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281화 (281/813)

〈 281화 〉 275 헬루멘으로 가는 길

* * *

비상을 타고 마차의 앞에서 타박타박 걸어가는 환인에게 가도를 오가는 여러 파티와 무리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러나 환인은 머릿속으로 헬루멘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의 가정의 가정의 가정을 하며 비자룩스에서부터 만든 시나리오를 전량 검토 및 수정하느라 그 시선에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차에서 지켜보는 환인의 여자들이 부담감을 느끼는 지경.

3명은 충분히 앉을 만큼 넓은 마부석, 나란히 앉아있던 환인의 여자들은 혹시 모를 일을 경계하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안느. 오가는 사람들을 보니까 미궁 탐사자들이 많은 거 같은데, 뭐 아는 거 있어?=

이실리테의 질문에 ‘응?’ 하는 표정을 지었던 안느가 팔짱을 끼고 턱을 괸 채 잠깐 생각에 빠져들었다가 입을 열었다.

=근처에 정령의 동굴이 있어. 그 때문일 거야.=

=정령의 동굴은 뭐니? 미궁? 안에서 정령이 이형종으로 나와?=

=푸흨. 정령이 그렇게 출몰했다간 자연계 전체가 무너지는 대사건이 되는걸? 정령의 동굴이라고 하는 이유는 미궁에 정령의 기운이 강해서 땅을 파다 보면 정령석이 출토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야. 원래는 폭군룡의 둥지였던가 그래.=

=웜 타이런트? 그, 그거 7급 초대형 이형종이잖니?=

=그야 7급 미궁이니까. 아무튼 용종 컨셉의 지하 동굴형 미궁인데 정령석이 드물지만 이형종의 몸 안에서도 튀어나오고 땅에 그냥 떨어져 있기도 하니까 그걸 노리고 가는 걸 거야.=

=하긴, 정령석은 고가에 거래되니 인기가 많을 만도 하…… 어! 저, 저 새끼 뭐니!!?=

말하다 말고 튀어나오는 유르파의 상소리에 흠칫 놀란 여자들이 시선을 앞으로 돌렸을 때, 4급에 달하는 아우라의 벌거숭이 두더지 쥐인간이 환인을 덮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엽사 계통 직업자. 습격과 암습에 최적화되어있는 인간인지 환인의 여자친구 세 명 중 누구도 그가 환인에게 다가서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실리테와 안느가 무기를 뽑아드는 동시에 마부석을 박차고 뛰어오른다. 유르파도 주머니에서 공간 진동 폭탄 구슬을 꺼낸 순간이었다.

빠박­!!

은은한 회색빛의 패널이 섬전같이 쥐인간의 턱을 치고 지나가며 머리가 홱 꺾였고 이어서 비상의 날갯죽지가 헤비급 복서의 스트레이트 펀치처럼 쥐인간의 옆구리를 때렸다.

=캑!!=

턱을 맞은 것도 뇌진탕에 정확히 빠트리는 일격이었지만, 옆구리에 가해진 타격은 그쪽의 갈비뼈를 모조리 으스러트리는 일격이었다.

단말마를 토해내며 튕겨 날아간 쥐 인간은 뇌진탕에 걸려 사고력이 떨어진 머리로 생각했다.

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분명 회색 후드 망토를 쓴 무직자 놈을 덮치는 중이었는데……?

벌거숭이 두더지 쥐인간, 발람은 무직자 주제에 부르는 게 값이라는 성체 녹색 쿠에를 타고 있는 것을 보고 감탄과 부러움과 시기와 질투를 동시에 느꼈다.

처음에는 요란하게 하늘을 날던 녹색 쿠에의 모습에 작은 감탄만 느꼈었다.

녹색 바람을 휘감고 창공을 날아다니는 녹색 쿠에. 높이 떠있어도 선명한 녹색 바람이 몸을 감고 있는 게 보였고 독수리처럼 활짝 펼친 녹색 날개는 크고 튼튼해서 조인족이 보면 한눈에 반할 정도였다.

그런 몸으로 허공을 아름답게 유영하는 모습은 흡사 한 마리의 하늘 물고기 같은 자태.

만약 거기까지였거나, 일행으로 보이는 마차의 마부석에 앉아있는 6급과 4급 직업자가 녹색 쿠에의 등에 타고 있었다면 발람도 그냥 지나쳤을 거다.

하지만 땅에 착지한 녹색 쿠에의 등에는 웬 볼품없는 무직자가 타고 있었다. 거기다 겁도 없이 일행에서 떨어져 털레털레 걷고 있었다.

마치 자신에게서 녹색 쿠에를 뺏어가라는 것처럼 말이다.

일행 같은, 무려 세 마리의 쿠에를 맨 마차의 고급스러움과 그 마차에 앉아 있는 고위 직업자가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녹색 쿠에를 탈취해서 날아 도망치면 제까짓 것들이 어찌할 거야. 어느 산속 깊은 데서 몇 년 살다가 나와 암시장에 몰래 팔아치우면 그것만으로도 금화 수십 장.’

정식으로 판매하면 수백 닢이 붙을 테지만 암시장에서 제 가격을 받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수십 닢의 금화는 받을 수 있을 테고 그것은 일확천금이라 해도 될 정도의 거금이다.

‘그만한 돈이면 장비를 새로 갖추고 저 먼 북부나 벨티칼로 넘어가서 새 삶을 살아도 돼.’

마차에 문장이 없으니 호족은 아닐 테고, 제대로 통일된 호위도 없고 플뢰에 루크랑에 정체 모를 소수 종족을 섞어 데리고 다니는 거라면 어디 고위 신분도 아닐 테지.

어쩌다 운 좋게 중등급 미궁을 돌파해서 큰돈을 번 놈들이 아닐까.

발람은 머릿속으로 계획을 꾸몄다.

일단 녹색 쿠에의 등에 탄 놈은 무직자니까 힘도 없을 테고, 걷어차면서 몇 군데 뼈를 부러트려 놓으면 저 셋 중 하나는 무직자 놈을 챙기러 헐레벌떡 뛰어갈 거다.

술사가 술법을 쏘겠지만 강력한 공격 마법은 쓰지 못할 거다. 녹색 쿠에가 다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정신계나 상태 이상 쪽 마법을 쏠 텐데…….

‘나한테는 위상력 저항 토템이 있어.’

자신의 품 안에는 미궁에서 얻은 중상급 저항의 토템이 있다. 어지간한 정신 공격 대여섯 번은 막아준다.

발람은 마지막으로 고민했다.

이렇개 대낮의 대로에서 강탈하기보단 저 사람들을 뒤쫓아가서 밤에 쿠에를 훔치는 게 더 안전하고 쉬울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정령의 동굴 정령석 농사 파티에 가입했다. 지금 빠져나간다면 되려 의심과 함께 계약 파기 배상이 든다.

게다가 밤이 되면 자신 같은 놈들이 저 녹색 쿠에를 노리고 모여들지 모르는 일. 어쩌면 돈 많은 고족이나 호족이 접근해서 사갈지도 모르지.

그리되면 녹색 쿠에를 손에 넣을 기회가 날아가는 것과 다름없다.

발람은 결심하고 행동에 옮겼다.

잘만 하면 팔자를 필 수 있다는 유혹과 저 비싼 녹색 쿠에를 타고 다니는 무직자에 대한 시기와 질투,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같은 초조함,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데서 벌어진 충동이었다.

은신에 한층 가까워진 은밀 기술을 펼치고 인기척을 가려주는 마도기인 오래된 망토를 뒤집어쓴다. 그리고 숨을 멈추고 발걸음 소리를 죽여 움직인다.

=어? 눈나, 그 사람 어디 갔음요?=

=…조금 전까지 옆에서 걷고 있었는데.=

=아 거 생긴 거부터 예의 없더니 하는 짓도 소갈머리가 없어. 야, 다들 그 새끼 찾아봐.=

정령의 동굴에 같이 들어가기로 한 임시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최대한 기척을 감추며 녹색 쿠에를 향해 다가간다. 그리고 최적의 습격 거리에 도달한 발람은 자신의 무기인 날카로운 흑요석 단검을 역수로 쥐고 소리 없이 뛰어올랐다.

‘그랬는데…….’

쿠우엣!!

발람은 좀처럼 듣기 힘든 쿠에의 화난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는 것을 느끼며 쿨럭, 고통을 토해내고는 힘겹게 눈을 떴다. 입가를 닦아보니 피가 묻어난다.

‘뭐야. 나, 얻어맞은 거야?’

조금 돌아온 정신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은 발람은 옆구리에서 올라오는 극통을 애써 외면하고 빌빌거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녹색 쿠에가 자못 앙칼진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발람의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 차버렸다. 사람이라면 다 좋아하고 순하기로는 모든 동물을 통틀어 한 손에 꼽는 쿠에가 저렇게 적개심을 뿜고 있다니?

쿠르르르­

게다가 새끼가 위험에 처했을 때에만 낸다는 위협음을 자신에게 내고 있다고?

팍, 팍. 돌진하기 직전의 투우처럼 뒷발질로 땅을 파헤치는 것이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부리로 쪼고 발길질을 날릴 태도.

한발 늦게 옆구리의 고통이 쿠에의 날갯죽지에 얻어맞았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거기서 또 혼란에 빠졌다.

쿠에가 평범한 늑대는 어렵지 않게 걷어차 죽일 정도로 강하긴 하지만 자신은 갑옷까지 입은 직업자다.

이런 자신에게 이렇게나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건가? 녹색 쿠에라서 신체 능력도 더 뛰어난 거였나?

그 순간 발람은 눈앞을 가득 채우는 회백색의 동그란 구체를 발견했고, 생각은 거기서 끊어졌다.

퍼버버버벅­!!

=크어에게게그킄극!=

생각을 방해받아살짝 짜증난 환인이 방벽 패널을 조작해 보고 있기 괴로운 수준의 벌거숭이 두더지 쥐인간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던 것.

사람이 가장 큰 고통을 느끼는 곳 위주로 패널 볼이무자비하게 파고든다.

한 방 한 방에 살의를 담아 뼈가 부러지지 않을 정도의 충격만 주도록 컨트롤하며 공격을 퍼붓는 환인.

듣는 사람의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파육음에 가도를 걷던 사람들이 흠칫흠칫 떨며 물러난다.

=끄어어…….=

1분 가량의 짧은 구타에 살아도 산 게 아닌 것 같은 몰골로 변한 쥐인간을 무심히 바라본 환인은 가까이 다가온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말했다.

“저 사람들이 이자와 동료인 거 같으니 이리로 데려와라.”

쥐인간과 함께 걷던 인간들을 가리키자 살기를 풀풀 풍기고 있던 이실리테와 안느가 서슬 퍼런 눈동자로 뻣뻣하게 서 있는 다섯 명의 남녀에게 향한다.

이실리테는 다섯 명을 한차례 훑어보고 그중 기세와 자세가 가장 훌륭한 인랑족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 쥐 인간의 동료가 맞습니까.=

=어, 아니. 저기, 저희는…….=

=방금 공격받으신 분은 영혼 순례의 길을 걷는 순례자이십니다. 주인님께서는 괜한 소란을 원치 않으니 조용히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좆됐다……!’

파티의 리더인 회색 늑대 귀의 여자, 레이빈은 이실리테의 이야기를 듣곤 현기증에 눈을 질끈 감았다.

녹색 쿠에를 타고 있는 영혼사.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저 회색 후드 망토를 쓰고 녹색 쿠에를 타고 있는 사람은 지금 남부에서 가장 유명한, 무시무시한 속도로 위명이 퍼지고 있는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다.

혼재가 빙의된 빙의체를 1:1로 박살 내서 정화한 성자.

200명의 영혼을 앉은 자리에서 성불시킨 영혼길의 구도자.

휘광이 없는 상급 영혼사.

소문을 들었을 땐 영혼 기사가 빙의체를 처분한 게 와전됐을 거라며 동료들과 떠들었는데, 4급 엽사를 단숨에 찍어누른 저 실력을 보면 아무래도 소문이 진짜였던 것 같다.

=누, 눈나. 우리 어떡함? 지, 진짜 녹색 성자님이야.=

=아잇, 씻팔! 그러니까 행정관에서 정식 함정사를 구인하자고 했잖아! 돈 몇 푼 아끼겠다고 거지 같은 쥐새끼를 받아들여서는……!=

=저, 저기요. 영혼 기사님? 저새끼는 우연히 만나서 잠깐 영입한 함정사거든요? 쌩판 남이라서 우리도 아무것도 몰라요!=

=진짜에요! 저흰 여비를 벌기 위해서 정령의 동굴에서 정령석 농사를 짓는 펴, 평범하고 선량한 모험가들이에요! 범법 이력도 없어요!=

쿵!

결백을 주장하며 두서없이 떠드는 남녀의 모습에 안느는 길이 2m의 초대형 워해머, 천벌의 망치를 땅에 찍으며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들. 우리 초보같이 굴지 말자고. 이러면 책임 요소가 누구에게 있는지, 모험가라면 잘 알 거 아냐.=

=…….=

=…….=

=우리 도령은 무서운 사람이지만 놀랄 만큼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니까, 정말 죄가 없다면 일단 따라와. 따라와서 자초지종을 설명해. 뭐 저항하겠다면 그래도 돼. 그쪽이 나도 편하니까.=

안느가 천벌의 망치 자루를 꽈드득, 소리나게 움켜쥐며 눈에서 시퍼런 위상력을 흘리자 모험가 지망생들의 입에서 기겁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닙니다! 저항이라뇨!?=

=저, 저항 같은 거 안 할 거에요!!=

아우라의 농도는 척 봐도 6급의 숙련자에 벌려진 후드망토 사이로 보이는 판금 갑옷은 “나 고급이오.”하듯이 번쩍거린다.

거기다 뒤에서 지팡이를 쥐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6급 비술사까지.

살벌한 기세에 눌린 3~4급의 직업자들은 속으로 미친 쥐새끼를 향해 씨발씨발거리며 안느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레이빈은 그들보다 더욱 죽을 맛이었다.

진짜 걸려도 된통 걸렸다. 저런 놈인 줄 몰랐다곤 하나 임시로 파티에 맞이한 건 사실이고 저 쥐새끼가 녹색 쿠에의 탈취를 노린 것도 사실이다.

파티 전체에 페널티가 떨어지겠지만, 리더인 자신에게는 더한 페널티와 벌금이 부과되겠지. 그것도 짜증 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파티로 받아들인 놈이 영혼사님한테 개 짓거리를 했다는 거다.

‘씨발, 영혼사님한테 나쁜 짓 하면 죽어서도 평온을 얻지 못한다던데…….’

레이빈은 두들겨 맞아 찐빵처럼 변해버린 벌거숭이 두더지 쥐인간을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일단 환인의 앞에서 무릎부터 꿇었다.

리더의 행동에 뒤따르던 일행도 얼른 넙죽 엎드린다.

=죄송합니다!! 저런 새끼인 줄 몰랐다곤 해도 잘 알아보지 않고 파티로 받아들인 제 잘못입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한 번만 용서해주십쇼!!=

=죄송합니닷!!=

환인은 회색 늑대귀의 인랑족 여성의 뒤통수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환인입니다. 미흡하나마 성불행을 이어나가고 있는 혼의 순례자이지요.”

머리까지 땅에 박은 레이빈은 위에서 내려오는 남자 목소리가 생각보다 평온해서 일말의 기대감을 품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노, 녹색 성자로 이름난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 저는 레이빈 파티의 레이빈입니다.=

“예, 레이빈 씨. 제가 본 바로 이 남자는 레이빈 씨와 같은 일행이었습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하, 하지만 제 이야기를 부디 들어주십시오.=

레이빈은 무릎을 꿇은 채로 녹색 쿠에의 등에 올라타 있는 환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발람과 함께 움직이게 된 경위, 기존의 파티 함정사가 개인적인 이유로 한 달가량 쉬게 되었고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함정사를 주점에서 임시로 구했으며, 그게 저 쥐새끼라는 내용이다.

=저놈은 헬루멘에서도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함정사여서 저도 믿고 일회성으로 임시 파티원으로 받아들인 거였습니다! 제가 지금 드린 이야기에 거짓은 하나도 없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믿어주십시오!!=

=믿어주세요! 영혼사님을 어떻게 할 생각은 진짜 호브 눈곱만큼도 없었어요……!=

환인은 리더라는 레이빈과 그 동료들이 복창하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손바닥을 펼쳐 평온의 파동을 발사했다.

마치 짙은 안개처럼 회백색 빛의 파문이 주변 백여 미터 휩쓸고 지나가니 지금의 소란에 걸음을 멈추고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사람들에게서 경악성과 감탄이 무수하게 터져 나왔다.

반대로 레이빈 일행은 진심으로 엇됐다는 생각에 얼굴이 거무죽죽해졌다.

가볍게 손짓만 했을 뿐인데 평범한 영혼사님들의 평온의 파동보다 몇 배는 짙고 화사한 파문이 퍼져 나갔다.

평온의 파동을 쏘기 위해서는 두 손을 맞잡고 기도하는 자세가 반쯤 강요된다. 그 자세의 제약에서 벗어난 영혼사는 명실상부한 상위의 실력자.

평온의 파동이 주는 마음의 평온 사이로 이런 영혼사님과 마찰을 빚게 됐다는 불안과 공포가 솟아오르니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미치고 싶은데 미칠 수가 없는 기분. 속으로 쉴 새 없이 좆됐다고 중얼거리던 레이빈 일행은 다시 시작된 영혼사의 목소리에 황급히 귀를 기울였다.

“저도 수행을 위해 미궁을 들르는 처지에서 레이빈 씨의 억울함은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법도를 어길 수는 없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일말의 희망이 사라졌다.

레이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쥐새끼의 목만큼은 따버리겠다고 짐승신에게 맹세하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가, 이어진 환인의 이야기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다만 정황상 여러분은 이자의 행동에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으신 게 확실한듯하니…….”

제발, 제발……!

“…이자를 헬루멘의 경비대에 넘기고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의 경위를 증언하는 데 힘을 보태주시면 저도 여러분의 억울함을 경비대분들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네!!! 넵!!! 물론입니다!! 영혼사님께서 저 더러운 놈에게 손대실 일 없게 저희가 모두 처리하겠습니다!! 야!!=

레이빈은 즉시 동료를 불러 쥐새끼의 소지품과 장비를 모두 벗기고 속옷만 입힌 채 밧줄로 포박했다. 물론 주먹질과 발길질이 쉴 새 없이 쏟아진 것은 당연한 일.

=야! 이 새끼 죽겠다. 포션 먹여! 뿌려!=

=우르얀!=

=어어!=

=크어억……!=

=크억은 지랄이! 뒤져, 씨발색꺄!=

퍽퍽뻑콱!

=크엑! 퀡! 꺼욱!=

두 눈 뜨고 살아서 저승의 문턱에 한 발 걸치는 진귀한 경험에 분노한 레이빈 일행의 폭력은 그 후로도 몇 분간 이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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