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286화 (286/813)

〈 286화 〉 280 영웅의 도시 헬루멘

* * *

“…….”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오늘 도착한 호텔에서의 첫 밤을 보냈으니까.

“……?”

환인은 잠기운이 사라질수록 그 자리를 무게추가 차지하는 것 같은 감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흡사 머릿속에 10리터의 물이 들어차 있는 느낌.

그뿐만이 아니고 오한이 느껴지기도 하는데다 몸에도 힘이 잘 안 들어간다.

어젯밤에 안느와 너무 많이 했나.

성행위 횟수가 늘어날수록 풋풋한 소녀 같은 반응이 점차 성숙해져 가는 안느를 보는 건 꽤 흥이 돋는 일이었다.

더욱이 어제는 섹스어필 속옷만 입고 도시에 유행한다는 고양이 춤을 보여주었는데 거기에 낚여 평소보다 1.5배는 더 사랑을 나누었었다.

“으음…….”

입 안이 바짝 말라 물을 찾기 위해 몸을 일으킨 환인은 순간 칼로 뒷목을 찌르는듯한 두통에 인상을 썼다.

어찌나 아픈지 관자놀이와 미간까지 두통이 번져오는 듯 하다.

목도 아프고 몸도 으슬으슬하고. 이마를 짚고 가만히 있으니 옆에 알몸으로 색색 자고 있던 안느가 부시시,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으응…. 도령 뭐해…?=

“컨디션이 안 좋아서.”

=……?=

몸 상태가 안 좋다니? 환인의 등에 살결을 딱 붙인 안느는 그의 등에 닿은 젖가슴과 배로 평소보다 높은 그의 체온이 느껴져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싶어 손을 들어 이마에 댄 안느는 이불을 젖히고 얼굴에 걱정을 드러내며 물었다.

=도령 이마에서 열이 많이 나네. 몸은 어때? 목이 아프다거나 콧물 기침은 안 나?=

“두통과 인후통, 오한이 조금 있군.”

=어잇, 감기잖아. 누워, 일단 누워.=

그의 어깨를 잡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준 안느는 알몸 그대로 호다닥 자기 방으로 달려간 뒤 땅신의 징표를 가져와 정신을 집중, 질병 치료의 술법문을 외웠다.

앙크ankh를 닮은 징표에서 밝은 황색의 빛이 환인의 머리로 별빛처럼 쏟아졌지만, 무언가에 막힌 것처럼 그의 몸에 흡수되지 않고 좌우로 흘러내리기만 한다.

=아, 도령도령. 위상류 좀 거둬봐. 주문이 안먹혀. 도령?=

눈을 감은 환인의 어깨를 잡고 살살 흔들며 말하자 으음, 눈을 찌푸리며 든 환인은 그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조절이 안 된다.”

=헐.=

“안느, 물 좀…….”

=어, 잠깐만.=

잔에 물을 담아와 환인에게 먹여준 안느는 재차 질병 치료를 외웠지만, 빛이 정말 약간도 스며들지 않는다. 그사이 환인은 얼굴도 붉어졌고 몸에서도 열이 나기 시작했다.

이불을 덮고 있어도 추운지 몸을 떨기까지 하는 모습에 안느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어, 어어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몸이 아플 땐 뭘 해야 하지?

이런 식으로 아파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안느였기에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져 허둥거렸다.

피곤할땐 고기를 잔뜩 먹고 뜨뜻하게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말끔해졌는데, 고기를 구워와야 하나? 아니면 주문을 조금 더 외워볼까?

아냐. 애초에 질병 치유 술법은 위상력이 가미된 질병에 특효약이지, 평범한 병에는 큰 도움이 안 되는 술법이잖아.

큰 도움은 안 되지만 그래도 약간은 도움이 되는 건데. 그런데 도령의 위상류 때문에 이마저도 안되고…….

=아, 약초! 약, 율이 언니!=

후다닥 방을 뛰쳐나간 안느는 콰당, 유르파의 방문을 벌컥 열고 뛰어들었다.

=언니!!=

=히익!?=

큰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깬 유르파는 알몸으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안느에게 겁을 집어먹고 이불로 앞을 가리며 소리쳤다.

=아, 안느 아가씨?! 왜, 왜 그러니?! 나, 나한테는 자기가 있는데……!=

=도령이 아파! 감기 걸렸나 봐!=

=…자기가?=

의외의 소식에 놀라긴 했지만, 전사나 투사가 아닌 이상 가벼운 잔병치레는 하는 편이다.

여긴 기온이 낮기도 하고 자기는 술사 계통 직업자니까 감기에 걸리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유르파는 침착하게 침대에서 내려와 자기 약가방을 챙기려 했지만, 반쯤 패닉에 빠진 안느는 막무가내로 유르파를 끌고 가려 했다.

=자자잠깐, 안느 아가씨! 잠깐만 기다려! 가방, 약 가방은 가져가야지이!=

그 소란에 가벼운 잠옷 차림의 이실리테가 나타나 눈썹을 작게 찌푸리며 물었다.

=이게 무슨 소란이야?=

=이슬아! 도령이 아파! 감기 같아!=

눈썹을 더더욱 찌푸린 이실리테는 억지로 끌려가는 유르파와 그런 유르파를 끌고 가려는 안느를 떼어놓고 말했다.

=안느 너 발가벗고 돌아다니지 말고 옷부터 입어. 언니는 약가방 챙기세요. 저는 깨끗한 물이랑 수건 챙겨서 갈게요.=

=으응!=

주방에서 은 대야에 찬물과 수건을 챙겨서 환인의 방을 찾아간 이실리테는 식은땀을 흘리며 침대에 누워있는 환인과 그런 그를 진찰하는 유르파, 옷을 입은 건지 벗은 것인지 모를 차림으로 그 옆에서 발을 동동 굴리는 안느를 볼 수 있었다.

안절부절 못하는 안느를 밀어내고 의자를 가져와 은 대야를 올린 이실리테는 환인과 유르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응, 머리가 무겁고 두통에 목도 아프고. 기침이랑 콧물은 안나구?=

“예….”

=체온이 38도 정도인데 자기네 종족 평균 체온은 알아? ……36.5도? 좀 높긴 하지만 위험한 정도는 아니네.=

=정말 괜찮은 거야? 위상류, 위상류도 조절 못 해서 회복 술법이 안 걸리는데!=

=원래 몸이 약해지면 다 그래. 그리고 자기는 이슬이 아가씨가 영양 꼼꼼히 따져가면서 식사 챙겨 드리잖니. 가볍게 앓고 지나가는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유리 언니, 약 재료는 있나요?=

=약 괜찮은 거야?! 도령은 다른 세계 사람이잖아. 우리 약이 통하는 거 맞어?!=

계속된 안느의 고성에 미간을 찡그린 이실리테는 쉿, 조용히 하라고 한 뒤 유르파를 돌아보았다. 그에 유르파가 설명한다.

=감기에 특별히 쓰는 약 같은 건 없어. 그냥 몸을 따뜻하게 해준 뒤에 영양가 있는 음식만 충분히 먹여주면 알아서 나으니까. 약간의 진통제를 먹여도 좋은데 진통제 같은 건 회복 물약에도 충분히 들어가는 거고 회복 물약은 자기도 먹어본 적 있다고 했으니 자기 몸에 안 맞을 걱정은 안해도 될 거야.=

=정말이지? 진짜 별거 아닌 감기인 거지?=

=안느,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면 오히려 더 신경 쓰이니까 나가 있거나 아니면 수건을 물에 적셔서 주인님 이마에 올려줘.=

=어? 어, 응.=

물에 적셔 적당히 짠 수건을 환인의 이마에 올려준 안느는 그것만으로 굳어있던 환인의 표정이 펴지는 것을 보고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실리테는 꼼짝도 하지 않고 환인을 지켜보는 안느에게서 시선을 돌려 유르파에게 말했다.

=언니, 전 주인님이 드실 것 좀 만들어올게요.=

=그러겠니? 그럼 난 자기가 먹을 진통제를 만들게~.=

=네.=

부엌으로 들어온 이실리테는 잠시 뭘 만들지 생각했다가, 아플 때는 죽이라는 하녀기술원의 수업을 기억해냈다.

마침 어젯밤에 물에 불려놓은 쌀이 있다. 이어크래드 상단에서 선물로 받은 히스론드산 고급품종의 쌀로 볶음밥을 만들려고 했었는데 주인님이 드실 죽으로 만들어야지.

냄비에 불린 쌀과 물을 넣고 끓이고 감기에 좋다고 알려진 채소를 다듬어 투하, 쌀죽을 간단히 만들어낸다.

=이슬이 아가씨~, 약 다 만들었는데 음식은 어떻게 됐니? 약은 밥 먹은 뒤에 먹는 게 좋은데.=

=저도 다 됐어요.=

아픈 사람은 입맛이 없다고 해서 주인님이 드실지 걱정했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환인은 군말 없이 죽을 모두 비우고 유르파가 제조한 진통제까지 먹고 다시 잠들었기에 작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언니, 밖에 간단히 야채 볶음밥이랑 치킨 스프 만들어놨으니까 식사하고 오세요. 안느도 먹고 와.=

=엉. 금방 먹고 올 테니까 그때까지 이슬이가 도령 좀 봐줘.=

안느는 말 그대로 5분 만에 식사를 마치고 옷도 반 속옷 차림에서 제대로 옷을 챙겨입고 돌아왔다.

그때까지 물수건을 갈아주고 있던 이실리테도 그녀와 교대한 뒤 식사를 대강 끝내고 식기까지 정리를 끝마쳤다.

=…….=

조용한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던 이실리테는 환인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달칵.

=이슬이 아가씨? 난 방에서 일 좀 하고 있을 테니까 일 있으면 불러주렴.=

=네.=

환인의 방에서 나온 유르파가 이실리테에게 말하고 방으로 돌아간다.

안느가 주인님을 간호하는 건가. 그러면 나는 점심까지 할 일은 없겠네.

나도 주인님의 곁을 지키고 싶지만…….

이실리테는 가만히 소파테이블 위의 꽃병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주인님이 감기에 걸리신 건 나 때문이야.’

밑바닥의 밑바닥 생활을 해보고 다년간 용병단과 도적단을 이끌던 이실리테는 알고 있었다.

신경을 너무 많이 쓰고 피로와 스트레스를 받아도 감기 같은 것에 걸리기 쉬워진다는 걸 말이다.

실제로 무직자인 부하들이 잘 먹고 잘 자더라도 전투 전, 전투 후의 막대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아 몸 상태가 불량해지던 것을 종종 보았었다.

이실리테가 보기에는 주인님도 마찬가지였다.

비자룩스까지는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비자룩스를 나온 뒤부터는 시시때때로 생각에 골몰하는 모습이 보였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헬루멘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내가 선택한 더러운 과거 때문에…… 8급이나 되는 호족과 문제를 해결하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신 거겠지…….’

갑자기 추워진 날씨 문제도 있을 테고.

꽃병의 노랗고 빨간 꽃을 바라보는 이실리테의 망막에 꽃이 아닌 하나의 광경이 그려진다.

자기자신의 과거에 환인이 고생하는 모습이다.

=…….=

창문을 통해 들어오던 아침 햇살이 사라진다. 째깍거리는 괘종시계의 초침 소리. 창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오는 마차 소리와 말의 울음소리.

한참을 자리에 앉아있던 이실리테는 고개를 들어 환인의 방문을 쳐다보았다.

=…….=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이실리테는 판금­사슬 갑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무기는… 어떻게 하지? 비싼 거니까 그냥 기사검을 차고 갈까.

잠시 고민한 이실리테는 레드릭을 아공간 주머니에 챙겨 넣고 회색 후드 망토를 둘렀다.

그외 짐은 물론 철화 한 닢도 챙기지 않았다.

잠시 멈춰 서서 방바닥의 양탄자를 내려다본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과거는 누구의 손도 아닌 자기 손으로 잘라내야 하는 건데.’

주인님이 책임져주신다고 했지만, 그 상냥함에 기대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완벽할것 같은 주인님이지만 평범하게 아프거나 다칠 수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오늘 일로 깨달았다.

가뜩이나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많은 주인님이다. 적어도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

‘말없이 사라지면 다들 걱정할 거야.’

종이와 펜을 가져와 글을 적는다. 잠시 나갔다 올 테니 걱정 말라고, 식사는 룸서비스로 시켜먹으라고.

그 쪽지를 침대 위에 잘 보이는 곳에 올려놓고 방을 빠져나온 이실리테는 움찔 놀라고 말았다.

=어? 이슬이 너 그렇게 챙겨입고 어디 가는 거야?=

=으, 응? 아니 잠깐… 밖에 볼일이 있어서…….=

“볼일 보는 데 갑옷이 필요한 건가. 허리에 기사검이 안보이니 아공간 가방에 레드릭을 챙겼다는 뜻인데, 혼자 위르트 성을 찾아가려 한 것은 아니겠지.”

환인이 어깨에 숄을 걸친 채 피로가 묻어나는 얼굴로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고, 안느도 그의 곁에 붙어있었던 것.

자신을 보자마자 다 꿰뚫어본 환인의 날카로운 직관에 당황한 이실리테는 대답도 못하고 꾸물거렸다.

그 반응에 안느가 황당해하며 이실리테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묻는다.

=진짜야? 이슬이 너 혼자 거기 가려 했다고?=

=…….=

=어라? 무슨 일인 거니?=

조용히 혼자 나갈 셈이었는데…… 유르파까지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본 이실리테는 조용히 체념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응. 주인님 말씀이 맞아. 혼자 위르트 성에 가려고 했어.=

=왜? 너 바보야? 혼자 갔다간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데……!=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뜻밖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실리테 답다고 해야 할지. 두 가지 감정에 안느가 말문이 막혔을 때 이실리테가 시선을 내리깔고 말했다.

=나한테는 주인님 같은 지식과 지혜는 없어. 뭘 어떻게 해야 좋은지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최소한 해야 할 일은 알아.=

=…그게 위르트 가문을 찾아가서 네가 저지른 짓을 밝히는 거야?=

=내가 한 짓을 고백하고 영주에게 용서를 빌려고 했어.=

=야이, 바보야. 그런다고 호족이 ‘아이고 착하다’하면서 용서해줄 거라고 생각해?=

마실 것을 가지러 마스크를 끼고 나왔던 유르파는 눈을 끔뻑이다가 슬금슬금 환인에게 다가가 그의 옆에 찰싹 붙어 체온을 나누어주며 이실리테와 안느를 바라본다.

=아니.=

=그런데 왜!=

=위르트 가문의 가주는 최소한의 정의감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주인님이 말씀하셨으니까, 그래서 온정에 기대 죄를 갚을 기회를 달라고 해볼 생각이었어.=

이 순진하고 맹한 아가씨 같으니.

두통을 느낀 안느가 이마를 감싸 쥐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호족들이 그렇게 흐물흐물 넘어갈 리 없잖아. 도령도 그래서 머릴 써서 계획을 짠 거고. 최악에는 맥없이 사형당할 수도 있는 일인데…….=

=죽으러 갈 생각은 아니었어. 내가 죽을 장소는 주인님의 앞, 주인님을 지키다 죽는 거라고 결정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주인님의 영혼 기사니까 바로 사형시키리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안느는 와, 답답하기도 하고 어이없는 기분에 가만히 있는 환인을 돌아보았다.

=이제 보니까 이슬이는 나보다 더 막 나가는 성격이었어. 도령도 보지만 말고 뭐라고 해봐.=

“괜찮군.”

=…엥?=

벙쪄서 자신을 바라보는 안느와 유르파에게 환인은 초췌해진 얼굴로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말했다.

“이실리테의 생각은 나쁘지 않다. 듣고보니 오히려 내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군.”

잠깐 앓아누우면서 머릿속이 리셋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도 머리가 묵직해서 생각이 단순해진 걸까.

이실리테의 계획이 자신이 세운 계획 중 결점이나 피해가 가장 적은 것으로 느껴진다.

‘사람이 느끼는 감각은 컨디션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고 하지만.’

애초에 복잡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솔직하게 위르트 가문을 찾아가 이러한 일이 있었으니 선처를 바란다고 하면 끝날 일이었다.

왜냐. 자신은 상급 영혼사니까. 비자룩스에 벌어졌던 일이 헬루멘 전체에 퍼졌을 정도로 명성이 한때 한계까지 치솟은 상태니까.

‘이쪽은 재앙화한 혼재까지 정리한 상급 영혼사다. 2급 호족인 비자룩스의 영주가 공경의 태도를 보여줄 정도였으니 8급 호족도 어느 정도 예의는 차려야 할 상대.’

자신이 평범한 모험가나 여행자 일행이었다면, 혹은 상대가 합법과 비법 사이에 교묘히 줄타기한다거나 선민의식이 가득한 호족이었다면 최악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여러 안전장치와 대비책이 필요했겠지만.

위르트 가문의 가주는 그렇게 인성이 나쁜 인물은 아니었다.

거기다 어젯밤에 찾아온 루티아=아슬리드가 한 말.

‘이실리테의 건을 지목한 이야기였겠지.’

자리에서 일어난 환인이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갈 채비를 하지. 위르트 성으로 간다.”

=어, 어? 잠깐만. 도령 잠깐, 지금? 약속도 안 잡고 간다고?=

=자기? 자기는 지금 막 자리에서 일어난 참이잖니. 아직 몸 상태가 안 좋은데…….=

“이런 일은 시간을 끌어봤자 좋을 것 없다. 그리고 지금은 몸이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이쪽에게 책임이 있는 만큼 24시간을 기다려서라도 만나는 쪽이 낫다.

더욱이 몸이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전날 성불행을 행한 것, 그리고 오늘 바로 만남을 청한다는 것도 상대의 인성이 좋다면 플러스 요소가 되어줄 것이다.

무엇보다 다행인 점은, 영혼사의 신분이란 호족 저택의 문도 일단은 넘을 수 있게 해주는 프리패스 통행증이라는 것.

=…알았어.=

환인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걸 깨달은 안느와 유르파는 재빨리 자기 방으로 들어가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사이 이실리테는 환인의 말 없는 시선에 가시 방석에 앉은 기분을 느끼며 우물쭈물했다. 왠지 주인님이 화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실리테. 옷 입는 것을 도와주면 좋겠다.”

=네? 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몸에 억지로 힘을 줘 법사복을 챙겨입는다. 이실리테가 따뜻한 겨울 코트(이어크래드 상단의 선물)도 가져와 환인의 몸에 걸쳐주고 그 위에 회색 후드 망토를 입혀준다.

=저기, 주인님…….=

“할 말이 없군.”

=……네?=

“날 믿으라고 해놓고 이렇게 아픈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너도 불안했겠지.”

=아, 아니에요. 주인님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환인은 무어라 말하려는 이실리테를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갑옷이 딱딱해 느낌이 안 살지만, 마음은 전해졌는지 이실리테의 얼굴에 미안함과 고마움, 강해진 연모의 감정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네가 무엇 때문에 그런 선택을 내렸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심정도 이해한다.”

=…….=

“그래도 행동하기 전에 한 마디라도 먼저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좋겠다.”

=네, 주인님…….=

“가지.”

환인은 아직 몸에 남은 감기의 기운을 억누르며 방에서 준비하고 나온 안느와 유르파를 데리고 위르트 성으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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