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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273화 (273/813)

〈 273화 〉 267 광산 마을 비자룩스

* * *

마차는 즉시 인수되어 쿠에 두 마리가 끌수 있도록 개조되었고 안느는 싱글벙글 웃으며 이실리테와 함께 마차 내부에서 사용할 물건을 구하러 돌아다녔다.

그사이 유르파는 우선적으로 난방 마도구를 제작하는 한편, 그동안 환인에게 받은 금전과 위상석으로 제작한 생활 마도구, 마도기를 비자룩스 상단에 대량으로 팔아넘겨 총 82금화의 수익을 올렸다.

재료비로 17금화어치 1~2급 위상석과 2금화치 소재비를 사용했으니 430%의 이익을 거둔 셈.

“유르파의 마도구가 그렇게나 인기가 좋았군요.”

비자룩스 상단을 나오며 환인이 살짝 놀라워하자 유르파가 배실배실 입가에 웃음을 띄웠다.

=흐흥. 내가 마음먹으면 돈을 갈퀴로 쓸어담는 건 일도 아니란다?=

그녀가 제작한 것은 주로 주방용품.

도마와 식칼, 수압 증폭용 수도꼭지, 오븐 복사열 증폭판과 냉장 보관용 냉기 분사판, 독극물 감지용 은합금제 식기 및 냄비와 프라이팬 등으로 품질만 괜찮다면 서민들부터 호족까지 두루 애용하는 아이템이다.

그리고 유르파가 제작한 마도구는 주로 예리함, 내마모성, 내구성 등이 부여되어있어 on/off 기능을 잘만 이용하면 아껴서 조심조심 쓰는 것으로 반평생 사용할 수 있는데다 디자인도 꽤나 수려한 물건들.

가격은 꽤 비싸서 그중에 가장 싼 것도 7은화(식칼)에서 비싼 것은 30은화(냉기 분사판) 정도 했는데 그런 것을 수백 개씩 팔아치웠으니 80금화가 넘는 수입을 올린 거다.

=그래도 에사르트 씨의 알선이 아니었다면 이만큼 대량으로 판매하진 못했을 거야.=

마을 하나에서 소화할 수 있는 마도구의 숫자는 정해져 있다. 그런데 자신이 판 숫자는 그 소화량을 훌쩍 뛰어넘는 양이었다.

뭐 주변 마을을 돌아다니며 팔거나 몇 년동안 느긋하게 팔겠지.

=다음은 도시에서 판매할 전투 보조용 장신구를 만들 거야. 거기에 필요한 금속을 살 수 있는 곳을 상단주한테 소개받았거든~ 같이 가줄 수 있니?=

“알겠습니다. 혼자 들긴 무겁겠지요.”

배달시켜도 되지만 유르파는 환인과 단둘이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어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후후. 그런데 혁대는 써보니까 어떠니?=

“기능은 좋은데 패널티가 조금 아쉽더군요.”

그리모암의 혁대는 착용자의 힘을 최대 5배가량 늘려주지만 그만큼 신체에 과부하를 준다.

환인의 경우 강령을 쓰지 않으면 유지시간은 1분이 고작. 하급 정령 강령을 쓸 경우 5분까지 늘어나지만, 5분을 전부 사용하면 전신 근육통으로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된다.

그렇다고 이실리테나 안느가 쓸 수도 없는 것이, 그리모암의 혁대는 환인의 강령처럼 기존의 능력에 퍼센트로 더해주는 게 아니라 일정 수치까지만 증가시켜주는 식이다.

이를테면 일반인의 힘이 7이고 혁대가 35까지 늘려준다 치면 근접 직업자의 힘은 25~50을 오가니 효과는 거의 보지 못하는 데 비해 패널티가 붙어버리는 거다.

슬쩍, 유르파는 환인에게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모암의 유물은 비근접 직업자를 위한 유물이라서 그래. 거기다 그리모암의 강력은 다섯 아이템이 서로를 보완해주는 식이라 더욱 그렇구. 강체의 수파를 얻기 전까지는 그 패널티를 해결하지 못할 거라고 봐.=

“그 말은 목걸이도 패널티가 있다는 말 아닙니까.”

=응. 수파를 차면 신체 내구도가 오르는 대신 순발력이 좀 떨어질걸? 양화를 신으면 순발력이 보충되지만, 정신력이 감소할거구.=

혁대, 수파, 양화, 모자, 완륜이 각각 근력, 체력, 순발력, 정신력, 마력과 호환되며 먹이사슬처럼 혁대를 차면 근력이 오르는 대신 체력이 떨어지고, 수파를 목에 걸면 체력이 오르는대신 순발력이 떨어지는 식이다.

“결국 다섯 종류를 다 모으기 전까지는 제대로 활용하려면 기타 마도기에서 패널티를 보완하는 옵션을 구해야겠군요.”

좋긴 하지만 이게 과연 유물급인가 싶었던 환인은 유르파의 추가 설명에 수긍했다.

=아니야~. 다섯 유물을 모두 착용하면 그리모암의 강력이 발동하면서 7급에 가까운 신체 능력과 위상력이 더해진다고 해. 자체 유물 효과까지 더하면 결과적으로 거의 8급에 가깝지 않을까?=

“……확실히 유물 급이군요.”

다섯가지 아이템을 착용한다고 7급 직업자의 위상력과 신체 능력을 더해준다니, 유물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성능이다.

그러나 어느 세월에 나머지 네 개의 유물을 모을까.

재앙화된 혼재를 해결해주고서야 혁대를 받았을 정도다. 사는 것은 무리 일 거고 그전에 찾는 것부터가 난관이겠지.

혹시나싶어 유르파에게 다른 네 가지 그리모암의 유물이 어디 있는지 아는 게 있냐고 묻자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름난 도둑들이 그런 보물을 노리고 활개치는데 자랑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면 돼~. 그런 이야기는 특정 사교 파티에서나 오갈 정도?=

“땅신 교단을 통해 정보 수집은 불가능할까요.”

=음~. 개인 정보 쪽이라 점수가 많이 필요할 거 같은데.=

“안느를 통해 의뢰 알선을 많이 받아야겠군요.”

유르파의 의견에 환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유르파가 장신구 제작에 쓸 금속괴를 구매한 뒤에는 거리를 거닐며 짧은 데이트를 즐겼다.

=음~. 이거 맛있다. 자기도 한 입 먹어봐.=

오울링에서 다시 몸을 섞기 시작한 후로 유르파의 체모는 하얀색으로 고정되었고 피부도 투명할 정도로 하얗게 변해가는 중이었는데.

“…단맛이 너무 강한 것 같습니다.”

=후훗. 이건 그런 맛으로 먹는 거거든.=

눈내린 설산을 배경으로 하얀 모피 코트에 하얀 솜사탕을 들고 돌아다니니 눈의 정령으로 보일 정도여서 주변의 시선을 적잖게 끌어당기는 중이다.

눈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유르파.

밤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환인.

그 흑백의 강렬한 조화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지만, 둘 다 타인의 시선 따윈 의식하지 않는 인물들이라 데이트는 꽤나 즐거운 분위기로 흘러갔다.

=자기, 아~앙.=

“꽤 맛있군요. 재료가 뭘까요.”

=라드세아 평원 한 귀퉁이에서 재배한다는 붉은귀리팥 찹쌀떡이야. 약간의 단맛에 살짝 알싸하고 매콤한 맛이라서 인기가 많아~.=

“한 입 더 주시죠.”

=앗, 응.=

이렇게 서로 길거리 음식을 먹여주고 받아먹으며 유르파는 환인의 팔을 안고 환인은 유르파의 허리를 안은 채 돌아다니길 1시간.

짧은 데이트를 즐긴 환인과 유르파는 만족하고 호텔로 돌아와 각자 할 일을 시작했다.

=그럼 난 들어가서 난방 마도구를 마저 만들게~.=

“예.”

유르파를 방에 들여보낸 환인은 거실에서 양반다리로 앉아 내면의 관조를 개시했다.

그가 요즘 집중하고 있는 것은 강제력이 사람에게 약간이지만 통한 것과, 스타에타가 자신에게 비정상적으로 겁먹었던 그때 상황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영혼술이 성장한 여파다. 무언가 내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결론인데…….’

이 변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지난 11개월, 곧 1년이 되어가는 자신의 행적을 곰곰이 되짚어보았지만, 그간의 변화는 긍정적이면 긍정적이었지 부정적이지 않았으니까.

자신의 주관을 잃지 않으면서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을 알아가고 있다.

사랑과 미움과 욕망도 조금씩 느끼고 있고 재물욕, 명예욕, 식욕, 수면욕, 색욕의 다섯 가지 욕망도 맛보고 있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저 해야 할 일이라 하는 게 아닌, 마음이 동해서 그것들에 손을 대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자신의 삶과 지구의 삶을 비교하면 무채색과 총천연색으로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무채색도 나름의 편함이 있지만.’

그때로 돌아가라고 하면 조금은 고민할지도 모르겠다.

“……음.”

10분간 정신을 집중한 결과 머리 안쪽에서 눈이 열리는 듯한 느낌이 다시 한 번 찾아왔다.

환인은 이 감각이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고 강제력을 약간이지만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상태라고 확신하는 중이다.

이 감각의 발동 조건은 정신의 과다 집중.

다른게 눈에 들어오지 않고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을 강하게 집중하고 있으면 이 감각이 찾아온다.

그러나 정신의 과다 집중은 꽤나 피곤한데다 이 상태에 돌입하는데도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

현재까지 성공률은 고작 30%.

당시를 떠올려보면 감정의 고조가 과다 집중에 도움이 되는듯하지만, 의도적인 감정의 격동은 의미가 없는듯하다.

시험삼아 억지로 분노를 끌어올려 봤지만, 대상이 없는 분노여서인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이렇게 2시간 동안 정신 과다 집중 훈련을 하다가 휴식을 위해 후우, 짧게 숨을 내쉬는 순간 객실 문이 열리며 이실리테와 안느가 들어왔다.

두 팔과 등에 크고작은 짐가방이 가득 들려있는 상태다.

=도령~, 우리 왔어!=

=다녀왔습니다, 주인님.=

“어서와라. 출발 채비는 그걸로 끝인가.”

=네. 마차 이동에 필요한 준비물은 모두 챙겼어요.=

=스미든 씨가 적어준 수리 재료를 전부 샀는데 좀 비싸더라. 5금화나 들었어.=

마차를 이끌 쿠에의 마구, 마모가 심할 것으로 짐작되는 부품, 파손을 대비해 여분의 바퀴와 고무 타이어, 교체용 차체판정도인데 전부 마도구였다며 혀를 내두르는 안느다.

부품이 마도구인 이유는 마차 전체에 술식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차체와 축, 바퀴에 내구도 강화에 탄성 증가, 내구도 회복 술식이 새겨져 있고 차체도 방수, 방열에 내구도 강화, 내구도 회복등 상급 마도구만큼이나 술식으로 떡칠이 되어있었던 것.

“여기서만 구할 수 있는 거라면 곤란할 텐데.”

=아, 그건 아냐. 스미든 씨가 설계도도 줬거든. 만약 여분이 떨어지면 주문생산해도 돼.=

말하며 안느가 등에 짊어진 대형 배낭을 내려놓는데 바닥이 쿵, 작게 울린다.

=일상생활에서는 잘 안 부서지겠지만 공격받아서 파손율이 급격히 높아지면 마도구라고 해도 못 버티니까, 교체분은 넉넉히 챙기는 게 좋을 거라고 조언을 받았어요. 여기 스미든 씨에게 받은 설계도예요.=

“…….”

설계도를 받아보니 모르는 사람이 봐도 자세하다고 할 만큼 사용된 자재와 규격, 부여된 술식 종류와 그 술식의 제조까지 기입된 정밀 설계도면이다.

환인이 설계도를 확인하는 사이 이실리테와 안느는 구매해온 물건을 넓은 거실에 펼쳐놓고 소지 가방도 가져와 펼친 뒤 수량과 종류의 점검을 시작했다.

=으응. 침낭도 있는데 침구를 여분으로 3개나 더 산 건 역시 낭비 같아.=

=도령이랑 사랑을 나누면 막 오줌싸는 것처럼 물이 흐른다고 너도 세탁용으로 여분 사는 거 찬성했잖아.=

=야잇, 주인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그야…!=

=으브븝.=

안느의 돌발 발언에 황급히 그녀의 입을 막은 이실리테는 살짝 눈꼬리를 치켜뜨고 그녀의 등을 찰싹 때렸다. 그리고 힐끔, 환인을 돌아보았지만…… 별 반응이 없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실리테는 사온 물건들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인님의 침구를 최대한 고급으로 여분까지 준비한 건 아깝지 않다. 하지만 자신들이 쓸 것도 따로 챙긴 건 좀… 역시 그런데.

하지만 이미 사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작게 고개를 저은 이실리테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일 출발하기 전에 가방 내용물 정리 좀 하자. 도와줘.=

=엉.=

방에서 아공간 가방과 주머니를 모두 가져와 넓은 거실에 펼치는 이실리테와 안느.

가방을 하나하나 펼쳐보다가 급기야 가방 속 내용물을 모두 꺼내 버릴 것과 계속 사용할 것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이게 침구용 가방이니까 아무 데나 넣지 말고 여기에 넣어.=

=응응.=

=가볍게 대답하지 말고. 안느 너 보니까 아무 주머니에 막 집어넣었다가 소지품 못 찾아서 뒤집어놓는 버릇 있더라.=

=어? 내가 그랬나?=

=그랬어. 그나저나 가방 개수가 너무 많네. 유리 언니한테 대용량 가방을 주문해야할까.=

=으음. 마차 짐칸도 넓고 천장에도 짐을 실을 수 있긴 한데…… 가방이 좀 많긴 하네.=

식료품 보존 주머니 세 개. 각자 짐가방 가방 네 개에 야영 용품 가방이 두 개, 기타 비품 및 쿠에들의 먹이 가방 및 주머니가 세 개. 여기에 안느와 유르파가 쓰는 가방 네 개는 제외다.

대부분이 아공간 주머니 및 가방인데 전부 용량이 작다.

마침 유르파가 나른한 기운을 풍기며 방에서 나왔기에 안느가 유르파의 손을 잡고 데려와 숙덕숙덕거린다.

=대용량 가방~? 나쁘진 않은데 마차 후위 짐칸을 아예 아공간 상자화하고 지붕 위 수납 칸에 가방을 올려두는 게 더 좋지 않겠니?=

=아하. 확실히 설치형 물품 상자가 대용량 적용이 쉽지.=

=제작은 어떤가요? 어려울까요?=

=어렵진 않아~. 마침 4급 위상석도 잔뜩 생겼으니까 4급 1개랑 3급 2개면 그 크기에 맞는 걸 새겨넣을 수 있을 거야. 내부는 대충 7m * 7m * 7m 정도가 될걸?=

=좋네요.=

=좋네. 도령도령, 마차에 추가해도 돼?=

“그래.”

설계도를 머리에 집어넣고 있던 환인의 허락에 안느가 히히덕거리면서 가방 하나를 탁탁 때린다.

=그럼 가방 많이 남겠다. 이슬아, 하나는 내가 가져도 돼? 옷 가방으로 쓰고 싶은데.=

=중고 가격으로 파티 공금에 넣고 써.=

=얼만데?=

=46은화.=

=그정도면 있…….=

=안느 고갱님~? 뽕브라 대금이 아직 입금 안 됐는데요~?=

=읔. 그건… 그러니까…….=

안느가 용돈과 수입을 셈해보다 얼굴을 귀엽게 찡그리더니 엉금엉금 환인에게 기어가 그의 허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도려엉. 우리 미궁 언제 들어가? 나 용돈이 바닥나고 있어!=

새끼 고양이처럼 드러누워 배꼽을 살짝 드러낸 모습에 환인이 작게 웃으니 웃지만 말고 여자친구 재정을 위해 미궁 탐험도 계획에 넣어달라고 조르는 안느다.

=아, 이슬이 아가씨, 난방 마도구를 완성했거든? 이게 그거야.=

유르파의 손에서 30*30cm에 두께 3cm의 정사각형 철판 5개를 건네받은 이실리테가 호기심에 살펴보며 중얼거린다.

=생긴건 요리용 열선 플레이트랑 비슷하네요.=

=그것도 내가 만들었으니까?=

=아?=

=자기가 카턴 마을에서 산 거잖니. 아무튼 설치는 마차의 바닥판을 들어서 아래 홈에 끼우면 돼. 동작은 이 조작 구슬에 대고 위상력을 주입하면 충전량에 따라 지속시간이 늘어나고, 이건 온도 조절 조작판.=

=좋네요. 이게 있으면 주인님도 따뜻하게 주무실 수 있겠어요.=

=냉방 도구는 천천히 만들면 되지? 여름이 오려면 아직 7개월이나 남았고 한동안은 중부로 올라갈 일은 없으니까.=

대화중에 슬쩍 다가온 안느가 난방 마도구를 살펴보더니 그걸 들고 나가려 한다.

=네, 그러면 될 거 같아요. 안느 어디가? 설치는 나중에 할 거니까 일단 짐 정리부터 해.=

=이잉. 금방 갔다 올 수 있는데.=

=가면 이것저것 해보고 놀다가 올라올 거잖아. 빨리 이리와.=

=나도 도와줄게. 앗, 자기 속옷이다♡=

=잠깐, 언니. 그쪽 가방은 다 정리된 거니까 건드리지 말고 이쪽 도와줘요. 안느! 아이처럼 굴지 말고 얼른 이리와!=

환인은 이실리테가 유치원 선생님처럼 애쓰는 소릴 듣고 피식 웃으면서 설계도를 접었다.

“이실리테. 정리는 언제쯤 끝나지.”

=아, 시키실 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짐 정리는 밤에 해도 괜찮아요.=

“너희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하던 일은 마무리하는게 좋겠지.”

부탁이라는 단어에 안느와 유르파의 눈빛이 변하더니 이실리테의 지시를 받아 번개같이 짐정리를 끝마치는 두 사람.

10분동안 아웅다웅하다가 겨우 5분 만에 정리를 끝마친 이실리테가 약간 허무해하는 것이 재미있어 작게 웃음을 머금었던 환인은 그녀들을 앞에 앉혀두고 요 며칠 훈련하던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그래서, 기다리다가 무언가 내게 특이한 느낌이 들거나 하면 이야기해달라는 거다.”

집중해서 이야기를 듣던 안느가 기억난다는 듯이 가볍게 손뼉을 치며 묻는다.

=스타에타가 겁먹고 벌벌 떨던 때랑 혼재하고 싸울 때 도령의 목소리가 찌릿거렸던 거 말하는 거지?=

“그래. 기억하고 있었군.”

나머지 두 사람도 안느 덕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해했다.

환인은 그런 여자친구들을 앉혀놓고 정신 집중을 시작한다. 그리고 잠시 후, 5분정도 지나 머릿속 한복판에 눈이 개안하는 느낌이 들자 가장 먼저 안느가 입을 열었다.

=오, 느껴진다. 도령한테서 막 가슴 두근거리는 느낌이 전해져오고 있어.=

=저도 느껴져요. 손가락이랑 발가락이 간지러운 느낌이에요.=

=나도 느껴지는데 자기, 이거…… 8급 직업자의 앞에 섰을 때랑 비슷한 느낌인데?=

“…8급 직업자입니까?”

뜻밖의 이야기에 정신 집중을 해제하고 유르파를 바라보자 확실하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파르히스트의 백극 기사단 단장이 8급 무성인데 딱 한 번 그의 앞에 선 적 있거든? 그때 느꼈던 감각이랑 되게 비슷해. 막, 기를 못 펴고 오금이 저려서 몸이 저절로 움츠러드는 느낌.=

=뭐야. 그럼 도령이 8급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거야?=

크게 놀란 얼굴로 환인과 유르파를 번갈아 보는 안느에게 환인이 부정했다.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8급은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가 되는 영역일텐데 내가 그 경지에 도달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군.”

=음~? 도령도 능력만 보면 8급 영혼사라고 해도 믿을 수 있지 않을까? 언니랑 이슬이는 어떻게 생각해?=

=자기는 직업이 일반적이지 않잖니. 전당에 등록된 적이 한 번도 없는 특별한 직업이니까 특수 직업 효과가 발휘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난 계속 도령의 격이 8급에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도 그럴게 벽을 앞에 둔 사람은 일부지만 다음 단계의 힘을 쓸 수 있잖아. 그리고 도령 다른 세상 사람이니까 아직 등급에 감을 못 잡았을 가능성도 있고.=

=…그 설을 차용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두 여자친구의 의견에 환인이 생각에 잠겨 들자 그때까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이실리테가 환인에게 말했다.

=주인님, 주인님이 지금까지 성불시킨 영혼이 500명을 예전에 넘겼잖아요. 그 경험이 주인님의 영격을 끌어올린 게 아닐까요? 직업의 벽을 넘어 2차 각성한 사람은 존재감이 굉장히 강해진다고 용병 시절에 들었는데…….=

평범하게 자기를 단련해서 8급에 오른 사람은 자연스럽게 영혼의 격이 오른 거지만, 환인은 영혼 그 자체를 이끌며 그가 얻은 경험이 영혼의 격을 상승시키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가설이었다.

그 이야기에 안느와 유르파는 물론 환인도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그야 자신은 영혼이 성불할 때 흘리고 가는 빛구슬을 흡수하고 있지 않은가.

그 빛구슬이 만약 격의 파편이라고 하고 영혼술의 훈련이라던가를 생각해보면…….

“이실리테의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와 닿는군.”

환인은 그 후 정신 과다 집중 상태에서 “손을 들어라.”라는 강제력을 발휘했고, 6급인 안느와 유르파는 단지 어깨만 잠깐 움찔한 데 비해 4급인 이실리테는 손을 반쯤 들었다가 내리는 것을 보고 그 영혼의 격이라는 가설에 좀 더 신빙성을 두었다.

‘나쁘지 않아.’

환인은 만족스러웠다.

자신이 성불행을 계속하며 빛구슬을 더 많이 모아 격을 올리면 몇 분씩 정신을 집중할 필요도 없이 사람에게도 강제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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