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302화 (302/813)

〈 302화 〉 296 영웅의 도시 헬루멘

* * *

시하=사이지는 다가오는 성자, 그리고 그 뒤의 검희를 눈에 담고 있었지만 정작 생각하고 있는 것은 2시간 전의 회의실이었다.

가문 회의 도중 받은 긴급 보고, 당대의 검희가 출현했으며 그녀가 헬루멘에 입도했다는 것.

그리고 ‘그’ 이실리테가 검희였다는 내용.

가문 회의 중에 올라온 보고는 기존의 안건을 중지시켜놓고 바로 본 의제로 올릴 정도의 파급력을 가졌었다.

시하=사이지가 막 올라온 탁자 위의 서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내가 했던 말이 옳니 그대들이 했던 말이 그르니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니 넘어가겠어.=

=…….=

=…….=

=솔직하게 말하자면 상황은 좋지 못해. 지난 오랜 시간 헬루멘과 위르트는 시대에 출현한 검희를 품지 못한 적이 없었지. 그런데 나의 대에서 전통과 역사가 끊길 판이야.=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다름 아닌 성자의 태도였다.

그가 훈련을 명목으로 떠날 때 남겼던 말을 기억해낸 시하=사이지는 그 말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그 의도가 너무나도 의미심장하게 느껴졌기 때문.

“성에는 유르파가 남을 겁니다. 도망가려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시길.”

도망? 도망이라니?

자신은 성자와 그의 기사에게 해코지를 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도망이라는 단어가 나온 거지?

그때는 별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문장이 성자의 본심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거기에 부관이 했던 지적, 자신이 영혼 기사를 빼앗으려 하는 의도가 느껴졌다는 이야기가 더해지니 그 의혹은 확신이 되어갔다.

‘성자는 우리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다.’

곤란했다. 이쪽은 적대할 생각이 없는데.

때문에 시하=사이지는 성자가 남겨두고 간 동료와 친분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

성자의 내심을 알아보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매일 그녀를 찾아 티타임을 가졌다.

그렇게 일주일간 공을 들여 유르파와 친분을 다지려 한 시하=사이지는 귀족 예법에 능통하면서도 시종 정중함과 예의를 잃지 않는 유르파의 대응에 애가 탔다.

정중함이 지나치면 벽을 치는 것처럼 느껴지는 법인데 유르파가 그러한 스탠스를 보이며 일체의 정보를 내놓지 않았고, 그 사실이 성자가 위르트 가문과 자신을 안 내켜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그녀가 검희로 각성하였으니. 이제 어찌하여야 좋을지 기탄없이 이야기해보시게들.=

=검희로 각성한 여성을 놓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파르히스트의 펜리 후스티오 성주님도 성자님을 눈여겨보고 있는 만큼 검희의 각성 사실이 전해졌을 터이니 조속히 인사 등용을 진행하여야 합니다.=

=동감입니다. 영웅 기사단 입단 시험은 예외적으로 면해주는 것도 좋겠지요. 검희라는 직업 특성을 생각해본다면 가문의 지원을 집중해주어도 된다고 사료됩니다.=

=대를 이을 공자님과 혼인시켜 핏줄로 잇는 것은 어떻습니까. 검희로 각성한 여성은 밑바닥 출신인 만큼 신분 상승과 호화로운 생활에 동경이 클 겁니다. 그리되면 성자님도 휘하에 위르트 가문의 처를 두게 되니 나쁘지 않게 보지 않겠습니까.=

=공자님도 성인이 되신 지 오래되었고 세습 전에 혼례를 올리셔야 하는 나이이시니…….=

=약혼을 맺은 상대가 여럿이지만, 검희에 이실리테의 이름을 쓰는 상징성을 생각해보면 둘째 처 정도가 적당하겠군요.=

=…….=

대안이 나오고 있지만 시하=사이지의 마음은 편해지지 않는다.

상석에서 인상을 쓰고 있는 가주이자 영주를 힐끔 바라본 백로 계통 조인족은 후우우, 장탄식과 함께 다른 이들의 시선을 모았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외면하고 낙관적으로만 생각하십니다.=

=알토라눔 공,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대의 검희는 그 성자님의 영혼 기사이자 연인일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성자님이 저희를 좋지 않게 보고 계실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녀가 폭군룡의 미궁으로 향한 이유, 성자님이 동행한 이유를 떠올려보십시오.=

=으음…….=

=크흠.=

=이러한 마당에 입단 시험을 면제해주는 것이 통할까요? 영주님께서 입단 시험 지원을 제안하셨음에도 형평성이라는 점을 들어 지원을 사양하신 분입니다. 만약에 이 일이 알려진다면 우리는 최연소 영성이 되실 것으로 확실시되는 성자님과 불편한 관계가 되는 셈입니다.=

=그리되면 사방에서 비웃음과 조롱이 날아들겠군요. 그로 말미암은 유, 무형적 손해는 표로 작성해야만 할 정도가 될 테고요.=

좌중이 침묵에 잠겨 들었지만 되려 영주의 표정이 한결 나아지는 것을 본 알토라눔이 계속 말을 잇는다.

=맞습니다. 현재 시급히 다루어야 할 의제는 검희를 어떻게 우리 가문으로 편입하느냐가 아닌, 성자님과 그녀가 우리 가문에 어떤 시선을 보내고 있느냐를 정확히 알아보고 대처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등용은 그 이후의 문제라고 봅니다.=

=으으음.

=음…….=

=허어.=

시하=사이지는 혼약을 입에 담은 가신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알토라눔의 말대로다. 이쪽이 성의를 보여야 할 마당에 그의 것을 빼앗는다니, 성자와의 관계성이 최악으로 치달을 거다.=

=송구합니다.=

=성자가 우리를 우호적인 시선으로 보게끔 상황을 먼저 정리해야겠지. 이 점에 근거하여 의견을 내보도록.=

시하=사이지의 발언에 열두 가신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웅성거리다 차례차례 손을 들어 발언을 청했다.

=우선 가문이 해줄 수 있는 혜택과 원조를 나열해 그가 선택할 수 있도록…….=

=파르히스트는 못한다든가? 루티아 아슬리드가 성자를 회유하기 위해 공을 들이려 준비 중이다. 그쪽은 이쪽보다 돈도 더 많을 테지.=

=…우리 가문과 헬루멘이 나서서 그녀에게 크나큰 명예를…….=

=영예라면 성자의 영혼 기사라는 지위도 드높을 텐데. 이쪽이 여태껏 검희를 독점해온 만큼 영도도, 파르히스트도, 땅신 교단도 역량을 발휘할 가능성이 크다.=

=……가문과 영지의 힘으로 주도 성궁에 연락하여 그녀가 이전에 도적 활동으로 저지른 죄를 탕감해달라는 서신을…….=

=영도는 뭐 생각이 없어서 면죄부를 만들어 영혼 기사들에게 하사하는 거 같지?=

가신들은 말을 꺼낼 때마다 가주의 지적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아니, 방금 잘잘못은 잊고 이야기하자고 하지 않으셨던가? 이건 뒤끝이 폭발하는 거 같은데.

서로 눈치만 보는 가신들의 모습에 시하=사이지는 후, 한숨을 짧게 끊어내며 말했다.

=내 그래서 처음에 말하지 않았나. 녹색 성자의 영혼 기사이니만큼 이쪽의 체면을 적당히 접고 서로 상부상조할 수 있도록 상호 존중의 위치에서 대화를 나눠보자고.=

=그래도 가문 회의 종래에는 가주님도 회가 동하지 않으셨습니까. 오히려 이실리테… 그 여아를 회유하는 데는 가주님이 더 진심이었으면서 그러십니다.=

한 가신의 볼멘소리에 시하=사이지는 할말이 없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군. 조금 감정이 쌓여서. 아무튼 식상한 수단 말고 좀 기발하고, 어? 눈이 확 띄는 뭐 그런 제안은 없소? 성자도 귀가 솔깃해져서 어머, 이건 사야 해! 이런 반응이 나올 정도 말이오.=

웅성거리던 늙고 젊은 가신들은 좀처럼 대안을 꺼내지 못하고 천금 같은 시간을 흘려만 보냈다.

그러다 2시간 후, 성자와 검희가 위르트 성의 정문을 통과했다는 연락이 날아들었고 그 후 일단락된 것이…….

필두 가신들이 직접 찾아가 성자와 검희에게 생각이 짧았다며 일단 사과하는 것.

그리고 지금은 미궁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몹시 피곤할 테니 쉴 수 있도록 안내한 다음, 그렇게 번 시간으로 제대로 된 대안을 뽑자는 것이었다.

시하=사이지는 그 안을 받아들이고 가문의 책임 가신과 함께 성내 마굿간으로 향했다는 성자를 찾아 움직였다.

성자도 면면을 따져보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회 최고층의 인간이다. 사과한다고 해서 이쪽의 면이 상할 신분은 아니니 고개 숙이는 정도가 무엇이 어려울까.

그리고 환인과 함께 서 있는 이실리테를 처음 본 순간 그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어찌……?=

=허어…?=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이는 호박색에 가까운 머리카락.

사람들을 마음으로 포용하는 듯한 온화하고 상냥함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얼굴.

세상의 아름다움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듯한 완벽한 신체.

환한 햇살 아래 그보다 더 하얀 빛을 뿌리며 흘러내리는 곱고 아름다운 빛의 입자들.

영상 기록 매체에 저장되어있던 시조님이 밖으로 뛰쳐나온 듯한 모습에 시하=사이지와 그녀의 가신들은 환인이 다가와 먼저 말을 걸 때까지 무어라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시하 사이지 위르트 영주님.”

=……아.=

무의식중에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한 시하=사이지는 이실리테를 조금 멍하니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검희로 각성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리도…… 이실리테 님을 빼닮았을 줄이야…….=

“소식이 빠르시군요. 헬루멘에 도착한지 2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검희의 출현은 그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사안이라는 거…지요.=

“그렇습니까.”

그정도입니까, 하고 묻는듯한 담담한 표정의 환인을 한 번 쳐다본 시하=사이지는 다시 이실리테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시조님의 이름과 명예를 유지하려 하는 우리 입장을 이해한다면, 이실리테의 이름을 사용하는 자가 검희로 각성했다는 그 사실에서 받은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 거에요.=

“이해합니다.”

갑자기 존댓말이라니. 환인은 속으로 이채를 띄웠다.

이런 상황은 권력자의 자존심을 생각했을 때 비현실이어서 일부러 계산에서 제외했는데 설마 입장 역전식으로 사과를 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정신을 차린 듯 후, 짧게 숨을 내쉰 시하=사이지가 환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피곤할 텐데 앞을 막아서 미안하게 생각해요.=

“그 정도로 피곤하지는 않으니 괜찮습니다.”

반말에서 존대로 변했다는 사실이 주는 긍정적인 이미지에 환인도 일단은 말투에서 날을 누그러트린다.

=이실리테 양과 안느 양은 근접 각성 직업자이니 건장하겠지만, 성자는 평범한 신체를 가지고 있죠. 보름하고도 사흘간 강행군을 해온 사람을 오래 붙잡을 생각은 없어요.=

“…….”

=가면서 이야기할까요?=

원래는 얼굴을 보자마자 일단 가볍게 사과부터 할 생각이었지만, 시하=사이지는 이실리테를 목격한 순간 수십 년간 쌓아온 정치감각으로 하나의 사실을 예감했다.

이 자리에서 최소한 쌓인 감정을 풀지 않으면 크게 위험하겠구나 하는 막연한 예감.

심장이 벌렁거리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맺히는 느낌이라 외면할 수가 없다.

가신들이 뭘 하려고 그러시냐는 시선을 보내왔지만, 시하=사이지는 뒤에서 따라오라고 손짓한 뒤 환인과 함께 나란히 앞장섰다.

대충 넘어가는 사과로는 부족하다. 최소 수십만 인구를 통솔하고 그 최정상에 서 있는 자, 본인이 직접 정중하게 하는 사과가 아닌 이상에야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겠지.

일단 사과부터.

=녹색 성자, 그대가 떠나며 남긴 말을 그후 나 나름대로 생각해봤어요. 솔직히 앞으로 살아갈 시간보다 살아온 시간이 두 배 가까이 많은지라, 머리가 굳어서인지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바로 이해가 안 되더군요.=

“그러셨습니까.”

=하지만 부관참모가 한 가지 사실을 지적했을 때는 이렇게 머리가 굳은 여자지만 실수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어요.=

환인은 미약하게 의아함을 담아 옆에서 걷고 있는 영주의 옆얼굴을 돌아보았다.

정말로 사과하러 왔군.

환인은 가진 자들의 목이 얼마나 뻣뻣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게 8급 호족이라면 강철이 아니라 티타늄­골드 합금이라고 해도 무방하겠지.

그런 목이 굽혀지다니, 일대 사건이라고 할만하다.

그 증거로 뒤따라오고 있는 가신들이 경악해서 입을 쩍 벌리고 있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태도가 이렇게 변한 걸까. 설마 이실리테 때문에?

그러고보니 방금 이실리테를 빼닮았다고 했지. 환생이라고 믿지는 않지만 이실리테의 존재가 불러일으킬 파장과 가치를 읽었다는 뜻이겠군.

환인이 머리로 빠르게 상황을 재차 정립하는 사이에 시하=사이지가 크음, 침음을 흘리고는 멈춰 서서 가슴에 손을 올리고 환인에게 살짝 허리를 숙여 정중히 사과를 표시했다.

=그대의 의사를 무시하고 그대의 영혼 기사에게 손을 뻗치려 한 점, 실수라고 인지 못하고 그대의 마음을 상하게 한 점, 제 뜻만을 밀어붙여 입단 시험을 치르게 하려한 점을 모두 사과드리겠어요. 이실리테 양에게도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

이실리테의 호박색 눈동자가 동그래진다.

=변명일 뿐이지만, 그때 나는 정말로 그대와 저 아가씨를 어떻게 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어요. 의지를 보고자 엄포를 놓았던 것이었지, 진심으로는 이실리테 아가씨의 후원자이자 배경이 되어 그대의 성불행에 한쪽 팔 거들고자 했던 거였어요.=

“…만약 영주님께서 삿된 마음으로 다가오셨다면 저도 저 자신과 일행을 지키기 위해 쓸 수 있는 수단은 모두 사용했겠지요. 하지만 영주님께는 욕심이 느껴질지언정 우리를 괴롭히겠다는 의도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말에 시하=사이지는 쓴 미소를 머금었다.

정확하게 자신을 읽었었군.

=이쪽이 강요하다시피 밀어붙인 입단 시험 건은 철회하겠어요. 실수이고 잘못인 것을 알게 된 이상 밀어붙이는 것은 우둔함과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행위일 뿐이니까요.=

영주의 말을 들으며 계산을 끝낸 환인이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잠시 맑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하=사이지가 똑같이 하늘을 힐끔, 올려다보는 걸 기감으로 확인하자마자 이실리테를 돌아보며 조용히 말했다.

“영주님께서 지위와 체면에도 불구하고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시는군요. 솔직하게 마음을 열어 본심을 보여주시는 영주님께 저도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한 박자 쉰 다음 조용히 말한다.

“우선은 영주님의 뜻에 따라 이실리테가 입단 시험을 치르게는 할 생각이었습니다.”

=……입단 시험에 통과하더라도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군요.=

“그녀가 자질을 입증한다면 강자를 존중하는 영주님께서 일말의 사정을 이해해주실 거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영주님께서 자신의 의도를 밀어붙이셨다면 저도 제가 가진 수단을 모두 동원해 저항할 생각이었습니다.”

담담한 이야기와 다르게 내포된 뜻을 읽은 시하=사이지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자칫 영도 ­ 파르히스트 ­ 땅신 교단 세 곳과 마찰을 빚을 뻔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비자룩스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무리 헬루멘이 라드세아 남부의 패자라지만, 파르히스트도 중부의 기둥이며 영도는 세계적으로 명망이 드높은 도시 국가. 땅신님의 교단은 말 그대로 세계 사대 교단 중 한 곳이다.

동시에 분쟁을 빚으면 자칫 가문의 존폐가 위태로워진다. 헬루멘 중급 도시는 무사할지라도 위르트 가문은 지반이 흔들리겠지.

환인은 시하=사이지의 얼굴에서 생각을 읽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너만 힘 있는 게 아니다. 나도 수틀리면 들이박고 같이 뒤지는 수가 있다. 그러니 이 사과를 억지로 하는 거라면…… 서로 잘하자.

이런 느낌으로 한 말이었는데 제대로 통한듯하다.

“하지만 그리되는 것은 저에게도 적지 않게 부담되는 일. 그런 일은 영주님께서 사과해주신 덕에 일어나지 않게 되었군요. 영주님의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시하=사이지는 체통에 안 맞게 떨리는 한숨을 내쉬려다가 억누르며 살짝 고개를 숙였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며 살짝 미소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불과 보름 전만 해도 4급 전사에 불과했었는데 입단 시험에 통과할 거란 자신감이 있었나 보군요. 검희로 각성할 만큼의 자질을 가지고 있어서인가요?=

“이실리테는 제 연인이기도 하지만, 제 수제자이기도 합니다. 감히 발언하건대 4급 전사였을 적에도 영웅 기사단의 입단 시험을 통과 확률은 70% 이상이었을 겁니다.”

시하=사이지와 뒤따라오던 가신들은 입을 살짝 벌렸다.

아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4급 전사가 6급 전사, 투사를 상대로 이긴다고? 그건 역천이나 다름없는 일인데.

‘응……?’

그때문에 이상한 점을 뒤늦게 눈치채게 되었다.

수제자라니? 영혼사가 전사를? 어떻게?맥락을 보자면 기술을 가르쳤다는 뜻인데 그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지?

근접 전투 직업자들이 술사에게 술법을 가르쳤다는 것만큼이나 허황된 이야기임에도 그들은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어째서인지 저 남자의 이야기가 허풍으로는 단 1g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검희로 재각성한 지금은 7급을 상대로도 이길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요?=

환인은 대답 대신 작게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후우.=

복잡한 심정이 한가득 묻어나는 한숨을 짧게 내쉰 시하=사이지는 힐끔, 환인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는 걸 확인했다.

심사숙고한 뒤 일을 길게 끌고 가는 것보다 아예 이 자리에서 대략적인 개요는 정리해놓는 것이 서로 불편한 시간을 줄이는 길이라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만약 반응이 나쁘다면 회의를 열어 항목을 다시 정리해야할테고, 그리되면 시간이 더 필요해질테니까.

=이제와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 염치도, 체면도 없지만 위르트의 이름을 짊어지고 헬루멘을 이끌어나가는 자로서 이 말은 꼭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양지해주기 바래요.=

환인과 눈을 마주한 시하=사이지는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위상력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담담히 서있는 남자에게 묘하게도 마음이 끌린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이실리테 양의 배경에 우리, 위르트 가문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상대적 입장의 차이를 이용한 요구가 아니며, 위르트 가문은 성실히 후견의 의무를 다할 것이며 이로 인해 부당하고 불공평한 요청을 하는 일도 없을 것을 맹세하겠어요.=

“……바라시는 것이 단지 이실리테가 위르트 가문의 이름을 등 뒤에 두는 것입니까?”

=맞아요. 우리는 그저 이실리테 양과 녹색 성자, 당신을 후원하기만 할 뿐이니 우리를 위해 무엇도 하실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 위르트의 이름만 인정해달라는 거군. 검희와 이실리테라는 이름, 둘 모두 가진 아가씨를 품기 위해서라는 건가.

환인은 이 모든 것이 지구인이고 한국인인 자신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명예의 인식 차이임을 깨달았다.

‘애초에 근 천 년 전의 인물 이름을 두고 이러는 것도 이해되지 않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하자면 자신이 트립해서 다른 세상에 온 것부터가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다.

정식으로 문서와 계약서를 남겨 정확한 사항을 봐야 알겠지만 들어서 손해될 조건은 아니라고 판단한 환인은 이실리테와 눈을 마주친 뒤 그녀의 의중을 읽고 시하=사이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서로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에 이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서로 진정한 뒤에 차분히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이야기에 시하=사이지는 어디서 이런 남자가 나타났을까, 복잡하고도 미묘한 기분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이 이런 제안을 할 경우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받아먹기 바쁠 텐데 이런 와중에도 생각할 시간을 달라니.

“그리고 이대로라면 영주님께서 너무 양보해주시는 모양새가 되어 제 마음이 불편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어떤 제안인지?=

“제 영혼 기사들과 영주님의 기사들 사이 정식 친선 대련입니다.”

=그것은…… 바라마지않는 제안이군요.=

“영주님께서 내미신 제안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

시하=사이지는 부드럽게 미소짓는 환인의 얼굴을 잠깐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은 이야기를 듣고서야 그러한 친선 대련으로 얻을 무형적 이익을 생각해냈는데, 이 남자는 자신보다 더 일찍 계산해냈다는 뜻이 아닌가.

이러니 그 백곰 녀석이 자식까지 보낸 거군.

정말, 이런 남자가 하늘에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날 줄 알았다면 자신도 결혼을 좀 더 신중히 생각해봤을 텐데.

다시금 남자에 대한 욕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들었지만, 시하=사이지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 없이 마음을 억누르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