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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269화 (269/813)

〈 269화 〉 263 광산 마을 비자룩스

* * *

성의 사람들을 모두 정화해준 환인은 그들의 격한 감사 인사를 받은 뒤 고성의 3층에서부터 건물에 들러붙은 저주의 잔재를 정화하기 시작했다.

방문을 일일이 열어 내부를 살피는 조금 귀찮은 작업이지만, 이건 업무라고 생각하며 여자친구들과 에사르트를 뒤에 달고 대형 실내 체육관만큼이나 넓은 고성을 꼼꼼히 살펴나갔다.

그렇게 정화를 시작하자 성의 가이드를 위해 따라붙은 에사르트는 가문이 입은 피해 현황에서부터 앞으로의 계획, 알드헬름은 처음부터 안 그랬다는 과거 이야기에 이것저것 신변잡기까지 온갖 이야기를 환인에게 늘어놓았다.

심리적인 부채 의식과 존경, 흠모, 경외 등등 여러 감정이 복합된 결과로 뭐라도 하지 않으면, 말 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불러온 행동이었다.

그중에는 관심 없고 의미도 없는 이야기도 있었고 영혼사를 두고 떠도는 음모론에 가까운 이야기와 진위 여부도 확인되지 않은 가십 찌라시도 있었지만, 도움되는 이야기도 있었다.

=환인 상급 영혼사님만큼 훌륭한 파동은 제 22살 평생 처음 봅니다. 이토록 온후하면서도 선명하고 포근하면서도 안온한데 그 범위조차 넓다니, 여러 영혼사님의 정화행을 신실한 마음으로 참관하였지만, 환인 상급 영혼사님 수준의 평온은 본 적이 없을 정도입니다. 아! 그렇다고 다른 영혼사님의 수준이 낮다는 뜻이 아니라……!=

평온의 파동은 다른 영혼사들도 자주 쓰는, 그야말로 영혼사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는 것.

비자룩스는 1년에서 2년의 텀을 두고 영혼사를 초빙해 마을의 정화를 이벤트적인 의미로 시행하는데, 그때 에사르트가 참관한 경험을 빗대어 환인이 쓰는 평온의 파동을 평가했던 것이다.

그말은 즉 영혼사는 승령천제때 거리를 따라 돌아다니며 평온의 파동으로 마을을 정화하고 영혼을 찾아 성불시킨다는 이야기.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소소한 도움을 받으며 3층을 정화해나가던 환인은 복도 곳곳에서 시체와 마주쳤고 가끔은 살아있는 세뇌자와도 부딪쳤다.

빨갛게 충혈된 눈, 부들거리는 몸. 지능이 크게 깎여나갔는지 대체로 문을 열고 나오지 못한 듯한 사람들이었다.

파아앗­!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저주에 얼룩덜룩해져 있었는데, 환인 일행을 공격하다가도 평온의 파동을 맞으면 대체로 저주가 중화되어 픽 쓰러져 기절하기 일쑤였다.

뻐걱!

=크헥.=

아니면 환인의 천칭에 얻어맞아 기절하던가.

=어이! 이쪽이다!=

그렇게 치료된 사람들은 에사르트가 불러온 병사들의 손에 실려나갔고 환인도 계속 정화를 해나가던 중 시더의 기억에서 본 방에 도착했다.

알드헬름의 방이다.

“…….”

=…….=

가죽이 벗겨진 채 굴러다니는 알드헬름의 머리통과 침대를 피범벅으로 만들어놓은 몸뚱이.

환인은 말없이 평온의 파동을 뿌리고 나왔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구석의 작은 방에서 또 다른 세뇌자와 마주쳤는데.

“시…러, 사람… 해치기… 싫어…….”

대부분 눈을 까뒤집고 환인 일행을 공격해온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그녀는 방의 구석에서 이불을 두 손으로 꼭 쥐고 부들부들 떨며 자신을 억누르고 있었다.

환인은 그녀의 정체를 눈치챘다.

못채는게 이상하다. 그녀는 한국어로 말을 하고 있었고 시더가 남겨준 기억 속에 있는 여자였으니까.

=어? 이 사람 도령이랑 많이 비슷한데.=

=그러게. 혹시 자기 고향 사람 아니니?=

=……!=

흠칫 놀라는 에사르트. 그리고 일행의 목소리에 반응해 겁먹은 것처럼 더욱 움츠러드는 여자, 임세희.

환인은 말없이 평온의 파동을 펼쳤고, 회백색 빛 무리에 파묻혔던 임세희는 긴장의 끈이 끊어진 것처럼 아, 짧은 신음과 함께 풀썩 쓰러져 기절했다.

=와, 얘는 정신력이 강하네. 저주에 세뇌당했어도 사람을 해치기 싫어서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니.=

“이런 사람이 더 있을지 모른다. 좀 더 빠르게 움직이지.”

=아, 응.=

임세희는 에사르트가 호출한 병사들의 손에 들려 곧장 밖으로 실려나갔고 환인은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에사르트의 이야기가 좀 더 많아지고 두서가 없어졌다.

영혼사가 살해당할 경우 발생하는 혼의 역류와 영식?이 한차례 재가공되어서 상급 영혼사가 행하는 심판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

영혼술의 극에 다다른 영혼사는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에도 강제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이야기.

사악한 영혼사는 산사람의 몸에서도 영혼을 뽑아낼 수 있다거나…….

=영혼의 길을 통해 아무리 먼 거리도 단숨에 이동할 수 있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은연중에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물론 말이 안 되는 이야기죠! 하하하! 하하… 하……. 죄, 죄송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뒤늦게 무례한 말을 떠벌였다고 생각했는지 황급히 사과하는 에사르트에게 웃어준 환인은 과연 그게 전부 허무맹랑한 이야기일까 생각했다.

의외로 몇 가지는 사실에 기반을 둬 사람의 상상력이 꾸며낸 이야기가 있지 않았던가. 그러다 보니 다른 루머도 과연 어떨까 싶었던 거다.

거기에 예상대로 호족 가문 정도 되면 혼재를 처리할 비장의 수단이 있었다는 걸 확인했다.

1발에 가격을 정할 수 없는 영혼의 축성 받은 화살이 그것이었다.

상급 영혼사가 특수 제작자와 함께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제작한 석궁용 화살로, 그걸 맞추면 영혼사가 공격한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그 화살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세뇌자들에게 파괴되었습니다.=

하필 발사하려던 기사대장이 저주의 창에 꿰뚫리는 바람에 그대로 박살 났다고.

아무튼, 여러모로 정보 수집 등에 도움이 되었기에 환인은 조금 시끄러웠지만 성실하게 반응해주며 고성의 정화와 방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한 세뇌자들을 구출해나갔다.

=죽었을 거로 생각한 이들이 이렇게나 살아있었다니…….=

그렇게 정화 첫날 2층과 3층을 정화하고 9명을 구한 환인은 사람들에게 더욱 큰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이튿날.

다시 고성을 방문한 환인은 남은 1층을 정화한 뒤 재차 2층으로 올라가며 혹시 놓친 부분이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1층에도 위층에서 흘러내린 저주가 일부 묻어있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실수하지 않으려면 재확인은 필수.

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 고성 내부는 물론 내성 안쪽 정원과 다른 부속 건물들을 모두 둘러보며 고성에 들러붙은 저주를 모두 정화할 수 있었다.

환인이 성을 정화하는 사이 알드헬름 혼재 사태는 에사르트의 형제와 누이들의 지휘 아래 빠르게 정리되어나갔다.

혼재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대두하는 것이 주민의 이탈이다. 폭동을 빙자한 약탈도 벌어지고 마을이 혼란스러워진 틈을 탄 범죄가 기승을 부린다.

그것을 막기 위해 생존한 바위 기사단과 병사들, 순찰대를 동원해 사태는 이미 진정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한편 부푸는 악성 루머를 진압했다.

그냥 평범한 혼재도 아니고 마을을 다스리는 호족 가문 출신의 혼재다.

이 사실이 퍼지게 되면 2차, 3차 소문의 확대와 가공이 이루어져 호족 가문의 명예가 진창에 처박힐 수도 있는 노릇.

에사르트의 동생들은 그 점을 우려해 최대한 빠르고 현명하게 모든 일을 투명하게 처리했다.

먼저 영주 직인이 찍힌 대자보를 통해 사건의 개요와 이후 처리를 명시했고, 운 좋게 마을을 방문하고 있던 상급 영혼사님을 모셔서 혼재를 소멸시켰으며 대규모 정화를 통해 저주의 확산을 원천 봉쇄했다고 발표했다.

악의적이고 그릇된 소문의 확산과 사람들의 걱정을 깔끔한 방식으로 막아낸 것이다.

그리고 초대량의 일라일 꽃을 공수해와서 성 주변과 마을 곳곳에 도배하다시피 해 마을이 혼재로부터 안전하다는 사실을 재차 증명해 혼란이 일어날 요소를 근본적으로 차단했다.

이 일로 알드헬름이 저지른 패악질과 누군가의 원한을 사서 살해당한 뒤 혼재가 되었다는 사실이 마을에 널리 퍼졌다.

퍼질 수밖에 없었다. 환인이 신경 쓰고 있다고 알려진 일이다. 공정성과 투명성을 위해 모든 것을 밝혔으니 알드헬름은 죽어서도 사람들의 묵념과 추모를 받지 못하고 마을을 말아먹을 뻔한 천하에 둘도 없는 되놈이 되었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그날 성에서 일하던 30명에 달하는 시종, 하인과 하녀, 기사와 병사들이 살해당했다.

그 사람들이 모두 마을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진실을 묻었더라도 개새끼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

이 모든 활동의 결과물 덕분에 비자룩스 가문의 평판은 간신히 나락까지 처박히지 않을 수 있었다.

가문의 치부를 숨기려다 일을 크게 키우지 않은 점.

제때 마을에 머무르는 상급 영혼사님을 초빙해 사태를 최소한의 피해로 막아낸 점.

에사르트의 오누이들이 이후 사태에 돈을 아낌없이 풀어 위자료와 위로금을 지급하는 식으로 피해자들에게 손해 배상을 한 점.

혼재화가 성 밖으로 흐르지 않게 온 힘을 다했다는 점 등이 참작된 것.

하지만 마을 밖에서의 비자룩스 평판은 나락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사람은 더욱 자극적인 것에 환호하는 생물. 비자룩스가 혼재를 어떻게 해결했느냐보다는 비자룩스 가문 내에서 혼재가 발생했다는 점에 주목할 테니까.

반대급부로 환인의 명성과 위광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올랐다.

재앙화된 혼재를 제거한 위대한 상급 영혼사님. 남은 혼재의 저주도 손수 정화하시고 죽은 자의 영혼을 모아 성불시켜준 혼의 거룩한 순례자.

성의 저주 제거 작업을 하던 중에도 실시간으로 명성이 올라가는 것을 체감할 수 있던 환인이었지만, 저주 제거 작업이 끝났을 때는 호텔을 나서기도 곤란할 정도로 이름이 드높아진 걸 느꼈다.

마을 주민들과 아녀자 수백 명이 어떻게든 환인을 한 번이라도 보고자 돌심장 호텔 주변에 포진했고 거의 매 시간 꼴로 마을의 유지나 지역의 명사들이 찾아와 알현(그들이 이렇게 말했다) 받을 수 있길 청해왔던 것.

물론 환인은 그 요청을 전부 여자친구들에게 미뤄버렸다.

“이름이 알려지는 것은 바라는 바이지만, 별 의미도 없이 인맥 쌓기로 만나자고 찾아오는 사람을 일일이 다 만나줄 수는 없다.”

=응응. 영혼 기사 업무 중에는 호위 말고도 이런 막무가내 접견 요청을 처리하는 것도 있으니까. 자기는 신경 쓰지 말고 우리한테 맡기렴.=

=들어보고 도령이 꼭 만나야겠다 싶은 거는 따로 메모해서 전해줄게. 사흘 동안 정화하고 다니느라 지쳤을 테니까 도령은 편히 쉬어.=

=주인님, 다녀올게요.=

여자친구들이 이러고 있을 때 환인도 나름대로 정보 수집 활동을 벌였다.

그덕에 스타에타는 대외적으로 어미도 알아보지 못하는 아들을 진정시키려다 죽었다고 알려진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 정치적인 의미가 담겨있음을 간파했지만, 환인은 딱히 대응하지는 않았다.

원래 목적인 알드헬름을 죽였고 그 어미인 스타에타도 어쩌다 보니 혼까지 소멸시켰다.

영혼화살로 심장을 터트린 게 영혼에게까지 영향을 줄지 몰랐지만 아무튼, 후환은 깨끗하게 제거되었으니 여기서 더 신경 쓰는 것은 기력의 낭비일 뿐인 것.

대신 다른 쪽으로 정보를 흘리고 소문을 부풀렸다.

시더가 남긴 기억을 통해 알게 된 사실, 알드헬름이 발명하고 개발했다는 기술은 알고 보니 알드헬름이 거두어들인 검은 머리의 여자가 만들어낸 성과였다는 이야기였다.

이 소문이 퍼지고 얼마 뒤, 해당 인물이 환인을 찾아왔다.

“아…… 정말, 정말 한국 사람이었어. 흑, 흐아앙…….”

임세희, 알드헬름에게 발견되어 구조 당한 뒤 성노예와 지식 보따리로 활용당하던 여자는 환인을 보자마자 눈물을 쏟으며 엉엉 울었다.

당황한 안느와 유르파가 어깨를 토닥이며 그녀를 진정시키는 사이 이실리테가 물었다.

=같은 고향 분이라고 해서 모셔왔는데…… 제가 실수한 건가요?=

“아니다. 동향 사람인 것은 맞지.”

=어~. 근데 도령은 별로 반가운 것 같지 않은데.=

겨우겨우 울음을 그친 임세희를 소파에 앉히고 좀 떨어져 있던 환인에게 다가선 안느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말하자 환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국에서는 이런 말이 있지. 타향에서 만난 동향인을 가장 조심하라고.”

=하지만 여행지도 아니고 완벽히 다른 세계잖아. 나도 딴 차원에서 같은 차원, 그것도 같은 나라 출신을 만나면 엄청나게 안도할 거 같은데…….=

“두 개의 차원이 존재한다고 알려진 마당이다. 또 다른 평행 세계가 존재할지도 알 수 없는 일이고 시간대마저 같으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만약 전부 동일하다고 한다고 해도…….”

인구 5,000만의 국가. 그중에서 1명과 만난 것에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자신의 감정이 다채롭지 못하다고 설명하자 이실리테와 안느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5,000만이면 사대 국가 인구 전부 합친 것보다 많잖아? 도령 엄청 큰 나라 출신이구나.=

=그렇게나 많은 사람 중에 1명이라면 남처럼 느껴질 법도 하네요.=

아무튼, 임세희가 자신을 찾아오게 된 경위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환인이었다.

고성 정화작업 도중 쉬고 있을 때, 세뇌를 치료해준 그녀가 다른 하녀들과 지나가다가 자신과 여자친구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는 귀신을 본 것처럼 눈을 휘둥그레 뜬 걸 봤었으니까.

거기에 이름과 외모를 본다면 같은 한국인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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