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268화 (268/813)

〈 268화 〉 262 비자룩스의 혼재

* * *

* * * *

환인에게 매우 간단한 락픽 도구를 받은 시더는 말없이 고성으로 날아갔다.

도구가 지상에서 보이지 않게끔, 그렇다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밤새들에게 도구를 빼앗기지 않을 정도로.

현재 그녀의 머릿속은 오직 두 가지 생각뿐이었다.

알드헬름을 죽여 아들을 지키고, 다음 생이라는 게 있다면 영혼사님의 주변에서 태어나 영혼사님께 한평생 봉사하며 살겠다는 생각.

‘영혼사님은 지금 내가 옆에 머물며 도움을 주시길 바라는 것 같았지만…….’

안될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충동이 불쑥불쑥 들고 있다.

세상이 왜 나와 내 아들에게만 이렇게 가혹한가. 어째서 내가 그런 꼴을 겪으며 죽어야 했나. 왜 내 아들은 태어난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한평생 살아가야만 하는가.

조금만 긴장을 풀면 곧장 혼재가 되어버릴 것 같은 분노와 끈적한 증오가 피어나고 팔다리가 불타는 것처럼 아프게 된다.

영혼사님의 곁에서 평온의 파동을 받으면 괜찮아지지만, 그것도 점차 효과가 없어져 간다.

이대로 영혼사님의 곁에 계속 있다간 언젠가 반드시 혼재로 변해 큰 폐를 끼칠 거다.

‘그러기 전에 알드헬름을 죽이고 이승을 떠나야 해. 그분께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조금 더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아들을 얻었고 죽어서나마 생전에 꿈꿔보았던 은밀한 소원도 나름 충족했다.

이 정도면 할건 다 해본 삶이다. 더 이상은 미련이 없다.

비자룩스 성에 도착한 시더는 3층의 모서리 방 창문에 도착해 창문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씨발…… 씨발! 씨발!!=

퍽, 퍽! 뻑! 퍽퍽!

“악! 윽, 아악! 도, 도련님 제발 살려…… 꺄악!”

=닥쳐! 너도 날 우습게 여기는 거야?! 입 다물어! 닥치라고!!=

“그런 게 아니윽! 커헉! 끄엡!!=

퍼벅, 뻑, 콱콱!

=길바닥에서 뒤져가던 널 주워준 게 누구야?! 네년이 굶어 죽지 않게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챙겨준 게 누구냐고!!=

“도련님, 흐윽. 도련님이에요…!”

=그러면 주둥이 닥치고 내가 하는 대로 조용히 있으란 말이야!!=

퍽퍽퍽!

“아악!!”

화나게도 소중한 아들과 닮은 그 개말종은 벌거벗은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를 깔고 앉아 얼굴에 주먹질하고 젖무덤을 내려치며 폭행하는 동시에 강간하는 중이었다.

이상하게도 여자는 짐승 귀도 없고 꼬리도 없었던데다 피부색이 영혼사님과 약간 비슷해 보였지만, 시더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여자보다 알드헬름에게 집중했다.

빠각!

“끅!”

=아얏! 이씨발!!=

여자의 얼굴을 내려칠 때 광대뼈를 찍었는지 손을 털며 짜증 내다가 여자를 마구 짓밟고 걷어차며 있는 대로 짜증을 부리는 알드헬름.

그사이 여자는 기절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고 알드헬름은 때리다가 지쳤는지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 침대에서 끌어 내려 바닥에 내팽개친다.

기절한 여자를 아무렇게나 널브러트려놓고 자신은 침대에 풀썩 드러누워 씩씩거렸다.

=씨발, 개 같은 영혼사 새끼. 그 새끼만 아니었으면……. 하, 애새끼도 병에 걸려 죽었고 다른 년은 더 없는데…… 짜증 나게…….=

그렇게 한참 동안 영혼사님을 욕하며 씩씩거리던 알드헬름은 벌거벗은 채 팔자 좋게 늘어져 잠든다.

역시 쓰레기다. 아니, 생각한 것 이상으로 더한 쓰레기다.

저 쓰레기를 죽이는 것으로 모든 걸 끝내야 하나? 저 쓰레기가 태어나도록 밭이 되어준 집안과 저렇게 성장하도록 내버려둔 마을에도 벌을 내려야 하는 거 아닐까?

알드헬름이 잠에서 깰세라 잠시 기다리던 시더는 영혼사님이 준 도구로 창문을 열려다 창문이 잠겨있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시더는 쇳조각을 근처 화단에 파묻은 뒤 창문을 열고 알드헬름의 방안으로 들어왔다.

직후 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들어온 여기사는 창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다가 바닥에 쓰러진 여자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창문을 닫고 돌아온 여기사는 얼굴이 뭉개지고 온몸에 멍과 타박상이 든 여자를 조심스레 안아 들고 나간다.

무엇을 하려는 걸까. 시더는 벽에 붙어 문밖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엉망진창이군….=

=어. 회복제 그거 좀 남아있지? 줘봐.=

=여기.=

=…….=

=…….=

“으…….”

=임세희, 정신이 드냐?=

“…시트러 님….”

=네가 고생이 많다.=

“…아, 아니에요……. 아얏.”

=아니긴. 우릴 욕해도 괜찮아. 이걸 묵인하고 있는 우리도 도련님과 한패나 다름없으니까. 아 해봐. …입안도 다 터졌네. 이거 한 모금 입에 머금고 있어.=

“…함하함히하…….”

=감사해 하지 마. 우리는 감사 인사를 받을 만큼 착한 인간들이 아니야. 알드헬름 도련님이 네게 폭력을 쓰느라 마을 사람들을 건드리지 않는 걸 알고 일부러 손쓰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거니까.=

“그, 그런 말씀 마세요. 벌판에서 죽어가는 절 구해주신 분도 알드헬름 도련님이시고 기사님들이니까요…. 겨울에 추위에 떨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는 것도 도련님 덕분이구요…….”

=…….=

=후우……. 여기 옷이야. 입고 조심해서 돌아가라.=

“네. 기사님들도 고생하세요…….”

사박사박 멀어지는 발소리, 철그럭절그럭 쇳덩어리들이 잠깐 움직이는 소리.

잠시 후 방문 앞은 조용해졌고 시더는 분노가 끈적한 타르처럼 심장을 물들이는 것을 느꼈다.

다 똑같다. 영주라는 놈도, 그 아들이라는 놈도, 방문 앞의 기사라는 놈도 다 똑같아.

알면서도 내버려두고 방관하다니, 역시 이 집안은 잘못됐어.

시더는 호화로운 침대맡으로 다가가 태평하게 잠든 알드헬름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생전에는 아들과 닮은 외모 탓에 외려 안타까움을 느꼈었다.

얼마나 나쁜 환경에서 자라났기에 이런 짓을 하게 되었을까. 제대로 된 어른들에게 잘 교육받았다면 착하게 자라났을 텐데.

원한과 분노를 곱씹으려 해도 아들과 닮은 외모 탓에 강한 감정을 가지기 어려웠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겉은 아들을 닮았지만, 속에는 말도 안 되는 끔찍한 괴물이 똬리를 틀고 있다.

「…….」

이 쓰레기가 죽는다면 옆방에 있는 이 쓰레기를 낳은 년이 영혼사님을 의심하고 해악을 끼치려 할 텐데…….

이 쓰레기가 죽고난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히 보이는데 모두 영혼사님에게 미루고 내 원한만 충족하고 성불하는 게 옳은 일일까?

역시 그냥 죽일 수는 없다.

=으…… 씨발 왜 이렇게 추운 거야. 개년들이 난방 안 켰나……. 엄마랑 이 좆같은 마을을 빨리 떠서 주도로 가든가 해야지 씹…….=

시더가 흘리는 한기에 잠에서 깬 알드헬름은 이불을 둘둘 감고 다시 잠을 청한다.

그 모습에 스산한 눈빛을 흘린 시더는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검붉게 물든 자신의 팔다리를 가만히 보다가 작게 웃었다.

침대 근처의 탁자에 올려진 과일 바구니, 그곳에 놓인 날카로운 과도를 집어든 시더는 훌륭한 예기를 발하는 날을 검지로 스윽 문질러보았다.

검붉은 손끝이 쩍 갈라져서 피처럼 붉은 연기를 살짝 흘리다가 스르륵 다시 붙는다.

「…….」

시더는 있지도 않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이걸 실행하면 진짜 그런 일이 벌어질까?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만, 만약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과도를 꾹 쥐고 가만히 있던 시더는 곧 머리만 드러낸 채 웅얼거리는 알드헬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머리를 사아악 쓰다듬어주기 시작했다.

=……? 뭐야… 누구야. 엄마야?=

「내가 네 어미로 보여?」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엄마가 같이 잘려고 온 건가, 고개를 들었던 알드헬름은 영문 모를 한기가 귀를 타고 흐른다고 느꼈다.

=누구…… 끄르륽!?=

그 순간 목이 불타오르는 고통에 휩싸여 버둥거렸다.

숨이 안 쉬어진다. 무언가 걸쭉한 게 숨구멍을 틀어막아 호흡이 안된다.

팔을 들어 목을 잡으려 해봤지만 몸에 둘둘말린 두꺼운 이불이 구속구 역할을 해 헛된 시도로 돌아갈 뿐이다.

크어, 꺼르륵, 끄웨에엑…!

「좋구나, 참으로 좋아.」

알드헬름의 신음과 비명에 시더는 눈에서 귀기를 흘리며 연신 과도로 알드헬름의 얼굴 가죽을 도려내기 시작한다.

스걱서걱서걱.

푸슈슈슈슛­

끕……! 끄르륵! 꺼어억, 커허얽……!

「호호호. 과도가 참 잘 드는 구나. 역시 광산과 제철의 도시 비자룩스산 날붙이다워. 호호호.」

생전에는 개미 한 마리만 잡아도 마음이 불편했는데, 알드헬름의 얼굴 가죽을 도려내는 지금은 온몸에 기쁨이 충만하다.

알드헬름이 비명과 피를 토해내는 꼴을 보고 있으니 환인과 교접한 경험이 떠오를 만큼 강렬한 쾌감이 밀려오는 거다.

시더는 즐겁게 웃으며 알드헬름의 얼굴 가죽을 모두 벗겨 낸 뒤 눈알을 찔러 파내고 목을 과도로 썰어나갔다.

첫 칼질에 기도와 식도를 베인 알드헬름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산채로 얼굴과 목이 잘려나가며 키힉, 크러럵, 컯, 꺼어어­ 쉰소리와 함께 피를 토해낸다.

동맥이 끊어져 어마어마한 피가 흘러나와 이불과 이부자리를 물들여나가고, 생으로 목을 썰리던 알드헬름은 어마어마한 쇼크가 연달아 밀려와 기절했다 정신 차리고 기절했다 정신 차리길 반복하다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숨이 끊어져 사망했다.

「우후후. 얼마나 잘 먹고 잘 자랐는지 살점이 아주 넉넉해. 목뼈도 참으로 두껍고.」

알드헬름은 진작에 죽었지만 시더는 아랑곳하지 않고 키득키득 웃으며 목뼈는 그대로 두고 돌려 자르기를 하듯 목을 계속 잘라나갔다.

이윽고 목뼈만 남았을 때 알드헬름의 머릴 두 손으로 잡고 360도 빙글 돌려 뿌득­ 머리를 뜯어낸 시더는 고통과 절규가 공존하는 머리의 표정에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가 휙, 뒤로 집어 던졌다.

텅­ 터덩­ 데구르르르…….

알드헬름의 머리가 바닥을 피로 물들이며 구르는 것을 눈웃음짓고 감상하던 시더는 잠시 후 자신의 앞에 서서히 일어나는 알드헬름의 영혼을 짙은 미소로 바라보았다.

「좋아……. 어서 일어나렴, 빨리 일어나서 날 기쁘게 해줘.」

이 쓰레기가 혼재화 하더라도 다변형 방어 장치를 다루는 실력과 6급과 4급 영혼 기사를 상대로 압도적인 기량을 보여주신 무력, 수십 명의 영혼을 동시에 성불시키는 극치의 영혼력을 지닌 영혼사님이라면 큰 어려움 없이 퇴치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재앙화한 혼재를 퇴치한 그 명성이 영혼사님의 이름 위에 고스란히 쌓이겠지.

자식새끼가 혼재가 되어 가문과 마을에 큰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비자룩스 가문의 이름은 땅에 떨어질 것이다.

같은 호족 사회에서 고개도 들고다니지 못하는 것은 덤. 거기다 알드헬름이 저질러왔던 악행이 까발려진다면 그 누구도 비자룩스와 어울리려 하지 않을 거다.

2급 호족이 1급 호족으로 강등당했다가 고족으로 내려가서는 곧내 일반인이 되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혼재를 물리친 영혼사님에게 비자룩스 가문은 적지 않은 사례를 치를 터.

「씨…이발…… 뭐, 뭐야….」

이윽고 영혼이 되어 허우적거리는 알드헬름에게 다가간 시더는 그의 무의식적인 상황파악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무엇이긴. 네가 너의 가문을 말아먹는 시초가 되는 날이지.」

「하? 네년은 뭐…… 어, 너, 너는…….」

시더는 증오와 원한과 타락의 기운을 몰아넣은 두 팔을 다짜고짜 알드헬름의 영혼에 쑤셔 넣었다.

「끄아아아악?!!!」

혼이 불살라지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알드헬름. 시더 또한 영혼이 쪼그라드는듯한 극통을 느꼈지만, 자신의 고통보다 알드헬름의 고통에 기뻐하며 두 팔을 떼어냈다.

「후후 쿨럭. 호호호. 과연 생각대로네.」

타락에 물든 시더의 두 팔은 어깨 아래에서부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오염된 두 팔을 몸에 받아들인 알드헬름이 몸 전체가 붉게 물들어가는 중.

훗, 몸도 없지만 고통을 추스르려 짧게 숨을 내뱉은 시더는 이번엔 두 다리를 알드헬름의 머리와 어깨에 박아넣는다.

「키야아아아악­!!!」

「끄으읍…! 차, 참으로 듣기 좋은 소리네!」

그리고 잠시 후 알드헬름에게서 떨어져나온 시더는 팔다리가 없어진 모습으로 둥둥 떠다니며 절정의 쾌락을 느끼듯이 헐떡였다.

영혼이 전부 시뻘겋게 물들어 괴수처럼 울부짖는 알드헬름이 그녀에게 강한 정신적 자극을 주었던 것.

「꺄으아아아아악­!!!!」

세상이 떠나갈 듯이 울부짖다가 어느 순간 뚝 멈추고는 천천히 몸을 웅크리며 잠잠해지는 알드헬름.

시더는 어쩐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몇 시간 뒤에 알드헬름은 온전히 재앙화해서 저주를 사방에 뿌릴 거라고 말이다.

옆방의 개년도 자기 아들의 손에 뒤지거나 하겠지.

강렬한 정신적 절정을 느끼던 시더는 그러한 강한 자극이 사라지자 온몸이, 정신이 나른해지며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했……. 남은…… 영혼사님…… 부디… 건강…….」

원한도, 분노도, 타락과 절망도 모두 알드헬름에게 떠넘긴 시더는 작은 미소를 남긴 채 빛무리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그녀가 마지막에 생각한 것은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아들과, 그런 아들보다 더 커진 환인의 얼굴이었다.

* * * *

‘……일이 이렇게 된 거군.’

시더의 기억을 통해 전말을 알게 된 환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설마 마지막에 자신을 위해 선물을 남겨두고 갔을 줄이야.

=주인님?=

30초 정도 굳어있다가 갑자기 웃음을 흘리는 모습에 이실리테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환인은 그녀의 먼지투성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시더가 기억을 남겨주고 갔다.”

=시더 씨가요?=

“그래.”

의아해하는 여자친구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해주자 여자들이 작게 감탄사를 흘렸다.

=완벽한 복수인걸.=

=그러게 말이야. 역시 엄마가 한을 품으면 무서워~.=

“내려가지.”

오늘 이후 알드헬름이 숨겨놓은 루브이주 가문의 또 다른 핏줄을 어떻게 찾을지 고민했었는데 그에 대한 해답도 시더의 기억 속에 있었다.

‘병에 걸려 죽었다니.’

밖에서 웅성이는 소리를 들으며 계단을 내려가던 환인은 더 이상 비자룩스와 알드헬름의 일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화만 끝내면 모든 일이 마무리될 터, 이제 마음 편히 라드세아의 주도로 향하면 된다.

환인은 시더가 남긴 구슬 두 개를 흡수하고 한층 성장한 영혼술을 떠올렸다.

이번에는 푸른 구슬이 몇 개 되지 않아서일까, 별다른 스킬을 얻지 못했다. 대신 평온의 파동과 관련된 능력이 좀 더 강화되었다.

“…….”

주먹을 쥔 환인이 잠시 정신을 집중했다가 복도를 향해 주먹을 내밀자 회백색 빛의 파동이 파도처럼 전방을 향해 쏟아진다.

=와아.=

=오? 이제 한 손으로도 쓸 수 있게 됐네?=

=빛도 더 짙어진 거 같은걸.=

여자친구들은 회백색 파동이 계단을 가득 채우는 아름다운 광경에 탄성을 질렀다.

환인은 때처럼 벽에 들러붙어 있는 저주의 띠가 정화되어가는 것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꾸욱, 주먹에 힘을 주었다.

농도가 매우 짙어졌다. 이 정도면 재앙화된 혼재가 발악할 때 쏟아내던 농도의 저주 띠도 정화할 수 있을 정도.

계단을따라 위로, 아래로 내려가는 파문을 보면 사거리도 대폭 늘었다.

내려가며 평온의 파동을 몇 차례 더 쏴본 결과 환인은 평온의 파동의 변화점을 알 수 있었다.

평온의 파동 효과를 끌어올리거나 혹은 평온의 파동 범위를 넓힐 수 있게 되었다. 아니면 위력과 범위를 둘 다 올릴 수도 있고.

다만 위력을 올리고 범위를 넓힐수록 훈기가 많이 감소한다.

훈기가 소모되지 않는 수준은 성장 전보다 빛의 파문 농도와 범위를 1.3배 정도 더 끌어올린 정도.

‘좋아졌군.’

방향 지정 발사, 발사 편의성 증가, 전방위 발사, 돔 형태의 보호막까지. 이정도면 앞으로 대? 혼재전에서 오늘처럼 곤란을 겪을 일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방향을 지정해서 한 손으로 쏠 수 있게 된 게 무엇보다 좋았다. 솔직히 방사?? 형태의 파동은 아군에게 뿌리는 방어형이지 공격형은 절대 아니니까.

‘그나저나…….’

시더의 기억 한켠에 저장된 이름 세 글자와 여자 한 명.

이건 그거겠지. 자신과 같은 트립을 당한 사람.

임세희라는 이름과 외모를 보면 백퍼센트 한국인이다. 나이는 대충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알드헬름이 발명해낸 것들은 전부 그 여자의 지식일게 틀림없겠지. 시멘트처럼.’

나이를 보면 사회물을 먹은 건 아니다. 아마 대학을 다니다가 트립당하지 않았을까.

환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고 결론을 내리며 신경 껐다.

1층 홀을 지나 정원으로 나가자 여러 가지 가구와 짐, 가재도구 등이 쌓여있는 넓은 정원에 성의 가솔 수십 명과 기사, 병사들이 모여 웅성이는 게 눈에 들어온다.

=오셨습니까. 저들이 당시 성에 있던 식솔들 전원입니다.=

여기저기 흙먼지가 묻어 꾀죄죄해진 에사르트가 개처럼 헐떡이며 달려와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의 뒤로 동생으로 보이는 늑대와 여우 혼혈의 남자 둘에 여우 귀와 늑대 귀가 섞인 여자들 다섯도 함께였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예! 다들 오와 열을 맞춰 질서정연하게 영혼사님의 앞으로 이동한다!=

대충 평온의 파동을 뿌려주어도 되지만, 환인은 좀 더 완벽을 기하기 위해 사람들의 상태까지 살펴보며 평온의 파동을 섬세하게 뿌려나갔다.

사실 환인이 이토록 성의를 다해 움직이는 이유는 보상 때문이었다.

기억 속에서 보았던 시더의 판단대로 자신이 신경을 써주면 써주는 만큼 비자룩스 가문이 적지 않은 보상을 해줄 거라고 계산한 것이다.

만약 적절한 보상을 주지 않으면?

그에 걸맞은 소문을 퍼트려줄 뿐이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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