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285화 (285/813)

〈 285화 〉 279 영웅의 도시 헬루멘

* * *

쪼로로록­

=호클라바 지방의 베탄 고지에서 처음 딴 어린잎을 덖어 우려낸 녹차입니다.=

=어머…… 제가 알던 것과 다르게 향이 매우 진하네요. 색도 선명하구요. 덖음 한 찻잎이라서 그런가요?=

=네. 크딥트산 기름으로 길들인 무쇠 팬에 찻잎을 볶으면 더욱 고소하고 깊은 맛을 냅니다. 주인님이 즐기시는 몇 안 되는 차 중 하나입니다.=

=으음~. 말씀대로 깊이 우러나는 맛이 매우 인상적이네요.=

파르히스트의 영애와 함께 객실로 돌아온 환인은 이실리테가 내려준 녹차를 마시며 부드럽게 미소 짓는 루티아=아슬리드=파르히스트를 응시했다.

둘째 딸이라면 요나=아슬리드보다 나이가 더 많을 텐데 오히려 그녀보다 어려 보이는 동안 외모.

머리카락은 여름 하늘의 구름처럼 몽실몽실하고 부드러워 보였고 살짝 처진 눈매와 그린 듯이 가느다란 눈썹,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귀하게 자랐다는 듯이 반듯하다.

갈색 포근한 폴라티에 가벼우면서도 폭신폭신해 보이는 분홍색 맨투맨과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스크래치 무늬 H스커트.

귀족적이라기 보단 놀러 나온 여자친구 코디 느낌인데도 잘 소화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저런 옷을 많이 입어봤다는 뜻이겠지.

이실리테를 상대로도 솔직하고 다감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면 성품도 좋아 보인다.

하지만 마냥 순진하고 착하기만 한 귀한 집 아가씨는 아니다. 영리하지만 영악하지 않고 순종적이지만 굴종하지 않는다.

=으응~! 과하지 않은 단맛의 팥 시루떡이 녹차의 진한 맛이랑 만나 사르르 녹아내리네요. 이 간식은 어디서 주문하신 건가요? 저도 애용하고 싶어졌어요!=

=주인님께서 즐기시는 후식이어서 제가 직접 만들었습니다.=

=앗…. 그럼 비매품인 거네요…….=

정말 아쉬워하며 얼마 남지 않은 한입 크기의 팥시루떡을 야금야금 먹는 루티아=아슬리드.

환인은 응접실에서 그녀와 통성명을 나누자마자 들은 말을 떠올렸다.

=아버님께서는 성자님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친밀한 관계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이곳 헬루멘에서 성자님을 만나게 된 것도 실은 아버님께서…….=

사담으로 이야기를 질질 끌며 간을 보는 것보다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에 들어가는 것을 선호하는 환인이지만, 루티아=아슬리드는 그런 수준을 넘어섰다.

매너에 예민한 사람이라면 불쾌하게 느낄법한 수준이다.

환인은 루티아=아슬리드가 마지막 남은 디저트를 입에 넣고 음미하느라 대화가 끊기는 타이밍에 자연스럽게 질문했다.

“루티아 아슬리드 파르히스트 영애. 영애께서 저를 찾으신 이유가 파르히스트 성주님의 뜻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저에게 발설하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제가 생각하는 파르히스트 성주시라면 그러한 의도가 드러나길 원치 않으실 것 같습니다만.”

=네에. 돌아간다면 아버님께 꾸지람을 들을 거라고 생각해요.=

방긋 웃으며 대답하는 모습에 환인은 속으로 역시라고 중얼거렸다. 타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발언을 하더라도 그것은 더 큰 호의로 만들기 위한 빌드업으로 활용하는 화법이다.

이후 나올 그녀의 대답을 예상하며 환인은 의례적으로 물었다.

“그러면 어째서?”

=그런 속내를 숨기고 성자님께 다가가면 성자님은 저를 불편해하시거나 싫어하실 것 같아서였답니다.=

“연유를 밝힌 시점에서 제가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진솔하게 다가가지 않으면 성자님께서는 절 밀어내실 것 같았는걸요.=

그러면서 두 손을 모아 귀엽게 꼬물거리며 환인을 힐끔힐끔 바라본다. 남자라면 누구나 중저음으로 '귀여워'라고 중얼거릴 만큼 순수한 모습이다.

=저는…… 요나의 영혼을 저 어두컴컴한 미궁에서 구해내고 하늘로 올려보내 준 성자님과 누구의 지시나 명령이 아닌, 순수하게 사람 대 사람으로서 성자님과 가까워지고 싶었어요.=

아버님의 명령이 아니라 제 뜻, 제 바람으로서 말이에요. 라며 환인의 눈치를 살피듯 덧붙이는 루티아=아슬리드에게서 가식이나 꾸밈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영리한 여자라고 환인은 생각했다.

그 말대로다. 뒤로 다른 뜻을 품고 다가오는 사람의 속내를 눈치 못 챌 환인이 아니었고, 만약 루티아=아슬리드가 끝내 속을 밝히지 않았다면 환인은 절대로 좁혀들지 않는 거리감으로 루티아=아슬리드를 상대했을 것이다.

저 똑똑하고 빠른 눈치로 상대가 어떤 성격인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할지 무의식중에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일 터.

예법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루티아=아슬리드가 드레스의 치맛단을 살짝 들고 공손히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올린다.

=늦었지만 동생을 가문 묘에 안장할 수 있었던 것, 동생이 신님의 정원으로 무사히 들어갈 수 있도록 성불의 자비를 베풀어주신 것에 형제자매들을 대신해 감사드려요.=

“인사와 답례라면 펜리 성주님께 넘칠 만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니 이 이상의 예식은 부담스럽습니다. 편히 있어주시면 좋겠군요.”

=네, 성자님.=

환인은 한 줌의 악의도, 나쁜 의도도 느껴지지 않는 루티아=아슬리드와 한담을 나누며 펜리 성주의 의중을 읽었다.

=사실 성자님을 뵙기 전까지 조금 긴장하고 있었답니다. 만약 무서운 분이시면 어떻게 해야 하나, 두려움도 있었어요. 그런데 직접 뵌 성자님은 뭐랄까 상상했던 거랑 많이 다르셨다고 할지…….=

“신기하게 생겼습니까?”

=앗. 그런 게 아니구요! 멋있으세요! 멋있으신데 이야기로는 플뢰 남성분이라는 이미지였거든요? 근데 직접 뵈니까 전혀 다르셔서요!=

“제가 이국적인 외모이긴 합니다.”

=헤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배시시 웃는 루티아=아슬리드의 두 눈에서는 호의와 호감이 뚝뚝 떨어진다.

그것을 보면 파르히스트 성주가 쓰려는 것은 단순하지만 그만큼 효과적이며 인류사와 함께해온 효율적인 계책.

‘미인계.’

딱히 놀랍지는 않다. 증표를 받을 때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을 꼽아보았고 그중 가능성이 높은 항목에 미인계도 있었으니까.

다만 성격과 외모와 지성, 지혜를 모두 보자면 호족 사이에서도 상당한 우량주가 아닐까 싶은 자식을 보낼 정도로 성주의 의중이 확고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조금 안일했을지도 모르겠군.’

환인은 루티아=아슬리드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이 미인계의 범주는 어디까지일까 생각해보았다.

미인계의 종류도 여러 가지다. 평범하게 정보 유출을 목적으로 한 스파이형 미인계부터 정략결혼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인맥을 만들고 대상을 사로잡는 반려형 미인계까지.

게다가 헬루멘 도착 당일 찾아온 것을 보면 이쪽의 일정과 이동 루트를 읽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값비싼 수정구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라면 전자라기보다 후자 쪽이 더 무게감이 있겠지.

=헬루멘에 와서 가장 놀란 것은 추위와 하늘에서 내리는 차갑고 하얀 솜이었어요. 어찌나 차가운지 손끝이 금방 빨갛게 변할 정도였답니다.=

“파르히스트는 1년 사시사철 온화하거나 더운 장소이니까요. 영애께서는 남부나 북부를 여행해보신 적이 많이 없으신가 봅니다.”

=네에. 부끄럽게도 성에서 책만 읽으며 보냈던지라 눈이라는 게 이 정도로 차갑고 겨울이 이렇게나 추울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환인 님은 춥지 않으셨어요? 그런 복장이면 많이 추우실거 같은데.=

“망토가 냉기 정도는 막아주어서 이정도 추위는 괜찮습니다.”

차를 다시 채우며 소소하게 담소를 나눈 지 10분 정도 되었을까. 온화한 얼굴이지만 기도가 느껴지는 5급의 인견족 호위 여기사가 인기척을 내며 조심스레 다가와 루티아=아슬리드의 귀에 속삭인다.

=아가씨. 시간이 늦었습니다.=

=벌써?=

루티아=아슬리드의 표정에 아쉬움과 약간의 난감함이 차올랐다.

원래 목적이 있었지만 시간문제로 달성하지 못한 모양새라는 걸 읽은 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작게 웃음 지었다.

“제가 예의 없이 루티아 아슬리드 양을 오래 붙잡고 있었군요.”

=앗, 아니에요. 제가 찾아뵙는 게 늦었기 때문인걸요.=

“그렇습니까? 그럼 그런 걸로 할까요.”

이러한 농담이 취향이었을까. 루티아=아슬리드가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며 웃는다.

후후 웃는 루티아=아슬리드에게 손을 내민 환인은 그녀의 손을 잡고 호텔 밖까지 에스코트해주며 자신의 예정을 알렸다.

=앗…… 그러면 금방 헬루멘을 떠나실 건가요?=

환인은 로비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소식지를 읽는 사람, 자신이 호텔을 들락거릴 때마다 같은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을 의식하며 대답한다.

“헬루멘은 잠시 둘러본바, 배회하는 영혼의 수도 적으며 영적으로 맑고 깨끗한 도시였습니다. 헬루멘의 영주님이 현명하며 서민을 위하는 훌륭한 군주시라는 증거이지요.”

=네에. 위르트 영주님도 시민을 생각하는 어질며 뛰어난 군주시니까요.=

동감한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루티아=아슬리드에게 환인은 일부러 해가 져 어둠이 드리워진 호텔 바깥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만한 영의 농도라면 굳이 영의 순례와 성불행을 진행할 이유는 없겠지요. 너무 맑고 깨끗한 물에서는 물고기도 살지 못하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이틀가량 머무르다 프라버를 향해 출발할 생각입니다.”

그러기위해 엽사 조합에서 마을과 촌락의 위치 정보도 모았다고 말하니 루티아=아슬리드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은 채 이야기를 경청하다가 살짝 수줍어하며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몸짓. 환인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자 루티아=아슬리드도 용기를 낸 모습으로 환인에게 반쯤 안기는 자세로 까치발로 서서 그의 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파르히스트와 아버님은 환인 님이 곤경에 처했을 때 도움을 드릴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준비하고 있답니다.=

“…….”

=저희와 증표를 잊지 마세요….=

그리고는 세 걸음 정도 물러나서 약간 붉어진 얼굴로 묻는다.

=으응……. 이런 부탁을 드리기에는 정말 창피하지만, 성자님과 한 끼 식사할 수 있다면 무척이나 기쁠 거예요. 가능…할까요?=

“파르히스트 성주님께 크고 작은 신세를 진 터라 영애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기가 어렵군요.”

환인이 작게 눈웃음을 지으며 루티아=아슬리드의 손등에 키스해주자 붉어진 얼굴로 약간 새초롬한 티를 내며 입술을 삐죽 밀었다.

=정말, 환인 님은 차분한 외모와 다르게 장난꾸러기시네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치맛단을 들며 인사한 루티아=아슬리드는 마지막까지 눈웃음을 남기며 호위기사와 함께 마차를 타고 떠나갔다.

그녀가 탄 마차가 코너를 돌아 사라지자마자 얼굴에서 표정을 지운 환인은 호텔 로비로 들어오며 여전히 소식지에 얼굴을 묻고 있는 남자를 짧게 응시했고, 그 순간 시선이 마주친 남자는 살짝 당황하면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감각 확장과 기척 감지가 주변 감시와 탐지에 참 유용하군.’

환인도 그런 그에게 작게 고개를 숙인 뒤 객실로 돌아왔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은 환인은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현란한 무늬의 천장을 잠시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군.’

권력 투쟁과 확보, 권력을 위한 지연과 혈연의 확장, 자신을 치장하기 위한 불필요하고 무의미하고 과장된 행동.

이것들은 일정 지성을 가진 생명체의 모든 공통점인 걸까.

아니, 모든 생명체라고 보기는 어렵겠지. 비슷한 지성과 신체 구조를 가진 생명체의 동질성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

한국에서 자기 보호를 위해 신물 나도록 해온 짓이 이곳, 니오네브레스에서도 비슷하게 펼쳐지고 있음을 자각했더니 조금씩 깨어나던 감정의 색채가 다시 죽는 기분이 드는 환인이었다.

아니, 단순히 피곤해서인가.

불현듯 밀려오는 권태감에 다시 한숨을 내쉰 환인은 주방에서 나오는 이실리테를 불렀다.

“이실리테, 이리로.”

=앗. 주인님, 일찍 오셨네요.=

“입구까지 배웅해주고 왔을 뿐이다.”

가까이 다가온 여자친구를 향해 두 팔을 벌리자 뺨을 살짝 붉힌 이실리테가 품에 안겨든다.

과장보태 두 손으로 감쌀 수 있을 만큼 가느다란 허리에 팔을 감고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간지러운듯 움츠러드는 몸짓에서 따스한 체온이 서서히 전해져오며 이름 모를 꽃향기를 닮은 체취가 그의 머릿속을 이완시켜준다.

기실 현재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환인의 성향과 맞지 않는 일이 대다수였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복작복작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보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조용히 홀로 살아가는 삶을 선호했으니까.

하지만 평생 생기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이해자가 세 명이나 생겼고, 하지 않으면 안될 목표가 생겼다.

목표를 위해 과정을 헤쳐 나아가는 중이지만, 확실히 인간들의 틈바구니에서 지내는 건 피곤하다.

“…….”

삼림형 6급 미궁에서 탈출할 때가 생각나는 건 어째서일까.

전투기처럼 거대한 갈매기, 회색곰만큼 커다란 이족보행 토끼, 기린만큼 커다란 6족 사슴과 코끼리만큼 거대한 흰색 푸른 불꽃 호랑이, 작은 산만큼이나 큰 거북이.

말 그대로 신비라고 해야할 생명체들과 그렇지 못한 적대적 생명체가 가득해 언제나 전투가 벌어지는 위험한 장소.

오히려 그때가 속 편하고 재미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환인이다.

품 안에서 마찬가지로 자신의 체취를 맡는 이실리테를 조금 더 강하게 끌어안는다.

환인의 품에 반쯤 기대는 식으로 안겨있던 이실리테는 어쩐지 주인님이 피곤해하시는 것 같아 꾸물꾸물, 대면좌위 비슷하게 무릎 꿇고 앉아 환인의 얼굴을 가슴으로 품었다.

‘주인님은 가슴을 좋아하시니까 이러면 조금은 피로가 풀릴 거야.’

커다란 가슴골에 얼굴을 묻은 환인은 흡사 전문 마사지사에게 안면 마사지를 받는 것처럼 정신적 피로가 풀려나가는 기분에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재미없다 해도 하는 수밖에 없다. 지구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종족 연합과 교섭할만한 인지도, 명성, 힘이 필요하니까. 여자친구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만약 자신이 영혼사와 강령사가 아닌 평범한 전사나 투사, 술사 같은 직업을 얻었다면 상황은 달랐겠지만, 가정은 무의미하다.

얼굴로 이실리테의 풍만한 가슴을 만끽한 환인은 두 손을 내려 그녀의 100점 만점인 엉덩이를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안느와 유르파가 늦는군. 우리보다 먼저 돌아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면 바로 식사할 수 있도록 준비할까요?=

“아니. 둘이 오면 룸서비스를 시키지. 너도 쉴 때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새로운 요리를 맛보는 것도 요리 실력 향상에 도움 될 거라는 이야기에 이실리테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환인의 머리를 가슴에 꼬옥 품는다.

안느와 유르파가 돌아온 것은 그때였다.

벌컥.

=우리 왔어!=

=늦어서 미안~.=

객실 문을 세게 열고 들어오는 그녀들의 양손에는 짐이 가득했다.

“괜찮다. 쇼핑하느라 늦은 건가.”

=아냐아냐. 쇼핑이 아니라 이어크래드 상단에 갔더니 글쎄, 비자룩스 근처에서 만난 위샤 행수가 이어크래드 상단의 부상단주였던거 있지?=

=그 사람이 플레인스워커로 굉장한 이득을 취했다면서 이것저것 선물을 안겨주지 뭐니. 그것들도 받고 상단 물품 중에서 필요한 건 마진율 0%로 제공해준다길래 여행에 필요한 거 사오느라 늦었어.=

환인이 놓아주었기에 그의 품에서 나온 이실리테는 유르파에게 다가가 그녀가 한가득 안아 들고 있는 짐을 받아들면서 물었다.

=뭘 이렇게 많이 사신 거예요?=

=마도기 제작에 필요한 소재야. 평범하게 잘 쓰는 거였고 도시의 대형 상단답게 품질도 좋아서 그냥 다 사버렸어. 자기, 이번에 44금화를 썼는데…….=

“업무와 관련된 지출이니 괜찮습니다.”

=응, 여기!=

기다렸다는듯이 내미는 쪽지에는 보석 가루 제작용 보석 원석이 대량으로 포함되어있었고 희귀 금속괴와 금속판, 1~2급 위상석이 다량 적혀있었다.

부피는 주먹만 한 보석 원석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무게는 금속판과 금속괴, 값어치는 위상석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쪽지에 적힌 품목을 읽던 환인은 문득 있어야할 할 것이 없다는 걸 눈치채고 이전에도 없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유르파. 제작에 필요한 도구의 보충은 없습니까? 수백 개의 마도구를 만들었다면 소모된 도구가 상당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내가 쓰는 도구는 내가 만들어 쓰니까 따로 비용 지출은 없어~.=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자금 주머니에서 금화 50닢을 꺼내 유르파에게 주었다.

파티 자금의 1/6을 한 번에 써버렸지만, 44금화를 썼다 해도 알아서 시간을 들여 몇 배의 금화로 되돌려줄 유르파다.

이전는 19금화분의 재료비로 82금화를 벌어들인 그녀였으니.

=응~? 자기, 6금화가 더 많은데?=

“운용비입니다. 재료비 외에 써야 할 곳이 있을 때 쓰십시오. 미리 챙겨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으응~?! 아냐아냐. 에헤헤헤, 고마워~.=

헤헤 웃으면서 옆으로 다가와 팔짱을 끼는 유르파.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그렇지않아도 하얀 얼굴이 이제는 이목구비가 흐려질 정도로 희게 변해버린다.

환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춰주고 선물상자 안에 뭐가 들었는지 살펴보는 이실리테, 안느에게 다가갔다.

=오, 이슬아. 이거 루핀 후르츠 아냐?=

=…진짜네. 한 알에 1은화가 넘을 텐데 한 바구니씩이나……. 이거 말고도 비싼 식품이 많아. 프란딘의 최고급 홍차도 100g이나 있고 이건… 히스론드의 쌀? 이것도 kg당 은화 한 장씩 하는 거잖아.=

=우와, 이슬아 이거 봐. 이거 전부 드레스야. 치수는 나랑 너랑 율이 언니 꺼도 있고…… 오, 속옷도 있다. 이 부츠랑 구두는 흡혈마 소재로 만든 건가?=

=안느, 포장도 다 고급인데 이걸 전부 다 선물로 받았다는 거야?=

=응. 나랑 언니도 향응이 될까 봐 거절하려고 했는데 주도에서 플레인스워커의 목에 현상금을 10금화나 걸었대.=

그외에도 플레인스워커 무리에게 데였던 고족 가문과 호족 가문이 대신 원수를 갚아주었다며 사례와 답례를 보낸 게 적지 않았다고.

그걸 동등한 가치의 물건으로 바꾸고 주도의 현상금도 모두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위샤 씨는 플레인스워커의 사체를 판매하고 그 명성의 일부를 얻은 것만으로 만족이라고 하면서 제발 가져가 달라고, 자신들이 먹으면 오히려 크게 탈이 날거라고 애원했어. 안 그래도 이것들 전부 택배 조합에 맡겨서 우리한테 전달하려고 의뢰하려 했다더라.=

환인은 사정을 대강 눈치챘다.

플레인스워커, 우두머리 흡혈마와 그 무리를 잡은 것은 자신들이다. 현상금과 보상금, 후원금 등을 꿀꺽했다간 성자님 일행이 해낸 업적을 한낱 상단이 빼돌리려 했다는 식으로 알려질 수 있는 노릇.

그리되면 말 그대로 횡액이다.

환인은 유르파에게 금화 10개가 담긴 주머니를 받으며 물었다.

“이어크래드 상단주에게 고마움을 담은 편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하고, 나갔던 일은 어떻게 됐지.”

=어, 그거. 이러쿵저러쿵해서 위르트 가문이랑 땅신 교단이 정면으로 충돌할만한 사건이 아닌 이상 추기경의 이름을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어. 이어크래드 상단은 이슬이 이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라 그냥 말 안꺼냈구.=

“상단 쪽은 잘했다. 하지만 교단에서 그런 혜택을 베풀 거라곤 짐작 못 했는데…… 혹시 안느 네 지인이라는 그 추기경인가?”

=응. 르아웬이라고 해.=

“그쪽에도 답례의 편지를 보내야겠군.”

그동안 여행하면서 이 세상의 대략적인 대륙의 세력 구도를 알게 된 환인이다.

땅신 교단 본단의 5대 추기경 중 1인의 영향력은 지구의 바티칸 시국 교황에 맞먹는다. 그 이름을 쓸 수 있다는 건…….

‘이게 인맥인가.’

위력적인 패인 만큼 함부로 쓸 수는 없겠지만, 이걸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귀찮음이 상당 부분 감소하는 느낌이다.

환인은 잘했다며 안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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