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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272화 (272/813)

〈 272화 〉 266 광산 마을 비자룩스

* * *

임세희의 문제를 간단히 해결한 환인은 가벼운 마음으로 영주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며칠만에 본 셀가 영주는 살이 10킬로는 족히 빠진 것처럼 초췌하고 앙상해져 있었다.

마음 고생이 엄청났음을 짐작할 수 있는 몰골.

기력도 몹시 상한 듯 앉아있는 것도 힘겨워 보였는데 그럼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게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비자룩스의 영주로서 재앙화된 혼재의 퇴치와 성의 정화, 마을의 성불행을 치러주신 환인 영혼사님께 짐승신님과 선조 조상님들의 이름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제가 있을 때 일이 벌어진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그리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주는 환인에게 미안함을 금치 못하는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셋째 부인이 그토록 모멸찬 행동을 했음에도… 조의를 표시해주시는 영혼사님께 무어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그녀도… 신님의 정원에서 영혼사님께 참회하며 살아갈 겁니다.=

“…….”

돌아나가는 길에 에사르트에게만큼은 스타에타의 혼이 어찌 되었는지 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한 번 허리를 숙인 정도로 진땀을 흘리는 영주를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나중에 황야에서 죽어 쓰러지는 건 상관없지만, 자신의 앞에서 쓰러지는 것은 곤란하니까.

“다만 의문인 것이, 알드헬름의 암살 용의자는 밝혀졌습니까? 호족을 암살할 정도였으니 용의자를 좁히기 쉬울 거라 생각합니다만.”

=…암살자는 열려있던 창문을 통해 침입했으며 흉기로 방에 있던 과도를 사용했다는 것뿐…… 그 외에는 밝혀진 것 없이 오리무중입니다. 짐작하기에는 나사라트의 암살단이 개입되어있는 것이 아닐까 짐작합니다만…… 쿨럭. 확실한 것은 어디에도 없군요.=

혼재 사태의 핵심 관련자이자 영혼사로써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라 형식적으로 물은 건데, 꽤 괜찮은 정보가 들어왔다.

이러면 자신에게 의심의 눈길이 날아오진 않겠지.

“그렇습니까.”

네, 하고 힘겨운 웃음을 지은 영주는 책상의 서랍을 열더니 주먹만 한 비단 주머니와 손바닥 두 개만 한 작은 상자를 꺼내 옆에 선 에사르트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에사르트는 두 손으로 공손히 환인에게 그것들을 바쳤다.

=비자룩스가 멸망할 수도 있었던 죄업을, 최소한의 인명피해로 막을 수 있게 해주신 영혼사님께…… 비자룩스의 영주가 드리는 감사의 마음입니다.=

“염치불구하고 받겠습니다.”

주머니는 금화일 거란 예상과 다르게 잡스러운 색의 4급 위상석이 무려 10개나 들어있었다.

이것만으로도 75금화가 넘는 거금인데 촉감이 비단 같은 적회색의 나무 상자 안에는 지구에서 차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현대적인 디자인의 사각형 버클 벨트가 얌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색도 숯을 곱게 바른듯한 사각거리는 느낌의 흑색으로 보기에도 귀중품인 물건.

“허리띠군요.”

=어, 어머? 잠깐만, 설마 그리모암의 혁대?=

벨트의 정체를 눈치챈 유르파를 쳐다보고 영주를 돌아보자 허허, 작게 웃으며 눈가에 주름진 웃음을 띤다.

=유르파 영혼 기사님의 안목이 대단하시군요. 맞습니다. 수백 년 전, 상격의 영웅이신 그리모암 님이 소유하신 데서 유래된 다섯 가지 강력 중 하나, 강완의 혁대입니다.=

유르파와 영주의 반응에서 굉장히 귀한 아이템이라는 것을 눈치챈 환인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고마움을 드러냈다.

“보아하니 오랜 시간 간직해오신 유물 같은데 이런 걸 내어주셔도 괜찮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유물이라 해도 쓸 사람이 없는 유물은 고물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환인 영혼사님께서 싸우시는 모습에서 몇백 년간 주인을 찾지 못했던 그 혁대의 진정한 주인이 나타났음을 깨달았습니다. 영혼사님이라면 누구보다 그것을 잘 사용하실 수…… 쿨럭, 쿨럭쿨럭!=

=아버지.=

에사르트가 잔에 와인을 따라 건네주자 그것을 단숨에 마신 영주는 후우, 한결 진정된 모습으로 이야기를 다시 이어갔다.

=…그리모암 님은 술법사로 각성하셨으나 누구보다 무투의 자질이 뛰어나셨던 분. 환인 영혼사님은 혼재 빙의체와 물리적으로 싸워 이기시는 찬란한 재능을 지니셨으니…… 누구보다도 그리모암의 유물이 맞는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유르파와 안느가 격렬히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 칠흑의 벨트에 대해 유르파가 잘 아는 듯하니 자세한 이야기는 돌아가서 그녀에게 들으면 되겠지.

“귀중한 선물, 유용하게 잘 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비자룩스가 환인 영혼사님께 받은 것은 그러한 물질적인 가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 내어 드릴 수 있는 게 고작 그정도 뿐인지라 송구할 따름입니다….=

값어치란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환인이지만, 이번에는 말없이 그저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그렇…습니까.=

영주와 의례적인 대화를 마치고 나온 환인은 함께 나온 에사르트에게 스타에타의 혼이 소멸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셋째 어머님은 알드헬름과 관련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조용하고 정숙한…… 누구보다 호족에 어울리는 분이셨습니다. 저희 형제 누이들에게도 나름의 사랑을 베풀어주신 분이셨고요.=

알드헬름을 편애하는 면이 없진 않았지만, 그건 배 아파 낳은 아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그렇다는 면으로 보면 충분히 이해되는 수준이었고 에사르트 남매들도 그정도는 이해했기에 큰 분란은 일어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그랬던 것 같습니다.=

환인은 침울해진 에사르트를 바라보다가 눈 덮인 웅장한 비자루크스 산맥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소멸이란 번뇌의 굴레에 벗어나는 유일한 방도일지도 모릅니다.”

=…….=

“인세의 희노애락에서 해방이라는 것은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축복일 수도 있지요. 아들 사랑이 지나쳤던 스타에타 부인에게는…… 진정한 평온이 찾아온 거라고 생각합니다.”

신의 정원에 알드헬름은 없을 테니 말이다.

한참을 생각하던 에사르트는 무언가 어깨의 짐을 조금 내려놓은 듯한 미소로 대답했다.

=환인 영혼사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왠지 위안이 되는 기분입니다.=

“위안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아! 환인 영혼사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한 가지 더 준비한 선물이 있으니 그것까지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미 적지 않은 사례를 받은 터라 이 이상은 아무리 저라 해도 염치가 없습니다만.”

=아하하. 그러면 영혼 기사님들께 드리는 선물로 하겠습니다. 이쪽입니다.=

여자친구들에게? 환인이 그녀들을 돌아보자 그녀들은 짐작 가는 게 없다는 얼굴로 눈을 끔뻑거린다.

분위기 환기를 위해 쾌활한 척하는 에사르트가 무엇을 주려는 걸까 싶어 따라간 곳은 성내에 있는 비자룩스 가문 직속 공방이었다.

커스텀 오더와 오더 메이드 전문인지 도구가 자못 다양하다. 벽에는 프로토타입 같은 무기와 방어구에서 온갖 도구가 장식되어 있고 넓은 공방 한쪽에는 기차를 닮은 광차도 보인다.

무엇보다 환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기초적인 뼈대만 잡혀있는 하나의 쇳덩어리였다.

‘증기기관?’

매우 기초적인 방식이지만 증기기관의 얼개가 확실하다. 저것도 임세희가 낸 아이디어의 진행과정인가.

=여깁니다. 스미든 공방주, 부탁한 것을 수령하러 왔습니다.=

=오! 그럼 저분이 영혼사님입니까?!=

대장장이 작업복을 입은 그리즐리쪽 인웅족 남자가 활짝 웃으며 다가와서 환인에게 허리를 꾸벅 숙인다.

=감사합니다, 영혼사님! 영혼사님의 축복으로 아내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부인 되시는 분이……?”

=예! 영혼사님께서 정화해주신 기사 중에 제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부인분이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으하하하! 아무튼!! 영혼사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전력을 다해 완성하였으니 영혼사님도 마음에 쏙 드실겁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우렁우렁한 목소리와 함께 스미든 공방주가 보여준 것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 것 같은 디자인의 마차였다.

=보다시피 차체는 북부 노르딕산 옻나무를 아낌없이 사용했고 골조 또한 강철보다 내마모성이 뛰어난 스트릴 합금으로 제작했습니다! 마차의 흔들림과 진동을 잡아내기 위해 주도에서 유행한다는 새로운 기술을 접목해 거친 노면을 달려도 충격이 거의 전달되지 않으며 절묘한 무게 배분으로 쿠에라면 2두 마차로, 말을 쓴다면 4두 마차로 쓸수 있게 밸런스를 잡았습니다! 마차 뒤편에는 짐가방을 수납할 수 있는 공간과……!=

=우와, 오와.=

=어머나~.=

안느와 유르파는 스미든 공방주의 장황한 설명이 들리지 않는 얼굴로 기품있는 검은색의 무광택 마차를 살펴보느라 정신없다.

환인도 살짝 어이없는 감정을 느끼며 마차를 구경했다.

‘외형이 연예인 밴과 흡사한데.’

길가다보면 볼 수 있는 스타크래프트 밴보다 차체는 높지만, 그만큼 노면 주행의 안정성을 높인 구조로 마차라기보다는 캠핑 트레일러라고 하는게 더 어울리는 외형이다.

=스미든 씨, 마차 디자인이 굉장히 독특하네요~?=

=어? 아아, 최대한 탑승자의 편안함을 추구하며 조언을 받아들이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만, 보기 나쁜 편은 아니지요?=

=그럼요~. 오히려 일반 마차보다 차별성이 느껴져서 더 좋은걸요~?=

그 말대로 채택한 외형 덕분에 내부는 무척 넓고 높았다. 내부는 족히 12명은 누울 수 있고 천장도 2m나 될 정도.

무엇보다 신기한 점은 마차 내부 구조가 좌식??으로 꾸며져 있다는 점이었다.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마차 내구와 실용성을 위해 술식이 아낌없이…… 다양한 기능도…… 차체 무게마저…….=

내부를 구경하며 스미든에게서 구조 설명을 듣는 여자친구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에사르트가 웃으며 다가왔다.

=막내가 공방 쪽을 관리하고 있는데 며칠 전에 소식을 하나 가지고 왔었습니다. 영혼 기사님들이 마차를 알아보러 다닌다는 이야기였지요.=

“예. 비자룩스로 오는 길에 눈을 맞으며 야영하더니 마차를 구해야겠다는 이야기가 나왔었습니다. 이왕이면 장인이 많은 비자룩스에서 구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알아보는 중이었지요.”

=사실…… 이 마차는 알드헬름이 쓰려고 만들던 거였습니다. 그걸 환인 영혼사님께 드린다는 것이 조금…….”

“아아. 전혀 불쾌하지 않으니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군요.”

환인은 피식 웃었다.

알드헬름이 살아서 이걸 봤다면 피가 거꾸로 솟아 고혈압으로 사망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어째서 마차가 저런 모양이 되었는지 이해됐다.

임세희가 저것에도 관여했기 때문이겠지.

=도령도령! 이 마차 진짜 굉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안느의 모습에 환인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카턴 마을에서 처음 알드헬름을 알게 된 당시에는 살심이 머리끝까지 치솟을 정도로 무척이나 불쾌했었다. 정신병자의 쾌락 살인 행각에 휘말렸다고 생각했었던 거다.

그랬는데 알고 보니 호족과 마을 두 개가 얽힌 큰 사건이었고, 마지막에는 재앙화된 혼재와 싸우기까지 했다.

그 결과 금화 수십 닢짜리 마차와 시세가 정해져 있지 않은 유물 하나, 수십 금화의 값어치를 하는 4급 위상석 10개를 얻었다. 이 정도 보상이라면 그간의 고생이 보답 되고도 남는 수준.

환인은 약간, 정말로 약간이지만 알드헬름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놈이 아니었다면 유물은 구경도 못했을 테니까.

물론 비자룩스 가문이 오울링의 고족 가문 생존자, 말빈에게도 손해 배상을 지급하겠다고 들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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