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4화 〉 278 영웅의 도시 헬루멘
* * *
날이 어둑어둑해지는 가운데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하는 시간.
환인은 이실리테와 함께 호텔로 돌아가며 영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다 우연히 접한 헬루멘의 상황을 떠올렸다.
‘헬루멘은 역사적으로도 파벌에게 도시 관리를 위임해 다스려온 도시다.’
도시의 최상위 계층이자 지배자는 당연히 위르트 가문이다. 헬루멘의 전체 무력 중 70%가 영주 가문 내에서 나오니 말 다한 셈.
그러나 도시의 운영과 관리는 위르트 가문이 하지 않는다.
영주가 가문의 장로들과 회의를 통해 정책을 수립하면 그 아래 정부의 역할을 하는 기관이 도시를 관리하고 운영하는 식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그 기관을 선출하는 방식이다.
영주의 세대교체 시기가 다가오면 영주의 지시 아래 몇 개의 파벌을 키우고, 파벌끼리 능력 경쟁을 부추긴 뒤 승리한 한 곳이 그 기관의 역할을 하며 전대 기관의 업무와 영향력을 계승한다고.
“…….”
환인의 가정은 점차 불쾌한 쪽으로 가지를 뻗어 나가고 있었다.
지금은 영주 교체 시기가 대충 5~10년 뒤로 다가와 한창 새내기 파벌이 형성되는 시기다.
비상을 타고 하늘을 날고 있을 때 목격한 여자는 어쩌면 헬루멘의 영주가 아닐까. 그 여자가 후대와 함께할 파벌을 키울 토양의 비료로 자신과 이실리테의 일을 던져주는 것은 아닐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럴리 없다.’
그러나 자신의 상식은 이 세상의 상식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다.
만약 이 가정대로 상황이 흘러간다면 자신은 헬루멘의 영주를…….
“음….”
=주인님?=
“아무것도 아니다.”
뭔가 시킬 일이라도 있는가해서 바라보는 이실리테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준 환인은 너무 부정적으로 뻗어 가는 생각의 가지를 쳐냈다.
어쩐지 어제부터 몸이 조금 무겁고 나른해서인가. 사고가 마이너스 쪽으로 치중되는 느낌이다.
환인은 연인처럼 옆에 바짝 붙은 이실리테의 체온을 느끼며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생각했다.
남의 의도에 휘둘리는 것은 선호하지 않지만 잘못은 어디까지나 이쪽에 있다. 영주가 조금 억지를 부린다 해도 이성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제안을 내민다면 수용하고 받아들여야겠지.
하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얄짤 없다. 칼자루를 저쪽이 쥐고 있다지만 이쪽도 칼날이 붙은 강철 건틀릿을 끼고 있다.
자신은 성자로 불리기 시작한 상급 영혼사, 영도가 자신을 초대해 가는 길이라는 것도 패가 될 것이며 파르히스트 성주의 증표도 힘이 되어줄 것이다.
일행중에는 땅신 교단 본단의 성투사이자 다섯 추기경 중 1인이 친구인 연인이자 동료도 있으니개념없이 선을 넘으면 환인도 가진 패를 모두 동원해 헬루멘을 들이받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호텔 헬루멘에 돌아왔을 땐 날이 완전히 저문 시간이었다.
=돌아오셨습니까, 성자님.=
마도구 조명으로 인해 대낮처럼 환한 호텔에 들어서자 로비에 나와 있던 지배인이 서두르는 걸음으로 다가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예. 저를 기다리신듯한데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돌아오시자마자 이런 말씀을 드리기 송구스럽습니다만, 성자님을 기다린 분이 계십니다.=
“…….”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아니고 기다린 분이라는 표현인가.
호텔 지배인의 무척이나 송구하다는 표정과 방금 발언을 생각해보자면 신분이 높은 사람의 방문이라는 거겠지.
설마 성에서 나온 사람일까. 도시에 도착한 당일 사람을 보내오는 몰상식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이외에는 자신을 찾아올 사람이 없기에 누굴까 궁금해하며 지배인에게 안내를 부탁했고, 호텔에 마련된 우아한 다과실에 도착해 마주한 사람은 뜻밖에도…….
=라드세아 남부에서 위명을 떨치고 계신 녹색 성자님께, 파르히스트의 루티아 아슬리드가 인사드려요.=
동그랗고 하얀 곰 귀에 우아함과 사랑스러움이 공존하는 뛰어난 미모의 인물.
파르히스트 성주의 차녀였다.
* * * *
=하아아~.=
쿠라를 타고 땅신 교단으로 향하던 유르파는 안느의 커다란 탄식에 그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슬이 아가씨 걱정이 많이 되니?=
=응……. 이슬이도 이슬이지만 도령도 걱정이야. 도령은 자신한테 맡기라고 했지만 언니도 알다시피 호족들 중에 괴팍한 사람이 많잖아. 아무리 위르트가 영웅의 가문이라고 해도…… 아니아니, 영웅의 가문이라서 더 걱정이지.=
위르트 가문이 호족 특유의 자존감으로 급발진해서 이슬이를 상처입히면 도령도 웃는 얼굴로 회까닥 돌아버릴 가능성이 크다.
도령도 여러 가지 의미로 평범을 능가하는 인물이다.그도 그럴게, 알드헬름을 조진 것도 그렇고 조지는 데 사용한 방식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 못하는 일이 아닌가.
그런 상황이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안느는 자신의 머리로 상상할 수 없었다.
빈약한 상상력으로 추리해보자면…….
‘도령은 영혼을 다뤄서 혼재로 만들 수 있어. 그리고 자신을 건드리는 건 용서하지 않아. 그건 소유물에도 해당하는 말일 테니까.’
매우 화나면 헬루멘에 혼재를 떨어트릴지도 모른다. 순수한 영혼사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지만 도령은 영혼사와 강령사의 능력을 함께 갖추고 있잖아.
재앙화된 혼재가 헬루멘 같은 밀집형 대도시에서 벌어지면 끝이다.
파르히스트는 그나마 널찍널찍한데 헬루멘은 빽빽하기 그지없다. 이 거리만 보아도 8차선 도로 좌우에 백수십 명은 거주할 것 같은 밀집 주거형 건물이 도로 좌우를 빼곡히 채우고 있다.
인도를 걷고 있는 사람도 다들 멋쟁이 양복, 드레스 차림에 도로를 오가는 마차도 고급에 승용물도 쿠에의 비중이 다른 도시보다 높다.
구역 한 블럭을 넘어가면 2~3층 건물이나 단층 주택도 나오지만, 중심가일수록 1층은 상점, 2~4층은 거주구인 주상복합이 대다수. 도시 넓이는 파르히스트의 2/3 정도인데 비해 인구수는 비슷하다고 들었다.
이런 도심 한복판에 재앙화한 혼재가 발생하면?
‘끝장이지 뭐.’
그 상황만큼은 막아야 한다.
안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간파한 유르파는 조금 고민했다. 자신이 숨기고 있는 비장의 한 수를 공개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숨길 것인지.
‘숨기는 것보다는 밝히는 게 여러모로 플러스겠지?’
자신이 본 안느 아가씨는 행동이 때때로 가볍고 촐랑거리긴 하지만, 진지해야 할 때는 한없이 진지하고 동료와 환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강하다.
자신의 비밀을 알려준다 해도 그걸로 나쁜 생각을 할 리는 없다.
고개를 끄덕인 유르파는 도로 표지판을 보고 대로를 빠져나와 땅신 교단으로 향하는 2차선 도로로 들어서며 말했다.
=이건 아직 자기한테도 말 안 한 건데, 난 비상사태에 50km 정도 공간 도약을 할 수 있어. 아니, 자기라면 이미 짐작하고 있으려나?=
마도기에 전이술을 접목한 휴대용 전송 마도기 제작이 자신의 꿈이라는 것을 환인에게 이야기한 걸 떠올리고 있으니 안느가 깜짝 놀란다.
크게 소리칠뻔했다가 주위를 생각해 내곤 쿠핀을 움직여 쿠라의 옆으로 바짝 붙어 속삭였다.
=정말? 아니 50km라면 엄청난 거잖아!=
=당연히 막 쓸 수 있는 건 아냐. 쓸 때마다 수명을 1년 정도 깎아 먹고 5번 정도 쓰면 며칠은 자리에서 못 일어나니까. 안 가본 곳, 거기에 기억에서 오래된 곳도 못 가고.=
대신 사용방법은 복잡하지 않다. 30초? 그 정도 시간만 있다면 연속 5번은 쓸 수 있다.
=어, 어어. 그만한 공간 도약이니까 그정도 페널티는 당연하겠네.=
=만약 위르트 가문이 자기한테 해코지한다 싶으면 자기랑 아가씨들하고 비상이만 데리고 도망칠 거야.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1명만 탈출시킬 수 있다면 아가씨들은 포기하고 자길 도망치게 할거구.=
=그건 당연한 거지. 할 수 있다면 나나 이슬이도 그럴 거니까. 어후, 제일 걱정거리가 해소되니 속이 시원하네. 언니가 와줘서 진짜 다행이야.=
유르파는 푸훗,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안느의 반응이 자신의 짐작과 다를 바 없었던 거다.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사태가 최악이 되더라도 어떻게 그 자리를 모면하기만 하면 자기가 분노의 화신이 되어서 나중에 헬루멘에 재앙을 떨어트릴 테니까~.=
=으음. 가장 좋은 건 그런 일이 안 일어나는 거잖아. 그리되면 도령이 아무리 성자님이시라도 문제가 될 테니까…….=
=정 그러면 교단에 슬쩍 운이라도 띄워보는 게 어떻겠니?=
=응? 도령은 영도에 관련된 것만 의뢰하라고…… 아.=
뒤에서 수작 부리는걸 싫어할 거라고 했었지. 그럼 앞에서 대놓고 움직이는 건 나쁘지 않다는 이야기 아닌가?
표정이 묘하게 변한 안느는 땅신 교단 헬루멘 지부에 도착하자마자 절차를 밟아 땅신 교단 본단의 다섯 추기경 중 한 명, 자신의 동기이자 절친인 르아웬=아기오시스에게 영상 통신을 시도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개인 단말 수정구를 사용해도 되지만, 저번 사용으로 위상력 잔량이 간당간당하다. 이건 진짜 급할 때 써야 한다.
그렇게 영상이 연결되자마자 직사각형의 수정 패널에 옅은 은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동자의 미녀가 모습을 드러냈고, 미녀는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야이 미친 근돼뚱보년아! 너 이거 5년 만의 연락인 거 알아 몰라?!]
=…하루종일 책상 앞에 앉아서 서류 보니까 눈에 노화가 오기라도 한 거야? 내가 아직 근육 돼지로 보여?=
[시끄러워! 5년 만에 통화 걸어놓고 다짜고짜 하는 말이 뭐? 영도 상황을 조사해달라고? 저번에도 나한테 연락하지 않고 지 할 말만 툭 던지더니! 사람이라면 적어도 잘 지냈느냐고 인사를 먼저 하는 게 도리 아니냐아!]
=아~ 친애하는 내 친구 르아, 잘 지냈어? 난 우리 도령이랑 물고 빨고 할거 다하면서 즐겁게 지내느라 무척 잘지냈어~.=
[…나쁜년.]
유르파는 대형 패널을 통해 땅신 교단의 젊은 추기경과 허물없이 대화하는 안느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니, 아무리 같은 기수 출신이라지만 저게 가능한 일인가?
100세 미만의 젊은 나이에 추기경이 되었다는 것은 출신의 가문도 대단하다는 이야기다. 신분제가 라수비탄보다 명확한 플뢰 사회 구조상 저런 추기경과 친하게 지낸다는 뜻은 안느도…….
=아 그래서 우리 도령이랑 사이좋게 지내기 싫어?!=
50년지기 악우??처럼 아웅다웅하다가 바락 고함지르는 안느를 다시 놀란 눈으로 바라본 유르파는, 이어서 똑같이 고성으로 맞받아치는 은발녹안의 추기경을 돌아보았다.
[누가 싫다고 했냐! 최연소 성자님에 다음대 영성이 될 가능성이 큰 분이랑 친밀한 관계가 되는건 본단으로서도 대환영이거든!]
=근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냐!=
[너한테 서운해서 그런다 이년아! 씨잉. 난 네가 어디 객사하지 않을까 걱정해서 일주일에 한 번은 네 생각하고 네 뒤를 봐줬는데 친구란 년은 5년 동안 제대로 연락 한통 안 하고…….]
수정구 화질상 미모에 흠이 생긴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가씨들과 비슷한 수준의 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이자 안느가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삐죽 내민다.
유르파는 귀를 쫑긋했다가 묘한 얼굴로 안느를 쳐다보았다. 방금 선즙필승 어쩌고 했던 거 같은데?
[진짜 나한테 할 말 없냐. 이 나쁜년아아.]
=으휴, 미안해. 그땐 나도 진짜 이거저거 다 내려놨던 시기라서 성투사의 의무 빼곤 아무 데도 연락 안하고 연락도 안 받고 다녔어. 그러다가 도령 만난 뒤부터 정신 차린 거고. 너 싫어서 연락 안 한 거 아니니까 화 풀어.=
[훌쩍.]
=기회 되면 도령 소개해줄게. 이쪽도 지금 마냥 좋은 상황이 아니라서 좀 바쁘니까 나중에, 나아아중에.=
[……이실리테라는 동료 때문이지?]
=뭐, 그렇지.=
따로 긴 설명도 필요없이 이쪽 사정을 파악해버리는 추기경의 사고력에 유르파는 역시,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정도는 되어야 교단 최상위 서열이 될 수 있는 거겠지.
[영도에 관한 건 이쪽에서 알아볼게. 어지간히 큰 일 아니면 내 이름 끌어다 써도 되니까 네가 알아서 판단해. 대신 사후보고는 꼭 해라?]
=고마워.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쪽지 덜렁 보내지 말고 영통 걸라는 뜻이니까, 이번에도 대충 말 남기고 잠적하면 나 진짜 가만히 안 있을 거니까!]
=그래~ 사랑해, 내 친구.=
[칫……. 나 바빠. 끊어.]
그렇게 다소 과격하게 시작된 통신은 싱겁게 끝났고, 유르파는 멋쩍게 웃으며 =애가 오랜만에 봤더니 히스테리 끼가 생겼네.=라고 둘러대는 안느에게 그녀의 과거에 대해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과거가 어떠했든 지금은 한 남자를 사랑하는 친구이자 동료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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