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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290화 (290/813)

〈 290화 〉 284 영웅의 도시 헬루멘

* * *

환인의 여자들은 곧장 미궁 탐사 한 달 일정을 잡고 내일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준비물은 거의 다 준비된 상황.

=주인님. 식사는 3인 30일 치를 준비하면 될까요?=

“그래. 내부에서 음식을 수급할 수 있는듯하니 90일 분량을 전부 챙겨야 할 필요는 없겠지.”

이실리테와 유르파가 준비물을 챙기는 사이 안느는 환인이 헬루멘 엽사 조합에서 구매한 폭군룡의 미궁 정보를 읽는다.

=폭군룡의 미궁은 7급 미궁으로 총 일곱 개 층의 확장형 미궁이라고 명시되어있다. 한 층이 한 계층을 담당하며 각층은 매우 광대한 동굴로 형성되어있고 내부에는 하나의 작은 자연이 구성되어있어 이형종뿐만 아니라 작은 동물도 살고 있다.=

출현하는 이형종은 각양각색의 용종으로, 진룡이 아닌 아룡??이지만 그래도 용이라고 기본적으로 강화형으로 분류한다.

4계층이 강화 계층으로 변해 5급에 달하는 이형종이 나타나기 시작한 파르히스트의 감옥 미궁처럼, 폭군룡의 미궁은 미궁 전체가 강화형 계층으로 취급받는 것이다.

즉 1층에서 2급 이형종이, 4층에서 5급 이형종이 출몰하는 것.

동굴형 미궁이기에 함정은 없으며 내부는 일정 주기로 대낮처럼 밝아졌다가 밤처럼 어두워지는 특징이 있다.

이에 따라 이형종의 행동 패턴도 변화하는데 낮에는 평범하게 활동하지만, 밤이 되면 이형종 대부분은 둥지로 돌아가 잠을 잔다.

=이때 타의에 의해 잠에서 깬 이형종은 분노 상태에 돌입한다고 적혀있어. 평상시보다 30% 더 강해지니 4층에 나오는 분노한 이형종은 거의 5.5급 수준이겠네. 반대로 낮에 자고 밤에 깨어 움직이는 타입도 있어.=

=아, 여긴 지성체 대상 정신 침해 위험 미궁이네.=

=쿠에들을 다 데려가도 되겠다. 빈 아공간 가방도 전부 챙기고.=

지성이 인간 수준인 대상에게만 정신 침해가 작용하는 미궁이기에 짐말 등을 데리고 가기 용이한 미궁을 말한다.

환인이 구입한 정보를 확인하던 안느는 어느 한 항목에 눈을 주었다가 어이없다는 투로 읽는다.

=이 미궁에서 나오는 고기는 대부분 맛있지만 그중에서도 젬트 리저드가 가장 뛰어난 맛을 자랑한다? 뭐야, 미식 가이드도 아니고 이 무슨…….=

=주석에 젬트 리저드 고기가 1킬로당 1은화나 한다고 적혀있는 거 보면 진짜 맛있는 거 아니니?=

=아 몰라. 맛없을 거야.=

=……? 안느 아가씨, 이거 먹어본 적 있어?=

=몰라몰라. 암튼 맛 없을 거임.=

갑자기 애처럼 왜 이러는 걸까. 안느의 투정에 눈만 끔뻑이던 유르파는 환인의 설명을 듣고 아, 작게 탄성을 흘렸다.

“안느는 이제 고기를 못 먹게 됐으니 그러는 겁니다. 여우의 신포도 같은 거지요.”

=여우의 신포도는 무슨 비윤데?=

처음듣는 관용구를 궁금해하는 안느에게 환인이 짧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배고픈 여우 한 마리가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포도밭을 발견했다. 그러나 포도는 따 먹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 달려 있었고,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해도 도저히 포도까지 닿을 수가 없었던 여우는 “저 포도는 어차피 신 포도일 거야!”라고 투덜거리며 결국 포기하고 가 버렸다.”

=……픕.=

=후훗.=

환인이 담담한 표정으로 하는 이야기에 이실리테와 유르파는 참지 못하고 실소를 흘렸다.

이야기 속 여우의 표정이 저러지 않을까 싶을 만큼 안느의 표정이 적절했던 탓이다.

=웃지 마. 웃지 말라고.=

안느가 빨개진 얼굴로 이실리테와 유르파의 엉덩이를 발로 밀치며 분풀이를 하지만 두 여자는 키득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다음 날.

컨디션 회복을 위해 매일 치르던 연인들과 섹스를 하루 쉰 환인은 감기 기운을 완전히 떨쳐낼 수 있었다.

그 과정이 환인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는데, 이실리테가 =감기에 걸리면 멀쩡한 사람이 옆에 딱 붙어있어 주면 감기가 빨리 낫는다고 해요.=라고 발언했고 그 의견에 안느와 유르파도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환인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는 민간요법이었지만, 그 결과를 보고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감기가 옮을 수 있는 유르파는 빠지고 이실리테와 안느만 팬티 차림으로 생체 난로 역할을 자청해 환인의 옆구리에 바짝 붙었는데, 그렇게 밤이 지났더니 거짓말 같이 감기가 뚝 떨어진 것.

여러 생각이 치밀었지만,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녀들의 행동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어찌 되었든 감기는 떨어졌으며 정말 오랜만에 푹 잠들 수 있었으니까.

“…….”

무엇보다 어머니의 꿈을 꾸었다.

심한 감기에 걸려 앓아누웠던 어느 날 어머니의 품 안에서 잠들었던 기억.

유달리 따뜻하고 포근했던 어머니의 품,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는 느낌. 그 기억이 연인들의 품에서 되살아났었다.

자신이 사람으로서 평범하게 살 수 있도록 모든 사랑을 쏟아주셨던 어머니.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던 환인은 희미한 그리움이 잔잔히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 세계에 넘어와 처음 느껴본 감정. 그리고 좀처럼 느끼지 못한 감정.

자신에게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 이외의 것을 알려주신 아버지도 보고 싶지만, 오늘따라 가슴이 울렁거릴 만큼 어머니의 웃는 얼굴이 그립다.

‘…그때 부모님의 사진을 따로 챙겼었는데.’

강하연을 협박하러 나가기 전에 챙겼다. 그 사진을 어디에 뒀었지.

1년전의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때 액자를 분해해서 챙기고 아버지의 합금 멀티툴은 주머니에…….

‘사진을 여행 가방에 넣었었군.’

그 여행 가방은 자신과 함께 트립하지 않았으니 그 뒷골목에 덩그러니 놓여있겠지.

선량한 시민이 발견했다면 경찰서에 가져다 놓았겠지. 1년이나 지났으니 유류품으로 분류되어 어디에 처박혀있겠군. 아니면 도둑놈의 손에 넘어갔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환인은 마저 장비를 챙겨입는다.

몸 상태가 회복되어 피폐한 느낌에서 평소의 니힐한 외모로 돌아온 환인을 바라보던 유르파는 짐을 챙기는 아가씨들에게 붙어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아가씨들. 혹시 말이야. 자기가 몸이 갑자기 나빠진 건 그거 때문이 아닐까?=

=그거요?=

=그거? 그게 뭔데?=

=그, 밤마다 우리를 세 번씩 매일매일 안아주잖니. 아무리 정력이 강하다고 해도 그 정도면 해골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거든?=

가끔 엄청나게 강한 정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 없진 않다. 위상력의 축복을 정력에 모두 받은 듯한 남자들.

그런 남자는 대부분 털복숭이에 덩치도 크고 남자 냄새도 극심한 편. 하지만 환인은 가까이 있으면 상큼하면서도 살짝 흥분되는 체취였고 몸에는 눈썹 아래로는 체모가 극도로 적은 편이다.

=도령은 재생 강화 위상석이 있잖아. 그 효과 아냐? 도령 자기도 그 도움을 많이 받는다고 했고.=

=그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제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고 봐야하지 않겠니? 아가씨들도 알겠지만, 사람한테는 기본적인 회복량이 있어.=

예를 들어 풀 컨디션 상태가 활력 100이라고 하고 매일 40정도 회복한다고 하자.

성행위시에 활력을 10씩 소모한다고 가정하고 활력이 40이하로 내려가면 컨디션이 나빠진다고 했을 때 환인이 성교로 하루 소비하는 활력은 80~100.

=활력이 매일 40씩 회복되는 것은 아닐 거야. 너무 피곤해서 활력 회복량이 줄어드는 날도 있을 수도 있고, 숙면을 취하거나 릴렉스하는 시간을 보내면 늘어날 수도 있겠지. 음식을 통해 회복량을 늘릴 수도 있을 거고.=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안느가 말했다.

=그러니까 율이 언니가 하고 싶은 말은 재생 강화 위상석 덕에 활력을 50~60정도로 유지하고 있는 게 현 상황인데, 컨디션 난조에 평소보다 섹스를 많이 해서 활력이 40 이하로 내려간 게 어제였다는 거야?=

=응. 몸상태가 안 좋아져서 저항 능력이 떨어졌을 때 하필이면 감기에 걸린 거지.=

그럴듯한 이야기에 이실리테와 안느가 진지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유르파는 이실리테가 신경 쓸까 봐 말하지 않았지만, 머리를 너무 많이 써도 컨디션이 나빠진다는 걸 알고 있다.

비자룩스를 나왔을 때부터 환인은 줄곧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 영향도 없다곤 못하겠지.

거기다 마차가 생긴 이후로 마을에서 마을 사이를 이동할 때도 매일 밤 몇 번씩 사랑을 나눴다. 마차가 없을 때는 하루에 한 명, 한 번만 하면서 왔던 걸 생각해보면…….

=섹스의 빈도수가 너무 많아진 탓이 틀림없어. 마차가 생기기 전에는 마을에서 마을 사이를 이동하며 활력을 비축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졌으니까!=

=…해결법은 섹스 횟수를 줄이는 거네요.=

=매일 우리 셋을 안으니까 한 명씩 돌아가며 빠지는 건 어때?=

안느가 진지하게 해결책을 꺼냈을 때 유르파가 손을 들었다.

=내가 빠질게.=

=엉? 왜?=

=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해도 만족이거든~. 자기의 정액은 정기가 너무 농후해서 일주일에 한 번만 받아도 몇 달은 지낼 수 있을 정도니까. 내가 잠자리에 합류하기 전까지 자기 컨디션은 멀쩡하기도 했고.=

환인의 몸상태가 나빠진 이유에 자기 지분이 있다고 말하는 언니의 모습에 두 여자는 아니라고 말하려다 똑똑, 노크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유리 언니. 그 이야기는 미궁에 다녀온 뒤에 다시 해요.=

=어. 그건 언니 잘못도 아니고 남펴…… 도령의 컨디션 관리는 우리 모두가 책임져야 하는 거니까.=

남편? 방금 남편이라고 말하려 했던 거야?

안느의 말실수에 여자들의 분위기가 몽글몽글해졌을 때 방문이 열리며 시하=사이지가 활동성 높은 옅은 개나리색 짧은 드레스를 입고 성큼성큼 들어왔다.

하늘거리는 레이스 치마 아래로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가터벨트의 하얀 끈이 드러난다.

=환인, 성을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한 달 뒤에 있을 시험을 대비해 폭군룡의 미궁에서 훈련하고 올 예정입니다.”

환인은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무표정으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갑자기 이런 태도였다면 시하=사이지도 변한 태도에 의문을 품었겠지만, 환인은 어제부터 저 표정이었기에 일말의 의구심도 품지 않았다.

그저 젊고 유망한 영혼사와 인연을 맺고 자질이 꽤 기대되는 젊은 여기사를 얻을 생각에 웃음 띨 뿐.

=흠. 확실히 저 아이의 아우라 농도는 5급에 가깝지.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몸을 움직일 때 보이는 기도가 범상치 않은 자질을 증명한다. 위상력의 부족으로 시험에 떨어진다면 자신이 잘 구슬러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갸름하고 매끈한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주억거린 시하=사이지는 휙, 몸을 돌려 이실리테에게 다가가 물었다.

=영웅 기사단 입단 시험 지원자에게는 위르트 가문이 따로 지원을 담당한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사양하지 말고 말해라.=

“거절하겠습니다.”

그녀를 뒤따라온 환인이 이실리테 대신 지원을 거절했다.

그 대답이 의외였을까, 아니면 환인에게서 삭막하게 느껴질 법한 업무적인 태도 때문일까. 시하=사이지는 멈칫하곤 의외라는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어째서지? 미궁을 탐사하기 위해서는 인적 자원은 물론 물적 자원도 필요하다. 무구와 전투 도구의 지원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효율은 무시 못할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걸 성자는 모르는 건가?=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정상적이지 않은 만큼 뒷말이 나올 수 있는 요소는 배제하고 일행의 힘만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이후 말이 나올만한 자그마한 틈도 잡히기 싫다는 이야기에 시하=사이지는 약간 골이 난 표정을 지었다.

=주는건 다 받아 챙겨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도 부족할 판에 참 복잡하고 힘들게 사는군.=

이쪽은 선의로 지원해주려는 것인데.

“무력적인 배경이 없는 일개 영혼사가 강대한 힘의 호족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꽤 의미심장한 이야기다. 시하=사이지는 환인이 주는 무언가의 마지막 기회라는 걸 느꼈지만, 이러한 배려심과 기회 제공 같은 것은 생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천상 성골인 그녀였기에 기분 탓으로 치부하며 넘어갔다.

=지원이 없다는 것이 외려 불공평하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 않나.=

“위르트 가문의 가문 회의에서 절반의 인원이 기회를 주는 것에 반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음…….=

“거기다 당신께서도 5년에서 10년 내외로 세대 교체가 이루어질 거라고 말이 돌고 있습니다. 이후 일을 생각해봐도 당신의 말에 따라 지원을 받아 챙기는 건 하책이라는 판단밖에 들지 않습니다.”

시하=사이지는 대충 던진 이야기에 칼같이 따져오는 환인의 안목과 분석력에 적지 않게 놀랐다.

이정도로 상황을 분석하는 지식과 안목을 갖추는 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육받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이렇게 따박따박 반박당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신선한 기분이라고 생각하며 시하=사이지는 빙긋 웃었다.

=그대는 혀를 꽤나 매섭게 휘두르는군?=

“어제는 몸이 좋지 않았던 터라.”

지금이 내 본모습이다. 네가 이해해라.

=…….=

한 마디도 지지 않는게 조금 괘씸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한 느낌에 시하=사이지는 환인을 예쁘게 흘겨보았다가 이실리테에게 말했다.

=아무튼, 네 주인이 그렇다고 하니 지원은 없는 걸로 하겠다. 한 달 뒤 너의 성장을 기대하지. 환인, 그대와는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시간을 내주겠나.=

“지금 출발할 생각이라 안 되겠습니다. 접견이라면 다녀온 이후로 미뤄주시길.”

=뭐라? 영혼사가 미궁에서 무얼 하겠다고 전투직들을 따라간다는 말인가.=

“저는 파티의 리더입니다.”

=……으, 으음?=

“성에는 유르파가 남을 겁니다. 도망가려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시길.”

시하=사이지는 진심으로 혼란스러워졌다.

영혼사는 술사 계통 직업자로 분류된다. 각성하더라도 신체 능력의 강화가 일절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미궁, 그것도 3계층 이하의 전투에는 하등 도움되지 않는다.

저만한 사내가 그것을 모를리 없다. 억지를 부려 동료의 발목을 잡는다는 짓을 할 리 없을 텐데 어째서 미궁엘 따라 들어가겠다는 거지?

시하=사이지는 재차 환인의 기세와 기도를 읽었다.

여전히 특이점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 마주했을 때 느껴지던 강렬한 존재감이 사라졌다.

=…좋다.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거겠지.=

원래는 이실리테가 입단 시험에 떨어진 이후의 여파를 줄이기 위해 성자와 동행하며 가문 내 고위 인사들에게 소개해주며 그의 신분과 자질을 인지시켜줄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그와 좋은 시간도 가질 수 있다면 가지고.

그런데 왠지 이쪽의 오지랖이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게다가 아까부터 자신의 정치 감각이 콕콕 뒷목을 찌르는 것이 뭔가가 뭔가인데…….

얼핏 어제 나눈 대화가 문제가 되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거기서 가정의 가지가 뻗어 나가는 일은 없었다.

그녀의 정치 감각은 압도적인 신분, 능력, 금전으로 이루어진 황제 정치였기에 자신이 당한다는 가설을 떠올리기 어려웠기 때문.

하지만 평생을 정치판에서 살아온 그녀였기에 어쩌면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특별한 일을 겪을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은 느낄 수 있었다.

‘궁금해지는군.’

시하=사이지는 한 달 뒤에 저들이 일으킬 사건을 기대하며 미궁을 향해 출발하는 환인 일행에게 무운을 기원했다.

위르트 성을 나와 서문으로 향하던 안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시하 영주님 말이야. 생각보다 좋으신 분 같지 않아? 다시 보니까 말투가 좀 오해를 사기 쉬운 편이긴 한데 속셈은 없고 우호적인 느낌이던걸.=

=그러게~. 이슬이 아가씨를 이리저리 챙겨주려는 것에 사심 같은 것은 안보였고, 자기를 따로 불러내려 한 것도 이슬이 아가씨가 시험에서 떨어진 뒤를 의논할 생각이었던 것 같았어.=

안느와 유르파가 환인을 힐끔거린다.

출발 직전에 찾아와 하는 말을 보면 그녀에게 악의가 있다곤 보기 어려웠다. 자기/도령이라면 당연히 눈치챘을 거 같은데…….

여자친구들이 자신을 힐끔거리는 걸 느낀 환인은 비상의 목을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 관계 개선을 시도할 필요는 없다. 문제가 해결된 이후 상대의 반응을 봐가며 정해도 늦지 않는 일이다. 영주의 성격을 보면 대화를 나누다 오히려 그쪽이 또 실수를 저질러 문제를 심화시킬 가능성이 크겠지.”

……그런가? 듣고보니 그런거 같기도 하고.

그렇게 서문에 도착한 환인은 배웅한다고 따라온 유르파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영주의 초대로 성에 머무르는 것이니 당신의 종족 등을 두고 트집 잡거나 시비를 거는 자가 있다면 얼굴과 이름을 외워놓으십시오.”

=후후훗. 다녀와서 혼내줄 거니?=

“혼내주는 정도로 되겠습니까. 비전투 계통의 영혼 기사를 건드렸으니 신의 정원으로 못 들어가는 정도로 손봐줘야 교환비가 맞아떨어지겠지요.”

=…….=

=…….=

=…….=

농담인듯 웃으며 말하는데 어째서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는 걸까.

얼어있는 유르파의 모습에 안느가 피식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녀올게. 어디서 맞고 돌아다니지 말고 방에서 얌전히 기다려.=

=다녀올게요.=

=어, 응응. 조심해서들 다녀와~.=

그렇게 서문을 나오고 약 6시간.

각자 쿠에, 쿠르티, 쿠핀을 타고 쉴 새 없이 달린 덕분에 걸어서 하루하고 반나절 거리를 돌파해 폭군룡의 미궁에 도달한 일행은 도시의 그 어떤 관리도 받지 못하는 야생의 미궁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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