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7화 〉 291 폭군룡의 미궁
* * *
이후 환인은 계층 내 이형종을 찾아다니며 이실리테의 전투 수행 능력을 눈여겨보았고, 수차례 전투 끝에 강령을 받지 않을 경우와 받은 경우의 차이가 1.3배에 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강령을 받지 못할 경우 다중 검기의 형태 변화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날이 긴 장검 ↔ 특대검 사이를 오가는 정도의 변화밖에 일으키지 못했던 것.
또한 이형종의 약점 육질을 노리지 않으면 청웅룡에게 가해졌던 절단은 이뤄지지 않았고, 적의 육질이 질기고 단단할수록 이실리테가 소비하는 체력의 양도 늘어났다.
이 점은 방어력이 어마무시하게 높을 것으로 판단되는 딱정벌레 타입의 갑충룡???과 수귀룡??을 상대할 때 상대할 때 여실히 드러났다.
=윽.=
위상력을 등껍질에 밀어 넣어 방어력을 극대화한 수귀룡에게 날린 빛의 검이 등껍질과 충돌하며 뭉개져 사라지자 얼굴색이 급격히 나빠지며 숨을 몰아쉬었던 것.
“빛의 검이 소실되면 체력도 대폭 깎이는군. 확실히 방벽과 구조가 비슷해.”
하지만 정령 강령을 받으면 단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 모두 보강된다.
일차적으로 다중 검기가 무색으로 불타오르며 비교적 형태 변화가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날의 길이를 수 미터까지 늘린다거나 대검으로 만든다거나 소검 등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여기에 절삭력 또한 눈에 띄게 증가하며 강령이 유지되는 동안 체력 소모도 감소한다.
그 증거로 강령을 받자마자 껍질과 키틴질에 흠집만 내는 수준에 그쳤던 다중 검기가 등껍질과 갑각을 뭉텅이로 깎아나갔으며 반발력에 빛의 검이 스러지는 게 보였지만 이실리테는 지치지 않고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어룡을 해치울 때 보여준 임팩트가 워낙 컸기에 다중 검기가 무엇이든 뚫는 무적의 창처럼 보였지만.
=어룡이 술사 계통이라 방어력이 다른 이형종에 비해 유달리 낮았고 절단 계통 공격에 무척이나 취약했기에 가능했던 거였네.=
흥분을 식히고 냉정하게 분석한 결과 낮은 방어력 + 약점 공격 + 공격력 강화 = 즉사라는 공식이 성립된 것을 깨달은 것.
=하아앗!!=
촤작, 쩌걱! 카가각!
위상력이 가득 들어차 내구도가 금강석을 웃도는 등껍질이 퍽퍽 잘려나가니 생명의 위협을 느낀 수귀룡이 등껍질 속에 숨은 채로 위상력을 터트렸다.
끄웨에에엥! 아쟁 소리 같은 길고 째지는 포효와 함께 쿠쾅, 폭음이 터지며 땅이 패고 나무가 부서져 나간다.
그 공격을 레드릭으로 막아낸 이실리테가 충격에 뒤로 튕겨 날아가자 머리와 다리를 꺼낸 수귀룡이 곧장 팽이처럼 몸을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쿵! 쾅! 콰광!
갈 지之자로 튕기며 땅을 박살 내고 바위를 으스러트리는 상태가 자못 위협적이지만, 그게 수귀룡이 저지른 최악의 실수였다.
1톤 트럭 사이즈의 거북을 닮은 이형종의 돌격은 포탄처럼 위협적이었지만.
=흐으읍!!=
레드릭을 땅에 박아놓고 두 손으로 빛의 검을 쥔 이실리테가 특대검으로 형상을 변환, 포탄처럼 쏘아져 오는 수귀룡의 회전 방향 반대로 후려쳤고.
콰가각!
회전력과 가속도, 중량에 충돌한 빛의 검이 수귀룡을 사과 깎듯이 살점째로 갈라져 버렸다.
=흐악, 학! 허읍… 후욱!=
물론 빛의 검도 태반이 깎여나가 이실리테의 체력을 뭉텅이로 깎아 먹었지만, 회오리감자처럼 몸이 절단된 수귀룡보단 상태가 양호하다.
안느는 무릎에 손을 짚고 헐떡이는 이실리테를 보며 감탄했다.
=저 등껍질을 위상력째로 잘라버리다니, 공격력이 정말 어마어마한걸.=
“체력을 모두 소모해버리면 원기 충전으로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지만, 애초에 그 상태가 될 정도면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나 다름없으니 단점으로 꼽지도 못하겠지.”
=응. 진짜 도령의 존재가 결정적이네. 마도기 구원으로 체력도 채워줘, 축복으로 능력도 올려주고 기술의 위력도 높여줘. 정말 도령이랑 단짝 같은 능력이야.=
그 순수한 감상에 환인은 대답 없이 피식 웃었다.
파르히스트의 성주에게 사과 표시로 받은 주황색 6급 위상석으로 유르파가 제작해준 원기 회복의 마도기.
애초에 여자친구들의 전투 후 여자친구들의 체력을 회복시켜줄 용도로 제작하긴 했지만 이렇게나 유용해질 줄이야.
‘그야말로 호랑이의 등에 날개를 단 격이군.’
패색이 짙어지자 등껍질 속에 숨어 나오지 않던 수귀룡을 강령에 힘입어 박살 내버리고 돌아오는 이실리테에게 환인이 말했다.
“4층은 더 이상 실력 향상에 도움이 안 되겠군. 5층으로 내려간다.”
=네!=
=응.=
5계층으로 내려가는 길은 이전 층과 똑같은 회전 계단이었지만, 1층부터 4층의 계단에 비해 족히 3배는 길었다.
거기다 계단은 계층의 낮밤 전환과 무관한 장소였는지 광량이 극히 낮아 어두컴컴한데다 어디선가 휘오오오 차가운 바람까지 불어와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꾸우…….
비상이 꺼림칙하다며 칭얼거리는 소리에 환인이 목을 긁어주며 다독인다.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올라가는 길도 멀쩡하고 넌 여차하면 날아서 도망칠 수도 있으니까.”
꾸엣!
꾸엣… 꾸에…… 꾸………….
혼자 도망 안친다고 소리쳤다가 메아리치는 자신의 울음소리에 찔끔, 목을 움츠리며 불안한 듯 눈을 굴리는 비상.
=근데 진짜 길어. 거의 20층은 내려온 거 같은데…… 와, 위가 잘 안 보일 정도네. 헐, 아래쪽도 어두워서 안 보인다.=
난간이 없는 돌계단 가장자리에서 위아래를 살피는 안느의 행동에 기겁한 이실리테가 그녀의 팔을 잡고 벽 쪽으로 끌어당긴다.
=미쳤어! 떨어지면 어쩌려고!=
어쩌려고…… 어쩌려고…… 어쩌려고……….
다시 반향을 일으키는 소리에 쿠르티와 쿠핀도 불안한듯 밀짚색 기다란 꽁지깃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고는 계단의 벽 쪽에 바짝 붙어섰다.
불안이 전염병처럼 일행에게 번지는 것을 본 환인은 춥다며 자신의 왼쪽 가슴 포켓에 들어가 있는 환연을 불러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없어어. 으으, 진짜 추워. 춥다. 추워으.」
“……지금이라도 안주머니로 들어와라.”
「안주머니는 갑갑해서 싫다. 그리고 납작해질까 무서워.」
“…….”
큐삣! 꾸국!
쿠엣.
쿠으응…….
=계단도 단단한데 뭐가 떨어진다고 호들갑이야?=
=밑에서 바람이 불잖아. 어 하다가 떨어지면 죽는 거니까 그렇지.=
=너 장비 무게랑 몸무게 다 합치면 100kg이 넘거든? 나도 지금 풀세팅이라서 200kg에 가깝고. 우리가 바람에 쓰러지려면 폭풍이 불어야 해.=
=하여튼! 위험한 짓 하지마.=
「추워추어추브부우으브브.」
두서없고 산만한 분위기. 현재 목적마저 망각한듯한 일행의 모습이 이상하다. 눈빛도 어딘가 모르게 흐린 것에 환인은 눈썹을 찌푸렸다.
정신 침해가 환경 때문에 심해진 건가.
후, 짧게 한숨을 내쉰 환인은 목소리를 깔고 나지막이 말했다.
“조용.”
무겁고 위압적으로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서로 티격태격하던 이실리테와 안느, 불안에 떠는 쿠에들, 덜덜 떨며 입을 한시도 쉬지 않는 환연까지 모두가 입을 다물고 환인을 돌아본다.
그때 평온의 파동을 발사했다.
추위도 밀어내는 것처럼 따스한 느낌의 회백색 빛의 파동이 퍼져나간 뒤 환인은 모두의 눈빛이 맑아지며 정상으로 돌아온 것을 느꼈다.
“정신 차렸나.”
=어…… 응. 미안해, 도령. 방금은 내가 좀 이상했던 거 같아.=
=저도요…….=
꾸우. 쿠에엥….
“아무래도 지금 이 환경이 모두에게 정신적인 압박을 주는 듯하군. 긴장 풀지 않고 마음 단단히 먹어라. 그리고 이실리테.”
=네, 주인님.=
“네가 선물로 사줬던 장갑을 환연에게 빌려주어야겠다.”
=앗, 네.=
「추브브브으으흐으…….」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작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안쪽이 부드러운 털로 가득 찬 장갑을 꺼낸 뒤 달달 떠는 환연을 장갑에 밀어 넣었다.
손목까지 덮는 장갑이었기에 그 안에 환연이 들어가자 턱 아래까지 몸이 잠긴다.
그 상태로 장갑 안에 들어간 환연을 가슴 포켓 주머니에 넣으니 「으하아아.」 한결 떨림이 가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나.”
「응…… 찬바람도 안 들어오고 이제 좀 살 거 같아…….」
=환연아. 이거도 몸에 감아. 실크로 만든 손수건이라서 버석거리지 않고 부드러워서 장갑 안에 공간을 채우기 좋을 거야.=
환연은 안느가 주는 하얀 손수건을 주섬주섬 장갑 안으로 잡아당겨 작은 새의 둥지처럼 장갑 안에 채워넣고는 잠시 꼬물거리다 풀어진 얼굴로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아, 이제 따뜻해지는군. 환인, 안느. 고맙다.」
=말투.=
「요.」
“또 추워지면 말해라. 방도를 더 찾아보지. 그럼 다시 내려간다.”
분위기가 정돈된 일행을 끌고 다시 계단을 내려가며 환인은 모두가 느끼고 있는 불안의 이유를 논리적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논리까지도 필요없는, 마음에 여유가 있고 약간의 관찰력이 있다면 누구나 눈치챌법한 간단한 이유다.
“계단이 이렇게 긴 것은 4층의 구조 때문일 거다.”
=구조요?=
꾸에?
“너희들도 봤다시피 4층의 바닥에는 곳곳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 아래로 보인 것은 또 다른 층이었고.”
=아.=
높이를 보았을 때 그 아래층은 4층의 천장높이보다 훨씬 높았다.
“이 계단에 도착해 내려올 때만 해도 거기가 지하 5층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 아래까지 포함된 것이 4층이었던거 같군. 그러니 이 계단은 최소 40층 높이의 계단이겠지. 이제 20층 가량 내려왔으니 앞으로 내려온 만큼은 더 내려가야 5층에 도착할 거다.”
미지에 대한 무지는 쉽게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오지만, 무지가 지식으로 채워지면 두려움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기 마련.
환인은 한결 편안해진 안색의 일행과 10층 정도 높이를 더 내려갔고, 그 결과 예상대로 바닥에 내려설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