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264화 (264/813)

〈 264화 〉 258 비자룩스의 혼재

* * *

비자룩스 성에 혼재가 발생했다는 에사르트의 피를 토하는 외침에 환인이 먼저 떠올린 것은 시더였다.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는 바람에 분노가 임계를 넘었나?

아니다. 혼재화와 악령화의 구분은 아직 모호하지만, 악령의 늪에 한 발 내디뎠던 시더라면 혼재가 아닌 악령화가 되었을 테지.

그다음으로 생각한 것은 직접적으로 얼굴을 본 적 없는 알드헬름이었다. 영혼에게 암살당해 이성을 잃고 격노, 향할 곳 없는 진득한 원한과 증오로 혼재화했다고 하면 납득 되니까.

남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정신병자일수록 반비례해서 자신의 목숨을 중히 여기는 경향이 크다.

다른 사람을 벌레 죽이듯 고문하고 살해하는 알드헬름이라면 자신이 살해당했다는 걸 아는 순간 세월로 농축되어야 할 원한이 단숨에 형성될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 에사르트와 그의 호위는 전투를 치른 듯한 모습이다. 혼재가 사람을 공격했다는 뜻이니 곧 재앙이 시작된다고 봐야 할 테지.

주변 사람들에게 저주를 뿌리고, 시체를 일으키고, 살아있는 사람에게 빙의하고.

최종 단계는 자신의 시체가 일어난 것을 본 영혼도 자신이 더럽혀졌다며 연쇄적으로 혼재화하는 것. 물론 혼재에게 살해당한 사람의 영혼도 혼재로 변할 가능성이 크다.

일이 이쯤 되면 영혼을 공격할 수단이 있는 상급 영혼사가 아닌 이상 사태 해결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비자룩스 가문은 자신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도와준다면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리고 돕지 않는다면 얻을 수 있는 것과 잃을 것은 무엇인가.

굳은 얼굴로 여기까지 1초만에 사고한 환인은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일단 갑시다.”

하나 확실한 것은 혼재를 돕지 않을 경우 자신의 명성과 평판이 추락하고 여자친구들의 신뢰도 잃을 거라는 점.

명성과 평판 따위는 아쉽지 않지만, 여자친구들의 믿음에 금이 가는 것은 원치 않는다.

‘어째서?’

서로 사랑하겠다는 구두상의 계약을 맺었지만 계약이란 깨어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마음 한구석에 의문이 돋아났지만 그 점은 무시한다.

대신 자신도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에 집중하며 (다른 사람의 눈에) 망설임 없이 비상에 오르는 환인.

=크윽… 진심으로 면목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에사르트의 외침과 동시에 호위들이 즉시 환인의 여자들에게 쿠에를 양도한다.

=영혼 기사님들은 이걸 타고 가십시오!=

=이쪽입니다!=

타고 왔던 갈색 쿠에의 등에 오른 에사르트가 박차를 가해 앞으로 튀어 나가자 비상도 눈치껏 에사르트의 옆으로 따라붙는다.

환인은 여자친구들이 뒤따라오는 것을 확인하고 에사르트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혼재가 확실한 겁니까?! 어제만 해도 성에 혼재의 기운은 느끼지 못했습니다만! 잘못 보셨을 가능성은 없지 않습니까!”

잠시 침통한 표정을 지은 에사르트는 공업 구역의 인적 없는 뒷길을 확인 후 강한 바람 소리에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혼재화한 것은 집안의 수치가 된 동생입니다! 현재 가시화까지 이루었으며 시종과 병사, 기사들을 세뇌 상태에 빠트려 사람을 공격하는 중입니다! 확실합니다!!=

“알드헬름이 죽어 혼재가 되었단 말입니까!”

그 대답에 에사르트는 입술을 짓씹었다. 알드헬름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역시 그자식이 오울링에서 살육 행각을 벌였다는 걸 알고 계셨어!

=…그렇습니다! 간밤에 날붙이로 살해당한 뒤 원한에 급성 혼재가 된 것으로 파악 중입니다! 현재 아버지께서 바위 기사단들과 함께 혼재가 성을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최대한 틀어막고 계시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침통해하는 찡그린 표정에서 나온 이야기는 환인이 바라던 정보 대부분이 섞여 있었다.

시더가 알드헬름을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 그 말은 그녀도 성불했다는 뜻이며 자신의 복수도 완성되었다는 것.

가문 핵심 구성원이 혼재로 변했다는 사실은 호족 사회에서 엄청난 불명예가 될 것이다.

알드헬름이 혼재로 변했다는 사실은 입소문을 타고 일파만파 퍼져 나갈 테니 평판은 평판대로 추락하고 마을 주민들의 비자룩스 가문을 향한 충성심과 신뢰도 덩달아 곤두박질치겠지.

만족감에 마음이 한결 느긋해진 환인은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에사르트를 쫓아간다.

여기서 자신이 해야 할 질문은…….

공단길 같은 곳을 달리다 코너를 꺾어 골목길로 들어가는 에사르트를 따르며 주위를 힐끔 돌아본 뒤 소리쳐 물었다.

“알드헬름은 어떻게 살해당한 겁니까! 혼재가 되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지난밤 창문이 열려있었다는 점! 방 안의 과도로 심장을 찔려 살해당했다는 점! 그외 흔적이 전혀 없다는 점을 들어 암살자가 들어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살해 수법이 잔혹해……=

‘암살자로 의심받는 건가.’

저렇게 쫓기는 듯한 상황에서 에사르트가 이야기를 지어내고 허튼소리를 내뱉을 만큼 영악하고 약삭빠르지는 않다.

그렇다면 오울링에서 저지른 일 외에도 원한을 살만한 행동을 많이 한 걸지도 모르겠다.

커다란 바람 소리 사이로 소리쳐서 말하던 에사르트는 골목길 같은 곳을 빠져나와 대로로 진입하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듣는 귀가 많아져서 소리쳐 대화하는 것은 어렵다는 뜻이겠지.

대로로 나온 뒤 성까지는 일직선이었다. 머리가 좋은 쿠에답게 대로를 오가는 마차와 수레를 피해 달린 환인 일행은 에사르트와 함께 순식간에 비자룩스 성에 입성했고.

“…….”

해자를 건너 내성문을 통과하자마자 환인은 성에서 느껴지는 기이하면서도 기분 나쁜 감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냄새는 마치 10년은 관리와 청소를 하지 않은 하수구처럼 끔찍한 냄새였고 썩어서 누렇게 변한 연못에 들어간 것처럼 소름 끼치는 감각이다.

=으윽, 뭐야 이거? 엄청 기분 나빠.=

=위상력이 부패하고 있네.=

안느와 유르파도 몸서리치며 불쾌감을 내비치고 이실리테도 잔뜩 인상을 쓰면서 환인의 곁에 붙어 허리께의 기사검에 손을 올렸다.

성의 입구에서 여기사가 다수의 병사와 함께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 바위 기사단입니다. 적이 아닙니다.=

헉, 소리와 함께 여자친구들에게 설명하는 에사르트를 두고 환인은 비상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지시했다.

“여기서 상황을 지켜보다 뭔가 이상해지면 호텔로 먼저 돌아가 있어라.”

쿠우으.

“안된다. 몰래 따라오기라도 했다간 크게 혼쭐 낼 테다.”

쿠힝…….

환인은 이쪽으로 달려오는 기사를 향해 마주 걸어가면서 주변 상황을 살핀다.

수십에 달하는 시종과 하녀, 하인들이 다급히 초상화, 책, 상자 등등을 성에서 가지고 나와 잔디 정원에 쌓는 중이고 병사들도 흙이 잔뜩 묻은 삽을 들고 고함지르며 오가는 중이었다.

하얀 포?에 둘둘 말린 무언가가 병사들의 손에 옮겨지고 있는데 저 포 안에는 아마 영주 일족의 선대 시신이 들어있겠지.

고성이 오가며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게 마치 전쟁통 같은 상황이다.

환인이 굳은 얼굴을 풀지 않고 물었다.

“에사르트 씨. 정확한 상황을 설명 부탁합니다.”

=…아침 8시 경 시중인의 비명과 함께 혼재의 존재가 처음 확인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제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무렵에는 이미 30분이 지나 혼재의 주변에 세뇌당한 자들이 포진한 상태였으며, 성내의 비전투 인원을 대피시키는 한편 죽은 자가 일어나지 않도록 가문묘의 이전을 진행 중입니다.=

“혼재가 성을 빠져나가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일반적인 수단으로는 영혼의 행진을 막을 수 없을 텐데요.”

=그것이 저희도 의문이지만, 혼재가 된 동생… 알드헬름은 어찌 된 일인지 자신이 세뇌한 사람들과 행동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시체가 일어나기 시작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할 테니 안에서 틀어막고 있는 건가.

“……불행 중 다행인 이야기군요. 영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제가 나오기 전까지 손수 병력을 인솔하시며 세뇌당한 기사들과 시중인들이 성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막아내고 계셨습니다.=

“저를 왜 일찍 찾지 않으셨습니까?”

지금은 정오가 훌쩍 넘었다. 8시 반에 발견했다면 족히 네 시간이 넘게 지난 상황. 사태가 심각해질 수도 있는 시간이다.

=…그, 가문의 힘으로 어떻게든 해결해보려 했다가 그만…….=

“실패했다는 뜻이군요.”

알려지면 치부가 될 게 확실하니 어떻게든 사태를 무마해보려 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수단은 실패해 다급히 자신을 부른 것이고.

‘역시 호족 정도 되면 혼을 공격할 수단이 있는 거군.’

하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고 느끼지도 못하는 혼을 어떻게 공격할까. 그 수단이란 아마도 가시화된 혼재가 나타나면 쓰기 위한 방편이리라.

혼재가 발생한 뒤에 상급 영혼사를 부르면 그 사이 얼마나 큰 피해가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까.

에사르트는 면목없어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혼재는 아직 사자 부활을 쓰지 못하는 상태이며 저주도 뿌려 심신을 약화시키는 중입니다. 저주에는 세뇌 효과도 있는듯합니다.=

영혼을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게 궁금한 환인이었지만, 나중에 알 방법이 있겠거니 하며 가까이 다가온 인묘족 여기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에사르트 도련님!=

=상급 영혼사님을 모셔왔다! 케르카 단장, 부하들과 함께 전열 방위 태세로 앞장서도록! 보호 대상은 환인 영혼사님이다!=

=…옛!=

4급 직업자인 인묘종 여기사를 중심으로 쐐기꼴 진형을 잡는 병사들.

환인은 여자친구들에게 지시했다.

“너희는 내 뒤에서 떨어지지 말고 혹시 모를 세뇌자들의 접근을 막아라. 유르파는 이실리테와 안느의 엄호를 부탁합니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표현하는 여자친구들과 함께 성 안으로 들어간 환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공기 중에 기름띠가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내부가 드러나며 악취와 기분 나쁜 감각이 더욱 심해졌기 때문.

‘이게 재앙으로 변한 혼재의 여파인가. 나 이외에 보이는 사람은 없나 보군.’

꾸르르륵­ 환청과 비슷한 괴수의 으르렁거림이 울려 퍼진다. 그 기괴한 현상에 환인은 두 손을 깍지 끼고 평온의 파동을 발사해보았다.

회백색 빛의 파문이 오염된 기름띠 같은 기운을 밀어낸다. 아니, 밀어내는 게 아니라 정화해나간다.

괴상망측한 소리도 덩달아 사라지자 잔뜩 경직된 모습으로 나아가던 병사들이 어? 하고 의아해했다.

=갑자기 공기가 깨끗해진 거 같아…….=

=영혼사님의 힘이다! 상급 영혼사님이 함께 하시니 혼재 따위에 겁먹지 말고 정신 단단히 차려라!=

오오오!!

옆에서 환인을 따르던 에사르트가 소리치자 병사들의 기세가 한층 오른다.

그상태로 융단 길을 따라 나아가며 주기적으로 평온의 파동을 쏘던 환인은 파동을 쏘기 위한 준비 자세가 상당히 귀찮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평온의 파동을 쓰지 못할 텐데. 그렇다고 방벽으로 공격하며 평온의 파동을 쓰는 건 또 어떨지.

잠시 후 중앙 대大 계단에 도착한 환인은 2층에서 싸움 소리가 내려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에사르트도 긴장한 것처럼 주먹을 꾹 쥐고 말한다.

=3층의 왼편 타워에서 여기까지 밀려났나 봅니다.=

3층 왼편이라면 알드헬름과 스타에타의 방이 있는 곳이다.

“성의 계단은 여기뿐입니까?”

=예. 사용인들이 쓰는 작은 계단이 각 타워마다 있습니다만, 비상 장치를 작동시켜 현재는 모두 폐쇄된 상태입니다.=

“빠르게 올라가겠습니다.”

환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르르 올라가는 병사들의 보폭에 맞추어 2층으로 뛰어 올라간 환인은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한 것을 알 수 있었다.

2층 내부는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로 기름띠 같은 기운이 심각하게 들어차 있었고, 사방에서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게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2층 홀 여기저기에는 목이 잘린 남자와 여자 기사의 시체와 난도질당해 죽은 남녀 병사의 시체가 흥건한 피와 함께 어지럽게 널려있고, 살아남은 기사 차림의 직업자 십수 명이 여기저기 몸에 얼룩 같은 것을 뒤집어쓴 채 방진??을 형성해 필사적으로 통로를 틀어막는 중이다.

기사들이 상대하고 있는 자들은 같은 기사와 하인, 하녀들이었는데 눈동자와 피부가 검은색, 주홍색, 흑갈색 등으로 물든 채 짐승처럼 움직이며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저자들이 세뇌당한 사람들인가.’

세뇌자들의 몸에 들러붙은 얼룩이 유독 심한 것을 보면 이 기름띠 같은 것이 저주인듯하다.

순간 전투의 틈바구니, 기름띠 사이로 잠깐 드러난 건너편 광경에 환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유방과 음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헐벗은 차림으로 눈알을 까뒤집고 서 있는 스타에타와 그 옆에 떠있는 피처럼 시뻘건 영혼 하나.

재앙화된 혼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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