 내용은 전혀 포함되어있지 않은 짧은 설명에 유르파가 벙찌자 꾸물꾸물, 그녀의 가슴골 사이에서 머리를 내민 환연이 푸하­ 숨을 토해내며 물었다.

「환인. 이 여자가 네가 말한 다른 1명의 동료인가?」

=말투.=

옆에서 짐을 내려놓던 안느가 유르파의 옆가슴을 검지로 꾹, 누르자 환연이「좋은 압박이다.」 변태처럼 중얼거리며 헤실헤실 웃는다.

“그래. 이름은 유르파다.”

환인은 여자친구들에게 이러는 환연을 볼 때마다 심정이 복잡해졌다.

폭군룡의 미궁에서도 휴식시간 때마다 여자친구들에게 거의 성희롱에 가까운 짓을 했었다.

잠시 쪽잠을 자는 여자친구들의 옷 사이로 들어간다든가 여자친구들의 뺨에 자신의 뺨을 비빈다든가 그녀들이 자리에 앉아있으면 그 사이에 들어가 앉는다든가.

환연은 자신의 피에서 태어나 자신의 성격과 말투를 베꼈다고 했다. 그 말은…… 자신의 마음속에는 여자를 저렇게 좋아하는 습성이 숨어있다는 건가?

「그렇군. 난 환연이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으, 응. 잘 부탁해? 그런데 그, 가슴에서 좀 나와주면 안 될까……?=

유르파와 인사를 나누는 환연을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던 환인은 작게 고개를 저은 뒤 이실리테의 시중을 받으며 법사복을 벗고 얇은 셔츠에 가벼운 바지 차림으로 돌아갔다.

=주인님, 그럼 씻을 준비를 할게요.=

“아니, 잠시 기다려라.”

짝짝, 손뼉을 쳐서 모두의 시선을 모은 환인이 입을 열었다.

“우선 너희의 뜻을 묻지 않고 친선 대결을 결정한 걸 사과하지.”

=아니에요. 주인님이 이유 없이 그러시지는 않으셨을 테니까요.=

=어. 그 상황에서 뭐라도 영주에게 돌려주지 않았다면 그 밑에서는 틀림없이 말이 나왔을 거야. 도령의 제안은 시기적절했어.=

하지만 친선 대련으로 영주가 얻는 이득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던 안느는 구세의 빛을 모두 벗어 손질할 준비를 하며 물었다.

=그런데 그게 영주님한테 도움이 되는 거야? 그분도 바로 제안을 받아들이던데.=

“대련으로 영주가 얻는 것은 무형적인 인지도와 영향력이다. 친선이라는 것은 서로 사이가 좋을 때나, 아니면 사이가 극도로 나쁠 때 쓸 수 있는 패지. 그 내용도 관계성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고. 더욱이…….”

충성이 과도한 자들은 상관의 행동을 자의 해석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그런 자들은 대부분 상관이나 소속된 집단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며, 그 과정에 발생하는 상대의 피해에는 안중도 없는 경우가 태반.

환인이 친선 대결을 제안한 가장 큰 이유는 이쪽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고 그런 자들의 행동을 억제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건 시하 영주에게도 도움되는 일이다.

환인 일행의 실력이 대단하면 대단할수록 그녀의 안목이 조명받는 동시에 환인 일행에게 주어지는 혜택의 당위성이 입증되니까.

=영주는 녹색 성자에게 휘하 기사들 간의 친선 대련을 주선할 정도로 사이 좋다는걸 어필할 수 있다는 거구나.=

“우리는 영주성에 도착하자마자 하루 쉬고 곧장 폭군룡의 미궁으로 향했다. 거기서 눈치 빠른 자들은 나와 영주의 사이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고 파악했을 거다.”

특히 루티아 아슬리드, 파르히스트의 영애라면 말이다.

그런 소문을 불식시키고 이쪽의 관계가 양호하다는 걸 보여주기에 친선 대련만 한 패가 없다.

“거기에 이실리테가 위르트 가문을 배경으로 삼는 과정에서 이미지 형성에도 도움이 될 거다. 영주는 검희 이실리테와 막역한 관계를 구축하고 보다 친밀함을 어필할 기회로 삼아 위르트 가문은 다시 검희를 거두어들였다는 상징성을 얻는 동시에 상급 영혼사와도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사방에 떨칠 기회인 거지.”

명예와 이실리테라는 이름, 검희에 집착하는 그러한 성향 집중 현상은 아마도 다른 귀족들도 비슷할 것이다.

그들은 이실리테와 검희가 아니라 다른 점에 집중할 테지만 아무튼.

웨이포드에서 피가죽 클랜 사건, 파르히스트의 성주와 크라버리 영주가 보여주는 대립 구도 및 태도, 그것들을 생각해보면 호족 사회에 명예라는 것은 곧 사회적 영향력의 측도라고 봐야겠지.

“영주와 가신들이 이실리테를 처음 봤을 때 보인 모습에서 지금의 이실리테가 저들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거라는 걸 깨달았다. 아마도 위르트 가문의 시조가 지금의 이실리테와 말도 못할 만큼 닮았기 때문일 테지.”

=어? 진짜?=

“누구보다 검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그들이 놀라 넋을 놓았을 정도다. 그 이유라면 하나뿐이지 않겠나. 그 ‘이실리테’의 환생처럼 느껴졌다거나.”

=…….=

=…….=

“그러니 그 대련으로 얻을 유, 무형적 이득 정도면 이쪽이 제공해줘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거다. 그 주최 의지도 영주 쪽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이실리테의 배경이 되어주겠다는 것에 대한 보답도 될 것이고.”

=위르트 가문을 이슬이의 배경으로 삼는 건 결정된 거네?=

환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실리테와 안느는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언제나처럼 주인님/도령이 주인님/도령했구나 싶을 뿐.

그때 유르파가 헉! 하고 깜짝 놀라며 이실리테를 쳐다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이슬이 아가씨, 이제 보니까 검희로 재각성했네?! 와아, 축하해!=

=고마워요 언니.=

옆에서 이실리테를 꼭 껴안아준 유르파는 여전히 가슴골에 환연을 끼운 채로 환인에게 정보를 전했다.

환인 일행이 자리를 비운 동안 영주가 매일같이 찾아와 크고 작은 선물을 주고 다과 시간을 가지며 이쪽의 가벼운 의중을 알아내려 했다고.

“음.”

=나랑 친해진 뒤에 자기의 생각을 읽어보려 했나 봐. 그런데 이쪽도 그런 호족들의 암투 같은 것에 조금 익숙한 편이라서? 철저하게 갑을 관계로 트집 잡히지 않을 수준의 예의범절로만 상대했어.=

“그랬군요. 갑자기 영주의 태도가 정중해졌고 사과까지 하기에 무언가 일이 있었나 했는데 유르파 덕분에 긴장감과 위기감이 높아졌었나 봅니다.”

=힉. 사과까지 했니? 의외네.=

=나도 놀랐잖아. 8급이 고개까지 숙일 거라곤 전혀 생각 못했어.=

=그게 그렇게 놀라고 의외인 일인가요……?=

=그럼~? 잘나신 호족님은 자기가 사과할 바에는 그냥 사과받을 상대를 죽여버리는 걸 선택하거나 전쟁을 일으킬 정도인걸? 크라버리 영주를 생각해보렴.=

=아…….=

“아무튼, 그렇게 되었으니 오늘 저녁부터 바로 훈련에 들어간다. 보여주기식이 될테니 조금 빈틈이 없게 갈 거다. 각오하도록.”

언제나 되는 만큼 대련을 해줬었는데 타이트하게 한다고 경고까지 하다니?

이실리테와 안느는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을 다졌다.

객실에 딸린 대형 욕실에서 여자친구들과 함께 묵은 피로를 풀던 환인은 진지하게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욕실 문화를 누구보다 마음에 들어 한 환연이 여자친구들의 알몸에 무척이나 큰 관심과 함께 스킨십의 야욕을 불태웠기 때문이었다.

「히야아. 이렇게 매끈매끈하고 보들보들한 피부라니!」

=가, 간지러워.=

여자친구들의 몸 이곳저곳을 건드려본다거나 대형 물침대처럼 커다란 젖무덤 위에 누워 안락함을 만끽한다거나 자기 머리보다 조금 작은 젖꼭지를 두 손으로 잡아당겨 본다거나.

=흣, 이 변태 요정이 진짜!=

안느는 비누칠한 자신의 젖꼭지를 가지고 노는 환연을 붙잡고 으르릉거렸다.

=너 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게 변태 같은 거야? 도령은 안 이러는데!=

「몰? 라.」

얄밉게 어깨를 으쓱거린 환연은 비누칠 덕분에 기막혀하는 안느의 손아귀에서 쉽게 빠져나와 물 위에 섬처럼 둥둥 뜬 이실리테의 가슴 위로 상륙한다.

그리고 온몸으로 그 부드러움을 만끽하니 가슴섬의 주인이 조금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가슴이 대체 뭐라고……. 그동안 계속 보고 만지고 했으면서 이제 질릴 때도 되지 않았어?=

「최고야. 늘 새로워. 짜릿해.」

=그렇게 짜릿하면 네 걸 만지면 되잖아.=

비누칠을 끝내고 몸에 물을 끼얹으며 안느가 투덜거리자 환연이 고개를 주억이며 이게 진리라는 듯이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내 것은 이렇게 안 크니까. 그리고 가슴의 진가는 자기 거보다 남의 거를 만질 때 드러나지. 진짜 가슴은 크면 클수록 좋다는 말은 인생의 대현자가 생각해낸 말이 틀림없어.」

=그건 또 어디서 들은 거야…….=

「나에게는 눈과 귀가 되어줄 정령이 무지무지 많거든. 지금도 환인이랑 너희랑 밤에 가끔 하던 거 하는 사람도 보이는데?」

=…….=

=…….=

「그런데 저 사람 거는 환인거랑 생긴 게 좀 다르네. 저건 주먹 같은 살덩어리 끝에 돌기가 막 나 있어서 징그러워. 그게 여기로 들락거리니까 여기 여자 배가 막 울룩불룩…… 읍읍!」

듣다못한 안느가 얼굴이 빨개진 채 환연을 붙잡고 입을 막아버린다.

“…….”

이걸 모두 지켜본 환인은 눈을 감고 소리 없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 요정의 본성은 자신에게서 이어진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다.

「…해서 내가 태어난 거지.」

=흠~. 그러니까, 환연 아가씨는 원래 상급 정령으로 태어날 운명이었는데 우리 자기가 실수로 피를 떨어트려 생육을 만들어준 덕분에 육신에 갇혀버렸다는 거네?=

「그래.」

=아마 환연 아가씨의 본성은 우리 자기한테서 이어받은 게 아니라, 자기의 종족적 특성이라고 봐야 할 거야. 갓 태어났을 때는 자의식과 정신세계 구축에 자기에게서 피를 통해 이어받은 지식과 본성을 사용했겠지만, 점점 정신이 무르익고 육체와 동기화되니까 종의 성질이 발현하는 거야.=

「넌 그걸 어떻게 잘 알지?」

=비술은 범주가 굉장히 넓어서 폭넓은 지식이 필요하거든. 여기에 부여 술법에는 예술성을 필요로 하는데 이 예술성은 다양한 경험을 해야만 성장해. 그래서 이것저것 읽고 보고 들었는데 그중에는 요정학 서적도 있었어.=

「그 요정학 서적에 나 같은 예시가 있었군?」

=응응. 그 예시는 루크랑이나 플뢰, 프라우드 족이었는데 셋 다 종족적 성격이 강하게 발현되었다고 적혀있었어. 루크랑족은 자유분방하고 플뢰는 조용하고 차분하고 프라우드 족은 호탕하고 수더분한 거.=

옆에서 조용히 경청하던 안느가 미묘한 표정으로 환인과 환연을 번갈아 보면서 중얼거린다.

=그럼 도령의 종족은 성 쪽으로 자아가 강하다는 거야……?=

=그럴지도? 자기는 굉장히 이성적이잖니. 자고로 강한 이성은 본능을 억누르기 마련이야. 하지만 이성이 강하더라도 본능을 억누르기 어려운 때도 있는데…….=

=아직 어린 아이들.=

이실리테의 무언가 아픔이 스며들어있는 듯한 짧은 대답에 그녀를 돌아본 유르파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우리 요정 씨는 아직 머리가 덜 여물어서 그런 종족성에 크게 휘둘리는 거……라고 난 생각해.=

유르파의 설명에 여자들은 어째서 환연이 지적인 언어를 구사하면서 때때로 징그럽게 들러붙어 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환인은 남몰래 고개를 저었다.

환연의 행동원리는 유르파의 설명으로도 납득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확실히 전세계 인구 70억이라는 숫자는 어지간히 뇌가 성욕에 지배되지 않는 이상 나올 수 없는 숫자다.

하지만 여자친구들이야 지구인이라는 종을 처음 보니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환인은 달랐다.

환연은 성별이 여자다. 여자가 여자에게 끌리는 일은…….

‘있긴하지.’

환인은 저 요정이 여자친구들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은 건지, 아니면 정령들의 호기심과 장난, 재미 쪽에 더 집중하는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여차저차해서 목욕을 끝내고 나온 환인은 여자친구들과 환연이 한층 가까워진 것에 만족하고 깊게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환연의 행동에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니 당분간 지켜보면 알 수 있겠지.

딸랑딸랑.

몸을 씻고 휴식한 뒤 땀을 흘려도 괜찮은 옷을 챙겨입은 환인은 호출종을 울려 시녀를 불렀다.

“일행과 훈련을 하고 싶은데 적당한 곳이 있겠습니까? 남들의 시선은 상관없으니 넓은 곳이면 좋겠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환인이 넌지시 건넨 말에서 숨은 뜻을 캐치했는지 시녀는 곧장 암살자처럼 사라졌고, 잠시 후 시하=사이지가 직접 찾아와 훈련장으로 안내해주었다.

=영웅 기사단이 이용하는 시설이라 각종 술법적 안전 조치가 되어있고 4급 성술사도 상주하고 있어요. 라드세아에서도 손꼽힌다고 자부하니 이용하기 편리할 거라 장담하겠어요.=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정말로 괜찮나요? 그곳에서 훈련한다면 사람들의 눈에 들 텐데요.=

“괜찮습니다. 영웅 기사단의 훈련장이라면 영주님과 관계없는 자들이 드나들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다면.=

당신을 믿는다는 이야기에 은은하게 기분 좋아하는 티를 드러내는 영주.

그녀 연한 핑크색 눈동자가 한차례 번뜩이는 걸 본 환인은 그녀도 참관할 생각이라는 걸 눈치챘다.

상관없다. 참관해주면 오히려 더 좋다. 그래야 참관을 빌미로 전사에서 무성으로 승급한 직업자의 능력을 볼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까.

그리고 도착한 훈련장은 영주가 장담할 만큼 시설이 훌륭했다.

외부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서인지 무도회장처럼 깔끔하고 세련된 건물 안에 마련된 훈련장은 수많은 조명등과 천장 등이 내부를 환히 밝히고 있다.

서로 어울리는 기사들만 12명. 저들이 영웅 기사단의 기사들이겠지. 벽에 일렬로 서서 기사들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는 아이들은 종자일 테고.

훈련장 한쪽에는 드링크 바도 만들어져있고 메디컬센터처럼 꾸며진 곳에는 성술사와 의사로 보이는 이들도 대기 중이다.

다른 쪽에는 훈련장 무대의 환경 조정을 위한 장치인지 비술사 몇 명이 기사들의 주문에 대련 조건을 조정하고 있다.

가운데 무대에 마련된 대련장은 총 여섯 개.

=저 조작판에서 환경을 원하는 대로 설정할 수 있어요. 설원, 사막, 초원, 물가, 고산지, 안개, 우천, 무엇이든 구현할 수 있죠. 환상이지만 체감은 극히 사실에 가까워요.=

“훌륭하군요.”

무대 네 곳에는 이미 여덟 명이 동료 기사와 대련중이다.

스탠딩 바bar에서 쉬고 있던 기사 4명이 영주의 입장에 잔을 내려놓고 경례salute를 올린다.

종자로 보이는 아이들 스물도 영주를 향해 차렷자세로 긴장하고 있는 게 보였지만, 환인은 누구에게도 신경 쓰지 않고 이실리테를 먼저 불러 비어있는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영주의 손짓에 황급히 달려온 4급 비술사가 이실리테에게 물었다.

=대, 대련 조건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인님. 어떻게 할까요?=

“네가 편한 대로 해라.”

환인과 이실리테의 짧은 문답에 좌중에서 믿기 어렵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영주님과 함께 들어온 저 여자의 아우라는 이야기로만 듣던 검희인듯 하다. 그것만으로도 깜짝 놀랐는데 검희가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자라니?

=저 남자는 아우라가 없는데, 무휘광인가?=

=검희……께서 남성에게 무술을 가르치는 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니다. 잘 봐라. 검희……가 남자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자세다.=

시하=사이지는 자신의 키를 훌쩍 넘어가는 특대검을 꺼내 드는 검희와, 그런 그녀 앞에서 가느다란 나무봉 하나만 드는 성자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아니 정말로…… 스승과 제자였다고?’

누가 보아도 검희가 성자에게 배움을 청하는 자세다. 준비에 어색함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저 대련이 하루이틀 이어진게 아닐 터.

시하=사이지는 그나마 친밀도를 조금이나마 쌓은 유르파에게 물었다.

=유르파, 그가 위험하지 않겠나? 아무리 보아도 검희는 진심으로 보인다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잠시 후면 이해하실 것이옵니다.=

=…….=

힐끔, 자신보다 20cm는 족히 더 큰 플뢰 족 성투사를 보았지만 그녀 또한 태연하다.

아니, 다음은 자기 차례인 것처럼 어느샌가 자이언트 카이트 실드와 자이언트 워해머를 꺼내 몸을 풀고 있다.

=핫­!=

쾅!

짧은 기합과 함께 바닥을 박차는 소리에 재빨리 무대를 돌아본 시하=사이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한순간 속도를 몇 배나 끌어 올린 가속, 그리고 살벌하게 휘둘러지는 은색의 특대검.

대련이며 영혼 기사가 영혼사를 해칠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희의 기세는 상대를 두쪽으로 내버릴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경악했다.

툭툭, 턱.

봉으로 검면과 손목을 말 그대로 물 흐르듯 치고 때리더니 발을 거는 것과 동시에 봉으로 몸의 축을 건드려 검희를 뒤로 날려버렸기 때문.

날려진 이실리테는 당황하지 않고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자세를 잡으려 했지만, 날 끝이 뭉툭하게 조절된 패널 소드 세 자루가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는 것에는 당황해서 레드릭을 풍차처럼 휘둘러 패널 소드를 날려버린다.

그리고 어느샌가 자신의 착지점에 기다리고 있는 환인을 목격하곤 허공을 가르는 발차기 이후 몸을 회전시키며 레드릭을 이어 휘둘렀지만.

뻐어억!

=흑!=

명치를 정확히 세 번, 한 호흡에 가격당한 이실리테는 반쯤 무너진 자세로 겨우 착지한다.

고작 2초 남짓한 짧은 격돌에 술렁거림이 훈련장 내부를 잠식했다.

어느샌가 다른 무대 위의 기사들도 대련을 중지하고 환인과 이실리테를 주목하고 있는 상황.

=……아, 아니 다중 검기라고?! 영혼사가 어떻게 다중 검기를?!=

수많은 의문점과 의아함과 경악과 혼돈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와중에 환인의 몸 주변에 떠있는 빛의 검을 목격한 시하=사이지의 외침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같은 의문을 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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