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화 〉 264 광산 마을 비자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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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진정시켜주는 차와 유르파의 다독임에 눈물을 그치고 진정한 임세희는 허리를 꾸벅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같은 한국 사람을 만났다는 게 너무 안심되어서 그만…….”
“아닙니다. 그래서, 절 찾아오신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임세희는 통성명조차 하지 않고 본론을 묻는 환인의 반응에 불안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니, 어차피 얼굴이랑 이름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보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담담한 걸까. 벌써 이 이상한 세계에 적응해버린 걸까? 그러고 보면 영혼사라는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인데다가 옆에는 감히 자신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예쁜 여자들도 있고…….
그런 임세희의 생각을 읽은 환인이지만 딱히 배려해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잘 대해주었다간 그녀가 짐 덩어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머, 먼저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저, 저주에 세뇌당해서 원래라면 주, 죽었을 텐데.”
“딱히 감사 인사를 듣고자 해서 한 일은 아니니 괜찮습니다.”
무뚝뚝하고 차가운 반응에 임세희는 심장이 더욱 세차게 뛰며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불안이 심장에서 넘쳐흐르는 듯한 느낌.
이 세상에 처음 떨어졌을 때의 느낌.
임세희는 다그치는 듯한 환인의 무표정한 눈이 무섭다고 생각하며 손을 덜덜 떨면서 말했다.
“원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방법을 아실까 싶어서였어요. 다,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에요!”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안타깝지만, 저도 모릅니다.”
“아…….”
낙담과 절망이 버무려져 급격하게 흐려지는 임세희의 눈빛.
임세희를 유심히 지켜보던 환인은 생각보다 건전한 그녀의 반응, 그리고 남들에게 폐를 끼치려 하지 않던 세뇌당한 때의 모습 등에서 판단을 유보하고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저는 환인이라고 합니다. 아가씨의 이름은?”
“임, 임세희예요. 21살이구 서울대를 다니고 있었어요. 아, 아빠는 판사고 엄, 엄마는 변호사에요. 집, 집에 돈도 많아요.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빠가 사례를 크게 해드릴 거예요!”
“돈이라면 저도 지구에 부족함 없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도 한국으로 돌아갈 단서는 없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도와드리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게 진실입니다.”
“앗…… 아아.”
“임세희씨는 언제 니오네브레스에 오셨습니까.”
“…이제 5개월 됐어요…….”
“저와 별 차이 없군요. 서기 몇 년 몇 월에, 어쩌다가 이 세계에 오시게 된 겁니까.”
“2021년 8월이요……. 학교에서 나와 집에 가는 길에 땅에 손가락만 한 보석이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하고 주웠는데, 경찰서에 가져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주위가 변해서…… 흑…….”
패턴이 자신과 흡사하다. 날려온 시기와 시간의 흐름을 보면 지구와 니오네브레스의 흐름도 1:1이고 시간의 괴리도 없다.
몇 가지 정보를 더 얻어보니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창 활개치던 자신과 똑같은 시대의 똑같은 시간 선임을 알게 되었다.
다만 납치라는 점과 동일범의 소행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정보와 증거가 부족하다.
“저는 이 금화 때문에 니오네브레스에 오게 되었습니다. 임세희 씨는 그 보석은 가지고 있습니까.”
“펴, 평원에서 괴, 괴물한테 쫓기면서 잃어버렸어요…….”
그녀가 트립한 곳은 라드세아 평원 한복판이었다는 말에 환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 나타난 것이 불행 중 다행이군요. 저 같은 경우에는 밀림의 미궁 한복판에 떨어졌었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 행운이었을 정도였지요.”
“네, 네…….”
“임세희 씨도 아시겠지만, 이 세상에는 우리 세상에 없는 괴물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처럼 트립한 사람 중 많은 수가 인적이 없는 오지에서 괴물들에게 비명횡사했고 또 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비자룩스라는 도시에 가까운 마을의 일원으로 있습니다.”
“…….”
“당신의 절망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살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형편이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만큼 일단 사회에 스며들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기회가 오지 않겠습니까.”
환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진정한 임세희는 그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방금 나눈 대화와 성에서 한 일을 생각해보면 눈앞의 남자는 영혼사로 각성한데다 저렇게 예쁜 여자들을 데리고 다닐 정도로 이 세상에 적응했다는 뜻이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면 괴물밖에 없는 미궁 한복판에 떨어져서 혼자 살아나왔을 정도로 강하다. 게다가 금화를 아직 들고 다니고 있다는 것은 한국으로 돌아갈 길을 찾고 있다는 게 아닐까?
“저, 환인… 오빠.”
“…….”
“저도, 저도 데려가 주시면 안돼요?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게요! 서, 성에서 일하면서 모아둔 돈이랑 보석도 조금 있어요. 그거 전부다 드릴 테니까 제발, 제발 저도 데려가 주세요. 엄마, 엄마랑 아빠가 보고 싶어요…….”
말하다보니 감정이 북받쳐올라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남자라곤 괴물같은 사람들뿐인데다 그마저도 얼마 없고 여자가 절대다수인 이런 이상한 곳에는 더 있고 싶지 않은 임세희였다.
원래 세상으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옷을 벗으라 해도 벗을 것이고 엎드려 개처럼 짖으라 해도 짖을 수 있었다.
그만큼 지난 5개월간 그녀가 보고 겪은 것, 알드헬름에게 도구처럼 다루어지던 경험은 그녀의 마음에 큰 상처를 냈다.
환인은 그걸 알고 있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포기하는 게 좋을 겁니다.”
“……예?”
“이 세상에는 당신과 저같은 처지인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원래 세계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저도 들어본 적 없고, 이 세상의 많은 사람이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도 믿지 않을 겁니다.”
그말대로였다. 임세희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걸 믿은 건 알드헬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아프거나 다른 먼 나라에서 온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것.
“하, 하지만 환인 오빠는 포기하지 않으셨잖아요……. 포…기한 사람의 눈이 아닌걸요…….”
“그것이 당신을 책임지고 데리고 다녀야 할 이유가 되지도 않습니다.”
창으로 심장을 찌르는 것처럼 아픈 이야기에 임세희는 소리 없이 눈물을 주륵주륵 흘렸다.
임세희와 대화하다 보니 상식이 충분했고 예의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가 성에서 조금 편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신경 써주려 마음 먹었었다.
에사르트의 반응과 제반 사항을 대입해보면 말 몇 마디면 충분한 일이니까. 그리고 그게 요즘 고찰하고 있는 인간의 도리라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해서였다.
예의에는 예의로, 호의에는 호의로.
“흑……. 흑흑…….”
다르게 말하면 직업을 각성하지도 못한, 무쓸모인 짐짝이나 다름없는 그녀를 데리고 다닐 생각은 전혀 없다는 뜻.
“저는 그 방법을 찾기 위해 힘을 쌓으면서 어렵고 위험한 길을 걸어갈 겁니다. 미궁을 들어갈 거고 괴물과도 싸울 겁니다. 필요하다면 이 세계의 권력자들과도 다투게 되겠지요. 거기에 아무런 힘도 없고 가진 거라곤 학교에서 배운 약간의 지식뿐인 임세희 씨가 있을 자리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
“절 따라온다면 1년 내에 당신이 죽을 확률이 90%가 넘는다고 장담하겠습니다.”
임세희는 잠깐 생각해보고 몸을 떨었다.
생각만해도 오줌을 지릴 것 같은 그 괴물보다 더 무서운 이형종이 가득한 미궁에 들어가겠다니, 정상이 아니다.
……아니, 저 남자가 정상이고 용기 있는 거겠지. 내가 겁쟁이에 비정상이고…….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해?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아가야 하는 거야? 엄마도, 아빠도, 맨날 싸우기만 하는 남동생도, 초코도 두 번 다 시 못 보고?
임세희는 절망했다. 절망해서 눈앞의 남자한테 소리 지르고 매달리고 울부짖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래 봤자 바뀌는 것은 없을 테니까.
아니, 이 세계에서 영혼사가 얼마나 대우받는 사람인지는 알고 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자신 따윈 손가락질 하나로 검에 묻은 녹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겠지…….
“윽…. 흐윽…… 으으윽…….”
한 여자가 절망해서 감정을 억누르며 우는 소리에 환인의 여자들은 안타까워했다.
환인은 아무런 감정도, 감흥도 느끼지 못한 모습으로 임세희가 소리죽여 우는 것을 바라보다가 한 손으로 평온의 파동을 쏘았다.
좀 더 환해지고 반짝이 효과까지 가미된 회백색 빛의 파동이 거실 내부를 휘감았다가 사라지고, 절망에 잠겨있던 임세희가 어느 정도 진정했을 때 환인이 입을 열었다.
“임세희 씨. 듣기로 당신이나 저처럼 이 세상에 트립한 사람을 모아 보호하고 있는 곳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엘프, 아십니까?”
“네, 네……. 지구에서 유명한 해외 판타지 영화를 본 적 있어요….”
“그 종족과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국가가 있습니다.”
환인은 자신이 여행하며 수집한 정보를 들려주며 그녀에게 선택하라고 했다.
엘프처럼 생긴 플뢰와 드워프처럼 생긴 프라우드 족이 살아가는 종족 연합 주도에 가면 위험한 일을 겪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은 남녀 성비도 반반 정도인데다 같은 지구 출신의 사람들이 다수 있으니 서로 위안받으면서 지낼 수 있을 거다.
“하,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문제가…….”
=그건 내가 해결해줄 수 있어. 난 땅신 교단 성투사거든. 본단에 연락 한 통 넣으면 널 데리러 사람들이 올 거야.=
안느의 장담에 임세희가 살짝 놀라며 “정말이요?” 묻는다. 그 대답은 환인이 해주었다.
“다만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곳은 니오네브레스이고 지구인과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장소이니까요. 통제를 받을 겁니다. 지구인의 사상은 그들의 입장에 위험한 것이 다수 있으니까요. 어쩌면 더 위험한 일이 있을 수 있죠.”
“이, 인체 실험 같은 게 있을 수 있다는 거네요…….”
확실히 말귀가 밝다. 판단력도 나쁘지 않고.
‘그러니 성노예처럼 지내면서까지 악착같이 살아남은 거겠지.’
=으~. 절대 없다고 소리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게 괴로워.=
안느가 불퉁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만약 다른 사람이 저런 소릴 했다면 천벌의 망치를 꺼내서 =결투다!= 소리쳤을 것이다. 그런데 도령이 저리 말하니까 ‘설마? 혹시?’하는 생각이 머릿속 한구석에 슬그머니 드는 거다.
“희박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작게 웃으며 그렇게 안느를 달랜 환인은 불안해하는 임세희에게 말했다.
“그러지 않고 여기에 남겠다면 제가 비자룩스 가문에 말을 해 편의를 봐달라고 부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남는다고 해서…… 좋은 게 있나요?”
“알드헬름에게 시멘트 제조법과 하중 분산 방식 같은 것을 알려준 사람은 당신이겠지요. 거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이성을 유지하고 상대의 의도와 심중을 어느정도 읽을 수 있는 지식과 지혜, 자신을 통제하는 자제력이 있는 당신이라면 노력 여하에 따라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을거라고 봅니다.”
=아가씨가 알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 자기의 발언력은 비자룩스의 모든 시민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을 정도란다? 이런 자기가 편의를 봐달라고 영주 가문에 부탁하면 모르긴 몰라도 부자처럼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을 거야. 적어도 이 마을에서 아가씨를 건드리거나 해꼬지할 사람은 이제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도 돼.=
환인의 이야기에 유르파의 장담이 더해지자 임세희의 눈빛이 작게 흔들렸다.
괴물이, 해수??가 사는 바다를 건너는 반년에 걸친 위험한 여행 끝에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종족 연합 주도로 갈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그나마 안전하게 살아갈 것인가.
“대답은 당장 하지 않아도 됩니다. 며칠간 머물렀다가 비자룩스를 떠날 예정이니…….”
“아니요.”
훌쩍, 코를 삼키며 작게 숨을 들이마신 임세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드세아에서도 예쁜 축에 속하는 얼굴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허리를 꾸벅 숙였다.
“여기서 지내겠습니다.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제게 이렇게나 큰 호의를 베풀어주셔서 감사드려요, 환인 오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환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동향 출신이고 예의를 아는 사람이다. 이 정도 베풂은 정도는 해줄 수 있다.
환인은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을 떠올리며 보다 안전하게 살 수 있을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주기 시작했고, 임세희는 한 글자도 놓치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해 천금 같은 지식과 정보를 머릿속에 받아들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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