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291화 (291/813)

〈 291화 〉 285 폭군룡의 미궁

* * *

환인 일행은 쿠에를 타고 원기를 나누어주며 잠시도 쉬지 않고 달린 덕분에 오후 중간 즈음에 폭군룡의 미궁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입구는 여러 개의 구릉이 모이는 지점에 짐승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처럼 형성되어있었다.

입구 주변에는 여러 채의 건물이 무질서하게 난립하고 있었는데 제대로 된 석조 건물이 있는가 하면 금방이라도 쓰러질듯한 목조 건물도 눈에 띈다.

민가는 일절 없는, 미궁에 드나드는 모험가, 탐험가, 용병과 노동자를 노린 상점이나 편의 시설들로만 채워진 기형적인 마을.

높이 5m짜리 돌벽으로 둘러쳐진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아무리 잘봐줘도 자경단 그 이상이 아닌 사람 셋이 오른팔에 때묻은 하얀 스카프를 매고 출입비용을 요구한다.

=세 명에 세 마리, 90동화다. 시설의 유지 보수를 위해 걷는 통행세이니 협조 부탁하지.=

“정식 마을로는 보이지 않는데. 마을을 관리하는 조직이 따로 있는 건가.”

=그래. 이런 건 누가 솔선하지 않으면 유지되지 않으니까.=

척봐도 그 조직이 통행세 외에도 여러 가지 이권(노점 자릿세, 건물 임대비 등)을 챙기고 있는 걸로 보였지만, 자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통행세를 거두고 있었다.

비교적 예의를 갖춰 말하는 2급 직업자에게 1은화를 내어주고 10동화를 거슬러 받는다.

=도마뱀 마을은 처음인 거 같으니 대충 룰을 가르쳐주지. 안에서 싸움을 벌이든 살인을 저지르든 상관하지 않지만, 마을 건물은 부수지 말고 우리처럼 오른팔에 흰 스카프를 맨 사람이 동행하는 상인도 건들지 마.=

“건드리면 어떻게 되지.”

=자다가 칼침이나 독침을 맞을지도 모르지. 여기 도마뱀 마을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만약 그쪽 조직원이 시비를 걸면?”

=그때는 마음대로 해. 시시비비는 그 뒤에 가려질 테고 그쪽에 잘못이 있다면 영원한 잠을 선물할 친구들이 계속 찾아갈 테니까.=

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법자의 마을 같은 건가. 재미있군.

그렇게 마을에 들어선 일행은 허름한 목조의 싸구려 술집에서부터 제대로 돌로 지은 여관 겸 주점, 대장간, 잡화점, 도박장, 창관, 목욕탕, 유료 화장실 등등 각종 상업 시설이 버젓이 운영하고 있는 것을 보며 잠깐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런가.’

분위기가 나쁜 사람에서부터 범죄자 분위기가 풀풀 풍기는 사람들, 대낮부터 만취해 골목 건물 여기저기 처박혀있는 사람들, 평범한 파티로 보이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길가를 보며 수긍했다.

일일 유동량이 수백 명 정도는 될법한 장소임에도 헬루멘이 직접 운영하지 않는 이유.

‘안스트와 헬루멘 두 도시 사이 경계에 모호하게 서 있기 때문이겠지.’

길을 걷고 있으니 환인은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불온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전원 쿠에를 타고 무직자로 보이는 인물을 포함한 6급과 4급 파티는 어디를 가나 눈에 띈다.

기감으로 이쪽을 신경 쓰는 사람들의 숫자와 행태 등을 살피며 곧장 미궁으로 향한 환인은 마치 도떼기 시장바닥 같은 미궁 앞 광장을 볼 수 있었다.

지금도 미궁으로 들어갔다 나오고 있는 직업자들.

그런 직업자들을 상대로 부산물 거래에 바쁜 개인 행상인들과 노점을 펴놓고 부산물을 매입, 매각하는 사람들에 좌판을 펼쳐놓고 중고로 보이는 무기나 방어구, 잡화를 파는 사람들까지 수백 명이 와글거린다.

그럼에도 주변 환경은 매우 깨끗했다.

보통 중세였다면 땅이 똥오줌으로 범벅되어 끔찍한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이나 바닥은 잘 말라있고 사람들이 오가는 길은 넓적넓적한 돌이 깔려있어 통행에 불편함이 없다.

오물도 얼마 없는데 아마도 곳곳에 고정되어있는 청소용 수액 괴물의 힘일 것이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그곳에 쓰레기를 툭툭 버리니 수액 괴물이 꾸물거리며 쓰래기를 먹고 분해해나간다.

‘스림의 힘이 대단하군.’

아마도 니오네브레스의 인구 증가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스림일 것이다.

지구의 중세와 근현대사를 보아도 위생 문제로 아이가 열 명이 태어나면 다섯이 죽는다고 했다.

청소용 수액 괴물이 없었다면 오폐수로 오염되는 환경 때문에 수십만 인구의 도시는커녕 수만 정도가 한계였을 것이다.

적당한 망토를 둘러 구세의 빛을 가린 안느가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오는 용병에게 사나운 투기를 발산해 고개를 돌리게 하며 중얼거린다.

=꽤 넓고 깨끗하네. 사람도 많고 제대로 된 건물도 들어서는데 왜 도시에서 관리하지 않는 거지?=

“두 도시의 경계에 있어서 그렇겠지.”

=하긴. 7급 미궁을 관리하려면 엄청나게 신경 써야 할 테고 지출도 많을 테고, 그런데 정령석이랑 위상석 외에 돈 될만한 거라곤 고기랑 가죽, 뼈 정도뿐이라서 채산성도 안 맞을텐데 미궁 소유권으로 분쟁을 일으키기도 그렇겠네.=

그외의 목적으로 활용하기도 애매한 거리다. 쿠에를 타고 거의 한나절이라면 말은 하루를 꼬박 달려야 한다. 걸어서는 2~3일 걸릴 거리.

“그외에 정치적 사안이 있겠지만, 우리가 신경 쓸 건 아니지. 곧장 들어간다.”

비상에게 불온을 넘어 욕망이 담기는 시선이 쏟아졌지만, 환인은 무시하고 황색 잔디로 뒤덮인 구릉의 구멍, 짐승의 아가리처럼 보이는 통로를 향해 걸어가는데 이죽거림이 날아들었다.

=어이쿠 돈도 많으셔라. 녹색 쿠에에 그냥 쿠에를 두 마리나 끌고 들어가다니, 제정신이야?=

=무직자를 리더로 삼은 걸 보면 신종 자살 희망자일지도 몰라. 큭큭.=

=크크크. 뒤지러 갈 거면 예쁜이들이랑 녹색 쿠에는 우리한테 넘기고 가~. 우리가 찐하게 예뻐해 줄 테니까.=

안느는 눈썹을 찡그렸다. 근육 돼지 시절에는 눈길도 못 주던 것들이……. 내가 호리호리해지니까 만만해 보이나?

도령 덕분에 예쁘게 바뀐 몸을, 도령을 위해 가꾸고 있는 몸을 훑는 시선이 너무너무 기분 나쁘다.

예전같았다면 천벌의 망치로 후려쳐 몇 달은 골골거리게 만들어버렸을 정도로.

그러나 개 짖는 소리로도 치부하지 않고 무시하는 환인의 행동에 안느도 속으로 땅신 교단 경전을 외우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개새끼들은 무시하는 게 답이다. 개가 짖는다고 따라 짖으면 이쪽도 개가 될 뿐, 개새끼가 미쳐서 물면 그때 몽둥이 찜질을 해줘도 된다.

그런데 그 시간이 생각외로 일찍 다가왔다.

환인의 무시에 빈정이 상했는지 이죽거리던 각종 동물 머리의 2~5급 직업자들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와 조롱을 일삼는다.

=어? 날 무시하네? 기분 나쁘네?=

=뭐가 그렇게 바빠? 이야기 좀 하자니까~.=

=어이, 이쁜이들아. 이쪽 좀 보라니까?=

=씨발 얼굴값 한다고 좆같이 구네.=

그 숫자가 아홉.

일부는 달려서 환인의 앞을 가로막고 나머지는 일행을 포위하듯 빙 둘러선다. 환인이 걸음을 멈추자 그중 검은색 코요테 머리의 남자가 다가와 이를 드러내며 조롱하듯 환인의 뒷머리를 때렸다.

=야, 검은 대가리 씨발아. 사람 말 안들…….=

뻐걱, 콰직!

아니, 때리려 하는 순간 무릎이 박살나고 아래턱이 산산이 조각나며 쓰러졌다.

천칭을 꺼내 들면서 아래턱을 부숴버리고 무릎의 슬개골을 포함, 뼈마디를 으스러트린 환인은 껙, 소리도 못내고 쓰러진 코요테 남자의 관절이란 관절은 모조리 가루로 만들어나갔다.

뻑! 콰득, 우직! 빠각!!

=……?=

게거품을 문 채 맞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동료의 모습에 빨간색 여우 머리, 기분 나쁘다고 웅얼거렸던 5급 전사는 두 눈만 끔뻑였다.

뭐가 눈 한번 깜빡했는데 패거리에서 두 번째로 강한 놈이 박살 났다.

신전을 찾아가도 전치 20주는 될법한 부상. 그래도 4급 투사인데? 무직자를 상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 못했어?

=어, 뭐. 뭐야. 뭔데 씨발.=

정보가 머리로 인풋 되지 않아 버벅인다. 가슴 속에 서늘한 불안감이 고개를 치켜든다.

“덤빌 거냐. 덤빈다면 목숨은 내려놓고 와라.”

그 말과 함께 환인이 살기를 퍼트리자 패거리들이 흠칫 어깨를 떨며 일제히 무기를 빼 들었다. 환인도 천칭을 집어넣고 흑창을 꺼내 들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싸우자는 거군.”

=이, 이 씨발 새끼가…… 우리가 누군지 알고 개짓…… 개… 개…….=

두 손에 곡도를 빼 들고 으르렁거리던 붉은 여우 머리는 환인의 몸 주변에 떠오르는 회백색의 검 여섯 자루를 보곤 말을 더듬었다.

저건 뭐야. 무직자가 아니었어? 씨발, 설마 무휘광? 그럼, 저 새끼도 6급?

점심때 먹은 것도 게워낼 정도의 살기도 그렇고 저 회백색 검 여섯 자루는 대체 무슨 기술인지 알 수 없다. 만약 저놈도 6급이라면…….

붉은 여우 머리 남자의 머릿속에 비상등이 켜져 뒤늦게 요란한 경고음을 낸다.

“셋 세지. 하나…….”

뭘 세? 셋? 왜?

“둘…….”

갑작스레 폭증하는 살기에 붉은 여우 머리는 눈동자를 떨었고 환인 일행을 포위한 직업자들 머릿속에는 엿됐다, 좆됐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녹색 쿠에를 대놓고 끌고 다닐 정도니 뭔가 있는 놈이라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금화 수백 닢짜리 쿠에를 보고 든 욕심에 놈들이 바로 미궁으로 들어가려는 걸 보고 너무 섣불리 움직였다.

붉은 여우 머리 남자는 광장을 곁눈질했다.

광장에 상주하는 상인들에 길을 오가던 모험가, 탐험가, 용병 수백 명의 시선이 모여들고 있다.

물러날 수 없다. 여기서 물러났다간 몇 년간 겨우 쌓아놓은 체면이 손상되는 건 물론 똥…….

“셋.”

…통에 처박.

푸화화화확­

검은 섬광이 한차례 번뜩이고 붉은 여우 머리 남자의 머리가 둥실 하늘로 떠올랐다. 절단된 목의 단면에서 피가 분수처럼 치솟아오른다.

루크랑 남자는 지구인보다 혈압이 높은 걸까. 환인이 무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붉은 핏빛을 신호로 이실리테가 레드릭을 꺼내 포위한 자들에게 날아들었고 안느도 천벌의 망치와 성벽의 방패를 세우고 얼타고 있는 놈들을 향해 돌진했다.

추와악­! 콰광! 꾸구궁­

이어서 벌어진 것은 학살이었다.

상대가 이실리테와 안느였던 것에 비해 시비를 걸어온 패거리들은 살기에 위축되고 급박한 상황 변화에 당황해 실력의 30%도 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허공에 그려지는 붉은 대검의 그림자. 내려쳐 지축을 작게 흔드는 거대한 망치.

=사, 살려줘!=

=내 거길 뭐 어떻게 한다고?=

=그건 농담이었……!=

=농담 좋네. 저세상에 가서 마음껏 농담해.=

콰광!

그 결과 전사와 투사 여섯 명은 이실리테의 대검과 안느의 자이언트 워 해머에 절단육, 다짐육으로 변했고 비늘 갑옷을 착용한 술사 두 명은 실력을 내보일 틈도 없이 환인의 창격에 심장이 꿰뚫렸다.

위이잉­

환인이 공격하는 사이 넓게 퍼져 주변을 경계하듯 떠다니던 패널 소드가 환인의 몸 주변으로 돌아와 호위하듯 맴돈다.

=…….=

=…….=

눈 몇 번 끔뻑일 시간에 4~5급 직업자 아홉이 고깃덩어리로 변하자 축구장보다 넓은 공터에 쥐죽은 듯 침묵이 깔렸다.

숨 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

환인은 죽인 놈들의 팔다리에 흰 스카프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얼어붙은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며 나직이 내뱉었다.

“이런 쓰레기들이 대놓고 활동하는 곳이라니, 어처구니없이 흥미로운 장소군.”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살기를 마음껏 뿌리고 있자니 사람들이 심장마비에 걸릴 것 같은 표정으로 환인의 시선을 피하거나 물러난다.

안느가 자신에게 ‘주머니 챙겨?’라고 눈으로 물어왔기에 환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실리테와 안느가 죽인 놈들의 품에서 돈주머니를 챙길 때 떨리는 늙은이의 목소리가 나왔다.

=하, 할코네 조직 행동 대원들을 모두 죽이다니. 당신들도…… 무사하지 못할 거요. 저들은 헬루멘과 안스트 양쪽의 비호를 받는 자들이란 말이오.=

그쪽을 쳐다본 환인은 겁먹은 늙은 부엉이 머리의 남자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찾아가 그자들도 모두 죽이라는 건가.”

=…….=

5급 전사의 목을 마치 풀베듯 날려버린 남자다. 무휘광이지만 7급은 넘지 않을까 싶은 무력. 부엉이 머리 늙은이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부리를 꾹 다물었다.

그 모습에 시니컬한 비웃음을 날린 환인이 툭, 말을 던지고 폭군룡의 미궁에 입장했다.

“할코네라는 놈이 날 찾는다면 위르트 성으로 사람을 보내 따지라고 하도록.”

미궁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처럼 매끈하고 단단한 돌계단이었다.

벽과 천장도 조금 울퉁불퉁하지만 단단한 돌이었으며 기온은 한겨울인 바깥과 달리 제법 따뜻했다.

어떤 효과인지 모르지만 광원 하나 없음에도 밝아 걸음을 옮기기 어렵지 않은 수준.

10층 높이에 달하는 계단을 내려갈수록 푸르스름한 기운이 세 사람을 감싸기 시작한다.

=미궁이 시작되나 보다. 7급은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영혼을 억 죄는 감각이 제법인걸.=

=…….=

=비상아. 넌 괜찮아?=

쿠웃! 큐삣. 삐삐삣!

=도령, 비상이가 뭐라고 하는 거야?=

“당연히 괜찮지. 적이 나오면 나도 싸울 거야.”

=뭐어? 안돼 안돼. 넌 아직 다 크지도 않았잖아.=

쿠에?

=도령이 허락 안 할 거야. 그러니 나설 생각은 하지 마.=

삐이…….

미궁 입구에서 난리를 피워서일까, 뒤따라오는 사람은 없고 앞서 가는 사람도 없다.

간혹 나오는 사람과 스쳐 지나가며 조용히 1층에 도착한 환인은 영혼 시야를 켜 눈에 보이는 곳부터 살폈다.

자욱히 깔린 바닥 안개와 그 속에서 얼핏얼핏 드러나는 수풀과 나무들.

지하동굴이 아니라 어디 듬성듬성 나무가 자란 숲에 들어온 느낌이다.

태양 아래보다는 어둡지만 조명등을 켠 방 안정도로 밝은 공동. 색색의 나무와 수풀. 이따금 눈에 띄는 꽃들.

‘생각보다 더 넓다.’

천장 높이는 30m에 이를 정도며 눈앞에 펼쳐진 넓이는 야구장만 하다.

1층에 내려와 처음 마주친 작은 방이 이 정도라니, 지도의 타일 한 칸당 5미터 가량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건 타일 한 장에 10미터는 되는 느낌이다.

미궁 전체 폭은 5km 정도일까.

그때 입구 주변의 탐색을 마친 안느가 물었다.

=근데 도령, 괜찮을까? 사람들 피를 빨아먹는 해충 같은 놈들로 보여서 죽였어도 양심의 가책 같은 건 없지만, 마지막에 누가 말한 것처럼 양쪽 도시의 비호를 받고 있다면 문제가 생길 텐데.=

“주요 행동 대원 같은 놈들이 허망하게 몰살당했다. 거기서 뭐라도 말 안 했다면 할코네라는 놈의 이 마을 장악력에 큰 손상이 생겼겠지.”

죽인 놈들의 영혼을 회수한 환인은 미궁으로 내려오는 길에 강제력으로 이것저것 심문해보았었다.

조직의 규모, 직업자의 수, 조직의 위치, 주변 조직 관계도, 뒷배의 유무, 녹색 성자에 대한 정보 등.

「안돼, 안돼.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죽은 놈들도 녹색 성자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환인이 그 녹색 성자였다는 걸 안 뒤로 절망을 부르짖었지만, 환인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의도가 생각 이상으로 잘 통해서 만족스러워했을 뿐.

녹색 성자 일행은 4명이고 회색 후드 망토를 쓰고 녹색 쿠에를 타고 다닌다. 이 이미지가 고착된 덕분에 유르파가 만들어준 보온용 털코트를 입은 자신을 성자라고 못알아 본 것이다.

아무튼,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붉은 여우 머리의 조직, 할코네 패밀리에 직업자는 최대 5급 뿐이며 총 세명이었지만 이제 두 명이 되었다.

뒷배경은 없으며 헬루멘에 근거지가 있고 조직원은 무직자까지 포함해 200명 정도. 작은 상회를 운영하고 있지만 인신매매가 주업.

환인이 캐낸 정보에 안느가 얼굴을 찌푸렸다.

=인신매매라니 더러운 짓까지 하네.=

아까부터 아무 말도 없이 굳은 표정의 이실리테를 힐끔 쳐다본 환인이 말했다.

“놈들에게 따지려면 위르트 성으로 오라고 했지만, 제정신이 박혔다면 성을 찾을리 없지.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리도 없다. 보복하기 위해 우리를 습격할테니 이실리테, 그때는 네가 나서라.”

=네. 쫓는 놈들은 전부 제가 처리하겠어요.=

비유로든 실제로든, 사람은 보통 극한 상황에서 각성하기 마련이다.

앞에는 미궁의 이형종. 뒤에는 자신들을 추적하는 조직.

적당히 두드려 패서 실력만 보여도 충분했지만, 일부러 손을 과하게 썼던 환인은 굳은 얼굴로 대답하는 이실리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3주동안 찾아오는 놈들을 모두 죽여놓고 도시로 돌아간 뒤 조직을 찾아가 박살내면 귀찮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다.

그마저도 성가시면 입단 시험 이후 시하 영주에게 슬쩍 이야기를 흘려도 될테고.

환인은 계단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것을 느끼고 서쪽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폭군룡의 미궁에 온 목적이 목적이니만큼 이제부터 모든 전투는 이실리테가 맡는다. 소비한 원기의 회복은 내게 맡겨라. 입은 상처는 안느가 성술로 치료해주도록. 나는 뒤에서 비상과 쿠르티, 쿠핀을 지키지.”

=네, 주인님.=

=알았어.=

1층이었기에 등장하는 이형종은 대형견 크기의 도마뱀류가 전부였다.

무릎까지 덮는 수풀 사이를 헤치며 돌아다니다 사람을 발견하면 키에엑­ 비명을 지르며 무작정 공격해오는 갈색, 초록색, 군청색, 회색의 파충류들.

동굴에서 서식하는 동물들인지 뿔 달린 짧은 귀의 토끼나 귀가 코끼리처럼 넓은 다람쥐, 흑갈색이나 초록색의 작은 새들도 있었고 형형색색의 꽃도 피어있어 여러모로 미궁이 아닌 동굴 속 숲처럼 느껴지는 동화적인 풍경이다.

그러한 풍경을 빛바래게 하는 요소도 있었으니.

=…….=

“…….”

곧장 다음 층을 향해 나아가던 환인은 간혹 사람들과 마주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이쪽을 눈에 띄게 경계하며 피하거나 멀어졌다.

미궁의 분위기가 어떤지 눈치 없는 사람도 알아차릴 법한 모습들.

=에이, 무슨 반응이 저래.=

일반인이었다면 찜찜함에 안느처럼 반응했겠지만, 환인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적응 안된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안느는 다시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앞을 보았다.

중형견 정도 크기의 녹청색 도마뱀이 덤불을 헤치며 나타났던 것.

쉬익­

녹청색 도마뱀은 주둥이에서 바람 소리를 내며 그 덩치에 믿기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일행을 덮쳤지만, 그 속도에 반응하지 못할 사람은 파티에 없었다.

콰득!

이실리테는 용수철처럼 튕겨 나가며 오직 완력으로만 레드릭을 휘둘렀고, 녹청색 도마뱀은 허리가 잘리는 게 아니라 뜯겨나가다시피 하며 반토막이 나 죽어버렸다.

탐지 도구로 위상석 유무를 확인한 안느가 단검을 들고 거의 사체를 해체하다시피 하며 끙, 앓는 소리를 낸다.

=정령석 찾는 게 너무 힘든데.=

정령의 동굴이라서일까, 주위에 떠다니는 정령이 제법 보인다. 하급 정령도 있다.

환인은 저 정령들로 정령석의 유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이쪽을 향해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제 할 일만 하는 하급 땅의 정령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마주치는 이형종은 사냥하고 사람은 피해 가며 나아가던 환인은 과일나무를 꽤 자주 볼 수 있었다.

이실리테도, 안느도 어떤 과일인지 알지 못했지만, 환인은 영혼 시야로 보이는 색계통에서 식용 가능한걸 파악한 다음 쿠에들에게 먹였다.

처음 발견한 과일나무의 과일을 따서 먹여서일까. 그떄부터 비상은 과일나무를 볼 때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환인을 쳐다보았다.

이번에 나타난 과일나무도 마찬가지였다.

비상의 반짝이는 녹색 눈망울에 환인은 고개를 뒤로 꺾어 위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린다.

“이건 너무 높이 달렸군. 못 따겠는데.”

위치마다 다르지만, 미궁의 천장은 대체로 20m를 넘기는 편이었다.

나무의 키는 4m에서 8m까지 다양한데 비상이 먹고 싶다며 해맑은 눈빛을 보내오는 과일나무의 높이는 유달리 높아 20m에 달할 정도.

날아서 따먹으라고 하면 간단하지만, 그랬다간 남들에게 위치를 알리는 꼴 밖에 안된다.

1층이라면 괜찮을지 몰라도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이형종에게 발각될 수 있는 일.

방벽 패널 사거리를 벗어난 높이였기에 환인은 그냥 이실리테에게 나무를 자르라고 시킬까 하던 중, 안느가 비상의 목을 긁어주며 말했다.

=비상아. 너 바람 쓰잖아. 바람으로 나뭇가지를 자르면 안 돼?=

쿠우?

그래도 돼? 하고 묻는 비상에게 환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 날개를 활짝 펴고 쿠웃! 녹색 칼날 바람을 쏟아부었다.

촤자자자작~!

수십 개의 반월형 바람의 칼날이 쏟아져 나무를 벌거숭이로 만들어버린다.

후두둑 떨어지는 수많은 나뭇가지와 사과를 닮은 과일들.

쿠에~.

쿠엣.

대장 굉장해하며 우는 쿠르티와 쿠핀에게 으스댄 비상은 부하들과 사이좋게 과일을 주워 먹기 시작한다.

뒤에서 그걸 지켜본 안느가 혀를 내둘렀다.

=와. 얘 바람 솜씨가 점점 더 무서워지는데? 방금 풍참의 위력이나 정밀도, 공격 횟수를 보면 4급 바람 술사 수준을 넘어선 거 같아.=

=…….=

“그 정도인가.”

여행을 다닌 지 오래 됐지만 술사가 술법을 쓰는 건 좀처럼 보지 못한 환인이었다. 그저 비상의 바람이 점점 강해진다는 느낌이었을 뿐인데…….

‘4급 근접직에 맞먹는 신체 능력과 4급 술사 수준의 바람 속성 공격력이라.’

여기에 자신과 이실리테하고 전투 경험도 잔뜩 쌓았으니 4급 이형종은 가볍게 이길 수 있을 테지.

=도령이 바람을 먹인지도 거의 두 달 다되어가는 중이지?=

“그래. 날 태우고 몇 분씩 날아다닐 수 있게 된 걸 보면 슬슬 마지막 성장을 할 것 같은데 좀처럼 그때가 안 다가오는군.”

알록달록한 과일 세 개를 집어들어 옷자락에 닦은 뒤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하나씩 건네준 환인은 자신도 과일을 한입 베어먹었다.

입 안에 살구 특유의 산미와 달콤함이 가득 퍼진다. 미궁안에 들어와 있다는 약간의 긴장감과 불쾌감마저도 날려버릴 정도의 맛이다.

유르파에게도 챙겨줄 생각으로 하나 더 챙긴 환인은 배부르게 양껏 먹었다며 쿳, 쿠쿠, 콧노래를 부르는 비상과 쿠르티, 쿠핀을 데리고 다음 층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앞서 가는 이실리테의 뒷모습을 눈에 담는다.

=…….=

폭군룡의 미궁에 도착한 뒤부터 줄곧 표정이 굳어있어 신경 쓰인다.

너무 잔걱정은 오히려 성장에 방해만 될 뿐. 환인은 그녀가 스스로 중압감과 부담감을 떨쳐내길 바라며 일행을 다음 층으로 인도했다.

[폭군룡의 미궁 1층]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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