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화 〉 281 영웅의 도시 헬루멘
* * *
환인을 포함해 그의 여자들도 모두 회색 후드 망토를 쓰고 거기에 쿠에까지 타고 대로를 이동하자 길을 걷던 사람들, 마차 안 승객, 마부 할 것 없이 대부분이 일행에게 시선을 주기 시작했다.
절반은 머리가 좋아 환인 일행의 특징에서 정체를 깨닫고, 나머지 절반은 뭔가 피부가 찌릿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려서 쳐다보는 식이다.
“후우….”
환인이 고개를 숙이고 짧은 숨을 내쉬자 비상이 걱정된다는 듯이 돌아보며 쿠엣, 운다. 그 소리에 유르파가 환인의 옆에 붙으며 말했다.
=자기, 힘들면 말해. 진통제 더 있으니까 처방해줄게.=
“지금은 괜찮습니다. 정 못 견딜 것 같으면 그때 부탁하겠습니다.”
=응.=
뒤에서 따라가던 안느는 그 대화를 듣고 이렇게 찾아가도 괜찮은지, 뭔가 계획이라도 있는지 환인에게 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비상의 등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보여서 괜한 질문에 더 힘들어할까 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유리 언니도 계속 말 걸지 않고 금방 뒤로 돌아갔고…….’
생각하다보니 조금 화가 났다. 몸이 아프면 다 나은 뒤에 가도 될 텐데 열이 내리고 두통이 많이 가라앉았다고 금방 움직이다니.
‘으~. 몸이 빨리 수목화가 시작되어야 할 텐데.’
부끄러워서 말하지 않았지만, 수목화가 진행되어서 몸에 정수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면 그것만 꾸준히 마셔도 잔병치레하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
그게 왜 부끄러운가 하면 그 정수??란 몸에서 만들어지는 물이기 때문.
애초에 때가 거의 타지 않는 종족이 플뢰다. 몇 날 며칠 씻지 않고 싸돌아다녀도 머리카락도 떡지지 않고 몸에 개기름이 흐르지도 않는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먹은 것을 100% 소화해버릴 정도로 깨끗한 종족이지만, 체액을 마시게 한다는 건 즉…….
으흠흠.
속으로 헛기침한 안느는 생각의 주제를 전환했다.
아무튼 도령의 지능은 진짜 대단하다. 이슬이가 뭘 하려는지 거실에 줄곧 앉아있다는 이야기만 듣고 눈치채다니, 머리가 아플 때도 이만큼의 두뇌 회전을 보이는 건 역시 천재라서 그런 거겠지?
안느는 환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시 궁금해졌지만, 현재 환인은 머리가 무거워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사진으로만 본, 영국의 근현대 도시와 비슷한 화려한 거리를 구경하고 있을 뿐.
오르막길을 따라 도착한 거성, 위르트 성?에는 해자도, 도개교도, 성문도 없었다.
그저 중간이 텅 빈 성벽 사이에 기사 네 명이 전신판금 갑옷 차림으로 경계근무를 서고 있을 뿐.
아무리 본성의 입구라지만 기사를 경계 근무에 투입하다니, 병력의 질은 저 파르히스트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8급 직업자가 현시점에도 셋이나 된다고 하니 정말 영웅의 도시라고 불리 울만 하다.
환인이 성의 출입구를 향해 다가가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기사들은 환인 일행을 보며 살짝 긴장하고 있었다.
점심 교대를 마친 기사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런데 인파로 북적거리는 길 아래와 다르게 개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는 성 앞 거리로 네 명이 행인의 시선을 잡아끌며 다가오는 게 아닌가.
깔맞춤을 한 듯 회색 후드 망토를 걸치고 있었고 네 명 중 세 명이 4급 이상의 직업자. 거기다 쿠에를 기승하기까지.
풍기는 분위기만큼은 상급을 넘어 최상급, 일류 모험가 파티 느낌…….
‘…이 아니잖아!!’
분명 어제 보고가 들어왔다.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가 입도했다고 말이다.
점심 경계 근무조장인 하급 기사 길드레는 다가오는 일행의 정체를 눈치채곤 목 뒤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동료 기사에게 말했다.
=콴. 어이, 콴.=
=…어어?=
=오늘 아침에 이야기 들었지? 저분들이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님과 그 일행이다. 초소 건물로 들어가서 안쪽에 연락 넣어.=
=설마 했는데 역시나였구만. 갔다 오지.=
동료 기사가 보고를 위해 성벽 뒤에 숨겨진 건물로 들어가고, 남은 기사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가장 선두의 녹색 쿠에를 탄 무휘광에게 향했다.
‘거리가 30m 이상 떨어져 있는데도 피부가 저릿저릿한 존재감이라니.’
강렬한 존재감에 드러난 맨살이 저릿저릿하다.
얼굴이 뻣뻣하게 굳는 이 느낌은 헬루멘의 자랑이자 최상의 기사단인 영웅 기사단의 단장이나 역대 단장들의 모임인 장로회의 장로분들 앞에 섰을 때와 흡사한 감각이었다.
저 정도는 되어야 성자로 불리며 이토록 빠르게 명성이 퍼져 나가는 건가.
실은 컨디션이 나쁘고 두통 탓에 기분도 좋지 않아 겉으로 흘러나오는 환인의 본성, 살기 비슷한 거였지만 환인의 이름값 때문에 존재감으로 오해하는 기사들이다.
=다가오시는 분들께서는 잠시 멈춰주십시오.=
길드레는 예법과 근무 철칙에 따라 환인 일행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그리고 쿠에에서 내리는 성자와 그의 일행을 보며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그저 말을 걸었을 뿐인데 탈것에서 내리다니. 고족만 되어도 마차에서 내리지 않거나 신분이 높다면 앞을 가로막는다며 짜증 내기 십상인데.
=성문 오후 근무담당자 길드레입니다. 방문하신 분들의 성함과 신분, 방문 목적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환인은 정중히 다가오는 맹금류의 머리를 한 기사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뒤 후드를 벗으며 대답했다.
“제 이름은 환인, 길을 잃고 헤매는 영혼을 정원으로 안내하는 순례자입니다. 이쪽은 저의 연인이자 동료인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
이실리테의 이름이 나온 순간 검고 동그란 눈을 끔벅인 길드레는 이어 굉장히 짙고 온화한 평온의 파동에 맞아 노랗지만 끝이 검게 물든 부리를 살짝 벌렸다.
한손으로, 거기다 이토록 농밀한 파동을…….
신분 증명으로 평온의 파동을 보여준 환인은 하던 말을 이었다.
“방문 목적은 헬루멘의 영주이시며 위르트 가문의 가주이신 시하 사이지 위르트 님을 뵙기 위해섭니다.”
부리를 살짝 벌리고 있던 길드레는 자신의 추태를 깨닫고 황급히 부리를 다문 뒤 큼큼 헛기침했다.
=실례했습니다. 혹시 가주님과 약속을 잡으셨는지요.=
“못했습니다.”
=외람되지만, 가주님께서는 공사가 다망하셔서 약속 없이는 뵙기 어려우실듯합니다. 방명록에 머물고 계신 곳을 남겨주시면 안으로 전달하여 머지않은 시간에 답변을 받으실 수 있도록 조치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 달라는 정중한 부탁이다.
“곤란한 부탁을 해야 할 것 같군요.”
=예……?=
“가주님을 뵙기 전에는 염치없이 돌아갈 수가 없겠습니다. 여기서 계속 기다릴 테니 연락이 온다면 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
길드레를 비롯해 다른 기사 두 명은 적잖이 당황했다.
분명히 돌아가 주십사하는 이야기를 알아들으신 거 같은데 여기서 기다리시겠다니. 상급 중에서도 성자로 불리는 영혼사를 성에 들여 대접한 것도 아니고 길바닥에 세워뒀다는 사실이 알려졌다간 진짜로 큰일 난다.
‘게다가 영혼사님의 안색도 그렇고 목소리도 안 좋으신 게, 편찮아 보이시는데.’
심각해진 길드레는 동료들과 눈빛으로 의중을 나누고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한 뒤 초소 건물로 향했다.
때마침 연락하라고 들여보냈던 콴이 나오고 있어 부른다.
=콴.=
=어. 영혼사님 돌아가셨냐?=
=아니. 가주님이 만나주실 때까지 길에서 기다리신다고 하신다.=
=뭐? 미친, 그래서 밖에 그냥 세워뒀어?=
=니가 무슨 말을 들었느냐에 따라 달라져. 안에서 뭐랬는지 얼른 말해.=
=안 돌아가셨으면 정중히 안으로 모시라는 시녀장님의 말씀이다. 얼른 가자.=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길드레는 다행이라는 얼굴로 콴에게 지시를 내렸다.
=아니, 넌 다시 안에 연락 넣어서 영혼사님의 용태가 좋지 못하다고 먼저 전해. 목소리는 조금 갈라졌고 안색도 안 좋아. 식은땀의 흔적도 보인다고 하고. 시녀부에서 보살핌이 필요할 거 같다.=
=어잇, 씨. 그거 나만 불안함?=
=닥치고 얼른 가.=
길드레는 즉시 몸을 돌려 나갔고, 정말로 이 추위에 밖에서 기다릴 셈이었는지 한쪽 벽으로 물러나 있는 영혼사 일행을 볼 수 있었다.
속으로 식겁한 것은 자신뿐만 아니었는지 ‘안으로 모시라고 연락 왔지? 왔다고 말해!’ 눈빛으로 소리치는 동료들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환인에게 다가간다.
=성자님. 성에서 안으로 정중히 모시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부탁합니다, 길드레 경.”
=별말씀을. 이것이 저희들의 의무입니다.=
위르트 성의 외관은 독일의 성하면 떠오르는 프로이센 왕가의 로열 하우스를 닮았다고 환인은 생각했다.
닮기만 했을 뿐, 규모와 사이즈는 2배 가까이 컸고 내부 또한 유럽의 왕실을 연상시키는 적갈색조의 기품있는 화려함으로 가득하다.
화려하면서도 절제되고 중후하면서도 산뜻한 느낌이 공존하는 성 내부를 자세히 살펴보던 환인은 생각을 멈추었다.
인테리어로 집주인의 성격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1대 뿐이다. 수십 대는 내려왔을 기나긴 역사의 성에 현 주인의 의중이란 한점도 가미되어있지 않을 테지.
가문의 역사가 길수록 가문에 매몰되는 것이 사람이니까.
=이곳에서 기다리시면 되겠습니다.=
정갈한 복장의 시녀에게 안내받은 응접실은 넓었고 따스했다.
한쪽 벽에 설치된 커다란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오르고 있지만, 훈기는 중세 프랑스 풍 인테리어의 넓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도구로 온기를 유지하면서 벽난로까지 피우다니, 부자의 기본 소양은 낭비라고 하더니 틀린 말이 아닌듯하다.
시녀가 나가고 여자친구들과 응접실에 남게 된 환인이 약간 비틀거리며 발을 내딛자마자 이실리테와 안느가 흠칫 놀라며 옆에서 부축해준다.
“미안하다.”
=에헤이.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어서 앉아, 어서.=
부축을 받으며 가까운 안락의자에 앉은 환인은 몸을 늘어트렸다.
마치 몸이 소파와 함께 녹아내리는 느낌. 이만한 피로는 정말로 오랜만이어서 감회가 새롭다.
마지막으로 이런 피로를 느낀 게 언제였지. 기상청의 맑다는 날씨를 믿고 한겨울 비박을 나갔다가 눈보라 속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이었나.
=주인님…….=
주변에 모여 서성거리던 여자친구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중 가장 시무룩한 얼굴로 자신을 걱정하는 이실리테에게 후 웃어준 환인은 오랜만에 마도기구원, 원기를 회복시켜주는 오브를 꺼내 만지며 말했다.
“누가 보면 죽으러 온 줄 알겠다.”
=그렇지만 주인님이 이렇게 지친 모습은 본 적이 없어서…….=
“각성 이후 이만큼 지친 적은 확실히 없었군. 오랜만의 피로여서 반갑기까지 하니 그렇게 신경 쓰지 마라.”
구원을 통해 원기??를 채워봤지만 얼마 회복되다 말고 멈춘다. 늘어지고 망가진 컨디션이 원기의 상한선까지 줄여놓은 느낌이다.
환인은 여전히 자신 주변을 서성이는 여자친구들에게 말했다.
“누가 올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긴장을 풀고 쉬도록 해라. 특히 이실리테.”
=도령은 위르트의 가주님이 이슬이한테 뭔가 시킬 거라고 생각해?=
“현 상황에서는 무엇하나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아무튼, 오래 기다려야 할지 모르니 알아서 휴식하고 있도록.”
주황색으로 반짝이는 오브를 집어넣고 핏빛 위상석을 꺼내 쥔 환인은 머리를 머리받침에 대고 눈을 감는다.
위르트 가문의 가주가 올지, 가주의 대리인이 올지 알 수 없지만 최소 그때 쓸 체력을 비축할 속셈이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정신 집중과 핏빛 위상석의 효과로 신체 회복에 집중 한지 얼마나 되었을까.
똑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열린 문에서 갈색의 순한 염소 머리 남자가 머리에 하얀 두건을 쓴 세 명의 시녀와 함께 들어왔다.
하얀 가운을 입은 염소 머리 남자는 응접실로 들어온 뒤 정확히 환인을 향해 다가와 두 손 모아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십니까, 녹색 성자님. 저는 위르트 성의 상주 의사이자 가주님의 주치의인 톨발데 큐어운즈입니다.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앉은 채로 실례했습니다. 혼길의 순례자인 환인이라고 합니다.”
핏빛 위상석 덕에 아주 약간 회복된 체력으로 일어나려 하자 톨발데=큐어운즈가 메헤헤 웃으며 다가와 환인의 어깨를 살포시 눌렀다.
=일어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영주님의 명으로 성자님의 병세를 확인하기 위해 왔으니까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러더니 환인의 손목 맥을 잡아보고 눈과 안색, 땀의 유무 등을 확인하더니 묻는다.
=으음, 입구의 근무 담당 기사의 보고대로 감기가 원인인 원기 손상 증세군요. 원기가 본격적으로 상한 것은 오늘 새벽 즈음이고요. 그런데 몸 상태가 벌써 회복 중으로 보입니다.=
“일행이자 연인 중에 약사 기술을 익힌 그녀가 있습니다. 연인들의 간병 덕분이지요.”
그새 가까이 온 유르파를 보며 말하자 상주의사가 메헤엑, 크게 감탄하며 유르파에게 예의를 표시했다.
=비술뿐만 아니라 약술에도 일가견이 있으시는군요. 진통에 효과가 있는 말린 메이르 잎가루에 정제 회복 물약을 7.8:2.2 분량으로 섞어 쓰신듯한데, 맞습니까?=
=큐어운즈 씨 말씀처럼 흘렌식 요법을 참조해서 진통제를 제작했답니다.=
=메헼, 감기에는 그만한 약이 없지요. 혹시 이후 처방을 생각해두신 것이 있으신지……?=
톨발데는 환인의 치유는 그녀의 영역임을 인정하듯이 유르파와 이야기를 나누며 보조 처방을 결정해나갔고, 잠시 후 유르파는 자신의 약제 도구로 톨발데의 조언을 통해 원기 회복제를 제조해냈다.
갈색의 작은 환약을 복용한 환인에게 톨발데가 조곤조곤 설명한다.
=감기의 회복에는 충분한 휴식만큼 좋은 치료법이 없습니다. 성자님의 정신력이라면 일상생활도 가능하시겠으나 빠른 쾌유를 위해 침대를 벗어나시는 것은 의사로서 추천해 드리고 싶지 않군요.=
“그녀도 빨리 나으려면 쉬는 게 좋다고 했지만, 차마 미룰 수 없는 일이 있어 부득이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큐어운즈 님과 위르트 가주님께도 폐를 끼치게 되어 면목이 없습니다.”
=메헼. 이 늙은이의 참견입니다만, 만병은 가벼운 감기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입니다. 그 점 염두에 두시고 모쪼록 몸조리 잘하시길. 저는 이만 가보겠으니 몸이 더 안좋아진다거나 하시면 저 아가씨들을 통해 불러주십시오.=
“예. 살펴가십시오.”
환인은 문앞까지 따라간 유르파와 대화를 이어가는 톨발데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한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라스트 네임이 있는 주치의를 성주가 직접 보냈다는 것은…….’
습관적으로 상황을 분석하던 환인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머릿속에서 생각을 털어내고 무념무상으로 명상을 시작해나갔다.
=아으…… 기약 없이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건 힘드네…….=
3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 가만히 앉아만 있던 안느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씩 굳는 관절을 풀기 시작했다.
환인은 1시간 전에 안락의자에서 내려와 평범한 의자에 앉아 정신 집중 훈련중이고 이실리테도 그 근처에서 환인을 따라 명상 중이다.
유르파는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책을 꺼내 조용히 읽는 중.
오간 이야기는 1시간에 두 마디 정도였다. 활발한 쪽 성격인 안느에게 꽤나 괴로운 상황이다.
안느의 혼잣말을 들은 이실리테가 눈을 뜨고 사과한다.
=미안.=
=미안하면 두부 전골 ‘해줘’.=
고기를 안 먹게 된 안느였기에 채소로만 제대로 전골 맛을 내기 위해서는 꽤 까다롭고 성가신 조미료의 배합과 손이 많이 가는 특제 소스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사과 대신으로 받기에는 별로 만들기 어렵지도 않은 음식.
이실리테는 안느의 배려를 읽고 작게 웃음 지었고 환인이 눈을 뜬 것도 그때였다.
“왔다.”
달칵.
문이 열리며 환인과 비슷한 장신의 여자가 당당하고 곧은 걸음으로 들어왔다.
환인의 여자들은 그녀의 입장에 방이 한층 밝아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화사하게 빛나는 연분홍색 웨이브 펌, 그 위로 하얀 여우귀가 쫑긋 솟아있고 한쪽 어깨는 순백의 숄더망토가 나긋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진주색의 유광 가죽 부츠를 신었으며 그 위로 하얀 바탕에 회색 레이스 단의 주름치마가 귀만큼이나 하얀 4개의 꼬리와 함께 하늘거린다.
갖은 호화장식이 덧붙은 트렌디셔널한 회색 정장조끼를 걸친 복장이 외모와 어우러져 기품과 부귀가 동시에 우러난다.
청순 계통인 이실리테와 청순+활발 계통의 안느하고 전혀 다른, 성숙하고 강인한 인상의 굉장한 미녀다.
노크도 없이 들어온 여자의 정체를 쉽사리 깨달은 환인의 여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환인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 느긋하게 있다가 찾아올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일찍 찾아왔군?=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몸에는 로잘린 펄 계통색의 번개가 주기적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변화한 아우라의 형태, 7급 이상에서 2차 각성을 이룬 직업자의 특징이다.
환인은 무심한 얼굴로 한쪽 가슴에 손을 올리며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방문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영혼길을 따라 순례중인 환인입니다. 이쪽은 차례대로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 소중한 연인이자 여정의 동료입니다.”
=헬루멘의 영주이자 위르트 가문의 가주인 시하 사이지 위르트다. 최근 위명을 떨치고 있는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를 봐서 영광이군.=
시하=사이지=위르트는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환인도 감정 없이 손을 뻗어 악수를 나누었다.
살펴보는듯한 시선으로 환인와 이실리테를 한차례 훑은 시하=사이지는 씩 웃으며 말했다.
=뜻밖이야. 그리고 재미있어. 이야기는 내 방으로 자릴 옮겨서 하지.=
최고급 실처럼 흘러내리는 연분홍색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쓸어넘긴 시하=사이지는 곧장 몸을 돌려 응접실을 나갔다.
“…….”
=…….=
환인도 묵묵히 그 뒤를 따랐고, 잠시 시선을 나눈 그의 여자들도 서둘러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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