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1화 〉 295 영웅의 도시 헬루멘
* * *
아침 늦게 미궁 마을을 나선 환인 일행은 쉬지 않고 달려 정오가 지날 즈음에 헬루멘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비상, 쿠르티, 쿠핀이 각각 250kg ~ 400kg의 짐을 싣고(안느의 무게가 제일 많이 나가서 250kg, 비상의 체력이 가장 강하고 환인의 장비 무게가 가장 가벼워서 400kg)있어 중간중간 최하급 정령 강령을 펼쳐준 덕분에 별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일까, 괴물이나 짐승의 습격도 없었고 날씨도 조금씩 풀리는 초봄이었기에 쾌적한 이동이었다.
그리고 도착한 헬루멘 남쪽 성문.
=…….=
“…….”
=…….=
“……병사님.”
=어?! 아, 실례했습니다!=
자신을 앞에 두고 넋이 나간 것처럼 이실리테를 쳐다보는 성문 병사. 그녀뿐만 아니라 경비초소의 모든 기사와 병사가 이실리테를 홀린 듯이 쳐다본다.
검문을 기다리던 사람 중에서도 적지 않은 수가 이실리테를 바라보고 있다.
아무리 도시의 시조가 검희라지만, 그때로부터 근 10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데다 가장 최근에 나타났던 검희도 수백 년 전의 사람이다.
그럼에도 이리 선명한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의문이 드는 환인이었다.
=아마도 역대 검희가 모두 헬루멘에서 활동해왔기에 그런 거 아닐까?=
“그런가. 그렇다면 유소년 교육 과정에 검희와 이실리테에 대한 것도 가르칠지도 모르겠군.”
병사들의 형식적인 몸수색이 끝나고 도시로 진입한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쏠리는 시선을 느꼈다.
번화가에 들어서자 시선이 분산되긴 했지만, 10명 중 1명은 이실리테의 흘러내리는 빛의 아우라에 시선을 준다.
조금 눈치가 둔한 이실리테도 그걸 느꼈는지 갈색 망토의 후드를 코까지 푹 눌러쓴 상태.
환인은 장고에 들어갔다.
이실리테가 검희로 재각성한 이후 이 사실을 활용할 여러 수단을 고안해냈지만, 수단을 사용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되었다.
당장 떠올린 것도 이실리테의 각성을 주요 소재로 다루어 헬루멘의 이미지와 평가를 대폭락시키는 작업, 그리고 헬루멘 자체에 가하는 혼재 테러다.
위르트 가문이 적대적으로 나왔다면, 평판이 나빴다면 환인도 이렇게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8급 호족이 다스리는 도시인데다 평화로워 혼도 별로 없다?
혼재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어 노력 대비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알게 뭔가. 질 나쁜 혼은 도시에 도사리고 있는 범죄자들을 쳐죽여서 공수해도 된다. 혼재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다면 그 대비로 감당 못할 만큼 혼재를 마구 뿌리면 그만이다.
동시에 위르트 가문의 추문을 모아 퍼트려 영향력을 낮춘다.
혼재로 도시의 분위기가 뒤숭숭한 가운데 위르트 가문의 추문이 터져 나오면 도시는 안팎으로 시끄러워지고 혼란스러워지겠지.
방법은 어렵지 않다.
일단 이실리테의 검희 각성 사실을 남은 12일에 걸쳐 널리 알린다.
이실리테라는 이름, 그리고 검희라는 직업, 여기에 녹색 성자의 일행이자 연인이라는 사실을 더한다면 소문은 들불처럼 번져나갈 것이다.
분위기가 최고점에 이르렀을 때 시하=사이지의 실언과 실수를 꼬집어 불합리함을 폭로한다.
녹색 성자로 크게 이름 알려지고 있는 상급 영혼사의 영혼 기사를 빼앗으려 했다는 뉘앙스라면 여론은 크게 동요할 것이다.
이쯤되어 이실리테의 영웅 기사단 입단 시험을 알린다.
평소였다면 사회 최상류층에 발을 내딛을 기회인데 배가 부르다못해 복에 겨운 소리하고 있다고 부정적으로 인식했겠지만, 이실리테가 검희로 각성한 마당이다.
그녀를 영혼사에게 빼앗아 강제로 위르트 가문에 편입시키려 한다는 사실이 소문날 경우 위르트 가문은 예의도, 명예도 모르는 쌍놈의 집안으로 이미지가 폭락하겠지.
여기에 환인 자신이 영주든, 영주 휘하의 기사든, 유력자와 대련을 유도한다.
검희가 제자라는 사실을 은근히 어필한다면 사실 여부 확인을 위해서라도 다가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상대를 패퇴시키거나 일부러 져준 뒤 ‘위르트 가문이 영혼사에게 위해를 끼쳤다.’고 퍼트리면 영웅의 도시라는 것에 자부심을 품고 있던 헬루멘의 민심은 매우 뒤숭숭해질게 틀림없다.
힘없는 영혼사와 대련을 했다고? 그런데 그 대련에서 졌어? 영웅이라고 입에 담으면서 대체 뒤에서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거야?
이후 몇 단계에 걸쳐 위르트 가문을 사실상 괴뢰로 만들려는 시나리오와 플랜이 이어지지만…….
시하=사이지의 행동은 도를 넘은 부분이 있다곤 해도 그 행동과 의도는 일단 선?에 기반을 둔 것이다.
일단 바탕과 기본은 착한 쪽이고 그런 가문과 사람을 짓밟기 위한 계획이라서일까, 길레스=백슬과 크라버리를 염두에 두고 공작 활동을 벌이던 때와 다르게 심리적으로 거리낌이 느껴진다.
부모님께 배운 사회화 교육도 이 수단을 사용하는 걸 꺼리게 만든다.
‘일단은…… 보류해야겠군.’
가장 큰 이유라면 이제 와서 이 방식을 채용할 이유가 없고, 시도하기에는 위험성이 너무 높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위르트 가문의 위신을 땅에 떨어트리는 것까지는 간단하다.
문제는 그 이후, 위신을 땅에 떨어트려 놓고 떠나기만 한다면 가문이 뒷수습한 뒤 보복해올 가능성이 있다.
그걸 생각하면 아예 재기하지 못하게끔 엉망으로 휘저어놔야하는데, 그 이후 가문의 영향력을 뿌리까지 갈아엎기에는 미확인 요소도 많은데다 위험성이 너무 높다.
거기다 그곳까지 가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인가. 가면서 모든 경우의 수를 예상해내고 성공으로 이끄는 것은 얼마나 지난할 것인가.
그 길 끝에 도달해 위르트 가문을 손에 넣는다 해도 이후에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잃는 것도 너무 많다.
‘그때부터는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정치질의 연속이 될 테지. 지금처럼 여행은 꿈도 꾸지 못하고 사방에서 자신을 경계하는 호족들과 신경전을 벌여야 할 것이다.’
라수비탄의 주도 반응도 지켜봐야 할 점이고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게 알려지는 것은 필연, 그때가 되면 자신을 소환한 미지의 인물이 어떻게 나올지도 알 수 없다.
영도의 움직임도 신경 써야 한다. 영도의 지도자라는 닌실=아나그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 혼재 테러를 일으켰다간 어떤 의심을 받을지 모른다.
‘지킬 것이 생긴 사람은 몸을 사리게 된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너무 강한 충돌은 있을 곳을 잃게 만드는 법.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폭력적인 수단을 모두 커트하니 유화적인 방식밖에 남지 않는다.
“…….”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부터 확인을 해야겠지. 대응은 그 이후에 정해도 상황이 아쉽지 않을 것이다.
단, 이실리테의 명성을 높이는 작업은 바로 시행한다.
이 명성 작업은 자신의 계획이 만들어내는 모든 상황의 기초가 되는 만큼, 만약 상황이 꼬이고 틀어져 위르트 가문과 척을 질 상황이 되면 곧바로 폐기한 수단을 기용해야 할 텐데 그때 도움이 될 것이다.
고개를 들어 저 높은 곳에서 위용을 뿜어내고 있는 위르트 성을 올려다본 환인은 안느에게 이어크래드 상단으로 안내를 부탁했다.
=응. 이쪽이야.=
영혼사는 자선과 봉행, 그리고 청빈이 대표적인 이미지다.
영혼사인 환인이 상단을 사적으로 방문한다는 것은 이래저래 구설수에 오르기 쉬운 일.
하지만 정령의 동굴 지하 5층의 이형종을 사냥하며 획득한 부산물을 처분한다는 핑계가 있다.
무엇보다 이어크래드 상단과의 인연은 라드세아 평원의 흡혈마 무리 처분으로 맺어진 것이었다. 오히려 다른 상단을 방문하는 게 이상한 일이다.
=아니아니아니! 녹색 성자님이 아니십니까?! 이럴수가, 어서 이리로! 계단으로 오르시지요!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상단 건물에서 환인은 맨발로 뛰어나오는 상단주와 부상단주를 볼 수 있었다.
어찌나 호의가 높아 보이는지 상단의 대은인을 맞이한듯한 모습.
환인은 부산물을 팔러왔다는 핑계를 바탕으로 은근슬쩍 이실리테의 직업을 어필……할 것도 없이 복실복실한 포메라니안 머리의 인견족 상단주는 이실리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검희, 검희님이시라니…… 서, 성함도 이실리테 님이시라고욧?!=
기존의 판금사슬 갑옷은 지하 3층까지 올라왔을 때 이음매가 망가지며 갑옷의 기능을 상실해버렸다.
현재는 웨이포드에서 마련한 여자 모험가 풍의 복장을 입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탓에 배틀 드레스 이미지의 아우라와 더욱 잘 어울리는 모습이 된 상태다.
오죽하면 상단주가 몽롱한 얼굴로 연신 이실리테를 힐끔거릴까.
“이실리테가 그 직업을 얻게 되다니, 저로서는 신의 인도가 있지 않았나 싶은 심정입니다.”
=아아!! 그렇고 말고요! 헬루멘 영내의 미궁에서 영혼 기사이신 이실리테 님이 검희로 각성하다니, 이것이 운명과 신님의 인도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별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하는 상단주. 목소리도 커서 이 정도면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다 들을 정도다.
“그래서, 이것들을 처분하고 이실리테의 품격에 걸맞은 방어구를 장만해주려고 합니다. 매입해주실수 있으십니까.”
약 30마리분의 가죽과 이빨, 발톱, 뿔, 뼈 등 1톤에 가까운 양을 본 상단주의 얼굴이 환희에 물들었다.
=오오오! 이, 이건 설호룡의 모피! 갑주저룡의 어금니에 양각기룡의 뿔에 뒷다리 뼈와…… 폭군룡의 미궁을 5계층까지 내려가셨었군요? 무두질도 나름 양호하게 처리되어있으니 비싸게 사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를 듣자하니 폭군룡의 미궁 저층에 서식하는 고등급 이형종 부산물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 품귀 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고.
담당자와 동석하에 계산해본 결과 자신의 예상보다 2배에 가까운, 무려 32금화에 달하는 견적이 나왔다.
이어크래드 상단주는 업계 시세를 투명하게 공개하며 자신들의 수익을 깎아가면서까지 가격을 쳐주는 게 보였기에 환인은 계산 없이 일괄로 넘겨주었고, 상단주는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부산물을 옮기라고 직원에게 지시한 다음 손을 비비며 말했다.
=그렇지않아도 경연 탓에 등급이 높은 부산물이 시장에 씨가 마른 상태였습니다. 이정도 양이라면 방어구 분야에서는 한숨 돌릴 양은 되겠지요.=
“경연입니까.”
개미처럼 짐을 옮기면서도 이실리테를 힐끔거리는 상단 직원들을 바라보던 환인은 상단주가 조심조심 이야기를 꺼내는 소리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 성자님, 혹시 무장 경연 대회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처음 들어봅니다.”
=음. 사흘 뒤 헬루멘 백화점에서 관계자 참석하에 치러지는데 이 경연은 라드세아 중부와 남부에서 손에 꼽을 만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무구 경연 대회입니다.=
그때 환인의 왼쪽에 앉아 차를 마시던 안느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들어본 적 있어. 3년에 한 번씩 벌어지는 경연인데 거기서 우승한 작품은 주도의 성궁에서도 사간대.=
“무구 경연… 최상급 마도기가 다수 출품되겠군요.”
=예에. 맞습니다. 그 경연에는 주도의 내로라하는 아티피서와 블랙스미스들도 참여하는데 그 수준이 비범하기 짝이 없지요.=
마침 이어크래드 상단도 참관권을 가지고 있다며 슬쩍 어필하는 상단주다.
=경연에 참관하신다면 출품된 작품의 우선 구매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중복으로 선택된 제품의 경우 다수의 구매권이 필요하긴 합니다만, 영혼사님께서도 참관해보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최상품과 상품, 두 가지 분야에서 진행되니 자신의 눈에 맞는 것도 볼 수 있을 거라며 품질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말하는 상단주.
환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흥미가 동한다는 듯이 표정을 꾸미며 대답했다.
“관심이 가는군요. 일정을 확인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상단주님이 챙겨주신 선물, 무척 유용하게 잘 썼습니다. 고맙습니다.”
=예? 아, 아이고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가 성자님의 위명에 기대어 분에 넘치는 결과를 얻게 되었음에도 그 정도밖에 드리지 못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요!=
“아닙니다. 폭군룡의 미궁 5층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상단주님이 주신 방한용품 덕분이었으니까요.”
상단주는 환인의 치사에 짧고 몽실몽실한 털꼬리를 풍차처럼 휘두르며 연신 웃음을 짓는다.
매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환인은 느긋하게 상단주와 다과 시간을 가져나갔다.
“지금쯤이면 영주의 귀에 이실리테의 각성 이야기가 들어갔겠지. 그만 돌아간다.”
상단을 나와 거리로 돌아온 환인은 가슴 포켓에서 고개를 자꾸 내밀려하는 환연의 머리를 살짝 눌러 밀어 넣으며 비상의 등에 올라탔다.
그의 뒤를 따라 쿠핀의 등에 오른 안느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있잖아, 도령. 경연 참석 권유에 왜 바로 응하지 않은 거야?=
“경연대회라면 관람 등급이 있을 테지.”
=어? 그야 그렇겠지. 호족이랑 고족을 일반인들 사이에 세워둘 리 없을 테니까. 그에 따른 우선 구매권 등 옵션이 발생할 가능성도…… 아.”
“그래. 영주도 초대장을 받았을 테지. 최고등급, 혹은 심사위원으로. 환연, 자꾸 고개 내밀지 마라.”
환인의 지적에 환연이 포켓 속에서 환인을 올려다보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나도 도시 구경하고 싶은데.」
“지금 너는 너무 약하다. 네 몸 하나 지킬 정도가 되면 모르겠지만, 아직은 네 존재가 알려지지 않는 편이 좋다.”
=도령 말 들어. 요정은 가뜩이나 작고 귀여워서 관상용으로 납치당할 확률이 크니까.=
「진짜?」
=응. 그래서 요정들이 깊은 숲이나 정글, 밀림에 숨어 사는 거야.=
안느의 경고에 환연은 「어쩔 수 없지.」하며 포켓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는다.
포켓 안에서 웅크리고 잠자려는 것을 느낀 환인은 장갑 입구를 오므려 감춘 뒤 주위를 둘러보며 하던 말을 이었다.
“아무튼, 기왕이면 영주를 이용할 생각이다.”
상단주의 호의도 있고 함께 간다면 그가 다른 선물을 장만해줄 가능성도 있지만, 자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도 영주는 경연 관람권 정도는 쉽게 구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이어크래드 같은 중형 상단의 상단주도 얻는 관람권이다. 영주 정도 되면 부담 없이 구할 수 있는 물건일 테지.
이실리테의 시험에 관련해서는 부정이라던가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을 생각해 도움을 모두 거절했지만, 장비 마련은 다른 이야기.
여차하면 자신이 쓸 것을 알아본다고 해도 된다. 그게 통하면 좋은 거고 안되면 상단주에게 다시 부탁하면 될 일이고.
‘유화적인 정책을 사용하기로 한 이상 이쪽도 받아먹을 것은 받아먹고 챙길 것은 챙겨야지.’
비상을 타고 도로를 따라 마차들과 함께 이동하고 있으니 회색 후드 망토를 뒤집어썼기 때문일까, 인파의 소음 속에 숙덕숙덕 이야기 소리가 들려온다.
저기 저분, 녹색 성자님 아니셔?
어? 진짜?
녹색 쿠에를 타고 회색 후드 망토를 쓰신 분이 성자님이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저 뒤에 갈색 머리카락 여자, 저 아우라 말이야.
에이 설마…….
‘잘 퍼져 나가고 있군.’
이어크래드 상단에서 이실리테를 본 직원들도 소문을 퍼다 나르기 시작할 테니 시험까지 남은 12일, 소식은 충분히 헬루멘 전역으로 퍼져 나갈 터.
뒤에서 여자친구들이 나누는 대화가 작게 들려온다.
=그 노출 영주님이 이슬이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네. 이슬이는 기분이 어때?=
=별로…… 아무렇지도 않아. 그저 주인님의 기사로서 방심하지 않고 전력을 기울일 생각뿐이니까.=
=그 마음가짐이면 어지간한 상대는 널 이기긴 힘들 거야. 그도 그럴게 도령의 방어술 수제자는 너잖아?=
=안느도 참……. 너도 수제자면서.=
=에이, 난 너에게 비하면 평범한 제자지.=
안느가 그렇게 표현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안느가 보기에 (환인은 제외) 직업자 중에서 이실리테만큼 막고 흘리고 피하기를 잘하는 사람은 못 봤다.
아무리 잘 피하는 전사라 하더라도 전투의 기본은 무기로 막고 흘리기.
공격을 피하지 못하면 그대로 모든 피해를 받게 되는 회피는 잘 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실리테는 풀컨디션일 경우 거의 짐승 같은 감각으로 이형종의 공격을 대부분 피하거나 막아낸다.
16일간의 미궁 생활에서 공격을 허용했던 것은 정신침해에 시달리던 초반과 후반의 강력한 6급 이형종에게 허용했던 스치는 수준의 공격 뿐.
막강한 공격력.
대부분의 공격을 막고 피해내는 눈썰미와 반사신경.
검희로 각성하며 대폭 증가한 신체 능력.
그리고 다중 검기라는 사기적인 원천 기술까지.
저 네 가지를 전부 가진 이실리테가 라드세아에서 강하기로 한 손에 꼽힌다는 영웅 기사단을 상대로 어디까지 해낼지 자못 기대되는 안느였다.
위르트 성의 입구에 도착한 환인은 이실리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기사들의 모습에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인다.
저 여자 맞지? 영혼 기사가 되기 전에 이실리테 님의 이름을 도용해서 사고를 저지르고 다닌 사람.
맞아. 그런데 검희 직업을 얻었다니…….
보름 전에는 4급 전사라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보다 이번에 영웅 기사단 입단 시험을 치르는 걸로 잘못을 용서하기로 했다지 않아? 일이 저렇게 되면…….
영주님이 이걸 예견하신 걸지도 모르겠군.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들어가셔도 됩니다.=
“수고하시길.”
가벼운 신원 확인용 검문을 끝내고 기사들의 시선을 잡아끌면서 성 안으로 들어온 환인은 먼저 성내 마구간으로 향했다.
앞마당에서 서성거리던 쿠라는 환인 일행을 발견하자마자 후다닥 달려가 쿠에쿠에 울기 시작한다.
쿠핀의 옆에 바짝 붙어 우는 것이 못내 쿠핀이 보고 싶었던 모양새. 쿠핀도 날개를 들어 쿠라를 감싸며 쿠쿠, 운다.
이 소란에 마구 간지기가 나오더니 눈이 휘둥그레져서 다가와 환인에게 허리를 굽실굽실 숙였다.
=성자님, 오셨습니까요. 저기, 저 아이는…….=
혹시 자신이 쿠라를 괴롭혔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걱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마구간 지기에게 환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쿠핀과 쿠라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부부라서 그럴겁니다. 오해하지 않으니 안심하십시오.”
=어휴, 아닙니다요. 그, 신경 써서 보살피긴 했지만 쿠라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바깥 하늘을 애절하게 바라보는지 잘 지내지 못한 게 조금 걱정됩니다요…….=
“아닙니다. 오히려 보름간 잘 먹고 잘 쉬었는지 깃털도 윤이 나고 매끄럽군요. 쿠핀과 쿠르티도 잘 부탁하겠습니다.”
=어이고, 옙. 맡겨만 주십시오. 그런데 성자님께서 타고 계신 아이는 관리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요?=
“비상은 제 손길만 허락하니 괜찮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있게만 해주시면 됩니다. 청결한 것을 좋아하니 깨끗하고 잘 마른 짚을 푹신하게 깔아주시고요”
=예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요.=
그렇게 나이들어 주름이 자글자글한 인마족 마구간지기에게 비상과 쿠르티, 쿠핀을 넘긴 환인은 저 앞 정원길을 따라 시하=사이지가 나이 지긋한 일단의 인물들과 함께 서둘러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도령. 영주님이야.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가문의 가신들 같아.=
“음.”
혹시했는데 진짜 저쪽이 직접 찾아올 줄이야.
검희라는 직업의 상징성이 대체 어느 정도기에 영주가 휘하 가신을 이끌고, 그것도 자신이 도착하자마자 직접 행차하는 걸까.
영주를 포함한 그들의 시선이 이실리테에게 향하고 있는 것을 보며 환인이 눈빛을 날카롭게 빛냈을 무렵.
‘허…… 진짜였어.’
고급 목재와 하얀색 도료를 아낌없이 써서 회관처럼 깔끔하게 지어진 마구간 앞.
선남선녀인 환인 일행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시하=사이지의 속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