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295화 (295/813)

〈 295화 〉 289 폭군룡의 미궁

* * *

폭군룡의 미궁 4층.

벽에 붙은 회오리 계단을 통해 4층으로 내려가던 환인은 갑자기 시야가 확 넓어지며 펼쳐진 광경에 음,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계단은 벽을 따라

70~100m는 되어 보일법한 광대한 층높이. 빽빽한 나무 사이로 곳곳에 지름 10m가량 되는 구멍이 무수하게 나 있는데다 그 안쪽으로 어두컴컴한 아래층 풍경이 일부 보인다.

거무스름한 크고 작은 구멍이 무수하게 난 땅은 환 공포증을 일으키기 좋아 보였고, 실제로도 이실리테와 안느가 질색하는 표정을 짓는다.

=우와, 흉물스러워. 뭐야 저거?=

=구멍 속으로 아래층이 보이는데…… 저 위에서 싸우는 건 피해야 할 거 같아. 싸우다 지반이 무너져서 떨어지면 다 죽겠어.=

=그러게…… 어 구멍 속에서 뭐가 작은 게 날아오른다.=

=4층에서 사는 작은 새인 거 같네.=

알록달록한 숲 사이사이 흉하게 난 구멍과 높고 길고 구불구불한 벽의 병풍 같은 미궁 내벽.

여기에 미궁의 천장이 무척 높다는 점에서 비행형 이형종의 출몰 가능성을 읽은 환인은 벽에 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며 자신의 어깨에 올라와 있는 환연에게 물었다.

“근처에 이형종은 없나.”

「없어. 감지되면 말할게.」

계단참에서 습격당할 가능성은 낮나…….

낮다고는 해도 저 벽 너머에서 날아올 가능성도 있다. 환인은 여자친구들과 쿠에들을 재촉해 조금 더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20분 정도 걸어 계단을 다 내려온 환인은 눈앞에 펼쳐진 숲의 밀도에 눈을 약간 찌푸렸다.

“숲의 밀도가 위층과 비교하면 너무 높군.”

=그러게. 저 정도면 이슬이가 무기를 제대로 못 휘두르겠는데.=

1층과 비교하면 2배 가까이 나무가 늘었다. 리치가 긴 무기를 사용한다면 나무에 걸리거나 해서 지장이 생길 정도.

5급 이상의 전투에서는 약간의 틈으로 생사가 갈릴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저 숲 안에서 싸우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이실리테는 아랑곳하지 않고 투지를 뿜어내며 말했다.

=저런 제약의 전투도 경험해봐야지. 난 많은 경험이 필요해.=

=듣고보니 그 말이 맞네. 그나저나 좀 너무한 거 아냐? 엽사 조합에서 10은화나 주고 산 정보에 이런 것도 안 적혀있고 지형 정보도 없고, 좀 불량한걸.=

“클레임은 돌아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벽과 나무 사이는 거리가 좀 되니 벽을 따라 움직여보도록 하지.”

=네.=

=응.=

환인은 이실리테를 최전방에 내세우고 폭이 7m정도 되는 동굴 벽과 숲 사이의 틈을 따라 이동하며 숲의 생태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분위기도 그렇고 가을 느낌이군.’

1층과 2층은 봄의 느낌이 나는 숲이었다. 기온도 거기에 맞춰져 꽤 쾌적했고 나무도 침엽수와 활엽수가 적당히 섞여 있었다.

3층은 여름처럼 활엽수보단 침엽수가 많았고 기온도 높은 편이어서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났었다. 식생도 여름이나 밀림 쪽과 비슷했다.

그런데 여긴 척 봐도 가을이다. 침엽수보단 잎이 넓고 큰 활엽수가 많고 색도 울긋불긋 물들어있다.

땅에도 바짝 마른 낙엽이 잔뜩 깔렸는데다 기온도 3층보다 확 낮아져 활동하기에 최적의 온도.

“층마다 계절 컨셉이 있는 건가.”

환인의 혼잣말에 안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받아준다.

=1층하고 2층은 봄이었고 3층은 여름이었지? 4층은 완전히 가을 숲 풍경이니 5층은 겨울이 되려나.=

=겨울을 상정한 준비는 못 했는데 어쩌지…….=

=율이 언니가 보온 플레이트 안 챙겨줬어? 넣는 거 본 거 같은데.=

=우리 말고 주인님.=

=아.=

한 번 감기에 걸렸기 때문일까. 그녀들의 걱정이 조금 과해진 거 같아 말을 꺼내려 했을 때였다.

쿠우?

비상이 고개를 쭉 내밀고 북쪽을 보며 꽁지깃을 세운다.

끼히에에엑……!!

끄웨에에……!!

쿠구궁, 콰광. 드드드…… 쿠우웅……!

직후 두 마리의 포효와 함께 저 벽 너머에서 메아리치듯 전투의 굉음이 흐릿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환연은 자신을 쳐다보는 환인에게 검은 머릿결이 나부낄 정도로 고개를 붕붕 저었다.

「없어. 내 감지 거리 밖에서 벌어지는 전투야.」

환연의 정령 감지 범위는 대략 500m.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일행을 멈춰 세우고 그 전투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퍼덕, 퍼더덕……. 콰과광, 콰드드…… 쿠궁.

끼리리릿……!

꺄우욱, 아욱 아욱……!

‘…날갯짓 소리. 사족 보행 소리, 나무가 부러지고 넘어가는 소리…….’

소리에도 각자의 무게감과 음색이 있다. 숫자는 두 마리. 들려오는 음색의 무거움을 보자면 둘 다 덩치가 우르거 급으로 판단된다.

한 마리는 사족 보행형, 다른 한 마리는 날개 달린 비익?? 형태.

하지만 사람과 싸우는 것은 아니다. 병장기의 부딪치는 소리가 없다.

‘현재 위치는 지도의 41번.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은 북북동으로 최소 500m 밖이니 30번 근처겠군.’

소리가 벽에 반향을 일으켜 울려 퍼지긴 하지만 위치를 감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같은 미궁의 이형종끼리도 싸우는 일이 있군.”

=다른 파티가 싸우는 거 아냐?=

“들리는 소리에 병장기가 부딪치거나 사람의 육성은 들리지 않는다. 다른 파티가 전투 중일 가능성은 낮겠지.”

=어? ……듣고보니 그러네.=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 쿠르티의 짐에서 기사검을 꺼내 허리에 찬 이실리테가 환인에게 질문했다.

=주인님. 싸움이 벌어지는 곳으로 가면 안 될까요? 이형종끼리의 싸움을 보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감옥 미궁 4계층에서 나오는 것들하고 강함은 비슷할 테지만, 첫 전투가 가장 위험하다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니까 봐두면 힘을 가늠하는데 굉장히 도움될 거야.=

“그러지. 이동한다. 환연, 감지 범위 안으로 이형종이 나타나면 즉시 말해라.”

「응.」

그렇게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이동하던 환인은 군데군데 심연의 눈동자처럼 뚫려있는 구멍을 피해 가느라 시간을 조금 소비하긴 했지만, 싸움이 끝나기 전에 해당 지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쿠궁, 뀌르르르­!!

갸아아악~!!

쾅, 콰지지직! 으적!

거기서 본 것은 공룡 중 포스토수쿠스를 닮은 다리가 긴 악어 같은 생물과 그리핀처럼 한 쌍의 거대한 흰 날개를 가졌지만 공룡의 두상을 가진 다소 날렵한 형태의 생물이 서로를 죽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장면이었다.

뀌아아아악­!!

꿰르르르­!

전투는 날개를 가진 쪽이 우위에 있었다.

다리가 긴 악어 형태의 이형종은 쪽은 전신이 긁혀 피칠갑이었지만 하얀 깃털로 몸이 뒤덮인 흰 날개 쪽은 거의라고 할 만큼 피해가 없었던 것.

애초에 상성이 나빴다.

긴 다리를 가진 악어 쪽은 주요 공격이 물기뿐인데 비해 날개를 가진 쪽은 앞발에 어른의 팔뚝만 한 굵기의 흉악한 발톱도 있었고 이빨도 발톱 못지 않게 날카롭다.

공격 수단도 날개 쪽이 다양하고 기동성도 날개 쪽이 뛰어난데다 체급도 비슷하니 당연한 결과다.

‘저것도 용종인가. 조류와 파충류의 특성이 반반씩 섞인듯한데.’

환인이 흰 날개의 형태와 신체 스펙, 몸의 형태에 따른 공격방식을 유추하는 사이 두 마리는 거리를 두고 공터를 빙글빙글 돌며 서로의 공격을 견제한다.

뀌에에엑­!

푸확­!

흰 날개의 위협 포효에 주변을 자신의 피로 덧칠해놓은 긴 다리 악어가 주둥이를 벌려 화염 방사기 같은 불길을 내뿜었다.

1톤 트럭만 한 덩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올곧은 직선의 화염.

흰 날개 쪽은 채찍처럼 자신을 따라 휘어지는 불길을 피해 공중 곡예를 펼치더니 켁, 숨막힌 신음과 함께 불의 분사를 멈춘 긴 다리 악어를 향해 번개같이 내려꽂혔다.

콰과광!!

뀌이이익­!!

꾸어어억­!

삽시간에 목을 붙잡힌 긴 다리 악어가 몸부림치며 뒷발로 흰 날개를 걷어차고 꼬리로 후려치지만, 흰 날개는 긴 다리 악어의 목줄기에 초대형 갈고리 같은 발톱 8개를 박아넣고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전투를 나무 뒤에 숨어 지켜보던 안느가 중얼거렸다.

=저 하얀 날개 달린 거, 신체 강화 특성인 거 같네.=

=응. 악어처럼 생긴 것도 신체 강화가 있지만 화염 특성도 있어서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아.=

켁, 켁켁! 끄르르……!

뚜둑, 찌지직….

목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발톱이 박힌 생살이 찢어지는 소리가 섬뜩하다.

전투가 이대로 끝나는가 싶었지만, 악어는 포기하지 않았는지 주둥이에서 불을 크확 내뿜었다.

좀전에 뿜었던 불이 물결이었다면 이번에는 파도 같은 수준.

그야말로 브레스라고 칭하기에 부족함 없는 위력의 화염이 고오오오­ 산소를 연소하며 흰 날개에 쏟아지지만, 놀라운 것은 흰 날개가 그 불길을 맞아가며 앞발의 발톱으로 긴 다리 악어의 목을 파헤치고 쥐어뜯어 헤집어 버리는 것이었다.

정통으로 불길에 노출된 하얀 깃털이 조금씩 까매져 가지만 불에 큰 피해는 입지 않는 모양새다.

퀴힉, 키헤에엑­!!

긴다리 악어의 살점이 크게 패인 목 부분이 부들거리다 그곳의 살을 찢으며 불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어 펑­ 소리와 함께 긴 다리 악어의 콧구멍, 눈, 입, 발톱에 찍히고 패여 구멍이 난 목 곳곳에서 불길을 뿜으며 나뒹군다.

목이 붙잡힌 채로 온 체중을 다해 날뛰어서일까. 목에서 가슴까지 크게 찢어지며 펄떡이는 심장이 드러나고 피가 분수처럼 치솟지만.

치이이익­!

피가 뜨거운 열기에 증발하며 붉은 안개를 만들어내는데다 몸부림치며 흙먼지까지 피어오르니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그제야 긴다리 악어를 놓아주고 한발 물러서서 그 광경을 고고하게 지켜보던 흰 날개는 잠시 후 불길에 휩싸인 긴 다리 악어의 움직임이 멈추자마자 날개를 활짝 펴고 고개를 높이 치켜들어 삐에에에엑­! 승리의 포효를 질렀다.

‘불에 대한 내성이 비상하게 높은 깃털이군.’

색만 조금 검게 그을렸을 뿐 형태도 멀쩡하다. 저만큼 방염 효과가 뛰어나다면 소재로 챙겨도 괜찮겠지.

“이실리테.”

=네.=

이실리테가 레드릭을 꺼내 들며 나선 것은 그때였다.

저 주변은 트럭 사이즈의 거대 이형종 두 마리가 날뛰며 공터로 만들어놓은 상태. 바닥에 나무 잔해가 깔렸고 긴 다리 악어가 내뿜은 불로 불이 붙기 시작했지만 숲 속 보다는 싸우기 편한 무대다.

부릅.

흰 날개가 갑자기 출현한 이실리테를 향해 고개를 홱 돌리며 눈을 부라리지만, 이실리테도 강한 투기를 뿜어내며 두 손으로 자신의 키보다 더 큰 레드릭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자세를 잡는다.

2차전이 벌어지기 직전.

환인은 바짝 마른 숲에 옮겨붙어 점차 크기를 불려 가는 불길을 보곤 자신의 어깨 위 환연을 비상의 머리 위로 옮겨주며 말했다.

“환연. 불이 번지지 않도록 불의 정령에게 부탁해 끌 수 있겠나.”

「해볼게.」

“부탁하지.”

환인의 부탁에 씩 웃은 환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손을 흔들어 「이리와. 나 좀 도와줘.」 누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게 의아한 환인이었지만 콰곽, 까아앙!! 이실리테와 흰 날개가 본격적으로 전투를 시작하는 소리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아아악­!!

한차례 격돌한 흰 날개는 한 짝이 몸만큼이나 큰 한 쌍의 날개를 활짝 펴고 크기를 부풀리며 이실리테를 위협한다.

순간 뒷발로 도움닫기를 하는 동시에 앞다리 발톱으로 할퀴기를 시도하는 흰 날개.

조금이라도 걸리는 순간 살이 찢어지며 내장이 쏟아질 것 같은 흉악한 발톱이 허공을 가르며 내려꽂힌다. 길쭉한 주둥이가 우물거리는 꼴이 그 뒤를 이어 물기도 준비하는 모양새다.

무시못할 위력의 2단 공격이지만, 자신이라면 배 아래로 파고들어 할퀴기를 피하는 동시에 어느 생물이든 약점이 되는 복부를 공격했을 것이다.

점프라는 특성상 즉각적인 회피 기동은 어려울 테니까.

그러나 이실리테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흰 날개의 앞다리를 번개같이 후려쳐 공격 방향을 틀어버린 뒤 훤히 드러난 옆구리를 향해 레드릭을 삽시간에 세 번 휘둘렀다.

퍼벅뻑!!

내려치기, 당기는 동시에 후려치기, 거기서 이어지는 횡베기.

대검이라기보단 몽둥이로 후려친듯한 타격음이 연달아 터지며 흰 날개가 쿠헥, 거친 숨을 토해내면서 황급히 물러난다.

가죽이 질기고 머리에서부터 몸통 대부분을 뒤덮고 있는 깃털이 충격을 경감해주는지 자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환인의 눈에는 옆구리의 뼈가 부러진 절상이 보였다.

흰 날개의 노란 두 눈에 불신의 빛이 어린다. 이렇게 작고 약해 보이는 놈이 이렇게나 강한 충격을 줄지 예상하지 못했다는 기색.

지금껏 4층까지 내려온 파티와 싸워본 경험이 없는 이형종인 걸까.

경험의 부족은 곧 미숙한 실력으로 나타난다.

이형종끼리의 싸움은 신체 스펙이 승률의 대다수를 차지하기에 경험은 크게 문제 되지 않겠지만, 이실리테가 상대라면 그건 곧 커다란 약점이 되겠지.

퀴이이악!!

작은 이실리테를 경계하다 목을 쭉 빼며 위협한 흰 날개는 훌쩍 날아오르려 했지만, 하필이면 최악의 수를 선택했다.

=흡!=

이실리테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쏜살처럼 돌진해 대검으로 흰 날개의 시야를 가리는 공격을 하는 척하며 혼란을 준다.

그 기세에 흠칫, 흰 날개가 놀라 날개짓을 멈춘 사이 이실리테는 아주 익숙한 몸놀림으로 흰 날개의 깃털을 움켜쥐며 그 등에 올라탔다.

비상과 수십, 수백 번 대련하며 익힌 날개 달린 생물과의 싸움 대처법이었다.

퀴히익!? 뀌르르르륵­!!

등을 잡힌 흰 날개가 당황과 분노의 울음을 터트리며 날아오르다 말고 이실리테를 떨쳐내기 위해 온몸을 비틀고 사납게 날뛴다.

이실리테는 그런 흰날개의 옆구리를 허벅지로 강하게 조이며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공격, 레드릭의 자루로 흰 날개의 길다란 목을 사정없이 내려찍기 시작했다.

뻑, 뻐걱. 빠각!

상하좌우 미친 듯이 요동치는 흰 날개의 등에서 길고 두꺼운 목, 하얀 깃털에 가려진 목뼈의 한 지점만 집중적으로 가격하는 이실리테.

“비상과 싸웠던 것이 도움이 된 건가.”

꾸우…….

일방적으로 얻어터지고 있는 흰 날개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했는지 비상이 기죽은 모습으로 목을 움츠린 그 순간이었다.

끠랴랴랴략­!!

저항도 못하고 얻어맞기만 하는 상황에 대격노,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의 살기를 내뿜으며 흰 날개가 환인과 안느 그리고 그 뒤에 옹기종기 모인 쿠에들을 향해 돌진했다.

동쪽에서 뺨 맞고 서쪽에서 화풀이하는 격이지만 격노에 잠식된 흰 날개의 머릿속에 이성은 남아있지 않았다.

살아있는 것이 누구든 찢어 죽여야 분이 풀릴 것 같은 분노와 증오.

안느가 성벽의 방패를 세워 그 앞을 가로막고 환인은 영혼 화살과 패널 여섯 장을 띄워 돌진 궤적을 틀어놓으려는 찰나였다.

=흡!!=

이실리테가 한 손으로 흰 날개의 목깃털을 잡아 확 잡아당긴다. 그러자 모가지가 한쪽으로 꺾인 흰 날개의 돌진 방향이 그쪽으로 틀어졌고.

콰광!!

환인 일행을 피해 옆의 땅에 그대로 내다 꽂혔다.

먼지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가운데 휘청이며 몸을 일으킨 흰 날개는 등에 기분 나쁜 작은놈이 떨어진 것을 깨닫고 날개를 활짝 폈다.

분노가 불길처럼 타오른다. 감히 자신의 등에 올라탄 것도 부족해 목을 때리다니, 내 그 자그마한 놈을 하늘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리리라!!

이실리테가 떨어지며 레드릭을 내려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콰직!!

퀴헥……!!

낙하 속도에 위상력과 근력이 더해진 레드릭이 깔끔한 반원을 그리며 흰 날개의 척추뼈를 내려찍었다.

날개가 달렸지만 몸 형태는 짐승에 가까워 후방 시야 각도가 좁았던 흰 날개는 땅에 처박히기 직전, 점프해서 뛰어오른 이실리테를 보지 못한 것.

푸른 안개에 휘감긴듯한 무쇠의 일격에 등뼈가 기이한 각도로 꺾인 흰 날개는 격통에 사고를 잊고 앞다리만 버둥거리며 연신 폐가 짓눌리는듯한 소릴 토해낸다.

두 눈동자는 엇갈려 초점이 잡히지 않았고 벌려진 주둥이에서는 하얀 거품이 꿀럭꿀럭 올라와 땅을 적신다.

그런 흰 날개의 머리 위로 위상력을 품은 채 재차 떨어지는 레드릭.

빠각!! 꽈득! 콰각!!

두 번, 세 번, 레드릭이 장작을 패는 도끼처럼 내려쳐 질 때마다 섬뜩한 파열음이 터져 나왔고 흰 날개가 꿈틀 흠칫 거리다 그게 여섯 번이 이어졌을 때 영원한 침묵에 빠져들었다.

=후우.=

이실리테는 고개를 한차례 흔들어 땀을 털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비상과 대련한 경험이 크게 도움되었다. 아니었다면 날아오르는 것을 막지 못했을 테고 전투는 지지부진하게 흘러갔겠지. 주인님이 또 나섰을 수도 있다.

나름 깨끗한 전투였다고 자부하는 이실리테에게 다가간 안느가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을 다듬어주고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쳐주며 말했다.

=상처 없이 깔끔하게 잡았네.=

=비상이 덕분이었어.=

안느의 치사에 이마에 작게 흐른 땀을 닦으며 생긋 웃은 이실리테는 날에 묻은 회백색 물질과 깃털 조각을 천으로 닦아내다가 가까이 다가온 환인을 돌아보았다.

=주인님.=

“확실히 감옥 미궁 때보다 숙달된 게 느껴지는군. 잘했다.”

=감사합니다. 감옥 미궁 4계층에서 싸웠던 이형종보다 쉬웠던 것도 있는 것 같아요.=

“그곳의 이형종과 이것들의 강함은 별반 차이 없다. 쉽게 느껴졌다면 네가 그때보다 성장했다는 뜻이겠지.”

그러니 조금이라면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이실리테는 핑크빛 하트 화살을 심장에 맞은 것처럼 잠시 아무 말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칭찬과 쓰다듬.

가끔 훈련이 끝나면 칭찬해주시던 말과 다를 게 없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왜 이렇게 가슴 두근거리고 달콤하게 느껴지는 걸까. 그때와 지금에 어떤 차이가 있길래.

이실리테가 멍하니 서 있을 때 환연을 데리고 가서 위상석과 정령석의 유무를 확인한 안느가 말했다.

=도령, 위상석이랑 정령석 둘 다 없어.=

“그런가. 그럼 흰 날개의 깃털을 뽑아 챙기도록 하지.”

=어? 저건 왜?=

“불과 참격에 매우 강한 깃털이다. 유르파에게 보여주어 방어구나 외투로 가공한다면 도움 될만한게 나오지 않을까.”

=오, 그러고 보니 그러네. 아까 화염 숨결에도 멀쩡했었지?=

머리가 박살 나 죽은 흰 날개를 향해 환인과 안느가 한 걸음 옮겼을 때였다.

번쩍­

별안간 이실리테의 휘광이 강하게 빛나며 그 기세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투명하게 일렁이던 아우라가 폭풍처럼 회오리치며 이실리테의 몸을 휘감는다.

강력한 위상력의 폭풍을 느낀 안느가 흠칫, 뒤를 돌아보더니 환인의 팔을 잡아당기며 호들갑을 떨었다.

=헐, 도령도령!=

“음? ……저게 5급으로 성장하는 광경인가.”

뒤늦게 뒤를 돌아본 환인도 눈을 감고 우두커니 서있는 이실리테와 그녀의 주변에 벌어지는 현상을 응시하며 묻자 안느가 격하게 도리질 치며 소리쳤다.

=아냐! 저거 희귀 직업 각성 현상이야! 우와, 내가 저걸 두 눈으로 직접 볼 날이 올 줄이야!=

……희귀 직업이라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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