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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261화 (261/813)

〈 261화 〉 255 광산 마을 비자룩스

* * *

호텔의 객실로 돌아온 안느는 고양이처럼 몸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켜고는 환인을 향해 즐겁다는 듯이 말했다.

=으와, 도령이 그 꼴 보기 싫은 여자의 뺨을 때리는 거 보고 깜짝 놀랐어.=

“여자를 때려서 실망했나.”

=속 시원했다는 뜻이야! 세상에, 호족의 성에서 호족의 여자를 호기롭게 패는 걸 보고 더 반한 느낌?=

안느가 키득거리며 웃자 유르파도 살풋 웃다가 약간 걱정을 드러내며 물었다.

=자기가 스타에타의 언행에 화가 나서 손찌검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우리가 읽지 못한 무언가를 자기가 읽었고 빌드업을 위해 따귀를 때렸다고 보거든?=

=어, 진짜?=

=정말요?=

진지하게 묻고 있던 유르파는 진짜 그랬어? 하는 반응의 아가씨들을 황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환인은 그 모습에 살짝 웃으며 겉옷을 벗어 이실리테에게 넘겨준 뒤 거실 소파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알고 보면 별것 아닌 이야기입니다.”

비자룩스 영주는 소문대로 어질고 현명한 영주지만, 가족에게는 한없이 물러 자식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

알고봤더니 파르히스트의 성주가 서신을 보내 비자룩스 영주 일족에게 모종의 압박을 주었다는 것.

고성 바깥은 몰라도 안쪽에서는 알드헬름이 저지른 일이 알려져 당사자가 상당히 궁지에 몰렸다는 것.

스타에타도 사이코패스의 기질이 있었고 이러든 저러든 사이좋게 지낼 생각은 없었기에, 환인은 함무라비 스타일로 스타에타를 시더와 비슷한 꼴로 만들기 위해 그녀의 자존감을 건드렸다는 것.

“스타에타 부인의 성격을 본다면 성장 과정에 누군가에게 맞은 적이 없을 겁니다. 남편과 사이도 좋아 보였으니 가정 폭력이 있지도 않았겠지요. 결과적으로 저에게 처음 맞은 셈이 될 겁니다.”

지금이야 맞았다는 충격에 정신이 혼미하겠지만, 정신을 차린 뒤에는 자신을 증오하고 원망할 테고 남편의 초대마저 거절했으니 분노가 더욱 타오를 거라는 이야기에 유르파가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그 여자는 남편에만큼은 순종적으로 보였어. 애정도 진심이었던 거 같고. 그런 여자가 날뛸 정도라면 아들이 곤경에 처한 건 사실이겠네.=

=어, 근데 파르히스트 성주님이 압박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런 자의식 강한 영주 부인이 날 정확히 지목하며 분노를 토해냈다. 그녀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의 지적이 있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반응이지.”

=아.=

=오~? 그렇구나. 그렇게 해석할 수 있네.=

=그러고 보면 에사르트라는 분도 주인님한테 필사적으로 집안을 변호하는 느낌이었어요. 이유를 몰랐을 땐 왜 그러나 했는데 그런 이유라면 이해가 되네요.=

안느가 무지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크라버리 가문은 좀 이상해. 길레스도 그랬고 알드헬름도 그렇고 그 여자도, 지금까지 본 크라버리 인간 중에 제정신인 인간이 없는 거 같아.=

=흠…….=

=음….=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이런 말을 꺼내도 될지, 꺼내면 자신이 나쁘게 보지 않을지 걱정하며 말을 아끼는 게 환인의 눈에 훤히 보였다.

그래서 환인이 대신 이야기를 꺼냈다.

“크라버리가 정신병 질환을 앓고 있고 그 질환이 유전성이라는 건 확정이겠지.”

오울링에서 수집한 정보로는 크라버리의 상황은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고 한다. 특히 영주의 광증이 터져서 성안에서도 하루에 몇 명씩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다고.

홋, 짧게 한숨을 지은 여자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주제를 돌렸다.

=그러면…… 비자룩스 가문은 어떻게 할 거야?=

“그것에 관해서인데, 에사르트가 내가 고를 어떤 선택지를 두려워하는 점, 그리고 영주가 서슴없이 내게 한쪽 무릎을 꿇은 점을 보았을 때 아무래도 영혼사들도 일종의 집단행동을 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으래? 난 영주가 도령이 영성이 가까운 존재라고 지레짐작해서 겁먹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영성이라는 것은 전사 직업자의 상급직인 무성이나 투사 직업자의 투성 같은 걸 말하는 건가.”

=엉.=

시두르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고래를 두고 영성 하늘고래라고 불렀었다. 그것과 영성이 정말 관계 있는 건가 싶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게 아니다.

=그보다 자기? 집단행동이라면 영혼사가 조직적인 운동을 한다는 거니?=

“그렇습니다. 예를 들자면 해당 마을이나 도시의 보이콧이 있겠지요. 승령천제 때 누구도 방문하지 않는다거나 해당 마을에서 성불행을 진행하지 않는다거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술법과 위상력이라는 초월적인 힘이 존재하는 마당에 영혼사들이 자신의 몸을 지키려면 호위를 두고 명성을 알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권력에 대항하려면 그에 걸맞은 조직적인 힘이 필요하니, 가장 간단히 할 수 있는 것은 영혼사들의 보이콧 뿐이지.

=그, 그거 무섭네……. 엇, 혹시 도령이 노리는 게 그거야?=

“글쎄.”

안느의 질문에 환인은 대답하지 않고 완전히 어두워진 창밖을 돌아보았다.

자신은 영혼사들의 도시인 영도와 아무런 접점도 없다. 그러한 보이콧을 발동시키고 싶어도 절차를 알지 못하니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할 수 있는 것은 알드헬름이 저지른 일을 사실에 기반해 널리 알리는 것뿐. 그 소문을 다른 영혼사가 듣고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합당한 조치를 취할 거라고 믿는 수밖에 없다.

=음. 그러면…… 남은 건 그 일 뿐이네.=

안느가 표정을 살짝 굳히며 주어를 빼먹고 말했지만 못 알아들은 사람은 없었다.

비자룩스로 온 가장 큰 이유, 그리고 가장 위험한 일.

여자친구들의 긴장을 읽은 환인은 창가에 서서 창밖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너희는 신경 쓰지 마라.”

시더가 고성 쪽에서 하늘을 날아오고 있었다.

환인의 여자친구들은 그가 방으로 들어간 뒤 조금 시무룩해졌다.

=도령이 신경쓰지 말라는 게 우리를 배려해서 한 말이라고 머리로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쪼끔 우울하네.=

=그만큼 우리를 아낀다는 증거가 아니겠니. 우리가 안 좋은 일에 휘말리지 않길 바라는 거 말이야.=

=그건 기쁘지만…….=

말이라는게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보니 단어 하나 차이로 어감이 180도 변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이 경우도 이실리테와 안느는 환인이 자신들을 배려해서 한 말이라는 걸 이해했지만, 어감이 주는 반어적인 의미 ‘너희는 필요없다.’는 느낌에 풀이 죽어버린 것.

유르파는 연륜으로 그러한 감정을 빠르게 털어낸 뒤 시무룩한 아가씨들을 달랬다.

=원래 파티의 리더는 전투 외에 이런저런 일을 도맡아 해결하는 법이야. 그리고 이런 일은 원래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법이니까 아가씨들도 얼른 기억을 털어버리렴. 나도 버릴 테니까.=

=응…….=

=네…….=

하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축축 늘어진 상태다.

원래 가장 좋은 연인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며 동등한 관계가 가장 건강한 관계다.

그러나 환인의 능력이 워낙 우월하다 보니 수평적인 관계가 아닌 수직적인 관계가 형성되었고, 이실리테와 안느의 우울은 사랑하는 남자에게 도움이 못 된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잃어버린 것이 그 이유다.

이런 관계가 의외로 라드세아에는 흔하다. 남성 위주의 호족 사회에서는 거의 집집마다 있는 편이기도 하고.

유르파는 파르히스트에서 사업할 적 호족들을 대상으로 마도기와 마도구를 판매하였기에 그에 대한 지식이 비교적 상세한 편이었고, 덕분에 분위기를 빠르게 전환할 방법을 몇 가지 알고 있었다.

=자자. 계속 그렇게 눈꼬리가 축 처져있으면 좋은 거 안 보여준다~?=

=…좋은거? 뭔데?=

유르파는 마도기와 마도구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생활 보조 용품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뛰어나다.호족과 고족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고 지금 그녀들도 애용하는 피부재생 화장품도 유르파가 직접 제작한 것일 정도.

그점을 알고 있는 이실리테와 안느의 눈빛이 즉시 바뀌었고, 유르파는 의도대로 변한 그녀들의 기분에 빙그레 웃으며 유혹했다.

=사랑하는 그이와 좀 더 즐거운 잠자리를 위한 아이템~?=

=……!=

=……!=

=보러 갈까?=

=응!=

=네.=

그렇게 성에 순진한 아가씨들이 유르파의 수제 성인용품에 눈을 반짝이고 있을 무렵, 환인은 시더와 최종 단계를 점검하고 있었다.

“알드헬름이 자기 방에 갇혀있다면 큰 문제는 없겠군요.”

「제가 찾았을 무렵 스타에타는 알드헬름의 방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후 알드헬름이 비명을 지르고 발광했지만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 두 명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죽일 때 소음이 나더라도 당장 들키지 않을 겁니다.」

“들켜도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시더, 당신이 보복했다는 게 알려지더라도 통념상 큰 문제는 없겠지요.”

죽인 영혼이 악령이 되어 찾아와 살해할 수도 있다고 알려진다면 알드헬름 같은 인간의 막장 짓이 줄어들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영혼사님께 혐의가 돌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악령을 데려와 마을에 풀어놓았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저를 알기 전의 지식으로 누군가가 그런 식으로 살해당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경우 어떤 생각이 들 것 같습니까.”

「…….」

말도 안되는 헛소문이라고 치부하겠지. 오히려 영혼사님께 악의를 덮어씌운다고 소문을 퍼트린 자와 그 소문에 나온 호족을 욕했을 것이다.

환인은 시더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잠입할 수단을 구상한다.

“그러면…….”

고성의 형태와 알드헬름의 방 위치, 방의 창문 형태 등을 떠올려보던 창문이 환인은 간단한 걸쇠식이었음을 기억해내고 아공간 주머니에서 은제 포크를 꺼내 들었다.

“…….”

초능력 중에 사물의 기억을 읽어내는 사이코 메트리가 있다. 술법 중에도 그런 게 없으리란 보장이 없다.

포크는 다시 주머니에 넣고 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적당한 물건을 찾지 못한 환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수많은 사람의 손이 닿은 동화 1닢을 꺼내 하급 정령을 강령한 뒤 우악스런 힘으로 주화를 펴기 시작했다.

원기 충전으로 영혼에 원기를 밀어 넣으면 주입한 양에 따라 물리적인 힘의 행사가 가능해진다. 유지 시간은 현재 체력의 50%가량을 주입할 경우 3시간가량.

안느와 유르파에게 따로 조언을 구해본 결과 원기 회복의 술법에는 이런 효과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카턴 마을의 검은 영혼 여자에게 얻은 기술이어서 영혼에게 적용할 수 있는 특별한 효과가 생긴 거겠지.’

문제는 이렇게 원기를 흘려 넣어줄 경우 실체가 생긴 것처럼 벽을 통과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창문을 열고 들어갈 수단이 필요한데, 이것이 그 역할을 할 것이다.

잠시 후 500원짜리 동전 크기만 하던 동화가 명함처럼 얇고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변했을 때 그것을 시더에게 주었다.

“이거면 창문의 틈에 밀어 넣어 걸쇠를 풀 수 있을 겁니다.”

호텔의 창문도 그런 식이었기에 환인은 어떻게 걸쇠를 푸는지 시범을 보여준다.

“그 후 창문을 열고 들어간 뒤 방 안에 있다는 과도로 찔러죽이면 되겠지요. 보다 완벽한 성공을 노리려면 알드헬름이 잠들어있을 때 시도하십시오.”

「…….」

우둘투둘 얇은 금속 조각을 받아든 시더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그것을 보다가 눈앞의 남자, 영혼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환인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신세 많이 졌습니다, 영혼사님. 내세가 있다면 영혼사님의 종이나 노예로 태어나 현생에 입은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극락왕생을 기원하겠습니다.”

창문을 열어주자 쇳조각을 두 손으로 쥔 시더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시린 달빛 아래에서 점차 작아지는 그녀의 창백한 영혼을 바라보던 환인은 창문을 닫고 거실로 나갔다. 남은 것은…….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 저녁 먹으러 가지.”

정말 만약을 위해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 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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