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299화 (299/813)

〈 299화 〉 293 폭군룡의 미궁

* * *

환인 일행이 은신처로 삼은 곳은 지하 6층으로 내려가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폭이 7m 정도로 비교적 좁은 길이 골짜기처럼 100m 정도 이어져 있고 안쪽으로 꺾이며 바깥과 차단된 공간.

넓이는 축구장 정도였기에 이형종이 침입해온다고 해도 전투를 치를 수 있을만한 공간이 확보된 장소였다.

은신처라기보단 캠핑 장소라고 할만한 곳에 도착한 일행은 빠르게 움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환연. 부탁하지.”

「응.」

땅 위에 이글루를 짓기에는 눈의 양도 부족하고 추위를 막기도 어렵다.

때문에 땅을 먼저 좌우 폭 10m 깊이로 파낸다.

이때 힘을 쓰는 것이 환연이었다. 근처에 있는 하급 땅의 정령을 부른 뒤 정사각형의 구덩이를 이미지해 정령에게 보내주었고, 이미지를 전달받은 땅의 정령은 즉시 흙을 꾸물꾸물 움직여 환연이 보낸 이미지에 맞춰 구덩이를 만들어낸다.

돌맹이와 자갈을 빼고 땅을 평탄하게 만드는 것은 덤.

그리고 하급 눈의 정령도 불러와 눈을 모아 굳혀 여러 개의 설판雪? 만드는 사이 이실리테와 안느는 나무를 여러 그루 베어 엮은 뒤 꼬깔 모양의 지붕 뼈대를 순식간에 엮었다.

=이 정도면 됐어. 올리자.=

파낸 구덩이 위에 얼기설기 엮어 만든 지붕 뼈대를 올리고 환연이 눈의 정령을 부려 만든 설판을 차곡차곡 쌓는다.

그렇게 20분도 걸리지 않아 만들어진 눈 움집은 꽤 그럴싸해 보였다.

안느가 휴, 하얀 입김을 브레스처럼 내뿜으면서 감탄한다.

=이슬아. 이제 사람이 살아도 될만큼 그럴싸해 보이지 않아?=

=일주일 동안 매번 쉴 때마다 만드니까 숙달될 때도 됐잖아.=

미궁이 아니라 평범한 동굴이었다면 부수지 않는 한 계속 유지되었겠지만, 미궁이다 보니 자리를 비우고 1시간이 흐르면 만들기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버린다.

때문에 쉴 때마다 소형 움집을 만들어야 했기에 어느새 제작이 손에 익어버렸다.

“안느는 나와 마저 작업하지. 이실리테, 점심 겸 저녁 준비 부탁한다.”

=네, 주인님.=

=이슬아. 나 뜨끈한 국물 마시고 싶어.=

=알았어.=

환인과 안느가 포개놓은 설판의 틈에 눈을 채워넣고 작은 굴뚝과 환풍구를 만드는 사이, 이실리테는 바짝 마른 땅에 유르파가 챙겨준 보온 플레이트를 곳곳에 설치한 다음 그 위에 휴식 자리를 만들었다.

이어 장작을 가져와 부싯돌 마도구로 불을 붙여 모닥불을 피운 이실리테는 움집 내부가 훈훈해지는 걸 느끼고 갑옷을 벗었다.

째쟁­

=아… 또 고리가 깨졌네.=

주인님이 사주신 물건인데……. 조금 시무룩해졌지만, 이런 마음은 미궁 안에서 해만 될 뿐이다.

감정을 정리한 이실리테는 아공간 가방에서 성수포를 꺼내 손과 팔, 얼굴을 꼼꼼히 닦고 두건과 앞치마를 착용한다.

=음…….=

그리고 어느 고기를 사용할까 잠깐 생각하던 이실리테는 보존 주머니에서 어룡의 큼지막한 고기 한 덩어리와 저룡?의 고기를 30kg 정도 꺼냈다.

어룡의 고기는 먹으면 몸이 후끈해지니까 돼지고기랑 함께 볶고 전에 만들어둔 소스를…….

‘고기만 먹으면 속이 부담되니까 오늘은 밥도 지어야겠다.’

우선 주인님과 자신, 비상과 쿠르티, 쿠핀이 먹을 대량의 고기를 토막 친 뒤 소금을 뿌려 재워놓고 씻어서 잘게 나눠놓은 쌀 주머니를 꺼낸 뒤 작은 솥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 눈을 퍼담아왔다.

모닥불 위에 올리자 금세 눈이 녹아 물이 된다. 물의 양이 부족했기에 솥뚜껑으로 눈을 수차례 퍼서 옮긴 뒤 쌀을 넣고 밥을 올린다.

이어서 안느와 환연이 먹을 채소 요리를 고민했다.

‘뜨거운 걸 먹고 싶다고 했으니까 오늘은 면을 만들까.’

요리를 구상한 이실리테는 솥을 하나 더 꺼내 눈을 또 퍼와 물을 끓이고 쌀가루로 만든 넙적면을 투하, 미리 만들어둔 야채스톡을 넣는다.

각종 채를 친 야채를 좀 더 넣고 소금과 조미료, 향신료로 간을 맞춘 뒤 그대로 푹 끓이는 한편 대형 웍을 꺼내 화구 마도구를 설치하고 소금에 재워둔 고기를 볶기 시작했다.

음식을 만들던 이실리테는 영양 균형이라곤 없는 단백질 ­ 탄수화물 위주의 메뉴에 한숨을 흘렸다.

미궁에서 이만큼 해먹는 것도 사치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주인님께는 제대로 된 식사를 마련해 드리고 싶은데. 안느 수목화도 신경 써야 하고.

적당히 볶아진 고기 위에 매콤달콤한 특제 소스를 듬뿍 뿌리자 삽시간에 맛있는 냄새가 가득 퍼져 나간다.

밖에서 환기구를 만들어 마무리하고 있던 안느는 그 냄새를 직통으로 맡고 쿨럭, 콜록콜록 기침을 해댔다.

“왜 그러지.”

=윽. 맛있는 냄새에 침 삼키다가 사레가 들어서, 콜록.=

얼마나 배가 고프길래.

피식 웃은 환인은 설판 보강 작업을 끝낸 뒤 주머니에서 가늘고 부드러운 풀줄기를 모아 만든 빗자루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비상과 쿠르티, 쿠핀이 냉큼 달려와 그의 앞에 차례대로 선다.

쿠흥, 큐삣.

도도하게 고개를 들고 얼른 몸을 털어달라며 날개까지 활짝 펼치는 비상.

날개 안쪽의 솜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겨드랑이를 간지럽혀주자 날개를 파닥거리던 비상이 환인을 덮쳐 눈밭에 넘어트리고 큐피핏, 삐히힝 웃는다.

빗자루로 몸에 쌓인 눈가루를 털어주고 차례대로 이글루 안으로 들여보내자 이번에는 안느가 환인의 앞에서 두 팔을 벌리고 헤헤 웃었다.

다시 피식 웃은 환인은 빗자루로 털어주는 대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 뒤 햇살처럼 반짝이는 금발에 묻은 눈을 닦아주고 손바닥으로 눈이 가득 묻은 몸 곳곳을 두드려 털어준다.

이어 장갑을 벗은 뒤 얼어서 빨갛게 물든 그녀의 기다란 귀와 뺨을 녹여주자 눈의 여신처럼 하얀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 묻어났다.

=아, 손 따뜻해…….=

“그만 들어가지.”

안느를 먼저 들여보낸 환인이 톡톡, 가슴 포켓 부분을 건드리자 속에서 꾸물거리다가 환연이 고개를 빼꼼 내민다.

「어. 맛있는 냄새다.」

킁킁, 냄새를 맡더니 눈을 반짝이며 포켓 속에서 기어나온 환연은 환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안 들어가?」

“옷을 털고 들어갈 거다. 먼저 들어가 있어라.”

「응, 으힛. 추웟.」

환인이 건네주는 자기 집(장갑)을 받아든 환연은 그 말에 더 묻지 않고 등 뒤에 빛의 고리를 띄워 쌩하니 움집으로 날아서 들어가 버린다.

펄럭이는 모양새가 방풍, 방한 기능과는 연관이 없는 환연의 옷차림을 바라보다가 바깥으로 통하는 통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돌아가면 환연의 옷도 알아봐야겠군.’

신체 비율은 바비 인형처럼 이상적인데 마대자루나 다름없는 옷을 걸치고 있으니 그 언밸런스함 때문에 신경이 적지 않게 쓰이는 수준이다.

그나마 바느질에 어느 정도 손재주가 있는 이실리테여서 저 정도나마 만들어준 거지, 아니었다면 자연 속의 요정처럼 잎사귀 옷을 입고 다녔어야 했을 것이다.

환인은 눈투성이인 코트를 벗어 탁탁 털면서 생각에 잠겼다.

‘내려온지 보름이 넘어가는데…….’

추적자가 없다는 게 신경 쓰인다.

할코네 패밀리라는 놈들은 실력자가 부족해 여기까지 내려올 엄두를 못 내는 걸까, 아니면 입구에 진을 치고 자신들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걸까.

「꺄하하하~.」

「응앗~! 거기서어~!」

하급 눈의 정령들이 웃으며 장난치는 것을 응시하던 흠, 짧게 한숨을 내쉬며 아득히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마 두 가지 다겠지.

6급 이형종은 확실히 강하다.

구세의 빛이라는 최상품의 방어 마도기를 착장한 뒤 강령을 받고 방패와 갑옷에 위상력을 흘려 넣어 방어력을 올린 안느도 긴장을 놓지 않을 정도다.

검희가 된 이실리테의 공격력과 방어에 특화된 안느의 방어력, 여기에 자신의 강령에 환연의 색적 능력이 없었다면 사냥할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

이런 괴물 같은 이형종이 널려있는데 5급 언저리의 평범하고 무난하기 짝이 없는 조폭 같은 놈들이 내려온다?

그들이 말했던 대로 자살 지망이나 다름없다.

‘후자 때문이라도 나갈 때 신경 좀 써야겠군.’

이쪽이 나오길 기다리며 대기한다는 뜻은 온갖 정신계, 상태 이상 유발 계통의 술법과 저주를 준비해 함정을 파놓고 기다린다는 뜻이다.

야비한 폭력배 같은 놈들이니 이쪽의 무력을 대략적으로 알게 된 만큼 정면에서 부딪쳐올 리는 없을 테니까.

그래도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환연에게 정령을 부려 미궁 앞 상황을 살펴보고 오라고 하면 그만이니.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입구이니만큼 물리적인 함정은 설치할 수 있을 리 없다.

적의 위치를 파악한 뒤 자신이 위상류를 강하게 일으키고 먼저 나가서 술사부터 정리한 뒤 이실리테와 안느가 뛰쳐나와 나머지를 대강 정리해버리면 상황은 끝날 것이다.

아무튼.

6층에서 일주일 남짓 사냥하며 환인은 슬슬 자신이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아무리 미래시를 통해 공격을 읽는다 해도 피할 방법이 없는 공격을 해오면 그 순간 사망이다.

6급 이형종 정도라면 특별하게 몸을 보호할 능력이 없는 대상은 한순간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버리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속도는 어떤가. 어떤 이형종은 강령을 받은 여자친구들이 겨우 대응 가능할 정도다.

또 다루는 힘은?

그나마 가볍게는 불, 물, 바람, 모래 숨결을 뿜는 개체가 있고 위험한 종류로 설호룡처럼 상시 냉기 피해를 주는 아우라를 몸에 두르는 개체가 있다.

위상력이 담긴 포효를 질러 광역 피해를 주는 개체도 있으며 술법처럼 속성 공격을 넓은 공간에 밀도 높게 가하는 개체도 있다.

아무리 자신에게 위상류가 있다고 해도 6급 이형종의 술법 공격이면 위상류의 저항치를 뚫고 들어와 피해를 주기 충분하겠지.

마지막으로 방어력.

검희로 각성하며 공격력이 극도로 상승한 이실리테의 공격도 조금씩 막아내는 놈들에게 자신의 별것 아닌 공격이 통할 리 없다.

인간이라면 7급이나 8급도 방심을 통해 어떻게든 살해할 자신이 있지만 이형종은…….

역시 자신이 전투에 참가하려면 그리모암의 다섯 유물을 모아 착용하는 수뿐인가.

후, 짧게 한숨을 토해낸 환인은 후다닥­ 눈밭 위를 가로지르는 갈색 눈토끼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나저나 사람이 정말 없군.’

10일 넘게 4~5층을 배회했지만 환연이 인간의 기척을 감지한 것은 고작 두 번.

거기다 자신들이 미궁에 입장할 때도 5급 이상 직업자는 눈에 띄질 않았다. 이것만 봐도 4층 이하 계층이 얼마나 인기가 없는지 알 수 있다.

이형종의 부산물 수익도 무시할 수 없는데 정령석에 초점이 잡혀있어서일까.

상인들이 가죽이나 뼈, 내장 기관 같은 부산물에 관심이 얕다.

4급 흰 날개 이형종의 깃털만 보아도 깃털 망토, 외투 등으로 가공하면 쓸만한 방어구가 나올 텐데 상대적으로 허술하게 취급받는다고 할까.

환인은 미궁 앞 광장에 들어섰을 때 어느 행상인과 파티원의 흥정을 떠올렸다.

=부산물~? 에음. 우리는 정령석을 사들이러 왔는데.=

=그러지 말고. 신경 써서 갈무리한 덕분에 품질도 나쁘지 않다니까? 그쪽이 매입해서 가져다 팔아도 괜찮은 수익이 날 거야.=

=하지만~ 우리는 명색이 보석상이기도 하고~.=

=아 젠장. 알았어, 시세에서 80%만 받을게. 그럼 됐지?=

=80%? 수송과 손질과 처분에 드는 인력을 빼면 우리 손에 10%도 안 남겠군! 50%라면 사겠소.=

=미친. 아무리 그래도 75%는 받아야 해!=

=흐음…… 60% 이상은 안 돼.=

=아 진짜.=

=안스트나 헬루멘까지 다녀오는 시간 대비 소모를 생각하면 수리비와 소모품을 충당하는 정도가 좋지 않겠소?=

=정령석하고 위상석하고 하나도 안 나왔다고. 그 가격에 넘기면 진짜 인건비도 안 나와! 70%! 이 밑으로는 절대 안 돼!=

=별수 없구만…….=

이런식으로 후려치니 다른 미궁에 비해 부산물을 챙기는 파티가 줄어들고 매입하는 상인도 줄어들고 시장이 쪼그라드는 것이다.

주변 정황을 읽으면 나름 이해되기도 한다.

부산물을 노린다면 굳이 정령의 동굴이 아니더라도 괜찮은 미궁이 주변에 더 있었던 것이다.

굳이 확장형 강화 미궁에서 사냥할 이유가 없는 것.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미궁의 이형종 역류 현상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4층 이하에서 활동하는 파티가 없다 보니 이형종이 계속 쌓이는 게 신경 쓰이는 거다.

아무리 사람들이 1~3층에서 이형종을 잡아댄다 해도 그들이 미궁에서 쓰는 위상력도 있고, 서로 싸움박질하다 죽어나가는 사람도 있을 테고, 사냥에 실수해 몰살당하는 파티도 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미궁에게 에너지를 채워주다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하 4층 아래의 이형종은 서로 싸워서 잡아먹고 잡아먹힐 것이다.

그렇게 먹혀서 생긴 빈자리는 미궁이 다시 이형종을 만들어 채워넣을 테고, 그러면 그것들이 또 서로 싸우다 잡아먹고 잡아먹히길 반복하겠지.

고독??처럼 살아남는 이형종이 점차 단련되어 강해지게 되는 거다.

그러다 우두머리급이 탄생하면 약한 이형종을 휘어잡으며 이형종의 숫자가 계속 쌓이기 시작할 테고, 그렇게 쌓이고 쌓이다 일시에 터져 나오면?

“…….”

물론 미궁이 역류하도록 안스트와 헬루멘이 내버려둘 리 없다.

폭군룡의 미궁 속 이형종이 역류해 쏟아지면 두 도시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볼 테고, 무엇보다 헬루멘의 가문은 한 명의 영웅이 역류한 미궁을 모두 돌파하며 만들어낸 명성으로 쌓아올린 도시다.

그런 내력이 있는 가문이 도시 근처의 미궁에서 역류가 일어나도록 놔둘까?

무엇보다 1계층부터 4계층까지 이어진 계단은 덩치 때문에 5급 이상 이형종은 지나가지 못할 테지.

그럼에도 목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신경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한 노파심일까.

생각에 잠겨있던 환인은 불현듯 움집 쪽에서 누가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뒤돌아보자 환기구로 내놓은 작은 구멍으로 비상의 녹색 눈동자가 보인다.

[쿠우!]

“그래. 들어간다.”

환인은 그새 어깨와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내고 허기를 자극하는 냄새가 흘러나오는 움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실리테가 부실한 재료로 정성 들여 만든 고기덮밥에 쌀국수풍 뜨거운 면 요리를 곁들여 점심과 저녁 사이를 해결한 환인은 식사 후 갑옷을 손질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혹한의 환경에서 싸움을 이어가고 있어서일까, 그녀의 갑옷은 고철폐품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이실리테에 비하면 수십 배는 더 많이 공격을 받아낸 안느의 장비는 새것이나 다름없다.

아니, 실제로도 중장 판금 갑옷인 구세의 빛은 새것처럼 번쩍이고 있었고 거의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흘린 자이언트 타워실드, 성벽의 방패만 공격의 흔적이 남았는데 이마저도 방패의 자동 내구 회복 기능 덕분에 흠이 메꿔져 가고 있다.

=그 방패랑 갑옷은 진짜 평생 쓸 수 있겠네.=

=어~? 무한정 쓸 수는 없어. 공격을 받아낼 때마다 스크래치가 나면서 안쪽 술식 회로를 건드리니까. 대충 3~6개월 정도 쓰면 교단을 찾아가서 수리를 요청하거나 최상급 공방을 찾아서 마도 회로만 재구축하던가 해야 해. 이렇게 버티는 것도 전부 경도 강화하고 자동 내구 회복 기능 덕분이니까.=

“고등급의 적과 싸울 때는 그 두 가지 기능이 필수라는 거군.”

=그치. 이슬이가 검희가 되서 신체 능력이 전반적으로 상승하고 있지만, 방어구가 커버하는 부분은 절대 무시 못해. 이슬이 방어구도 자동 내구 회복과 경도 증가 기능은 반드시 들어간 걸 구해야 할 거야. 다중 검기가 신체 능력과 연동되니까 나머지 기능은 신체 능력을 올리는 쪽으로 장만하고.=

“그렇군.”

=술식 회로는 율이 언니가 다시 새길 수 있으니까 범용 술식으로 만든 걸 구하면 기타 유지비는 거의 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으음~ 6급 이형종이 위상석 하나만 떡하니 내놓으면 최상의 격은 무리라도 상격의 방어구는 마련할 수 있을 텐데.=

너덜너덜해진 방어구에 기름칠하고 조이던 이실리테는 환인과 안느의 시선에 아쉬워하는 얼굴로 찌그러진 가슴막이 부분을 쓰다듬는다.

=이 갑옷을 맞추면서 몇 년은 쓸 거라고 생각했는데, 반년도 채 못쓰겠네요.=

=그만큼 이슬이 네가 강해졌다는 뜻이야. 그리고 슬슬 바꿀 때도 됐어. 4급 이형종하고 싸우는 사람들도 하급이긴 해도 술법이 붙은 갑옷이나 방어구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데 넌 6급 이형종이랑 싸우면서 일반 철판 갑옷을 입고 있잖아.=

=그, 그건 어쩔 수 없었어. 너도 옆에서 지켜봤잖아.=

=하긴. 저번 미궁에서는 4급하고 싸웠는데 이번에는 6급하고 싸우고 있으니…… 생각해보니까 말도 안되서 헛웃음이 다 나오네.=

성벽의 방패에 난 흠에 위상력을 조금씩 흘려넣어 내구 회복을 촉진하던 안느가 피식피식 웃자 비상의 머리 위에 두 발 쭉 뻗고 앉아있던 환연이 물었다.

「이실리테는 지금 5급이고 안느는 6급이 맞나?」

=응. 왜?=

「둘은 척 봐도 엄청나게 강하다는 게 느껴지는데 왜 환인하고 같이 다니지?」

서로를 잠시 쳐다본 이실리테와 안느는 작게 웃음 지었다.

=네가 뭘 말하려는지 알겠지만, 도령의 대인 전투 능력은 나나 이슬이는 발 끝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야. 우리 둘이 동시에 도령하고 싸워도 승산은 1%도 안 될 걸.=

「술사 계통인데도?」

=직업 계통은 상관없어. 그냥 도령이 사람 상대로는 무지막지하게 강한 거야. 도령의 방벽도 그 사기성에 한몫하고 있고.=

「흐응.」

비상의 옆구리에 등을 기대고 있던 환인은 환연이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걸 느끼며 일정을 계산했다.

우선 이실리테가 저런 고철을 입고 더 싸우는 것은 무리다.

열심히 기름칠하고 손질한다지만 혹한 지역에서 연이어진 전투로 사슬갑옷의 고리가 계속 깨져나가는 상황.

그렇다고 미궁을 나가서 방어구를 마련한 뒤 다시 들어오자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여기서 미궁을 되돌아나가는데 이틀, 헬루멘까지 가는데 한나절, 장비를 갖추는데 하루, 미궁으로 돌아오는데 다시 한나절, 5층까지 다시 내려오는데 이틀.

왕복에 7일이 걸리지만 현재 주어진 남은 시간은 9일. 오늘 하루도 거의 다 지나갔으니 되돌아갔다 다시 온다 해도 이틀 밖에 시간이 안 남는다.

만약 방어구를 갖추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간 하루도 채 사냥을 못할 수 있다.

챙강­

=앗! 또…….=

환인의 시선이 곳곳이 끊어지고 녹슨 호버크를 들어 올리며 울상을 짓는 이실리테에게 향한다.

‘5층에서 실전 경험도 그럭저럭 쌓았고… 아우라도 밀도와 규칙성이 보강된 것을 보면 기초는 넘어갔다고 보아도 되겠지.’

일주일 전에 갓 각성했을 때 이실리테의 아우라 흐름은 어딘가 불규칙했고 끊겼다 이어지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일정하게 이실리테의 몸 주변을 흐르며 배틀 드레스 풍의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다.

속으로 결정을 내린 환인이 입을 열었다.

“모두 주목.”

일행의 시선을 모은 환인이 일정 변경을 선언한다.

“이실리테의 방어구 사정에 따라 더 이상의 전투는 불가능하다고 판단, 여기서 충분히 휴식한 다음 복귀를 시작한다. 위르트 성에 돌아가면 그때부터 이실리테는 안느와 실전 대련을, 나와는 기술 대련을 하며 그사이 이실리테의 갑옷을 알아보도록 하지.”

=찬성. 헬루멘은 영웅의 도시라고 불리니까 고급 갑옷이 많을 거야.=

“참고로 나가는 길에 할코네 조직과 마주칠 수 있고, 미궁 입구에 놈들이 포진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 염두에 두도록.”

=정신이나 저주 계통 공격이 날아올 수 있다는 거네요.=

“그래. 환연, 되돌아나가는 동안 네가 할 일은 이전과 똑같다. 정령석 탐색과 접근하는 이형종, 혹은 사람의 탐지.”

「응.」

“그럼 휴식하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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