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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292화 (292/813)

〈 292화 〉 286 폭군룡의 미궁

* * *

일행은 조심에 조심을 더해가며 천천히 전진, 이틀을 꼬박 써서 3층까지 내려왔다.

함정은 없었기에 발목 잡히는 시간은 없었지만, 환인과 비상의 기감에 이형종이 포착되면 그것들을 이실리테가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움직여서 시간이 적지 않게 들었다.

이형종과 싸우는 것은 오직 이실리테 뿐.

환인과 안느는 그녀가 위험에 처하면 언제든 나설 수 있도록 주시하고 있었지만, 3급 정도 되는 이형종은 이실리테에게 적수가 되지 않아 나설일은 없었다.

그리고 도착한 3층에서 시작된 전투는 대체로 무난하게 흘러갔다.

서너 마리씩 출현하긴 했지만, 레드릭의 위력도 위력이고 이실리테의 전투 기량도 훈련과 대련을 통해 일반적인 4급 전사의 수준을 아득히 넘었기 때문.

=하아압!=

키이잇­!

콰각, 투두둑­ 쾅! 콰광!

=폭군룡의 미궁이 정식 명칭보다 정령의 동굴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이유는 정령석 때문이라는 건 도령도 이제 알지?=

“그래.”

이형종을 잡아도 나오고 땅을 파다가도 나오며 운이 좋다면 땅에 굴러다니는 정령석을 주울 수 있다.

퀴이익­!

취지지짓­!

=이잇, 흡!=

우우웅­ 촤아악­!

=정령석의 효용은 주로 정령과 관련된 용도야.=

알이 굵고 정령력이 강하다면 무기나 방어구, 액세서리의 재료로 가공돼 정령술의 위력을 올리는 무구가 되고, 알이 작고 정령력이 미약하면 갈아서 가루로 만든 뒤 정령과 친화력을 올리는 데 사용한다.

정령은 보통 플뢰들이 가장 많이 사역하지만 모든 플뢰가 정령을 사역하는 것은 아니며, 플뢰가 아닌 종족 중에서도 정령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런 사람들을 통틀어 정령사라고 부른다.

=정령이 만들어내는 속성은 술사들이 형성해내는 것보다 더욱 순수한 자연에 가까운 힘이어서 아예 분류가 나뉜 거야.=

정령을 다루는 급에 따라 최하급은 1급, 하급은 3급, 중급은 5급, 상급은 7급, 최상급은 9급 각성자 정도라는 게 이 세상의 통설이라고.

키에에엑!!

=핫!!=

콰직!

안느의 정령학 강의가 이어지는 사이 에일리언을 닮은 네 마리의 도마뱀 이형종과 5분여 동안 드잡이질을 하던 이실리테가 한 마리의 빈틈을 잡아 허리를 쪼개버린다.

=정령과 친해질수록 강한 힘을 낼 수 있고 정령의 힘을 가까이서 쐴 때마다 친화력이 상승해. 그러다 친화력이 일정 이상이 되면 다음 단계 정령이랑 계약하는 식이야. 그래서 정령석은 정령사하고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아이템인 거지.=

“그 때문에 고품질의 정령석은 전부 종족 연합 도시로 수출되는 건가.”

=응. 가격도 엄청나게 비싸. 무게 200g 미만은 전부 가루용으로 활용하고 200g부터는 본격적으로 장비에 사용하는데 이때부터 100g당 2금화에 거래돼, 300g이면 100g당 3금화고 400g이면 100g당 4금화. 이런 식으로 높아져.=

“보통 시중에 풀리는 수준은 어느 정도지.”

=돈으로 구할 수 있는 크기 한계는 250~330g 내외? 그 이상은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들다고 해.=

촤학­! 훙훙훙훙…….

아가리를 쫙 벌리고 점프해서 덮쳐드는 한 마리를 올려 베기로 비스듬히 끊어내는 이실리테.

좌우로 몸뚱이가 나뉜 악어 사이즈의 도마뱀이 내장과 피를 흩뿌리며 널브러지고, 1:2가 되자마자 번개 같은 연격으로 남은 두 마리의 머리를 내려쳐 죽이고 횡베기로 으깨버리며 전투를 마무리 짓는다.

안느도 설명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는 이실리테에게 다가간다.

=수고했어. 이번에는 3대밖에 안 맞았네.=

=후우, 응.=

1층에서는 한 마리씩 돌아다녔고 강함도 낮은 이형종이었기에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3층부터는 여러 마리가 무리지어 출몰하기 시작했고 등급도 4급이거나 4급에 가까워 이실리테는 일 대 다수의 경험을 착실히 쌓아나가는 중이었다.

다소 부족한 경험이 일 대 다의 전투 쪽이었는데 그걸 보충해가며 착실히 성장해나가고 있었던 것.

이실리테가 그렇게 전투를 이어나가는 동안 환인은 정령을 살피고 정령에 대해 배웠다.

갑자기 정령에 관한 지식을 요구한 이유에는 정령의 동굴에 정령이 정말 많았기 때문이었고, 자신이 정령을 다룰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영혼 시야를 열면 반딧불처럼 사방에서 날아다니는 최하급을 볼 수 있었고 하급도 불과 번개를 제외한 여러 가지 속성이 곳곳에 눈에 띈다.

1층에도 적지 않았지만 지하 2층부터는 과장 보태서 공기 반, 정령 반이다.

=어때, 아직 아파?=

=아니. 이제 괜찮아. 고마워.=

안느에게 성술로 치료받는 이실리테를 바라보다가 빛으로 뒤덮인 왼팔에 시선을 주었다.

현재 보유 영혼 구슬 갯수는 72개.

오울링에서 일백에 가까운 영혼을 성불시키며 보유 갯수 60개를 달성한 이후 비자룩스와 캐스테드를 거치면서 평균 3일마다 1개꼴로 늘어나는 중이다.

물론 늘어나는 텀은 달랐다. 오울링을 나왔을 때는 하루에 1개씩 늘더니 그 간격이 점차 길어지고 있다.

영혼을 성불시켜 빛구슬을 흡수하면 영혼 구슬 증가 속도가 빨라졌다가 한동안 성불행을 못하면 다시 느려지는 식.

“…….”

환인은 정령이 들어가 있는 영혼 구슬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자신의 직업 바탕은 영혼사와 강혼사의 특징을 둘 다 가진 혼합 직업이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근간이다.

그런데 정령을 다룰 수 있는 것은 어째서일까. 혹시 영혼사와 강혼사의 이중 직업이 아니라 영혼사, 강혼사, 그리고 정령사의 삼중 직업인가?

안느에게 물어봤었다. 정령사도 정령을 몸에 받아들여 싸우는 방식이 있느냐고. 그에 돌아온 대답은 =있어.=였다.

정령과 합체해서 해당 정령의 속성을 사용해 싸운다고.

자신의 강령과 흡사하지만 그것만으로 정령사라고 단정 짓기에는 차이점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정령사는 언제 어디서든, 불이 없는 곳에서도 불의 정령을 불러낼 수 있고 하늘에서도 땅의 정령을 불러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은 그곳에 존재하는 정령만 강제력으로 움직일 수 있다.

정령은 정령사의 말에 따르고, 계약맺지 않은 정령이라도 정령사가 하는 말이면 일단 들어주는 척은 한다.

하지만 자신이 말을 걸면 사람 말을 하는 원숭이를 보는 것처럼 신기해한다. 뜻도 안 통하고 말도 안 먹힌다. 당연히 복잡한 명령은 물론 정령에게 힘을 발휘하라는 지시도 내리지 못한다.

무엇보다 자신은 정령어도 못하고 그때문에 정령과 계약 자체도 못하는 상황.

‘정령사인가 정령사를 닮은 다른 직업인가.’

아무튼.

정령들의 친밀도를 올리기 위해 정령의 목소리를 듣게 된 그때부터 줄곧 시간 날 때마다 영혼 구슬 핸들링을 통해 정령들의 액티비티를 충족시켜주고 있어 조금씩이지만 친밀도가 쌓이는 느낌이긴 한데…….

‘메마른 호수에 물 한 스푼을 뿌린 느낌이라는 게 문제군.’

한때 어둠의 정령을 실수로 후려치는 바람에 적대치가 max를 찍었던 적이 있다.

그 상태가 어둠의 정령석 가루로 해결된 것을 보면 정령석을 쓰면 확실히 사이는 좋아질 것이다. 그러나 친밀도를 정령석으로 올린다 해도 문제가 또 존재한다.

다루는 속성이 많아질수록 요구하는 정령석의 종류도 많아진다. 불과 바람과 땅의 정령을 다룬다면 불, 바람, 땅 세 가지 속성의 정령석이 필요하니 모든 정령을 쓸 수 있는 환인에게는 모든 속성의 정령석이 필요한 것.

정령석으로 친밀도를 올리려 한다면 밑빠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식이 되는 거다.

한마디로 금전적 문제다. 100g 미만의 정령석을 쓴다 해도 한 알에 수십 은화를 호가하는 데 그걸 밑도 끝도 없이 부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친밀도를 올려도 뭐가 좋은지 알 수 없다는 점도 문제다.

낮다면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도망가버리니 영혼 구슬 수급을 위해서 일정 친밀도는 유지해야 하지만, 친밀도를 높이면 볼 이득을 알 수 없다.

“…….”

우선 구하기 쉽고 가격이 낮은 정령석 위주로 속성 정령과 친화력을 올려볼까, 아니면 그냥 이 상태를 유지할까 고민하는 가운데 안느와 함께 이형종 사체를 갈무리한 이실리테가 다시 출발했다.

하루가 다시 흐르고 미궁 입장 나흘째.

3층을 배회하며 이형종과 싸워나가는 이실리테를 지켜보던 환인은 어째서 안느가 채산성이 안 맞다고 한지 이해했다.

이때까지 이형종을 개체 수만 따졌을 때 30마리 넘게 잡았는데도 정령석은 물론 위상석도 하나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땅에 떨어져 있는 정령석도 당연히 없었다.

‘내려오는 동안 곳곳에 보이던 파헤쳐진 자리는 정령석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흔적이었나.’

자신들의 운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지만, 환인은 그게 아니라 이 미궁의 위상석, 정령석 형성 확률이 낮은 거라고 직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숲을 만들어내는데에도 미궁은 적지 않은 힘을 소모할 거다. 거기다 강화형 용종이 출몰하니 위상석이나 정령석을 넣어 더 강한 이형종을 만들어낼 여력이 부족한 게 아닐까.

=비상아. 이형종 기척은 안 느껴져?=

꾸우? 쿠흥.

고개를 갸웃하다가 좌우로 붕붕 흔드는 비상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안느가 표정이 어두운 이실리테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이 근처에는 없는 거 같으니까 계속 움직이자.=

=……응.=

자신이 나설 상황은 아니었기에 여자친구들의 뒤를 따르며 유달리 침엽수가 많고 후덥지근해 땀이 나는 여름 숲 풍경의 미궁을 배회하던 환인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이실리테, 안느. 잠시.”

키 15cm ~ 25cm정도의 여러 속성 정령들이 땅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저기서 뭘 하는 걸까.

호기심을 느낀 환인은 온갖 속성의 하급 정령들이 바글거리는 곳으로 다가갔다.

자신이 접근해도 힐끔거릴 뿐 그 자리에서 떠나려 하지 않는 여러 색깔의 정령들.

=도령. 여기에 뭐가 있길래 그래?=

아무것도 없는 흙바닥을 신경쓰는 환인의 태도에 안느가 의아해하자 환인이 대답했다. 여기에 정령들이 모여있다고.

=정령이? 잠깐만…… 우왓, 얘들 왜 이렇게 모여있어?=

정신을 집중해 정령안???을 연 안느는 열 명이 넘는 정령의 존재에 흠칫 놀라며 물러선다.

=정령이 많아?=

=어어. 셋, 여섯, 아홉, 열둘…… 열여섯이나 모여있어. 큰녀석도 넷이나 되고.=

=…….=

이실리테도 눈에 힘을 주고 주인님과 안느가 바라보는 곳을 살펴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비상이 고개를 갸웃 갸웃하는 모습에 설마 하면서 물었다.

=비상아. 너도 보여?=

쿠웃.

……나만 안 보이는 건가. 이실리테가 우울함을 느끼며 쿠르티의 날개 끝을 매만지고 있을 때 환인은 접이식 삽을 꺼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정령들의 수군거림이 오울링으로 향하던 중 어둠의 정령을 발견했던 그때 그 느낌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이 밑에 정령석이 묻혀있을 가능성이 크다.

환인이 땅을 파기 시작하자 정령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해지며 좀 더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뭔가 있군.’

=도령. 도와줄게.=

=주인님, 삽 저한테 주세요. 제가 팔게요.=

“아니다. 정령과 친해지려면 직접 움직이는 게 좋다고 했으니까……. 다친다. 물러서라.”

너무 가까이 다가와 머리를 들이미는 풀의 정령을 조심스레 밀어내며 땅을 파길 잠시, 정령들이 한순간 술렁이는 소리에 멈칫, 삽질을 멈춘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삽을 넘겨주고 두 손으로 흙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툭.

얼마 후 뭔가 단단한 게 손끝에 닿는 걸 느낀 환인은 조심스럽게 그 주변을 파헤치다가…….

=헉! 도령 그거 뭐야? 설마 정령석이야?=

농구공만 한 반투명한 검회색 수정을 발굴해냈다. 무게로만 따져도 3kg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크기.

「와.」

「히야아아…….」

「우왕.」

“……모르겠다.”

정령석이라면 지금 모여있는 정령들이 달려들거나 들러붙거나 그런 반응을 보여야 하는데 모두다 일정 거리를 두고 작은 탄성만 지를 뿐, 접근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안느, 너도 이게 뭔지 모르나.”

=어어. 처음 보는데? 잠시만.=

조심스럽게 농구공만한 수정을 들어 올린 안느가 크으, 설렘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게가 3kg쯤 되나? 이게 정령석이라면, 이만한 크기의 정령석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없었으니까 그 희소가치를 생각했을 때 자체 가격만 900금화에 프리미엄 붙으면 2000금화까지도 오르겠어.=

“정령들 반응을 보면 정령석은 아니다.”

=그게 아쉽지. 어둠의 정령석이라면 색이 좀 더 짙어서 흑요석처럼 보여야하는데 이건 그냥 검회색이니까.=

환인이 가까이서 두 눈을 끔뻑이는 어둠의 정령에게 수정을 슬쩍 내밀자 꺅, 호들갑 섞인 소릴 지르며 뒤로 호다닥 물러난다.

위협을 받은 모습이 아니라 관심과 호기심이 있지만 가까이 있기에는 뭔가가 뭔가라서 호들갑을 떠는 모습.

“뭔지 모르겠지만 챙겨놓고 유르파에게 보여줘 봐야겠군.”

=어. 그게 낫겠어. 뭐 을씨년스럽거나 음산한 기운은 안 느껴지니까 나쁜 물건은 아닐 거야.=

그때 수정에 계속 호기심을 보이던 비상이 다가와 부리 끝으로 툭 검회색 수정을 건드렸다.

그 충격에 수정이 흔들리는 동시에 서걱, 손바닥에 뭔가 잘리는 느낌이 든 환인은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왼쪽 손바닥이 뜨끔하더니 열과 함께 찌릿거리는 고통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빛에 뒤덮여 상태는 안보이지만, 손바닥이 베였다는 걸 눈치챈 환인이 검회색 수정을 내려놓고 손을 더듬어 장갑을 벗는다.

벗은 검은 장갑의 손바닥 안쪽이 길게 잘린데다 검붉은 피가 묻어있다.

=앗, 도령 손바닥에 피 뭐야. 수정에 베였어?=

“그런거 같군.”

=으이구. 손 내봐. 치료해줄게.=

안느에게 손을 내밀다 손바닥에 고여있던 피가 후두둑 수정 위로 떨어진 순간.

「와.」

「와왕.」

「히익…….」

정령들이 다시 술렁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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