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4화 〉 288 폭군룡의 미궁
* * *
환연을 동료로 받아들인 환인은 자신이 그때 느꼈던 폭력적인 충동의 이유를 고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환연의 행동에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실리테, 너는 무척 아름다워. 은은한 정령 향도 매력적이야.」
=고, 고마워……?」
=나는? 나는?=
「안느도 정령들이 좋아할 법한 외모지만 정령력이 낮아 아쉬울 따름이군. 정령력만 조금 더 높았다면 정령들에게 사랑을 받았을 텐데.」
=아. 그래서 정령들이 날 거들떠도 안 봤구나…….=
「그런 거지. 읏차.」
=앗?! 화, 환연. 뭐하는 거에요?=
「난 옷이 없어. 춥다.」
갑옷을 입고 있느라 두드러진 이실리테의 가슴골로 파고들어 간 환연은 하아~ 기분 좋다는 듯이 작은 한숨을 흘렸고, 그 모습에 환인은 미약한 분노를 느끼면서 이게 일종의 동족 혐오였다는 걸 깨달았던 것.
=환연, 제가 옷 만들어줄 테니까 나와주세요.=
「그냥 여기에 계속 있어도 된다.」
=저는 줄곧 싸워야 해서 당신이 거기에 있으면 위험해요.=
=나한테 와도 괜찮은데?=
「안느는 가슴이 작아서 안돼…… 아야얏! 머리를 잡고 당기다니, 너는 내 목을 뽑을 셈인가!」
환인은 머리가 잡힌 채로 항의하는 환연을 보았다가 시무룩해진 안느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팔을 잡아당겼으면 팔이 뽑힌다고 했겠지. 몸을 잡았으면 몸이 으스러진다고 했을 테고. 그렇다고 말로 해서는 듣지 않았을 테니 이러는 수밖에.”
「으으. 이 무슨 난폭하고 무도한 인간인지!」
환연의 투정을 무시한 환인은 자신의 왼쪽 가슴 포켓을 확인한 뒤 그녀에게 말했다.
“앞으로 이 안에 들어와 있어라. 너의 안전을 확보한다는 측면에서는 그게 가장 나으니까.”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지 않아서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이실리테, 빨리 내 옷을 만들어다오.」
=네, 네에…….=
“그리고 이실리테와 안느는 시간 나면 환연에게 말투의 교정을 부탁한다. 환연 너도 이실리테와 안느가 가르치는 것을 성심성의껏 배우도록.”
「어째서?」
“너에게서 미약하지만 동족 혐오가 느껴진다. 이 점을 수정하지 않는다면 차후 너나 나에게 곤란한 일이 벌어질 거란 판단이 드는군.”
「그런 거라면 너도 고치는 것이 상호 관계적으로 좋지 않을까. 이실리테와 안느는 네가 다정한 말투를 사용하면 더욱 좋아할 거다.」
“나는 25년이 넘도록 이런 말투와 태도로 살아왔다. 그에 비해 너는 태어난 지 이제 하루, 교정한다면 네 쪽이 더 수월하고 효과적이겠지. 게다가 네 외모적인 요소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다소 부드러운 어감과 말투가 시너지를 더 강하게 일으킬 거다.”
그리고 영혼사라는 지위를 생각했을 때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말투보다 어느 정도 딱딱한 쪽이 귀찮고 성가신 일을 피하고 얕보이지 않을 수 있으며, 자신의 외모는 다소 딱딱한 말투가 어울린다고 하자 환연은 합당한 이유라며 수긍했다.
일행은 그 후 이실리테의 성장을 중점 목표로 계속 싸워나갔다.
이형종을 찾는 것은 이때까지 우연히 마주치거나 비상과 환인의 기척, 기감에 걸릴 때까지 돌아다니는 식이었지만, 환연이 동료가 된 뒤에는…….
「바람의 정령이 저쪽에 녹색에 꼬리 둘 달린 괴물이 셋 있다고 한다.」
「땅의 정령이 저기에 못생기고 울퉁불퉁한 괴물 넷이 모여있다고 알려주고 있어.」
정령을 통해 이형종의 위치를 알려주거나.
「저기 저 방향에서 이쪽으로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다.」
「이대로 가다 보면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겠다.」
다른 파티의 위치도 알려주는 등, 사람과 마주치지 않고 이형종과 싸우는데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마냥 좋은 결과만을 내지는 않았다.
전투가 계속될수록 이실리테가 상처를 입는 횟수가 늘어났고, 그에 따라 이실리테의 얼굴은 계속 굳어졌으며 긴장과 중압감이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저등급의 미궁은 특정 미궁을 제외하곤 정신 침해 요소가 그리 강하지 않다.
하층으로 내려갈수록 자연스럽게 침해 효과가 강해지며 정신적인 피로와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지배당하는 식이다.
하지만 고등급의 미궁은 입구에서부터 강한 침해 효과를 뿌린다.
숨을 쉴 때마다 폐부를 찌르는듯한 서늘한 분위기.
주위에 아무도 없음에도 누군가가 지켜보는 듯한 착각.
다른 사람이 뒤에 서있는 것처럼 목덜미가 간지러운 기분.
환인은 개방형 미궁의 경험이 있는데다 위상류 효과 및 정신 구조의 상이함으로 정신 침해에 면역에 가까운 상태다.
안느는 수많은 6급, 7급 미궁의 경험이 있어 분위기에 짓눌리지 않았지만 이실리테는 달랐다.
미궁 경험이 일천한데다 6급 이상의 고등급 미궁은 처음이기도 했고,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자신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기에 그에 대한 무의식 속의 자격지심, 환인을 향한 송구스러움이 계속 자극받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감옥 미궁이나 웨이포드의 빛이 닿지 않는 미궁처럼 인간에게 적대적인 환경이었고 안느와 단 둘이서 들어왔다면 역설적으로 긴장이 덜했을 것이다.
오직 전투에만 몰두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환인이 함께 들어와 지속해서 그의 존재감을 인식했고, 하나의 완벽한 생태계가 보존된듯한 미궁 내부는 감옥 미궁에 비해 신경 쓸 요소가 그만큼 많았다.
뜬금없이 불쑥 나타나 움찔하게 하는 들짐승. 갑자기 퍼더덕 날아오르며 사람을 놀라게 하는 날짐승.
전투중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밟아 미끄러지는 것도 경계해야 하고 돌부리에 걸리는 것도 신경 써야 한다.
출현하는 이형종도 까다롭다.
감옥 미궁의 이형종은 대다수가 언데드. 최대한 파괴하거나 머리를 부숴야 죽고 썩어버린 육체에서 흐르는 체액이 위험하긴 하지만, 충분한 실력과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문제는 되지 않았기에 신경 써야 할 요소는 오히려 적었다.
하지만 폭군룡의 미궁은 달랐다.
일단 살아있는 상대에게서 쏟아지는 분노와 증오, 살기 및 생명체 특유의 존재감이 압박을 준다.
층이 깊어질수록 이형종은 거대해져 상대하기 까다로워졌고, 무리 지어 몰려다녔으며, 때때로 독이나 속성 공격을 가하는 이형종까지 출현해 그녀의 신경을 자극했다.
여기에 환인이 지켜보고 있어 실수하면 안된다는 강박관념까지 끼어들었다.
신경 써야할 게 늘면 늘었지 줄지 않는 상황에 마음의 부담까지 짊어지고 있었으니 이실리테의 몸놀림이 어지러워지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콰득!
=……!=
결국 쌍두독사 세 마리와 싸우던 중 허벅지를 물린 이실리테는 신체 능력 저하 독에 중독되어 수세에 몰렸고, 즉시 범용 해독제를 꺼내 마셨지만 단백질독 전문 해독제가 아니었기에 완벽하게 치료되지는 않았다.
때문에 공격을 막아내다 다시 팔을 물린 이실리테는 중독이 가중되어 신체 능력이 더더욱 하락했고, 결국 환인과 안느가 개입해 상황을 정리했다.
첫 패배.
이실리테는 자책감에 고개를 푹 숙이고 말없이 안느의 치료를 받았다.
=……너무 그렇게 신경 쓰지 마. 싸우다 보면 다치는 것은 다반사니까. 전사나 투사들은 몸의 상처만큼 성장한다고 하잖아?=
=신경 안썼어. 아까 실수를 복기하고 있었으니까.=
안느가 이실리테를 성술로 치료하며 위로했지만, 이실리테는 마음에 여유가 없는 것처럼 굳은 얼굴로 차갑게 대꾸했다.
=그럼 다행이고.=
하지만 안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치료를 끝마친 뒤 그녀의 어깨를 상냥하게 두드려줄 뿐.
그녀의 자상함에 이실리테는 중압감이 더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알게 모르게 느끼던 그녀를 향한 질투와 부러움이 시기심으로 변화할 것만 같았다.
밤하늘의 달만큼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은발.
여신이 있다면 저렇지 않을까 싶은 화려하고 가려한 외모.
살이 덕지덕지 붙은 자신의 몸에 비해 늘씬한 체구에 큰 키와 강한 힘.
그녀가 자기 입으로 솔직하게 시인한 적은 없지만, 절대 낮지 않을 신분의 집안 내력.
무엇하나 그녀에게 견줄 것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패배감과 시기심이 진득하게 눌어붙을 것 같은 기분.
뒤에서 이실리테를 지켜보고 있던 환인은 그녀의 정신이 여러모로 한계라는 것을 눈치챘다.
이대로 두면 5급으로 성장하긴커녕 미궁의 정신 침해에 정신질환이 발생하겠지.
‘도움과 케어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인가.’
아무런 스트레스 요소 없이 들어왔어도 심리적인 압박이 심한 곳이 고등급 미궁이다. 이런저런 심리적 중압감을 느끼며 며칠째 쉬지 않고 싸웠으니 이정도까지 한 것도 선방한 셈.
이실리테가 임시로 만들어준 옷을 입고 비상의 머리에 앉아있는 환연에게 물었다.
“환연. 주변에 사람이 있나.”
「없어. 뭐 하려고?」
“보면 안다.”
주위에 동료들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받은 환인은 말없이 평온의 파동을 뿌렸다.
회백색의 빛무리가 따스하게 퍼져 나가며 이실리테를 포함한 일행을 상냥하게 휘감는다.
이실리테는 왠지 모르게 포근함을 느끼며 가슴에 돌덩이가 들어찬 것 같던 답답함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무의식중에 몸에 힘을 주고 있었는지 어깨가 내려가고 몸이 한결 편해진다.
건틀릿을 벗고 두 손으로 얼굴을 한차례 문지른 이실리테는 마음속의 패배감과 시기심을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환인에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네 중압감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어깨에 힘을 뺄 수 있도록 노력해라. 그렇게 긴장하면 될 것도 안되는 법이다.”
이실리테의 감사 인사에 환인은 담담한 모습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이실리테는 뺨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이슬이의 굳은 분위기가 좀 풀어졌네.
안느는 그녀가 심적으로 위태하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지만, 자신이 따로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마음만 졸이다가 이실리테의 표정이 풀어지는 것을 보곤 그녀도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씩 웃으며 환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도령, 말로 하는 위로보다 꼭 안아주는 게 이슬이의 긴장을 풀어주는 데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해?=
환인도 안느의 의중을 읽곤 피식 웃으며 대꾸한다.
“그렇게 안아주면 오히려 다른 문제가 생기겠지.”
=문제? 무슨 문제?=
이해를 못하는 안느의 뺨에 손을 댄 환인은 그녀와 눈을 마주고 그윽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눈을 끔뻑이다가 얼굴을 붉히며 당황한다.
일부러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하려는 안느의 뺨에 손을 올린 채 그녀의 허리를 잡고 몸을 바짝 붙인다. 그 상태로 얼굴을 좀 더 가까이하자…….
=응악, 알아써! 인정, 인정할게!=
계속 이어지는 시선에 견디다 못해 항복을 선언한 안느는 후다닥 환인에게서 떨어져 손바닥으로 얼굴에 부채질하다가 급기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프하핫 웃음을 터트렸다.
=우와~ 나 왜 이러지. 아하하하!=
엄청 부끄러워! 도령이 말한 다른 문제가 이런 거였구나~!
그 모습을 비상의 머리 위에서 한심하게 바라보던 환연이 옷의 목깃 부분을 꾹꾹 잡아당기며 핀잔을 날렸다.
「새삼스럽군. 밤에는 몸도 섞으면서 고작 눈 좀 마주쳤다고 암컷의 얼굴이 되는 건가?」
=야잇, 암컷이라니! 너 그런 말 쓰면 못써! 아니 그전에 그런 말을 어디서 배운 거야?=
「근처의 정령들이 듣는 것은 나도 들을 수 있다. 미궁을 탐사하는 다른 파티가 안느 너와 비슷한 표정의 여자에게 암컷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어.」
=아냐아냐. 그건 못된 말이야. 착한 요정은 그런거 쓰면 안 돼.=
「그래?」
=그래!=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어째서 이슬이 혼자 싸우게 두는 건지 난 이해가 안 된다. 지금 전투 방식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데.」
환연은 환인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안느가 해주었다.
=지금은 이슬이 집중 육성 기간이라서 그래. 여기 미궁에 들어온 목적이 이슬이를 5급으로 올리기 위해서거든.=
「혼자 싸우면 빨리 성장하나?」
=전투 경험은 빨리 늘지.=
흐음? 고개를 갸웃거린 환연은 좀 전의 회백색 빛의 파동이 무엇인지 물어본 뒤 나름의 판단을 내린다.
「다시 말해 경험의 독점이란 거군. 소모품의 사용은 안느 널 사용해 최대한 억제하고 정신적 피로는 평온의 파동으로 해소해가며 사냥 가능 시간을 확보하는 방식, 간단하지만 효율적인 구조야.」
=……전부 사실이긴한데 뭔가 좀 찜찜하네…….=
「무엇이 찜찜하다는 거지?」
=너 말투. 날 생체 부품처럼 말하고 있잖아. 뭐야 그게.=
「큰 문제는 아니니 신경 쓰지 마라.」
=문제 맞거든?! 그리고 내가 말투 바꾸라고 했지! 어미에 귀엽게 ~요를 붙이라구, 요!=
「큰 문제는 아니니 신경 쓰지마라요.」
=아니이!=
만지면 붉은색이 묻어날 정도로 얼굴이 빨개진 안느와 진지한 환연의 다소 우스꽝스러운 대화를 바라보던 이실리테는 뭔지 모를 편안함에 마음의 부담이 조금씩 사라져가며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나도 정신 침해에 휘어 잡히고 있었던 거구나.
조금 전 환인이 해줬던 격려를 다시 떠올린 이실리테는 아주 자그마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가……. 나도 주인님처럼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때문에 정신 침해에 강하게 영향을 받기 시작했고 몸도 거기에 따라 굳어진 거였어.
방금 물린 것도 평소였다면 가볍게 피했을 수준이었는데 긴장으로 몸이 굳고 둔해져서 물리고 말았다.
이실리테가 머릿속으로 자신을 짓누르던 것들을 떠올렸다.
굳이 치지 않아도 되는 시험을 치겠다고 억지를 부린 것.
이래놓고 시험에서 떨어져 주인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면 어떻게 하나.
사태가 안 좋아져서 주인님과 떨어지게 된다면?
주인님과 떨어지는 것은 괴롭지만 버틸 수 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나더라도 주인님이라면 자신을 기다려주실 거란 믿음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 사이 자신의 자리가 사라지는 것이 무섭다.
내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차지해버리는 것이 두렵다.
=내가 웬만하면 이 말 하지 않으려고 그랬는데, 너 말투가 너무 나빠.=
「무엇이 나쁘다는 거지? …요?」
=태연스레 다른 사람의 상처를 후벼 파는 식이란 말이야.=
「내 화법은 환인의 것을 고스란히 받아 베꼈을 터인데. 그 말은 안느 넌 환인이 하는 말을 기분 나쁘다고 생각한다는 건가? …요?」
=이거! 지금 이거! 태연스럽게 널 향한 화살을 도령한테 흘리고 있잖아! 난 너한테 말하는 건데 왜 다른 사람을 끌고 오는 건데? 그리고 도령은 우리한테 그런 식으로 절대 말 안 하거든!=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환인은 너희한테 만큼은 상냥하게 말하고 있었어. …요.」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도 정중하게 말한다구!=
「그건 가식이다. 본심이 거의 섞여들지 않은 가식. 그게 옳다고 말하는 건가?」
=옳고 그름의 차이는 둘째치고 도령은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예의와 범절을 지키고 있단 말이야! 너는 안 지키는 거고!=
「음……. 오묘하군. 표면적인 태도로 분쟁의 발생 여지가 생겨난다니, 인간이란 어찌 이다지도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생물이란 말인가. 결국, 속은 자기밖에 모르는 사이코패스라 해도 겉으로 예의 있는 척하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니 기만과 우롱이 만연하고 사회질서…….」
=아니 그러니까 그 문제는 좀 더 본질적인 거고…… 대화에는 친밀도에 따라 변하는 기본적인 예의가 있고 넌 그 예의를 말아먹었다는 뜻인데 사회 이야기가 왜 나와…….=
“…….”
무언가 훈육을 하려 하는데 잘 안되는지 괴로워하는 안느와 그게 이해 안 된다는 듯이 눈썹을 귀엽게 찡그리는 환연, 그리고 괜히 자신에게 불똥이 튀고 있어 비상을 쓰다듬으며 못 들은 척 하는 주인님의 모습.
뭔가 가슴이 간질거리며 가슴을 짓누르던 것이 점차 점차 사라져간다.
문득 이실리테는 자신이 미소를 머금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풀썩 웃어버렸다.
쿠에~.
쿠르티가 다가와 몸에 뺨을 비비며 작게 운다. 그러고 보니 쿠르티도 계속 걱정스러워했는데 그것도 눈치 못 챘었네.
이실리테는 울 것 같은 웃음을 띠고 쿠르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래……. 나답지 않게 여러 가지를 신경 쓰고 생각하니까 동작이 둔해지고 손발이 어지러워지는 거야.’
구구절절 반드시 이기겠다느니 주인님을 위해 이 한목숨 희생하겠다느니 긴장을 끌어올리기만 하는 생각보다 그냥 하나만 생각하자.
매순간 주인님을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거야.
이실리테는 레드릭을 고쳐 쥐고 눈을 반짝 빛냈다.
마음가짐이 바뀐 이실리테는 전후가 확연히 차이 날 정도로 동작이 매끄러워졌고 부드러워졌다.
이때까지 만난 이형종은 대다수가 도마뱀이나 이구아나였지만 악어 같은 종류도 있었고 랩터 같은 공룡과 흡사한 이형종도 출몰하는가 하면 다리 달린 뱀도 있었다.
전부 척삭동물문 파충강 뱀목에 해당하는 이형종들.
중간 생물분류가 같았기에 기초적인 신체 구조도 비슷했고, 결과적으로 전투 양상도 비슷했기에 이실리테는 긴장과 부담감을 내려놓자마자 순식간에 전투에 적응하며 4마리까지도 가볍게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환인은 그런 이실리테의 변화를 눈여겨보며…….
「환인. 저기 땅속에 정령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여긴가.”
「응. 거기 발밑.」
환연의 도움으로 땅에 묻혀있는 정령석을 찾아 캐고 다녔다.
덕분에 어제 하루와 오늘 반나절 간 캔 정령석이 3개, 200g대 2개와 400g대 1개였고 이실리테가 죽인 이형종의 몸에서 나온 190g 정도의 정령석 하나 해서 총 4개를 얻은 상황.
“캔 것을 제외하면 사흘 동안 50마리 가까이 잡았는데 얻은 정령석이 하나뿐이군.”
=정령석 때문인지 위상석도 잘 나오지 않는 느낌이야. 어째서 안스트하고 헬루멘이 정령의 동굴을 굳이 차지하려 들지 않는지 알 거 같네.=
“하지만 정령사가 온다면 돈은 쉽게 벌 것 같은데. 정령도 많으니 정령들과 쉽게 친해질 수도 있을 것 같고. 여러모로 정령사에게 메리트가 큰 미궁이 아닌가.”
=음.... 그건 아닐 거라고 봐. 환연이가 정령석을 찾아내는 게 특별한 거일 걸? 그리고 정령은 계약을 맺은 정령만 쉽게 볼 수 있고, 아닌 정령을 보기 위해서는 정령안을 열어야 하는데 이게 또 눈에 엄청나게 피로를 주는 거라서.=
“그런가.”
=그치만 등급이 낮은 직업자가 미궁에서 금화를 쥐어볼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거 아닐까.=
“일확천금을 노리는 거군.”
=응. 그리고 젬트 리저드 고기만큼은 인기가 많고 비싸니까 그걸 노리기도 할 거고.=
고개를 작게 끄덕이던 환인은 이실리테의 싸움에 시선을 주었다.
다리가 꼬리만큼 긴 악어 이형종을 상대로 위상력의 배분을 절묘하게 제어해 공격 때에만 위상력을 무기에 주입하는 식으로 공격력을 극대화, 긴 다리 악어 이형종의 다리와 꼬리를 잘라버리고 목을 쳐버리며 수월하게 승리를 거머쥔다.
“폼이 제대로 올라오고 있군.”
=응. 일 대 다수에도 실력을 모두 끌어내는 것처럼 보여.=
미궁에 완전히 적응한 거겠지. 환인은 환연과 함께 긴다리 악어 이형종의 사체에서 위상석과 정령석을 검사하는 이실리테를 불러들였다.
“이제 미궁에 익숙해진 듯하니 4층으로 내려가도록 하지. 다음 층부터는 안느도 같이 나간다.”
=엉.=
=네, 주인님.=
4층부터는 5급 이형종이 출몰한다. 2마리 이하면 이실리테 혼자 싸우고, 3마리 이상이면 초과분은 안느가 떼어내 빠르게 정리하는 식으로 계획을 짠다.
“처음 몇 번의 전투가 가장 위험하니 집중해라. 상황을 봐가면서 강령도 걸어줄 테니 늘 상황 변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고.”
=네.=
=알았어.=
환인이 앞서 4층 계단을 향해 걷기 시작하자 이실리테의 표정을 살핀 안느가 옆에 붙으며 말을 걸었다.
=표정이 좋은걸? 폼도 좋고. 뭔가 마음가짐이 변한 거야?=
=……주인님 말씀대로 어깨에 힘을 빼서 그런가 봐.=
그러며 살짝 미소 짓는 이실리테의 모습은, 연속된 전투로 흙먼지가 묻어 지저분했지만, 이상하게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안느는 생각했다.
‘으~음.’
지금뿐만이 아니다. 파르히스트에서 처음 만났을 땐…… 예쁘긴 했지만 어딘가 패배감이 약간씩 묻어난다고 할까 자존감이 낮았다고 할까.
그냥 예쁘고 음식 솜씨 좋은 여자애, 같이 지내기 좋은 성격 좋은 여자애라는 느낌이었는데 뭔가 쑥쑥 커지더니 지금은 같은 여자인 자신도 때때로 가슴 두근거릴 만큼 예쁘게 보이기 시작했다.
=흐으으음.=
=왜 그래?=
=아냐. 나도 열심히 해야겠다 싶어서.=
자신도 훈련을 열심히 하고 성술과 성법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지만, 이실리테의 변화가 너무 크다 보니 조금 뒤처지는 느낌이 없지 않다.
「환인은 직업이 영혼사라고 했지?」
“일단은 영혼사다.”
「영혼사가 뭔지 모르겠지만 직업자는 맞는 거야?」
“그래.”
「휘광이 없으면 무직자라는 걸 들었는데 예외도 있나 보다.」
“차근차근 말해주겠지만 지금 나는…….”
비상의 고삐를 잡고 앞서 걸어가며 며칠간의 집요한 교육으로 말투가 조금 순해진 환연과 대화하는 환인.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안느는 이실리테에게 지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그녀와 나란히 걸어나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