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화 〉 268 광산 마을 비자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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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을 끝내고 여자친구들도 출발 준비를 마친 그날 저녁, 프론트에서 손님이 찾아왔다는 연락에 내려간 이실리테가 임세희와 함께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오빠.”
“어서 오십시오.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신지.”
“이 시간에 찾아뵙는 게 무례한 일이라는 건 알지만, 내일 떠나신다는 소식을 들어서요. 그전에 이걸 전해드리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그러면서 생긋 웃는 임세희는 처음 찾아왔을 때에 비하면 표정도 부드러웠고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촉박함도 사라져 아픈 사람 같던 분위기가 굉장히 호전되어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평범하게 겪을 수 없는 모진 일을 경험해서일까. 스무살 남짓한 대학생이라고 보기 어려운 묘한 느낌이 든다. 남자의 보호 욕구를 자극한다고 할까.
그런 임세희는 조금 부끄러워하면서 손바닥만 한 상자를 내밀었는데, 안에는 1~3급 위상석 여러 개와 금화, 보석 등 어림잡아 5금화에 이르는 재화가 담겨있었다.
“이것은?”
“환인 오빠가 다녀가신 뒤에 많은 게 바뀌었어요. 제일 큰 변화는 에사르트 님이 앞으로 비자룩스 가문 차원으로 절 후원해주시겠다고 한 거예요.”
알드헬름이 만들었다고 알려진 것들 전부가 자신의 작품인걸 알게 된 에사르트가 정식으로 그녀의 활동을 지원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이건 이제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오빠가 여행하는 데 도움이 되셨으면 해서.”
=이것들은 어디서 난 거야? 성에서 하녀 생활을 하면서 모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닌데, 혹시 나쁜 짓으로 모은 건…… 아니지?=
남색 3급 위상석을 집어들고 살펴보던 안느가 조심스럽게 묻자 임세희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대답했다.
“그게, 알…드헬름이 이것저것 시킬 때 아껴서 몇 푼씩 뺀 거나 연구자금 남은 걸 다 쓴 것처럼 해서 숨긴 거예요. 알드헬름의 방을 청소할 때 가구 밑에 들어가 있는 것들을 발견하고 몰래 챙긴 것도 있구요.”
심하게 폭행당한 뒤 대충 입막음 비용으로 받은 것도 있고 적선하듯 던져준 돈도 모두 모아놓은 거란 이야기에 환인의 여자들이 불편하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유르파가 임세희의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며 물었다.
=모으다가 걸리면 치도곤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인데……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모은 거니?=
“아, 알드헬…름이 없는 곳으로, 도망가려고…… 한푼 두푼 모은 거예요. 다, 당연히 다른 데서는 손댄 거 없어요! 이제 알, 알드, 헬름도 없으니까 오빠가 좋은 일을 하, 하는 데 쓰면 좋을 거 같아서…….”
알드헬름을 떠올리며 트라우마가 도지는지 불안에 젖어가는 임세희의 모습에 유르파가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조심스레 쓰다듬어준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라며 속삭여주자 떨림과 불안한 표정이 조금씩 잦아드는 모습이다.
환인은 그런 임세희를 바라보다가 상자를 챙기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고맙게 받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파티 자금에서 금화 다섯 닢을 꺼내 임세희의 손에 올려준다.
“당신의 지식 활용에 감탄한 우리 일행이 당신에게 투자하는 겁니다. 사용처는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생활비로 써도 무방하고 지식 함양을 위한 서적 구입에 모두 사용해도 상관없습니다.”
“오, 오빠…….”
이런 현물은 임세희가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로도 문제가 될 수 있는 것들이다. 안느의 말대로 성에서 하녀 일을 몇 달 했다고 모을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으니까.
이를테면 장물인 셈이다.
임세희가 그걸 인지하고 장물을 처분하기 위해 준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로서는 거짓 없는 고마움의 표현인 거겠지.
환인은 그래서 5금화를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이러면 5금화나 되는 돈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도 문제 되지 않을 것이고, 그녀와 자신이 동향 출신이라는 건 에사르트도 알고 있으니 투자 겸 용돈을 주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임세희도 환인이 5금화를 고스란히 돌려준 데서 사정을 눈치채곤 눈물을 글썽이며 고마움에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에는 별다른 게 없었다.
그저 호의에는 선의로 베풀라는 부모님의 교육, 그리고 여자친구들이 임세희를 불쌍히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에게 약간의 친절을 베풀어놓으면 손해 볼 일이 없다고 계산한 것.
예상대로 여자친구들의 얼굴에서 불편함과 안쓰러움이 사라지고 미소가 떠오르는 걸 보며 환인도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아침.
비자룩스에 도착하던 날 내린 눈도 다 녹았고 얼어붙어 있던 날씨도 풀려서 포근해진 날씨 속에 법사복을 챙겨입던 환인은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들어오라고 입을 열었다.
달칵.
=…주, 주인님…….=
더듬거리는 말소리에 뒤를 돌아본 환인은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문 입구에는 하얀 얼굴이 복숭아처럼 물든 이실리테가 검은색 바탕에 하늘색 레이스가 붙은 브래지어와 마찬가지로 검은 바탕에 빨간 라인의 레이스 팬티 차림으로 서서 수줍어하고 있었던 것.
평소 밋밋한 느낌의 속옷만 입던 이실리테가, 그것도 이런 시간에 저런 노골적인 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에 환인은 의아한 마음에 그녀를 응시하기만 했다.
아니, 흉악한 미드와 한 줌도 안될 것 같은 가느다란 허리가 조금 야한 속옷과 만나 이뤄내는 색기 탓에 눈을 뗄 수 없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특히 포니테일이 잘 어울린다는 칭찬을 받고 줄곧 말총머리를 고집하던 이실리테였는데 지금은 살짝 웨이브를 준 긴 생머리 스타일이라 평소와 갭이 너무 크다.
약간 활달함을 가미한 청순한 처녀라는 느낌이 어디 귀한 집의 잘 교육받은 순진한 처녀라는 느낌으로 변해버린 것.
=으으…….=
환인의 뜨거운 시선이 피부에 닿는 걸 느끼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이실리테는 옆에서 작게 들려온 윽박질 =얼굴 계속 가리면 이번 거 무효야!=에 어쩔 수 없이 두 손을 내린다.
그리고 밀려드는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반쯤 울상으로 천천히 한 바퀴 도는데, 환인의 눈빛이 한층 더 강하게 빛났다.
하얀 피부 위로 아주 옅게 드러나는 운동의 흔적. 군살 없이 날씬한 등허리와 잘 발달한 골반 덕에 벌어진 허벅지 사이 삼각 공간으로 눈에 띄는 도끼 자국.
뒷머리 부분에는 연회색의 긴꼬리 리본 머리끈이 포인트를 주고 있었고 역하트 모양의 엉덩이를 감싸는 삼각형 레이스 팬티에도 꼬리뼈 부분에 귀여운 리본 매듭이 붙어있어 섹시함과 큐트함을 강조한다.
“또 안느의 내기에 당한 건가.”
어쩐지 눈 호강이라는 단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에 환인이 웃으며 다가가자 이실리테는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라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무슨 내기를 했는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은 그저 입안으로 들어오는 떡만 먹으면 될 일.
환인은 가까이에서 이실리테의 반라를 눈에 담다가 그녀를 품에 안고 찹쌀떡처럼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엉덩이를 주무르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머리도, 속옷도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군. 네게 안 어울리는 것을 찾는 게 더 어렵겠지만 말이다.”
고개를 숙여 그녀의 뺨에 뽀뽀해주고 목덜미를 강하게 빨아서 키스 마크를 남긴다.
손을 그녀의 엉덩이골 사이로 밀어 넣으며 음부의 굴곡이 느껴질 만큼 얇은 팬티 아래를 사악 쓰다듬으니 환인의 가슴에 바짝 붙어있던 그녀의 몸이 흠칫하고 떨렸다.
=하응….=
품 안에서 아기새처럼 바르르 떠는 몸짓이 환인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하루에 열댓 명 씩 모르는 여자들을 안을 적에는 성행위 자체가 박고 흡수하고 사정하는 삼박자의 단순 노동에 불과했었다.
더욱이 피곤할 때 멜라닌 색소의 착색으로 거뭇거뭇해진 음부와 불고기처럼 늘어진 소음순을 마주하고, 거기다 미묘한 지린내까지 맡으면 끓어오르던 성욕도 심해로 가라앉곤 했다.
영혼술을 성장시키기 위해 모든 감정을 제거해서 가능했던 일이었지, 아니었다면 이 세상에서도 그저 쌓인 신체적 정념의 발산을 위해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창관을 방문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주고받은 여자들이 생긴 뒤로 달라졌다.
마음을 준 여자들과 정서적인 교감을 나누며 하는 성행위는 몸과 마음 전부 푸근해지는 것을 환인도 알게 된 거다.
그렇다보니 환인은 약간이지만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시간만 있었으면 이대로 침대에 들어가 이실리테의 속살을 마주했을 텐데.
정해놓은 출발 시각을 영기의 흡수라는 핑계나 이유도 없이 욕망 때문에 미룬다는 건 환인 스스로 용납할 수 없다.
“아쉽지만 출발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니, 다음번에는 시간이 있을 때 이렇게 유혹해주었으면 좋겠다.”
=네, 녜헷.=
혀가 꼬인 그녀를 놓아주고 찹쌀떡 같은 엉덩이를 찰싹 때려주자 =꺅.= 작게 비명을 지른 이실리테가 어깨까지 복숭아색으로 물든 모습으로 엉덩이를 가린 채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앗, 이슬이 바보야…! 기세에 몸을 내던져야지 그냥 나오면 어떻게 해…!=
=바보는 너야…! 금방 출발할 건데 기세는 무슨…!=
=출발을 1시간 정도 늦춰도 되잖……!=
=시끄……!=
밖에서 작게 다투는 소리가 들리더니 후다닥 움직이는 소리와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난다.
“…….”
피식 웃으면서 반코트를 걸친 환인은 회색 후드 망토를 팔에 걸고 이실리테와 안느의 방 쪽에 시선을 주며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먼저 내려가 있을 테니 준비가 끝나면 내려오도록.”
[네, 주인님!]
[금방 따라갈게!]
“…….”
유르파의 대답이 없어 그녀의 방을 노크했지만, 안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문을 열어보니 방이 텅 비워져 있다.
호텔 마구간으로 내려간 환인은 유독 눈에 띄는 검은색 유선형의 마차에 쿠라와 쿠핀을 매고 있는 유르파를 볼 수 있었다.
“일찍 내려왔군요.”
=자기 왔구나. 아가씨들이 뒷정리하는 사이 출발 준비를 해두려고 먼저 내려왔지.=
쿠에~
쿠우우.
새 마차를 끌게 된 쿠라와 쿠핀이 환인을 돌아보며 기쁜 듯이 울고 비상과 쿠르티는 그런 두 마리가 부러운지 마차 주변을 서성이다가 환인에게 다가와 애교를 부리기 시작한다.
자기도 새 마차를 끌어보고 싶다는 표현이다.
환인은 그런 두 마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목을 토닥거려주며 말했다.
“쿠르티는 마차를 끌 수 있겠지만, 비상 너는 안된다.”
큐삣?!
“왜냐니. 일단 너는 저 녀석들과 골격 자체가 다른 게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는 날 태우고 다녀야지 날 두고 마차를 끌 생각이냐.”
쿠…우? 쿠흥!
간단히 설득당한 비상을 보고 웃으며 등을 두들겨준 환인은 마차 지붕으로 올라와 짐을 수납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가방을 잔뜩 가지고 내려온 이실리테와 안느도 짐가방을 정돈해나간다.
=그런데 도령. 이 마차는 뭐라고 부를 거야?=
“마차일 뿐인데 이름까지 필요한 건가.”
=이렇게 멋진 마차잖아. 킹 블랙 스트라이더라던가 왕의 찬란 호라던가 혼례자라던가 그런 이름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걸?=
예시로 든 이름 자체가 이상한 것 같다고 생각한 환인이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고개만 가로저었다.
배라던가 비행기면 몰라도 마차에 이름을 붙이는 건 과하다는 생각이었던 것.
그건 이실리테와 유르파도 비슷한 생각이었고, 안느도 조금 아쉬워하긴 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렇게 출발 준비를 거의 끝마쳤을 무렵이었다.
=환인 영혼사님. 계십니까?=
“예. 여깁니다.”
환인을 보자마자 아! 탄성을 지르며 다가온 에사르트가 다행이라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 아직 계셨군요. 체크아웃하셨다기에 벌써 출발하신 줄로만 알았습니다.=
어제 사례를 받고 나올 적에 미리 떠난다고 말을 해두었던 환인이었다. 그래서 에사르트가 찾아올 거라 생각을 못했는데 무슨 일인 걸까.
=자기? 저 옷, 영주 대행만 입을 수 있는 옷이야. 저기에 단망토를 걸치면 영주 정규 복장이 돼.=
‘그 뒤에 정식으로 자리를 이어받았나.’
옆에서 속삭여준 유르파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마차 지붕에서 뛰어내린 뒤 말했다.
“막 출발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일찍 출발했어도 길이 엇갈릴 뻔 했군요.”
하하 웃은 에사르트는 잠시 검은 마차를 바라보다가 아쉬움을 드러냈다.
=벌써 떠나신다니 무척이나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제가 가주직을 계승하는 날까지 귀빈으로 머물러주십사 떼를 쓰고 싶을 정도로요.=
“이 세상 어딘가에서 고통받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심정이라.”
환인의 대답에 에사르트는 과연! 감동하고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저도 환인 영혼사님의 그 고결한 마음을 본받아 영혼사님께서 비자룩스를 도와주셨다는 것에 후회하지 않도록 갖은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그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비자룩스는 앞으로도 큰 번영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주인님. 출발 준비 끝났어요.=
슬슬 떠나고 싶었던 환인은 시의적절한 이실리테의 서포트에 작게 웃으며 에사르트에게 악수를 건냈다.
“혹시 절 찾아오신 이유가 배웅을 위해서입니까?”
에사르트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적잖이 아쉬워하는 얼굴로 환인의 손을 잡으며 찾아온 목적을 꺼내 들었다.
=아닙니다. 오늘 새벽 통신 수정구로 한통의 연락을 받았는데 그 내용이 영혼사님과 관계된 것이어서 이렇게 급히 찾아뵌 겁니다.=
그러면서 에사르트가 내어준 것은 루크랑어로 적힌 짧은 내용의 쪽지 한 장이었다.
[세간에 성불행을 이어가며 영혼을 널리 이롭게 만들어나가시는 환인 영혼사님께, 영도 에쉬누르에서 정중히 초청장을 보냅니다. 시기는 상관하지 않겠사오니 바쁘신 걸음을 하시어 존귀한 뜻을 전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닌실=아나그]
“…….”
쪽지를 다 읽고 내용을 궁금해하는 여자친구들에게 넘겨주자 쪽지를 읽은 세 명이 힉, 하고 놀란다.
=니, 닌실 아나그면 영도의 일곱 영성의 수장인 대성녀님이잖아!=
=어…… 이거 진짜니? 진짜겠지?=
=시기도 상관하지 않고 영도로 와달라고 하는 거니까요. 사칭은 아닐 거 같아요.=
깜짝 놀란 여자 친구들이 사실 여부를 두고 의심하자 에사르트가 확인시켜준다.
=저도 연락을 받고 굉장히 놀랐습니다. 만약의 확인을 위해 통신 시에 발생한 위상력 파장을 대조해보았는데 영도에서 발신된 2급 중요 수정구의 위상력 파장과 일치했거든요.=
에사르트의 확인에 여자친구들이 묵묵히 서 있는 환인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돌아본다.
설마 영도의 수장이 주인님/도령/자기를 초대하다니! 이건 영성의 인정을 받은 것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초대장에 환인은 이실리테와 관련된 자그마한 문제를 기억해 내곤 속으로 약간 난감해하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전달받았습니다. 바쁘실 텐데 직접 전언을 전해주어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이건 제가 당연히 전해드려야 했을 내용이었거든요. 전언의 내용이든, 전언을 보낸 상대 신분을 생각하든 말입니다. 필시 다른 영지를 방문 중이셨어도 그곳의 주인이 환인 영혼사님을 찾았겠지요.=
환인은 작게 웃어준 뒤 여자친구들에게 쪽지를 돌려받고 내용을 다시 읽었다.
뜻밖의 연락에 환인의 생각이 깊어져 갔다.
기왕 나온 김이라며 에사르트는 환인의 출발을 그새 모여든 마을 주민 수백 명과 함께 배웅해주었다.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비자룩스를 나선 환인은 마차의 지붕에 앉아 비자룩스가 점만큼이나 작아질 때까지 생각에 잠겨 들었다.
=쿠에가 끌 때 마차 운전은 쉬운 편이야. 애들이 똑똑해서 우리 말을 잘 알아들으니까 길 따라 가라고 하거나 멈춰 세우거나 가속하거나, 아이들한테 약간의 신호만 전해주면 충분해.=
=응. 세우는 건 어떻게 해?=
=멈추는 것도 관성이 있으니까 그걸 주의해야 해. 갑자기 멈추라고 하면 마구에 매인 애들이 마차에 떠밀려서 다칠 수 있으니까 미리…….=
마차를 몰아본 경험이 있는 안느가 이실리테와 함께 마부석에 앉아 마차 모는 법을 가르친다.
쿠라와 쿠핀도 마차를 끌어본 경험이 있는지 안느가 지시하는 대로 달리다가 멈추고 걷다가 멈추고 방향을 선회하는 법, 뒷걸음질쳐서 물러나는 등의 시범을 매끄럽게 보여주었다.
덕분에 빠르게 운전법을 습득한 이실리테는 안느에게 고삐를 건네받아 조심스럽게 마차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얘들아, 잘 부탁해.=
쿠엣~
쿠웃!
이실리테가 마차를 운전하는 걸 잠시 지켜보던 안느는 훌쩍, 가벼운 몸놀림으로 마차 지붕 위로 올라와 환인의 옆에 앉아서 기지개를 켠다.
=흐아~ 엄청 편하네. 역시 호족 전용 특수마차라서 그런지 진동도 거의 없고 최고야.=
“그래. 여행은 편해지겠지만 아쉬운 점은 길이 없는 곳으로 다니기 어려워졌다는 거군.”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이니까. 뭣하면 근처 마을이나 촌락에 마차를 맡겨놓고 움직이는 방법도 있잖아? 설마하니 상급 영혼사님의 물건을 도둑질할 간 큰 인간은 없을 테니까.=
“그렇겠지…….”
신경이 반쯤 다른데 쏠린듯한 환인을 곁눈질하던 안느는 등에 짐을 지지 않아서 몸도 가볍게 하늘을 날고 있는 비상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도령, 어찌할 거야? 영도에 먼저 갈 생각?=
“글쎄다.”
=음. 라수비탄에 가기 전에 영도를 먼저 들르는 게 낫지 않아? 도령의 힘이면 충분히 인정받고 남을 거 같은데.=
안느의 이야기에 달칵, 지붕의 썬루프가 열리며 유르파가 하얀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하지만 자기는 순수 영혼사가 아니잖니. 영도에 가면 조금, 곤란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어엉? 뭐야, 마차 안에서도 이야기소리가 들렸어? 방음 어쨌어.=
=위상력을 충전하면 방음 기능도 켜고 끌 수 있는데 지금은 방음 안 켰으니까 그렇지? 그런 거보다~ 무슨 일로 부르는지 쪽지에 안 적힌 게 난 좀 신경 쓰이는걸.=
말하며 유르파가 안느에게 손을 뻗어 좀 올려달라고 부탁한다.
안느가 한손으로 유르파의 손을 잡고 들자 아이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가볍게 지붕 위로 나오는 유르파.
=와아, 바람이 시원하네. …가 아니라, 추워!=
=으이구. 이거 입어.=
오들오들 떠는 유르파에게 자기 겉옷을 벗어주는 안느. 환인은 그녀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쪽지에 초대한다는 내용만 적힌게 마음에 걸립니다. 그렇다고 마냥 무시하기에는 비자룩스 가문에 연락해 제게 소식을 전했다는 그 사실이 발목을 잡는군요.”
=으음…….=
=흐으음.=
그리고 이실리테와 관련된 문제도 하나 있다. 만약 라수비탄으로 향한다면 그 점은 신경안 써도 되겠지만, 영도로 간다 치면 그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환인은 갈롯에게 받은 지도를 바닥에 펼쳤다.
“안느, 영도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어~ 알고 있는데 이 지도에는 없네. 여기, 알류겔 호수 북쪽 조천의 도시에서 좀 더 북쪽으로…… 한 3일? 그정도 가면 엄청 높은 산맥이 나오는데 거기 중턱에 영도가 있어.=
“라드세아 주도와는 정반대군.”
=응. 영도에서는 라수비탄보다 팔라툼이 더 가까울 거야.=
“팔라툼…… 플라비우스 국가 히스론드의 주도였나.”
=맞아. 잠깐만.=
짧게 대답한 안느는 주머니를 뒤적이다 b2용지 크기만한 종이를 꺼내더니 축적을 크게 줄인 대강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기가 라드세아고 라드세아에서 북쪽으로 가면 이블 팩션 접경이 나와. 그 옆으로 영도가 있고 영도랑 맞닿아있는 곳이 히스론드의 주도 팔라툼. 그 옆으로는 사비 족의 국가인 벨티칼이 나오고 그 옆의 바다를 건너면 종족 연합 국가 메리아놀이 있어. 메리아놀하고 히스론드의 접경에 이블 팩션들의 땅이 붙어있고.=
동글동글한 선이 꽤나 귀여운 그림이다.
“…….”
환인은 안느가 그려준 대강의 지도를 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4대 국가 위치 feat.안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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