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화 〉 265 광산 마을 비자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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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정화를 끝내고 사흘 뒤.
지난 6일간 영주 대행으로 사태 수습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던 에사르트가 마차와 함께 직접 찾아와 성으로 정중히 초대했다.
쓰러졌던 셀가 영주도 정신을 차렸고 급한 불은 껐기에 감사의 마음이 담긴 보답을 하기 위해서라는 게 이유였다.
여자친구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가던 중 환인은 문득 영주가 말했던 죗값을 어떻게 치룰지 궁금해져 에사르트에게 질문했다.
“영주님은 괜찮으십니까.”
알드헬름이 혼재가 되고 스타에타는 그런 아들에게 빙의 당해 결국 모자가 환인에게 죽은 직후, 영주는 크나큰 상심과 정신적 충격을 받아 급격히 쇠약해져 자리에 드러눕고 말았다.
그게 닷새 전의 이야기. 고성의 정화를 시작한 지 2일 차 무렵이었다.
에사르트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것이…… 후우, 환인 영혼사님께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아버지는 가족애가 남다른 분이십니다. 어렸을 적 형제와 누이를 모두 잃은 경험 때문이죠.=
셀가 영주가 아직 어렸을 때, 당시 비자룩스 영주는 크라버리에 병력을 빌려 좀먹는 부패 카르텔과 전쟁을 벌였었다.
당시 전대 영주의 전방위적 압박은 병적이라 할 수 있을 수준이었으며 카르텔이 물러날 여지를 주지 않고 몰아붙였고,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속담처럼 물러날 곳이 사라진 카르텔은 악에 받쳐 영주의 가족을 습격했다.
그 사건으로 전대 영주의 부인 두 명과 세 아들, 여섯 딸 중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셀가 영주 뿐.
=…그후 카르텔을 뿌리 뽑은 할아버님은 새 할머님을 부인으로 맞이하셨고 삼촌과 고모가 태어나셨지만, 아버지의 상처받은 마음은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반작용으로 가족을 아끼는 마음이 강해졌고, 그놈이 밖에서 그런 짓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걸 알게 되었음에도 셋째 어머님이 그놈을 감싸고 도는 것에 마음이 약해져 손을 못 대셨지요.=
“…….”
=아버지께서는 어제 정신을 차리셨습니다. 다만 기력은 여전히 쇠하신 상태라…….=
“그렇군요.”
=……이번 사태가 일어난 이유에는 오롯이 당신의 잘못이라고 자책하고 계십니다. 모든 혼재 사태가 수습된 뒤에는 제게 작위를 이양하시고 비자루크스 산맥 어딘가로 떠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예.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연으로 돌아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다.=
마차 안이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침묵에 잠겨든다.
에사르트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이번 사태에 저도 책임이 있다고 통감했습니다. 장남으로서 가족의 일에 조금 더 신경을 썼더라면…….=
애써 담담한 척하는 에사르트의 말을 환인이 중간에 잘랐다.
“그런 식으로 책임을 하나하나 물어나가면 알드헬름의 행위를 막지 못한 기사들, 병사들, 보고도 못 본 척 넘어간 성내 고용인들, 그 고용인들의 가족들, 그 가족들의 친구에 친인척들까지 남김없이 포함됩니다. 연좌제란 그런 겁니다.”
눈을 크게 뜨고 끔뻑거리는 에사르트에게 환인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영주란 마을의 책임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책임자는 밑에서 일어난 일에 책임지는 자. 셀가 영주님 본인이 죄를 그러모아 품고 가시겠다는 뜻은 아들인 당신에게 죄를 물려주지 않고 후사를 맡긴다는 이야기겠지요. 아들 된 도리로서 영주님의 뒤를 잇는 것이 그분이 바라는 일일 겁니다.”
그러지않으면 이쪽이 곤란하다.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확신하고 있었지만, 방금 에사르트가 자신의 입으로 확인 사살했다.
전대 영주와 크라버리의 여자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 더 있다고.
그렇지않아도 크라버리와 접점이 깊어가는 마당에 그들 중 하나가 악한 마음을 품고 차기 영주 자리를 노리려 든다면? 그 시도가 성공해서 에사르트가 물러나고 크라버리 쪽 핏줄이 비자룩스의 영주를 계승한다면?
환인은 부서진 하수구 파이프에서 썩은 오물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는 것처럼 줄기차게 뒤가 신경 쓰일 것이다.
그리고 환인은 그런 불안 요소를 두고 보기보단 자신의 손으로 직접 처분하는 쪽을 선택할 남자다.
“부외자인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고까우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아니,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환인 영혼사님이 안 계셨다면 비자룩스는 끝장이었을 겁니다! 개의치 마시고 환인 영혼사님의 고견을 들려주십시오.=
“…예. 에사르트 씨는 부책임자로서 앞으로 영주님을 대신해 비자룩스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없을 수가 없을 테니까요.”
의미심장하다못해 심장 떨리는 이야기에 에사르트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묻는다.
=그, 그 말씀은……?=
“라드세아 중부에서 벌어지는 가장 큰 이슈, 크라버리와 파르히스트간의 분쟁은 에사르트 씨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일의 발단은…….”
=……!=
그 사건이 어떻게 거기까지 불거졌는지 알게 된 에사르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마차 바닥을 뚫어질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정화를 끝내고 사흘 뒤 다시 찾은 고성은 일단 겉은 알드헬름 혼재 사태 발생 이전과 다를 게 없을 정도로 복구되어 있었다.
실내에서 들어낸 각종 가구와 물품이 쌓여 엉망이던 정원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초록색 잔디로 싱그러워졌고, 흙먼지와 발자국으로 더럽혀져 있던 1층 홀과 로비도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해져 있었다.
격전의 흔적이 난무해있던 2층 로비는 임시로 커튼을 쳐서 막아놨지만 그외 장소는 원래의 기능을 회복한 상태.
얼굴에 슬픔이 약간 묻어나지만, 고용인들이 단정한 차림으로 바삐 움직이는 것을 보면, 혼재가 발생했던 장소라고 해서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주인님이 무려 사흘 동안 평온의 파동으로 깨끗하게 정화하셨잖아요. 그런데도 거리껴 한다면 그것은 주인님의 실력을 의심하는 행위니까요.=
=이실리테 영혼 기사님 말씀대로입니다. 비록 친구와 동료를 떠나보낸 슬픔은 남아있지만, 저주에 대한 두려움은 다들 떨쳐냈습니다.=
그리 대화를 나누며 영주 집무실로 향하던 일행은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올려묶은 임세희가 똑같은 하녀복 차림의 여자들과 어디론가 향하는 것을 목격했다.
환인이 시선을 주는 쪽에 같이 시선을 던졌던 안느가 환인의 팔을 콕콕 찌르며 말한다.
=도령도령. 저기 저 아가씨, 임세희 아냐?=
=……!=
안느의 발언에 에사르트가 흠칫 어깨를 떨며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가 안느와 환인을 번갈아 보았다.
얼굴에 불안이 드러난다. ‘그러고 보니 성을 정화할 때도 아는 분위기였는데. 어떤 관계이신 거지?’ 하는 눈이다.
=아, 에사르트 도련님은 몰랐겠네. 세희 아가씨랑 우리 도령이랑 같은 고향 출신이었어.=
=……!!=
임세희도 서울 태생, 환인도 서울 태생이니 같은 고향 사람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임세희가 사라진 복도 쪽으로 시선을 주었던 환인은 뜨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에사르트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나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안심입니다.”
=…….=
=에사르트 도련님?=
걸음을 멈추고 심각한 얼굴을 하는 에사르트를 안느가 부르자 퍼뜩 정신 차리고는 누가 봐도 수상할 정도로 호들갑스럽게 웃는다.
=네, 넷? 아! 네. 아하하. 그, 그렇죠!? 하하, 하하하! 설마 환인 영혼사님과 같은 고향이실 줄은… 저도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넵. 하하하.=
흔들리는 눈동자, 폭발한 것처럼 빳빳하게 일어선 꼬리, 정서불안처럼 까닥까닥 움직이는 귀.
알드헬름이 임세희를 성적으로 희롱하고 폭력까지 행사했다는 걸 알고 있어서겠지.
그런 뜻을 드러내며 압박을 주는 것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좋지 못한 일이다.
무엇보다 임세희도 무분별하게 원망을 토해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알드헬름이 해를 끼쳤지만 반대로 목숨을 구해준 것도 사실이었고 성의 기사들과 하녀, 하인들이 보살펴준 은혜도 잊지 않았기에 마을에서 머무른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아무튼 누가 봐도 ‘찔리는 게 엄청나게 많아서 당황했습니다.’하는 태도지만, 일행은 여상스런 태도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고보니 알드헬름이 발명했다는 기술은 도령 고향에는 비교적 알려진 전문 기술이었다며?=
=……넹? 자, 잠시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 그것도 몰랐어? 하중 분산구조, 시멘트, 도로 포장 방식, 전부 도령네 고향에서 쓰이던 기술…….=
“안느.”
환인이 손가락을 세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음, 입을 다물고 슬쩍 물러난다. 하지만 안느가 미처 다 말하지 못한 내용을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
모피로 뒤덮인 에사르트의 안면 근육이 요동치다가 애써 평정을 되찾았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받아야 했을 보상을 계산한 뒤 최대한 빠르게 챙겨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녀가 그 기술을 발명해낸 것도 아니고 그저 알려진 것을 전파했을 뿐이니까요.”
=……저, 저기. 환인 영혼사님의 고향에서는… 그런 기술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녀도 나름 전문적인 학문…… 이를테면 주도의 고급 아카데미 출신입니다. 그렇기에 그런 전문적인 지식도 가지고 있는 거지요.”
그쪽 방면으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인물이니 그 자질을 발휘할 토대를 마련해준다면 비자룩스에 도움이 되는 기술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거라 슬쩍 운을 띄우자 에사르트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신중하고 진지하게 변했다.
상급 영혼사의 고향 사람. 거기에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인물.
에사르트 정도 되는 위정자라면 임세희를 절대 홀대하지 않을 것이다.
‘표정을 보니 일이 잘 풀리면 처로 맞이할 가능성도 보이는군.’
상급 영혼사의 같은 고향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가문의 사람에게 성적으로 희롱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혼재 사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정치적 이슈로 집중포화를 맞을 거다.
이 사태를 유야무야 넘기는 방법은 그녀가 당한 일을 커버하고도 남는 보상인데 그만한 보상이라면…….
차기 영주의 처 정도.
‘그건 임세희가 결정할 일이겠지.’
환인은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며 아직도 발이 멈춰있는 에사르트의 정신을 깨워 영주 집무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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