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화 〉 274 헬루멘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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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뒤 말끔한 모습으로 마차에서 나온 환인은 유르파에게 마차 안의 정리를 부탁했다.
“공기 정화 기능만 켜면 됩니다. 위상력이 다 떨어졌는지 공기 정화 장치가 작동하질 않아서.”
=으, 응!=
설마 이슬이 아가씨, 기절한 건가? 대체 얼마나 격렬하게 했길래 그 이슬이 아가씨가 기절까지 했을까?
유르파는 빨개진 얼굴로 허둥거리다 환인의 손을 잡고 지붕의 썬루프를 통해 마차 안으로 들어갔고, 환인은 뚱한 얼굴의 안느 옆자리로 옮기며 물었다.
“표정이 안 좋은데 문제라도 있나.”
=나랑 율이 언니 거기에 홍수가 났다는 점만 빼면 문제없어.=
“그런가. 미안하군.”
후 웃으며 하는 사과에 안느도 뚱한 얼굴을 치우고 픽 웃었다.
=아까 도령 엄청나게 멋있더라. 네가 사랑하게 된 남자는 그렇게 무능하지 않다. 걱정하지 말고 날 믿어라.=
목소리 톤을 낮춰 환인의 성대모사를 한 안느가 히히 웃다가 진지한 얼굴로 묻는다.
=근데 정말 괜찮아? 헬루멘의 위르트 가문은 8급의 호족이야. 가문을 추종하는 무사도 많고 무인은 더 많아. 당대 위르트 가문의 가주가 만약 이실리테한테 나쁜 감정을 품으면 앞으로 여행이 곤란해질 거야.=
“괜찮다는 판단을 내린 데는 마땅한 이유가 있다.”
=뭔데?=
“파르히스트 토너먼트에 출전했을 때의 분위기다. 이실리테가 그 이름을 썼는데도 관중은 열광했지.”
=확실히……. 그때 관중과 사람들의 반응은 우호 일색이었어. 4급인데도 붉은 대검이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였으니까.=
“만약 이실리테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토너먼트 때 발생했을 거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이실리테에게 다가가 사인을 부탁했을 정도였고 그녀가 쓰던 레드릭은 피규어 사이즈로 축소되어 인기리에 팔려나가는 수준이었다.
이실리테라는 이름 자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면 그런 반응이 나오지 않았을 거다.
스사도 그 이름으로 도적질하는 것을 지적했었지 이름을 쓴다는 것만으로는 무어라 하지 않았었고.
“이름을 쓰는 것 자체로는 문제 될게 없다는 이야기지. 문제가 되는 점은 그 이름으로 도적질을 한 것인데…….”
그때 마차 지붕의 썬루프가 열리며 시무룩한 얼굴의 유르파가 나왔다.
=언니는 왜 죽상이야?=
=아니…… 안이 깨끗하게 정리되어있어서…….=
주변에 흐른 정기라도 흡수해보려 했는데 격렬한 정사 소리에 비해 마차 바닥에 흐른 흔적은 극히 미미했다. 대부분 이실리테의 몸에 집중되어있었던 것.
=허기졌을 때 진수성찬의 냄새만 맡은 기분이야.=
유르파의 실망에 소리없이 짧게 웃은 환인이 계속 말했다.
“도적질을 했다는 점에서 잘못은 이쪽에 있지만, 그점은 교섭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이쪽도 호족의 배경이 있으니까.”
시무룩해져있던 유르파는 오가는 이야기가 진지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마차 쪽 지붕 가장자리로 붙어 진지한 얼굴로 귀를 기울인다.
“위르트 가문이 이실리테라는 이름에 집착하고 있다면 그녀의 과거 정도는 이미 추적했을 거다. 아니, 도적으로 활동할 때도 병력을 보내 그녀를 토벌하려 들었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북부에서 어느 호족과 마찰을 빚어 중부로 이동했을 때도 말이다.”
=막 죽이려고 날뛸 만큼 화난 상태는 아니니까 대화는 통할 거라고 보는 거네.=
“그래. 여기에 파르히스트 성주의 증표가 있는 만큼 대화의 장을 열수 있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이 세계에서 호족의 등급 = 서열(무력)이란 공식은 없다.
아니 전혀 없지는 않지만, 적어도 고등급의 호족 사이에는 등급으로 말미암은 서열상의 격차는 없는 편이다.
일례로 8급 호족인 위르트 가문은 중급 도시를 다스리고 있고 7급 호족인 파르히스트 가문은 성도를 다스린다.
소도시 웨이포드의 알드진=베레=웨이포드는 역사가 긴 가문이지만 4급이며, 소도시 크라버리의 가문은 5급이지만 성도 파르히스트를 상대로 기 싸움과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걸 보면 호족의 등급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뜻이고, 파르히스트 성주의 증표를 가지고 있는 이상 위르트 가문은 급발진하지는 못할 거다.
“마지막으로 이실리테는 너희들처럼 나의 연인이라는 점이다. 현재 나는 상급 영혼사로 알려지고 있지만, 처음 비자룩스 성에 초대받았을 때 영주가 한 발언을 생각해보면 내가 영성에 가깝다는 착각도 함께 퍼지고 있을 거라고 본다.”
그런 영혼사의 연인이자 과거를 회개하고 뉘우쳐 영혼사의 호위로 영혼 기사의 길을 걷는 자.
“위르트 가문의 수장이 이성적이라면 결코 이쪽과 얼굴 붉히고 싸우려 들진 않을 거다.”
=그래도 위르트 가문이 이름을 더럽혔다고 이실리테를 처벌하려 하면 어떻게 해……?=
트집같은게 아니라 진짜 걱정된다는 안느의 표정에 환인은 팔짱을 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악마가 또 펑펑 쏟아지기 시작한다.
“영혼 기사의 잘못은 영혼사의 책임이다. 영혼 기사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영혼사에게 묻는다는 말과 같아. 8급 호족인 위르트 가문의 가주가, 헬루멘의 영주가 그런 악수를 선택할까 싶지만 세상은 이성으로만 돌아가지 않는 법이지. 그래서 안느와 유르파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
=우리한테 부탁?=
안느와 유르파가 서로를 쳐다보는 행동에 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자룩스에서 알아본 바로는 이어크래드 상단, 우리에게 플레인스워커의 사체를 구매해간 곳이 헬루멘에서 1, 2위를 다투는 상단이라더군. 유르파는 팔만한 물건을 가지고 헬루멘에 도착하면 이어크래드 상단을 방문해주십시오. 거기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은근슬쩍 꺼내면 됩니다.”
흡혈마 무리의 부산물은 잘 팔았느냐. 우리 이실리테 아가씨가 영혼사님을 지키려 힘을 조금 과하게 쓴 면이 적지 않아 손상이 심했을 텐데 걱정이다. 내가 나름 능력있는 부여 술사인데 만약 문제가 있다면 도와줄 수 있다.
환인의 예시에 유르파가 눈을 반짝 떴다.
=그렇게 이슬이 아가씨의 행적이랑 바뀐 성품을 은근슬쩍 어필하면서 파르히스트 토너먼트 준우승자라는 것도 알리면 좋겠네!=
“예. 안느 너는 기존의 예정대로 헬루멘의 땅신 교단을 방문해 현재 영도의 상황과 이쪽의 일을 알리면서 이실리테가 조금 걱정된다고 운만 띄우면 된다. 그쪽이 현명하다면 그것만으로 상황을 눈치챌 테고, 아니라면 솔직히 이야기해주면 충분하다.”
=전에는 도적이었지만 도령을 만나면서 손을 씻고 영혼 기사로서 새사람이 되었다는 거 말이지?=
“그래. 교단이 상급 영혼사와 연줄을 보다 단단히 만들 생각이라면 알아서 나서 줄 거다.”
사실 가장 간단한 해결방법은 그녀들이 무심결에 꺼낸 이야기대로 헬루멘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다.
논어에도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위험한 곳에는 가지 말고 어지러운 곳에는 살지 말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지금까지 내려온 길의 방향성이 노골적이며 영도로 가는 길이 하나 뿐이라는 게 문제다.
헬루멘은 라드세아 남부의 요충지.
동쪽으로는 주도 라수비탄이 나오고 서쪽으로는 비자룩스와 중부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북쪽에는 프라버와 알류겔 대호수가 있으며 남부의 안스트하고도 이어진 곳이라 어지간해서는 들르지 않을 수 없는 장소에 있다.
비자룩스에서 주도 라수비탄을 향해 가는 거라면 평원 남쪽의 안스트에서 대수림을 지나는 방법도 있지만, 비자룩스에서 프라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헬루멘에 들러야 한다.
만약 헬루멘에 들르지 않고 평원 북쪽을 가로지른다면 행적에 부자연스러움이 더해지고, 차후 문제가 불거질 시에는 위르트 가문이 백 퍼센트 그 행동을 꼬집을 것이다.
어째서 캐스테드까지 지나온 마당에 헬루멘을 방문하지 않고 길도 없는 초원을 가로질러 프라버로 향했느냐고.
일정을 단축시키기 위한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길이 없는 황야와 벌판, 구릉지를 넘는 것보다 길을 따라 달리는 게 더 빠르니까. 게다가 마차까지 있으니…….
안느가 조금 불편해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이슬이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 때문에 힘들고 성가신 일을 겪는다고 또 소심쭈구리 되겠네.=
=그런 생각 안 하도록 잘 다독여줘야지~.=
“이러든 저러든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다. 예방 주사를 맞는 셈 쳐야지.”
=주사라니 뭘 놓는다는 거야? 예방이라고 하는 걸 보면 나쁜 건 아닌 거 같은데.=
=맞아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이야기랑 비슷한 거 아니니?=
=그런가……? 아무튼, 도령 이거.=
안느는 손에 쥔 고삐를 환인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속옷 좀 갈아입고 올게. 도령이랑 이슬이랑 그렇고 그러는 소리를 1시간동안 들었더니 밑에 홍수가…… 으익, 바지까지 젖었잖아!=
“…….”
환인은 엉거주춤 일어나는 안느의 바지 국부 쪽 진한 얼룩을 목격했지만, 예의상 못 본 척 해주었다.
은근슬쩍 환인이 자신도 덮쳐주길 바랐던 안느는 내심 서운함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다음날, 환인 일행은 점심이 다되어가는 시간에 야트막한 언덕을 오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시야를 가득 가리는 헬루멘의 황갈색 성벽과 그 너머로 보이는 하얀 도시였다.
지금도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하얀 악마들 탓에 온통 하얗게 물든 벌판과 논밭 그리고 도시.
꽁꽁 언 강이 구불구불 흐르며 도시를 가로지르고 집보다 더 많은 나무 탓에 가려진 틈새로 점만큼이나 작은 사람들이 오가는 게 보였다.
도시는 신기하게도 집보다 나무가 더 많았다. 성벽 높이의 4층짜리 아파트식 건물이 빼곡하지만, 그보다 앙상한 가지의 활엽수와 뾰족뾰족한 침엽수가 더 많아 건물이 잘 안 보이는 신기한 도시였던 것.
환인은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도시의 중심부에 선 회색 거성巨?에 시선을 주었다.
사람이 점보다 작게 보이는데도 그 형태가 뚜렷이 보일 만큼 거대한 성. 도시 어디에 있더라도 보일 것 같은 웅장한 성의 자태에 안느가 감탄한다.
=파르히스트 성도 크고 화려했는데 헬루멘의 성은 그거보다 더 크네.=
=저렇게 큰 성이면 보통 영민을 쥐어짜는 이미지가 있을 텐데 신기하게 그런 게 안 느껴져.=
=그러니까. 저 성을 짓는 데만 엄청난 인력과 돈이 들었을 거 같은데…… 왜지?=
“성이 도시의 크기에 비례 되는 수준이어서 그렇겠지.”
가구수 200 미만인 지역의 읍사무소가 도청만 하다면 위화감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오를 것이다. ‘무슨 돈낭비를 저렇게 하느냐’며 말이다.
그러나 인구수 100만의 도시에 도청 건물이라면 지극히 당연하게 느껴지겠지.
헬루멘의 회색 거성은 그런 느낌이었다. 있을만한 장소에 존재하는 당연한 건축물.
이랴, 이실리테가 고삐를 흔들자 쿠르티가 쿠에~ 울고 그 신호에 쿠핀과 쿠라도 마차를 다시 끌기 시작했다.
얕은 언덕을 내려와 평지에 들어서자 성벽이 높아져 내부가 점차 보이지 않게 되었고, 환인의 여자들이 속닥였다.
=다시 말해서 도시가 성을 돋보이게 해주는 역할이라는 거지? 삼각형처럼 가장 꼭대기에 회색 거성이 있는 거.=
=애초에 헬루멘의 시작이 위르트 가문이었잖아. 도시가 가문을 꾸며주는 사회 구조가 당연한걸 지도 몰라.=
=여행 중에 들었는데 일부러 성도로 승급신청을 안 하고 있대. 어째서일까?=
=음~. 의무가 생겨서 그러는게 아닐까? 도시급은 매년 몇 개의 미궁을 의무적으로 부셔야 하는 걸로 알고 있거든.=
=그런걸려나?=
=그렇지. 그런데 역사가 오래된 도시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성도급도 아닌 중급 도시가 저렇게 화려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환인은 마부석에서 그 대화를 듣다가 휘파람을 불어 하늘을 날아 쫓아오는 비상을 불러들였다.
쿠엣
휘파람에 맑은 울음소리로 대답한 비상이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하강, 하얀 눈이 두껍게 쌓인 논밭을 저공비행으로 스쳐 쏜살같이 날아온다.
그 날개짓과 스쳐 지나가며 일어나는 돌풍에 두텁게 쌓인 논밭의 눈발이 허공으로 치솟아오르며 비상의 꽁지 끝을 쫓는다.
그렇게 비상이 마차를 스쳐 지나가자 대마법사가 블리자드를 외운 것처럼 눈의 폭풍이 환인이 타고 있는 마차와 일행을 덮쳤다.
휘오오오오!
=아앗…!=
=으꺅! 에퉤퉷!=
=어푸, 아푸!=
이 상황에 멀찍이 거리를 두고 따라오거나 앞서 가거나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여행자 무리와 상단 행렬, 짐수레를 끄는 파티 등이 흠칫 놀라는 게 환인의 기감에 걸려들었다.
캐스테드 마을과 헬루멘 사이를 잇는 가도??는 중간에 두 갈래로 길이 나누어진다.
나뉘어지는 쪽으로 내려가면 평원 남부의 도시, 안스트가 나오는데 대다수의 사람은 안스트를 향하거나 안스트에서 오는 사람들로 보였다.
그런 그들의 놀란 반응을 보면 이쪽이 영혼사 일행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기보단, 녹색 쿠에가 갑자기 나타나서 놀란 눈치다.
‘안스트까지 소문이 퍼지지 않은 건가, 아니면 소문이 자세히 알려지지 않은 건가.’
=야아아~! 비상이 너어! 언니가 가만 안둬~!=
쿠에엣~
안느의 고성에 비상이 약 올리듯 울며 다시 논밭으로 하강해 꼬리에 눈의 폭풍을 담아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비상의 녹색 눈망울에 장난기가 맺혀 반짝반짝 빛난다.
=앗, 아아.=
=저거 또 온다! 야잇, 비상이 너 진짜……!=
푸화아악
또다시 눈발에 덮쳐진 여자들이 꺅꺅거리며 짜증 내다가 한 명이 사라진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 도령 어디 갔어?=
=자기야?=
당황한 여자들이 하얀 눈을 뒤집어쓴 모습으로 두리번거린다. 설마 날아오는 비상이랑 부딪쳐서 날아간 건가?
그런 걱정도 잠시, 이실리테가 =비상의 등에 계시네요.= 하는 말에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챈 안느가 기막혀하며 중얼거렸다.
=우와, 패널을 밟고 스쳐 지나가는 비상의 등에 올라탄 거야? 그게 가능해?=
=주인님이라면 가능한 곡예일지도…….=
=미쳤어.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완벽하게 올라타야 할 텐데…….=
여자친구들의 예상대로 환인은 비상이 스쳐지나가는 찰나의 순간, 비상의 비행 궤적을 읽고 여섯 장의 패널을 겹쳐 발판으로 삼아 뛰어오르며 비상의 등에 올라탔었다.
비상은 ‘내 친구라면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지.’하며 태연하게 환인을 등에 태운 채 광풍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고, 환인도 자신의 행위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하늘에서 헬루멘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흠.”
고고고고
비상이 고도를 유지하려고 바람을 마구 끌어모아 일으키는 탓에 커다란 바람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든다.
불어닥치는 바람 탓에 냉기가 몸을 침투하고 있지만, 환인은 하급 강령을 펼쳐 체온을 올리는 한편 자홍색, 황색, 갈색, 녹색, 노란색 등등 갖가지 색으로 물든 도시의 건물을 구경하며 알록달록한 도시 구조를 눈에 담는다.
헬루멘은 추정 인구 70만가량의 중급 도시로 알려졌다. 그렇다 보니 도시의 넓이가 한국의 어지간한 작은 도시 절반 수준이었는데 그럼에도 건물의 높이는 성벽의 높이를 넘지 않았다.
인구밀도가 어마어마할텐데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 걸까.
환인의 눈길이 도시를 다시 훑는다.
몇몇 성당의 첨탑, 종탑, 시계탑 등이 뾰족하게 솟아있지만 그뿐이다. 건물의 고도 제한을 까다롭게 건 느낌이 있다.
대신 중세 유럽의 건축 문화를 화려하게 발달시킨 것처럼 지붕이 화려했고 건물도 단순 민무늬 벽이 아니라 갖은 건축 세공이 들어갔으며 지붕 모양도 아치형, 기와형, 모스크형, 첨탑형으로 가득가득한데다 건물에는 심심찮게 유리공예로 가공된 창문이 붙어 화려함을 뿜어낸다.
그럼에도 도시가 답답하다는 느낌이 안 드는 것은, 건물 높이만 한 침엽수와 활엽수가 건물 숫자만큼, 부피만큼 존재하는데다 지붕도 녹색 계통이 다수였기에 그럴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평면적인 도시 광경 속에 홀로 우뚝 솟은 성이 분위기를 쥐어 잡으니 환인은 도시 전체가 회색 거성을 돋보이게 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를테면 성은 심장, 도시는 혈관이다.
도시 자체가 거성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외성벽 내성벽으로 나뉘는 헬루멘을 유심히 응시하던 환인은 저 도시에서 위르트 가문의 지배력이 어느 정도인지 깨달았다.
도시 전체를 발판처럼 삼은 성이라니, 위르트 가문의 영향력과 지배력은 자신이 예상했던 수준을 아득히 웃돌 것이다.
평화로워보이는 도시, 겉보기에 평화로워 보일지라도 수십만 인구를 그렇게 꾸민다는 것 자체가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거니까.
‘위르트 가문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건 시기상조일지도 모르겠군.’
애초에 헬루멘에서 장기 체류할 생각이 없던 환인이었지만 그 마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만약 위르트 가문이 사나흘 동안 접근해오지 않고 지켜본다면 환인은 망설임 없이 헬루멘을 떠날 것이다.
도착한 다음날 바로 떠나는 것은 일부러 피하는 느낌이 든다. 훗날 꼬투리를 잡힐 가능성이 있으니 2~3일이라면 일정에 촉박한 것처럼 떠나는 걸로 적당히 보이겠지.
“……?”
도시를 다 살펴보았기에 이제 그만 내려가려던 환인은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평범한 시선이 아니다. 마치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가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느낌.
환인은 가까운 데서 그 시선의 주인을 찾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살펴보는 거리가 멀어질수록 점점 표정이 굳어졌고 회색 거성의 가장 높은 첨탑 세모꼴의 깃발이 펄럭이는 그 아래 난간에 서 있는 여자와 우연히 눈이 마주친 순간 환인은 미간에 힘을 잔뜩 주었다.
눈이 정말 마주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환인은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다.
여기서 저기까지 거리는 20여 킬로미터에 달한다. 직업 각성 후 시력이 크게 향상되어 간신히 사람이라는 것만 알아본 거지, 아니었다면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을 거리. 그럼에도 환인은 여자라는 것과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비상, 내려가자.”
쿠우!
왠지 손쓸 겨를 없이 위르트 영주와 부딪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환인의 머리 속을 뒤덮는다.
지상으로 내려가는 비상의 등에서 환인은 갖은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돌리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