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화 〉 283 영웅의 도시 헬루멘
* * *
그날 오후, 호텔 헬루멘에 주차해놓은 마차와 쿠에들을 데리러 안느와 유르파가 나간 사이 이실리테를 불러 면담의 시간을 가졌다.
현 상황에 대한 변곡점이 발생한 상황, 이실리테와 먼저 이야기를 나눠 그녀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실리테.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말고, 네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마음속으로 물은 다음 신중하게 대답해주길 바란다.”
=네, 주인님.=
“낮에 시하 영주와 대화를 나누며 알게 된 사실은 우선, 영주는 너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입단 시험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나와의 관계성을 감안해 큰 불이익은 주지 않으려 하겠지.”
중간에 몇 가지 추살대를 보내려 했다느니 쓸데없이 환인의 기질을 자극하는 발언도 있었고 이쪽이 저자세로 나가니까 제멋대로 구는 꼴도 있었지만, 환인은 일단 참았다.
추살대를 보내려 했다는 발언은 자신과 이실리테가 만나기 이전의 일이었고, 중간부터는 자신이 아닌 이실리테와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무시하고 이실리테의 처우를 어쩌겠느니 하는 발언이 나온 대목에서는 오히려 속으로 웃었다.
이런 식으로 자기 발목을 붙잡는군, 하고.
‘신분과 능력으로 압도적인 우위에서의 인간관계 밖에 맺은 적이 없을 테니 당연한 일이겠지.’
아무튼.
영주는 이실리테가 시험에 떨어지더라도 처벌하지 않을 것이다.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을 꼽으라면 시험에 떨어진 이실리테를 일반 기사로 붙잡은 뒤 시험에 통과할 때까지 계속 시험을 치르게 하는 거겠지.
물론 무제한으로 시험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분기별로 한 번, 혹은 1년에 한 번 정도로 횟수 제한을 둘 게 틀림없다.
=주인님을 헬루멘에 오래 붙잡아 두기 위해서인가요……?=
“그래. 내가 널 두고 헬루멘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읽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사이 어떻게든 날 회유한다면 너와 나 둘 다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그 의도는 환인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이실리테의 처우를 결정하려 한 것에서 드러난다.
환인이 알기 쉽게 설명해준 덕분에 영주의 의중을 읽은 이실리테가 화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볼모로 삼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고귀한 성불행을 이어가시는 주인님을 옭아매려 하다니, 역시 대다수의 호족은 추악해.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눈썹 끝이 처지며 시무룩해졌다.
따지고보면 이 사태는 전부 자신이 도적질을 해서 벌어진 일이니까. 자기 자신이 원흉이니까.
이실리테가 풀죽은 것을 잠시 응시하던 환인이 입을 열었다.
“내가 왜 헬루멘의 영주와 담판을 지으려 했는지 알고 있나.”
=8급 호족은 준 왕족이니까요……? 무시하거나 하기에는 영향력이 너무 강해서……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헬루멘 영주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계속 방치하거나 미룬다면 폭탄 굴리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실리테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지금이 적기이긴 하다.
지금보다 명성이 더 높아진다면 오히려 반작용이 나타날 수 있으니까.
‘영성님의 영혼 기사 말이야. 8급 호족인 위르트 가문의 대영웅 이름을 더럽힌 사람이라며?’
‘자기 여자라고 잘못을 덮으려 하다니, 영성님 그렇게 안 봤는데 사리사욕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부류일지도 몰라.’
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나 꼬리표가 붙을 것이다.
전직 도적 출신 영혼 기사를 데리고 다니면서 은원도 청산하지 않고 좋을 대로 살고 있다는 뒷말 같은 것들.
신경쓰지않고 자기 할 일만 하면 그만이긴 하다. 하지만 자신의 가장 큰 목적, 지구로 귀환하기 위한 활동에 장애가 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배제하고 싶은 환인이었다.
무엇보다, 사람은 과거에 상당히 얽매이는 존재다.
이실리테가 과거라는 불씨를 품에 안고 있는 이상 언젠가는 해결해야 하는 문제.
이런 문제들이 얽히고설키다 자신이 계산하지 못한 일이 발생해 뒤엉켜 스노우볼링이 시작되면 호미로 막을 것을 트랙터로 밀어버려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때문에 환인은 적을 최대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이 되기 전에 아군으로 만들거나 적이 힘을 갖추기 전에 박살 내버리는 것이다.
손자병법에도 관련된 글귀가 있다.
일단 나보다 강한 놈이 있다면 가급적 싸우려 들지 마라. 싸울 거면 빨리 끝내라. 빨리 끝내려면 압도적인 힘을 갖춰라. 그게 안 된다면 싸우지 마라.
적이다 싶으면 사전에 드러나지 않는 형태로 박살 내버린다. 이 부분은 부모님마저도 교정하지 못한 환인의 심리 그 자체.
때문에 길레스=벡슬과 제하=메샤, 알드헬름을 죽이고 스타에타의 목숨을 끊어버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적이니까.
하지만 헬루멘의 영주는 문제가 있다.
부모님의 열정적인 교육으로 적이 아니거나 중립, 혹은 선의의 관계가 될 사람에 한해서는 행동이 미묘해진다.
더욱이 헬루멘의 영주와 관계는 이쪽에 어느 정도 잘못이 있는 상황이며 정의감과 선량함이 어느정도 있는 사람.
때문에 부모님의 가르침이 심리적 브레이크가 되었고, 향후 미래의 활동에 대한 계산으로 다소 저자세로 나갔다.
물론 8급 호족이라는 지위와 세력, 무력을 감안한 요소도 있다.
8급 호족에 대영웅 가문의 소재지. 가문 내에 8급 직업자도 다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5급 이상 직업자만 수백 명.
혼재라는 알려지지 않은 무기를 쥔 이상 들이받으면 박살 낼 수 있기야 하겠지만, 이쪽 인생과 활동도 박살 나는 것은 물론 최우선 목표의 달성도 불투명해진다.
=폭탄 굴리기인가요…?=
“그래. 현 상황에서 다행인 점은 시하 영주가 우리에게 호의와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내게 흑심을 품었다는 거지.”
=…….=
“여기에 시하 영주는 하나 실수를 저질렀다. 그걸 이용한다면 시험을 치르지 않더라도 이 문제를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실수인가요?=
시하=사이지는 이실리테를 영웅 기사단에 입단하면 활동의 자유를 보장해주겠다는 식으로 선심 쓰듯 말했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위르트 가문이 억지에 가까운 욕심을 부리는 일이었다.
최연소 영성의 영혼 기사 중에는 위르트 가문의 영웅 기사단 소속 기사가 있다!
이런 식으로 소문이 퍼져 나가면 위르트 가문에 실시간으로 명성치가 적립되는 일이다. 이득이 되면 됐지 손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입단 시험에 떨어져도 문제는 없다. 위르트 가문으로서는 입맛대로 사실에 적시한 소문을 가공해 퍼트릴 수 있으니까.
위르트 가문의 영웅 기사단은 현직 영혼 기사가 입단 시험을 치를 정도다!
…이런 식으로.
얼굴이 찡그려지는 이실리테를 보며 환인은 시하=사이지의 뒤에서 지었던 미소로 입을 열었다.
“그게 시하 영주의 가장 큰 실책이다.”
실책? 그게?
만약 시하 영주가 예의를 차려서 이실리테의 실력 테스트를 거친 후 영웅 기사단에 입단시킨 다음 이러이러하길 바란다~ 는 식으로 나왔다면 환인도 그러겠다고 하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고아에 아무런 커리어가 없는 이실리테가 8급 호족 가문의 최고 기사단 기사라는 신분을 획득하는 것은 그녀의 명예와 프라이드를 세워줄 하나의 항목이 될 테니까.
‘하지만 시하 영주, 당신은 너무 욕심을 부렸어.’
이쪽을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이 아니라 예의를 갖춰 방문한 호랑이 정도로 대우했어야 했다.
그러나 시하=사이지는 그러지 않았다.
“아까 대화할 때 말했다시피 네가 이실리테라는 이름으로 도적질을 한 것은, 도적질이라는 그 자체가 죄인거지 이름을 사용했다는 건 죄가 아니다. 여기에 시하 영주가 한 말을 더하면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지.”
녹색 성자는 영혼 기사로 삼은 여성의 과거를 청산하고 용서를 빌기 위해 위르트 가문을 찾았지만, 헬루멘의 위르트 가문은 녹색 성자와 영혼 기사를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데 이용하려 했다.
이야기를 듣던 이실리테는 뒷목에서 두통이 슬그머니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뭔가 주인님이 상황을 알려주시는데 채 절반도 이해되지 않는 느낌.
그래도 그동안 주인님의 말씀을 옆에서 줄곧 들은 덕분에 요점은 간신히 파악했다.
=시하 영주님이 욕심부리다가 칼자루를 놓쳤다는 거죠?=
“그래. 이실리테라는 이름이 라드세아에서 존경받는 영웅의 것임은 맞다. 위르트 가문도 그 이름의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손을 쓰고 있는 것도 맞고 그 사실도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이쪽이 마냥 죽을죄를 지었느냐고 하면 그런 건 아니다.
이쪽이 아픈 몸까지 끌고 찾아와 사과했으며 환인 일행이 그동안 라드세아에서 의로운 활동을 해온 것도 있다. 그럼에도 헬루멘의 영주는 상급 영혼사 일행을 자신 가문의 이득을 위해 이용하려 했다.
이름을 더럽혔다는 것은 일종의 명예훼손.시하 영주도 자신의 의견을 묻지 않고 영혼 기사이자 연인이라 소개까지 한 이실리테를 멋대로 하려 했으니 그쪽도 명예 훼손을 저지른 셈이다.
호의를 바탕으로 한 제안이라 해도 내용이 그따위면 반발심이 들기 마련이다. 제삼자도 정확한 내용을 알게 되면 ‘아, 그건 좀.’하며 고개를 저을 터.
만약 이실리테를 위해서 찾은 일이 아니었다면 그 순간 환인은 게임을 끝냈을 거다.
7급 호족의 증표와 배경, 땅신 교단 본단의 추기경이라는 배경, 영도에서 초대장을 받아 찾아가고 있다는 명분이라는 배경.
세 개의 힘을 하나로 모은 뒤 그 사실을 버무리면 사태 해결이라는 문이 열렸을 테니까.
그러나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이실리테를 위한 거였기에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 결정을 미룬 상태.
“자, 여기서 본론이다. 이실리테, 너는 어떻게 하고 싶지?”
단순히 도적질했던 과거를 청산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면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가능한 상황에 도달했다.
비록 위르트 가문과 사이가 좀 나빠지겠지만, 그정도야 감내 가능한 수준이다. 만약 기분 나쁘다고 수작질을 부려오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엿을 먹여도 되는 일.
저쪽의 의도에 휘둘리지 않아도 된다.
나름대로 환인에게 들은 것을 이해하려고 분석하고 생각하며 끙끙 앓던 이실리테는 반쯤 울것 같은 얼굴로 조그맣게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전 주인님을 위해서 움직이고 싶은데, 이제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헬루멘의 영주가 영웅 기사단 입단 시험을 치르라고 했을 때 이실리테는 ‘영웅 기사단이면 굉장이 위명 높은 기사단이잖아. 거기 들어가면 주인님한테도 도움되겠지?’ 해서 망설임 없이 치르겠다고 했었다.
▶입단하면 8급 호족의 이름 높은 기사단의 기사가 되어 신분이 상승한다.
▶주인님한테 도움이 된다.
▶이름을 함부로 쓴 것도 용서받는다.
▶개이득.
이렇게 생각한 것.
영주가 다소 무례한 식으로 위협과 회유를 하려 했지만, 그보다 더한 호족도 본 적이 있는 이실리테였기에 상대적 천사로 인식했다는 점도 있었다.
그런데 용서가 어떻고 죄가 문제가 된다고 하더니 명예 이야기가 나와 서로 명예를 훼손했다는 말이 되었다. 그러더니 영주가 욕심에 말실수를 저질렀다?
이실리테는 폭군룡의 미궁에 들어가서 성장하고 입단 시험을 통과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반도 채 이해 못할 이야기가 쏟아져 눈앞이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환인은 이실리테의 손을 잡고 고대 그리스의 렉투스lectus 같은 의자로 가 누우며 이실리테도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이실리테. 나는 너의 그 멍청미가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머, 멍청미? 멍청미가 뭐지…… 멍청한데 예쁘다? 멍청하지만 아름답다…?
환인의 품에 폭 안겨 욕인지 칭찬인지 헷갈리던 이실리테는 이어서 귀에 흘러들어온 속삭임에 몸을 떨었다.
“당연히 칭찬이다. 백치미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어리버리한 모습이 귀엽다는 뜻에 가깝지.”
=…….=
“그래서 내가 처음 말하지 않았나. 타인은 생각하지말고 네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생각해보라고.”
=아.=
빨개진 얼굴을 환인의 목덜미에 묻어서 감춘 이실리테는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속삭였다.
=시험 안 칠래요. 저는…… 주인님만의 영혼 기사가 되고 싶어요.=
“하지만 표정에는 미련이 남는데.”
=그건 신분 상승의 욕망 때문에……. 하수구 밑에서 태어난 계집애가 대륙에 이름난 영웅 기사단의 기사가 될 기회였잖아요. 하나도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니까…….=
“그런가. 그러면 시험 치도록 하지.”
=네? 하, 하지만.=
“시험을 치르고 보란 듯이 붙는 거다. 물론 기사단에 입단하지는 않는다. 영웅 기사단에 입단할 자격과 능력이 있다는 걸 증명했지만, 거절하고 영혼사와 함께 한다는 이미지를 선택하는 거지.”
영주는 거의 다 삼킨 호박을 토해낸 기분이 들겠지만 뭐라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도 자신이 너무 욕심을 부리다 망했다는 것을 깨달을 테니까.
이실리테는 한참 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아직도 잘은 모르겠지만, 주인님 말씀대로 할게요.=
“아직 한 달이라는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자신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보도록 해라.”
그리 말한 환인은 이실리테의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그녀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자친구들이 돌아왔을 때 환인은 이실리테와 내놓은 결론을 이야기해주었다.
=좀, 시하 영주님이 말하는 게 기분 나쁘긴 했어. 아무리 8급 호족이라지만 이쪽도 상급 영혼산데 너무 무시하는 느낌이었으니까.=
=난 그때 자기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있길래 뭔가 다른 생각이 있구나 싶었지~.=
=그건 나도 그랬지만 뭐, 시하 영주님의 반응은 도령의 추측대로 온건한 편이야. 거지 같은 성미였다면 지금 이렇게 있지도 못했겠지?=
“그런 성미였다면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다.”
협잡질과 루티아=아슬리드를 이용해 사태를 해결하려 했겠지. 그게 파르히스트 성주에게 빚을 지우는 일이라는 걸 알았어도 말이다.
=뭐어~ 나도 자기의 결정은 옳았다고 봐. 헬루멘을 피해 갔다면 호족 특유의 자존심 때문에 나중에 더 큰 문제와 귀찮음이 생겼을 테니까. 이렇게 가까이 왔으면서도 우리 도시를 피해 갔어? 너 뭔가 켕기는 거 있지? 하고.=
=호족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겠지. 영도가 확실한 우군이라는 보장도 없는 상황이고.=
“그래. 지금 바로 영도를 찾아가는 것도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니까.”
이실리테가 타준 당분 보충용 꿀차와 초콜릿을 먹던 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뜩이나 컨디션이 안 좋은데 다시 머리를 잔뜩 썼더니 몸 상태가 또 나빠진 기분이다.
환인은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유르파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눈을 감고 말했다.
“어쨌든, 이로써 이실리테의 문제는 별 탈 없이 해결될 거다. 한달 뒤 시험을 치른 다음 영도를 향해 출발하면 되겠지…….”
자신의 최종 목적은 지구로 귀환이다. 지금 여정도 그러기 위한 기초 활동에 불과하다.
괜한 적을 만들지 않고 넘어가게 되는 길이 열려 한결 마음을 놓은 환인은 안느의 망설임 섞인 부름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도령.=
“음.”
=전에 우리끼리 생각해본 건데, 도령은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갈 거지?=
불안과 두려움이 드러나는 눈빛에 환인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우리는 다 버리고 갈 거야?=
“이기적으로 들리겠지만 솔직한 마음에는 너희와 함께 가고 싶다.”
니오네브레스에서 편히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지만 이 세상은 이래저래 편히 살기 어려운 장소다.
지구는 신비와 이능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재해나 불의의 사고로 죽을 수는 있을지언정 난데없는 재앙이라 할만한 일로 인해 죽을 일은 없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니오네브레스는 언제 어디서 죽음이 찾아올지 모르는 세계다.
태풍이나 폭풍? 폭동? 사람들의 악의로 말미암은 범죄?
이런건 니오네브레스에서도 일어난다.
문제는 지구에는 존재하지 않는 신비와 이능. 미궁과 이형종의 존재. 사람을 적대하는 괴물의 존재.
그리고 이 세상에 실존하는 다섯 신까지.
멀리 볼 것도 없이 촌락의 운명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운이 좋다면 몇십 년, 몇백 년 동안 무사히 유지되지만, 재수 없다면 하루아침에 괴물과 이형종의 난립으로 소멸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 니오네브레스다.
또한 이능으로 인해 개개인의 무력 격차가 말도 안 되게 벌어지는 것도 문제로 꼽을 수 있다.
냉병기를 들고 혼자서 수천, 수만 명과 싸워 이기는 미친 상황도 벌어질 수 있다. 거기에 휘말리면 개인의 의지와 목숨은 강풍 앞의 촛불이나 다름없다.
이것들을 모두 제외하고 생활상만 보더라도 지구와 니오네브레스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편의성의 차이가 존재한다.
이능이나 신비가 없으니 이동과 여행도 자유롭고 다른 나라의 방문도 어렵지 않다.
일만 하면 일단 굶어 죽을 걱정 없이 최저한의 생활 수준을 보장받으며 먹고 살 수 있다.
돈에 의해 신분이 정해지긴 해도 원론적으로 보자면 법 위에 만인은 평등하다. 일반 시민이라도 적당한 돈과 머리만 있다면 사회 최상류층에게 거나한 엿을 처먹일 수 있다는 뜻.
이런저런 요소를 감안하고 분석하고 판단해보면, 환인의 기준에 니오네브레스는 몇 년 경험 삼아 살아 볼 만한 곳이긴 해도 평생을 살고 싶은 장소는 아니다.
=엄청 평화로운 장소라는 말로 들리네.=
“너나 이실리테가 쓰는 무기는 소지하려고만 해도 국가의 허락이 필요할 정도니까. 그만큼 평화로운 나라다.”
=와.=
=대단하네.=
감탄하던 여자친구들은 환인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거나 몸을 조금씩 배배꼬았다.
=만약, 진짜 만약인데. 우리를 못 데려가고 도령 혼자 돌아가야 하는 일이 생기면…… 어쩔 거야?=
“모르겠다.”
가감없이 솔직한 심정이다. 자세한 것은 그때 가야 알 수 있겠지.
환인의 솔직한 대답에 여자들은 작게 안도했다. 매몰차게 떠난다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으니까.
환인이 확답을 내리지 못한 것은 현 상황의 불확실성이 강해서였다. 그리고 현재 상황이 거기에 심력을 쏟을 만큼 평화롭지 않다는 이유도 있고.
자신에게 우호적인지 아닌지 확신 못하고 있는 영도의 문제도 있고 종족 연합 국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소환한 주체에 대한 문제도 있다.
둘 다 지독한 두통을 일으키는 수준의 복잡한 계산과 판단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되는 문제들이다.
이런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는 마당에 당면한 문제를 미루다가 폭탄의 심지가 다 타서 터지는 것은 피하고 싶은 게 환인의 마음이었다.
자신이 라드세아에 있는 한 8급 호족 정도가 마음먹고 깽판 치려 한다면 얼마든지 다른 호족을 동원할 수 있겠지.
이 세상에는 국가가 네 개 뿐. 여기서 8급 호족은 주도와 왕이 사는 성궁에도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급이 높은 신분이다
영혼사와 영도가 아무리 존중받고 존경받는 장소와 직업이라지만, 정치와 군사력을 끼워 넣으면 어쩔 수 없이 초라해지는 게 진실이다.
호족이 일반 시민이나 마을 촌민들처럼 영혼사를 무작정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한 8급 호족과 척을 지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다.
더한 문제는 라드세아 한 곳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
니오네브레스의 국가 네 곳은 전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나름의 협력 관계를 구축한 상태다. 악을 품고 훼방 놓으려 하면 히스론드, 종족연합, 벨티칼에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한 결과의 가짓수는 어림잡아 수백 가지.
영도의 초대장을 받고 비자룩스에서 나온 뒤 헬루멘에 도착할 때까지 그가 생각한 것은 이실리테의 문제보다는 헬루멘을 통과하거나 피해간 이후 세계정세가 어떤 식으로 변화할지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대다수였다.
자신이 상급 영혼사로 계속해서 성장해나가며 명성도 함께 높아졌을 때 라드세아, 히스론드, 종족연합 국가, 벨티칼 이 네 국가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자신과 자신 주변의 요소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자신의 행동으로 우호 관계가 어떻게 변화할지 등등.
여기에 헬루멘 영주와 이실리테 사이의 문제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또 수천 가지의 결과가 나오니 환인도 버티지 못하고 뻗어버린 것이다.
기실 환인은 대화보단 폭력을 써서 상황의 해결을 선호한다. 머리를 쓰는 두뇌전보다는 무방비한 상대의 뒤통수를 치고 등 뒤에 칼을 꽂는 것이 그의 취향이다.
그러나 8급 호족은 그런 방식으로 좋게 해결할 수 있는 체급이 아니다. 혼재에 대한 대처도 준비되어있을테니 테러를 저지른다해도 간단한 식은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때문에 괜히 강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머리를 썼던 건데, 이실리테가 보여준 하나의 길로 인해 상황이 생각보다 잘 풀렸다.
환인은 자신의 세계에 대한 정보를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여자친구들을 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