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화 〉 254 광산 마을 비자룩스
* * *
환인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자 인양족 여자, 스타에타=에필렉스=크라버리는 입고 있는 귀족 드레스에 어울리지 않게 경보하듯 성큼성큼 환인에게 다가가 허리에 척, 손을 올리고 환인을 노려보았다.
=당신인가요?!=
환인도 말없이 가슴을 자신의 배에 붙이듯 바짝 붙은 휜 양뿔 여자를 무미건조한 눈으로 내려다본다.
키는 150cm남짓. 자신의 가슴께에 정수리가 오는 여자는 처진 눈꼬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나운 눈을 하고 있다.
나쁜 성질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고성보다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말투가 어울릴 외모의 스타에타는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지난 11일간 얼마나 속을 썩였던가.
파르히스트 성에서 성주의 이름으로 날아온 한 장의 전보가 일의 발단이었다.
훌륭한 품질의 종이에 적힌 미려하고 세련된 글씨와 격식 있고 품격있는 내용은 자신의 소중한 아들이 어떤 볼품없는 마을에서 저지른 한때의 유흥을 질타하고 있었다.
호족의 수치.
호족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라.
계속 호족의 이름을 짓밟는다면 체벌을 결의할 것이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사랑하는 남편의 실망한 듯 찌푸린 미간이 심장을 주름지게 하는 것처럼 아팠다.
이어서 화가 났다. 세상에 별 도움 안 되는 인간 몇 명 좀 죽였다고 자신의 남편을 나무라고 아들을 비난하다니, 7급이면 다인가?
남편은 침중함을 드러내며 그와 관련된 소문과 정보의 수집을 명령했고, 그때부터 날아드는 이야기는 전부 그녀의 마음을 속상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약간 트집을 잡긴 했지만 큰 범주에서 보면 딱히 나쁜 짓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변의 판자촌에 사는 거지새끼들만 정리했다고 하지 않던가.
원한을 띈 영혼이 수십 명 발생했고 그걸 영혼사가 성불했다고 나무라는 건 너무하지 않나. 성불이 영혼사의 일이잖아. 성불시켰으면 된 거 아닌가?
아니, 마을의 주인인 고족 일가도 참살했다고? 대를 이을 남자아이 하나가 살아있으면 된 거잖아.
그런데 아이가 파르히스트 성주의 비호 아래에 들어갔다고?
알고보니 우리 아들이 그 작은 마을의 특산품을 빼앗으려 일부러 수작을 부렸고?
그걸 전부 밝혀낸 사람이 그 영혼사?
전서구가 날아들수록 사랑하는 남편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며 스타에타는 분노를 곱씹었다.
똑똑하고 남편을 닮아 잘생기고 어미의 핏줄을 이어 머리도 뛰어난 소중한 아이가 힘들다며 울먹이는 것을 볼 때마다 한을 을 품었다.
그 모든 사건의 원흉이 이 영혼사라지?!
=스타에타 님!=
=마님!=
잠시 후 우르르 들어오는 다수의 2~3급 직업자들.
갑옷 차림이 모두 통일된 그녀들은 싸늘한 응접실 내부 분위기에 당황한 것도 잠시, 환인과 스타에타가 대립하고 있는 모습에 즉각 나서려다 이실리테와 안느의 제지를 받았다.
앞을 가로막은 안느에게 똑같이 상아색 양뿔이 난 여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키십시오.=
=너야말로 범국가적인 문제로 비화시키기 전에 얌전히 있지?=
피부가 찌릿 거릴 정도의 기백에 양뿔 여자가 흠칫하며 한발 물러선다.
급해서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잘 보니 앞을 가로막은 큰 키의 플뢰 여자는 희귀한 아우라의 6급 직업자다. 옆의 4급 전사도 칼날처럼 예리한 기도가 느껴지는 게 절대 범상치 않은 실력자겠지.
그렇게 찰나의 순간 환인과 여자, 안느들과 직업자들의 소리 없는 대립이 이어졌다.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환인은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여자도 나와 같은 과군.’
새끼 양처럼 작고 폭신해 보이는 이 여자에게 자신과 같은 사이코패스 기질이 느껴진다.
시선 교환은 잠시 후 스타에타가 물리적으로 가슴이 닿을 만큼 바짝 붙으며, 마치 가슴으로 밀어내려는 듯이 누르며 끝났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가요!? 말하세요! 어째서 제 아들을 인면수심의 야만인으로 만든 거지요!?=
환인은 배에 여자의 가슴이 닿아 뭉개지는 것을 느꼈다. 만약 양뿔이 뒤로 휘지 않았다면 뿔에 찔렸을 정도로 짧은 거리.
소프트크림처럼 부드럽고 말랑한 감촉이었고 스타에타의 고성과 역반하장을 들었지만 환인은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그저 머릿속으로 지금 상황을 분석하고 이후에 벌어질 일을 계산하며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선택지를 만들어낼 뿐.
일단 눈앞의 여자는 명목상 호족의 아내.
이런식의 접촉은 자신의 선택지에 하등 좋을 것이 없기에 시선을 들어 유르파에게 주었다.
그 시선의 의미를 깨달은 유르파는 약간 굳은 얼굴로 간이 수인手?을 맺어 신체 강화의 술법을 자신에게 펼친 뒤 스타에타의 팔과 어깨를 잡아 수월하게 떼어낸다.
타인에 의해 자신의 행동이 제어 당한 스타에타는 즉시 분노를 드러내며 짝! 유르파의 팔을 쳐내곤 치와와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감히 제 몸에 손을 대다니! 당신이 영혼 기사라고 해도 용납할 수 없는 짓이에요!=
=그것을 알아볼 이성이 남아있다면 당신이 소리를 지르는 분이 어떤 분인지 다시 생각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영혼사지요! 직위도, 작위도 없는 비루한 서민과 다를 바 없는 영혼사! 그런 당신에 비하면 저는 고귀하고 거룩하며 고결한 크라버리의 정통된 혈통과 핏줄을 잇는 41대손, 스타에타 에필렉스 크라버리예요!=
=그런가요? 알았으니 일단 떨어져 주세요.=
환인을 욕보이는 앙칼진 대꾸에 유르파는 내심 이마에 핏줄이 돋아날 정도로 화났지만, 겉으로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손을 뻗어 스타에타의 어깨를 잡고 끌어낸다.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좀 전보다 더 강하게 들어간 것 같지만 착각이겠지.
=이익…! 이거 놔욧! 당신들은 지금 뭣들하고 있나요?! 당신들의 주인이 무례한에게 치욕을 당하고 있는 게 안보여요?!=
스타에타의 고성에 여기사들이 다시 움찔하는 것을 본 안느가 낮아진 음성으로 경고한다.
=관둬. 당신들도 알지? 이런 불명예스런 일로 죽어서 나락에 떨어지고 싶진 않을 거 아냐.=
뇌리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경고. 하지만 여기서 가만히 있다간 후일 셋째 부인에게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
죽어서 낭패를 당하느냐 살아서 보복을 당하느냐, 미룰 수 없는 양자택일의 순간.
호위들의 손이 점차 허리의 검으로 향하는 걸 본 안느도 무기를 수납해둔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었고, 이실리테도 허리춤의 기사검에 손을 내리며 경고한다.
=당신들의 주인은 누구인가요. 저기서 영혼사님께 무례를 저지르는 여자인가요, 아니면 마을을 다스리는 어질고 현명한 영주님이신가요.=
=…….=
=잘 생각해보고 움직이시는 게 좋을 거예요. 진정한 기사라면 그른 일에 충언할 수도 있어야겠죠.=
이실리테의 이야기가 결정타였다. 호위들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우울한 표정으로 두어 걸음 물러섰고 그 행동에 자극받은 스타에타가 짜랑짜랑한 목소리를 터트렸다.
=당신들! 그러고도 제 호위라고요?! 웃기지 마세요! 그이에게 말해서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요! 이이익……! 놔요! 놓으란 말이에요! 감히 제 몸에 손을 대고도 무사할 줄 알아요?!=
유르파에게 잡혀 사나운 암고양이처럼 몸부림치며 있는 대로 히스테리를 부리는 스타에타.
환인은 그 볼품없는 행동에 이유모를 답답함이 가슴을 채우는 것을 느꼈다.
이 답답함이 짜증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환인은 감정을 억누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인명을 하잘 것 없이 여기고.”
색이 있다면 회색이 아닐까 싶은 서늘하고도 낮은 목소리가 40평 남짓한 응접실을 꽉 채운다.
“관계없는 사람의 목숨을 길가의 벌레만도 못하게 여기며.”
마치 귓구멍이 파헤쳐지는 듯한 목소리에 환인의 여자들과 호위들, 이 소란에 어찌할 줄 모르고 벽에 붙어있는 시종인들이 부르르 떨다가 환인에게 시선을 준다.
“살인과 고문을 쾌락으로 여기는 것이 잘한 행동이란 말입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요!? 소속된 비자룩스의 영민도 아니고 저 멀리 흔해 빠지고 하잘것없는 고족의 집락! 거기서 궁상맞게 살아가는 인간 몇이 무례하게 굴어서 죽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냔 말이에요!!=
스타에타가 악을 쓰는 모습에 시종인들과 호위들은 까닭 모를 두려움과 오한을 느꼈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잔잔한 셋째 부인이지만 화가 나면 속된 말로 미친 것처럼 소리를 지른다. 이때까지는 그것을 고위 호족 특유의 프라이드로 인한 결벽증이라 여겼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시선이 저절로 무표정을 한 환인에게 향한다. 뭔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을 보는 듯한 불편함이 그들의 마음을 잠식한다.
환인은 무표정으로 스타에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들과 당신 사이에 차이점은 없습니다. 당신의 삶은 저기서 당신을 지키려 하는 사람, 저곳에서 당신의 편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모두의 삶과 다를바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저들은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섬기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섬김 받기 위해 태어난 저와 제 아들과 같다는 말인가요?! 무례한 언행에도 정도가 있지! 당신 따위에게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아요!!=
선민사상의 근본을 보여주는 발언에 환인이 흐릿하게 웃었다.
“스타에타 부인.”
=뭐죠?! 이제 와서 사과한다 해도 늦었어요!! 당신만큼은……!=
“잘잘못을 가리자면 잘못된 게 맞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신의 아들이 비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뭣……!? 이, 이, 이 남자가 뚫린 입이라고 잘도!=
스타에타의 가슴 속에서 분노가 활화산처럼 폭발하기 직전, 마치 영혼을 꿰뚫는 듯한 환인의 시선에 스타에타는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신 앞에 만인은 평등합니다. 호족도, 고족도, 서민도 모두 그분 앞에서는 단지 하나의 생명일 뿐. 그럼에도 당신은 그들과 자신이 다르다고 주장하는군요. 당신의 뜻이 그분들의 의지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요! 확대해석 하지 말죠?! 하여튼 어디서 배워먹지 못한 티를 내면서 말꼬투리를 잡는지!=
환인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는 직장생활을 하며 숱하게 겪었다.
그때는 개나 고양이처럼 말 안 통하는 짐승이 짖는 소리로밖에 느껴지지 않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가슴이 묵직해지는 걸까.
가슴을 채우는 이유 모를 답답함과 묵직함이 만나 마치 돌덩어리가 들어찬 것 같다. 혹시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어이없고 기막혀서 짜증 난다는 감정인가.
환인은 웃지 않는 눈으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내심을 꿰뚫어보는 듯한 얼음장 같은 시선과 그 시선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입가의 미소. 그런 표정과 마주한 스타에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두려움을 속삭인다. 심연 속의 형태 없는 괴물과 마주한 듯한 공포가 엄습한다.
저, 저자는 뭐지? 어떻게, 어떻게 저런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거야?
진땀 한 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 감각에 정신을 차린 스타에타가 두려움을 떨쳐내듯 이를 드러내며 분노를 토해냈다.
=이 일! 결코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요! 비자룩스 가문의 힘, 거기에 크라버리 가문의 영향력을 동원해서라도 이 일, 끝까지 걸고넘어질 테니까!! 당신도! 당신의 무례하고 건방진 영혼 기사들도 단단히 각오하고 있는 게 좋을……?=
이번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영혼사의 손을 보고 뱀 앞의 개구리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스타에타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지? 어째서 몸이 움직이지 않고 목이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는 걸까. 이 영혼사가 사특한 술수를 사용하는 거라면, 상상上上 격의 호신부 마도기가 막아줄 텐데?
철썩.
=……?=
그 순간 뺨에 가해진 충격에 고개가 홱 돌아간 스타에타는 몸도 따라가다 비틀, 균형을 잃고 풀썩 주저앉았다.
귀 근처에 벌떼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윙윙 울린다. 스타에타는 무의식중에 손을 들어 뺨을 만졌다.
뜨겁다. 바늘에 무수하게 찔린 것 같은 통증과 뺨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통증이 섞여 아프다.
무슨,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헉.
억.
우와.
주변에서 경악, 탄성, 감탄 등이 터져나와 그녀의 귀에 들어왔지만, 그녀는 얼이 나간 것처럼 인식하지 못했다.
뺨을 한차례 쓸어내린 스타에타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바들바들 떨었다.
=아… 이…….=
따귀를 맞았다. 누구한테도 맞아본 적 없는 자신이.
허용량을 초과하는 분노에 벙어리처럼 말을 잇지 못하던 스타에타는 작은 눈물방울을 눈꼬리에 매달고 환인을 노려보았다가, 시퍼렇게 불타는 듯한 환인의 시선을 목도하곤 힉 새된 비명과 함께 꽁꽁 얼어버리고 말았다.
시선과 마주치자 몸이 저절로 떨린다. 숨이 가빠오고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가 까맣게 물들길 반복한다.
기실 스타에타가 겪고 있는 패닉, 공황 장애는 환인의 감정이 고조된 데서 비롯한 일이었다.
영혼은 각자가 가진 격이 존재한다. 태생부터 정해진 격이다.
호브는 최하급의 격, 도마뱀인간 괴물은 하급의 격, 들창코의 못생긴 회색 괴물은 중하급의 격, 인간은 중급의 격.
그러나 환인은 수백 명의 영혼을 성불시켜나가며 그 영혼이 남기고 간 격의 파편을 몸에 받아들였다.
수많은 강령을 통해 갖은 격을 경험해보며 혼이 단련되었다. 수백 명이 넘는 여자를 안으며 영기를 받아들여 산자의 존재감이라 할 수 있는 훈기와 한기의 증대를 이루었다.
그 결과 환인 자신도 모르는 사이 혼격??의 상승이 이루어지는 중이다.
그리고 여자친구들을 언급한 스타에타의 발언은 환인의 감정을 고조시켜 그러한 영혼의 격을 겉으로 드러내게 만들었다.
이렇게 벌어진 격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현상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간단하게는 대상 앞에서 위축되는 것에서부터 심각하게는 대상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무조건 복종하게 되는 수준까지.
환인은 담담하게, 그래서 더 무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미궁과 깊은 숲 속에서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추잡한 호브와 다름없는 당신의 언행은 보아 넘길 수 없군요. 이번 일은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드러날 겁니다.”
=……!=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극심한 모욕에 손찌검이었지만, 그보다 더한 두려움과 공포, 충격에 잠식된 스타에타는 그 어떤 변명도, 변론도 꺼내지 못했다.`
내가, 내가 왜 이런 꼴을 겪어야 하는 거지? 머리가 아프다. 신경이 끊어질 것처럼 힘들고, 춥다. 누가 날 좀 감싸 안아줬으면.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상황에 쾅? 굉음과 함께 문이 벌컥 열리며 들어온 한 명의 사내를 목격한 스타에타는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을 수 있었다.
통나무 한 조각에 의존해 어두운 밤의 바다를 표류하다 등댓불을 발견하면 이럴까.
응접실에 들어온 사람은 늑대의 근엄함과 여우의 날카로움이 한데 어우러진 듯한 외모의, 스타에타가 사랑해 마지 않는 비자룩스의 영주 셀가=르=비자룩스였다.
의지할 수 있고 의존할 수 있는 존재의 출현에 스타에타는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느끼며 달려가 남편의 품에 안겼다.
=셀가, 셀가. 저는, 저는 이 이상의 치욕을 견, 견디기 힘들어요. 아파요. 괴로워요……! 저를, 저를 괴롭히는 저 영혼사에게 호족의 지엄함을 보여주세요, 제발……!=
셀가 영주는 자신의 품에 안겨 덜덜 떨며 흐느끼는 세 번째 아내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맞은 것처럼 붉어진 뺨. 경악하고 있는 시중인들과 기사들. 그리고 응접실에서 홀로 거대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는 남자.
셀가 영주는 온통 검고 기품있는 차림의 남자를 약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무슨 영압이란 말인가.’
여타의 인간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영적 자질로 인해 한 손으로 다 세지 못할 정도의 상급 영혼사를 만나며 영감이 개화한 셀가 영주는 환인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 남자는 틀림없는 상급 영혼사라고.
아니 어쩌면 영혼사의 벽을 뛰어넘은 영성?이 아닐까.
이때까지 만나본 어느 상급 영혼사보다 강렬한 영적 존재감을 발휘하며 자신을 무감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남자의 태도에 셀가 영주는 한숨을 속으로 감추며 환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영성의 길을 걷고 계실 상급 영혼사님께 비자룩스의 45대 영주, 셀가 르 비자룩스가 인사드리오.=
또다른 경악이 응접실 내부를 채웠다. 여, 영성? 상급 영혼사는 물론 영혼사의 벽을 넘어야만 도달한다는 그 영성?!
그러한 기색과 오면서 들은 희미한 고성, 세 번째 아내의 모습에서 사정을 읽은 셀가 영주는 가문에 드리워지는 암운을 느끼며 자신의 부인을 품에서 다소 매정하게 떼어냈다.
=여, 여보……?=
=당신은 방으로 돌아가 본인이 부를 때까지 자숙하고 있으시오.=
스타에타는 좀전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충격에 더해 언제나 따스한 미소를 지어주던 남편의 차디찬 반응에 무릎이 풀려 풀썩 주저앉았다.
셀가 영주는 아내의 멍한 시선을 외면하며 멍청히 서 있는 호위들에게 호령을 내렸다.
=무엇을 하는가. 부인을 방으로 모셔라.=
=…옛!!=
여기사들이 황급히 넋이 나간 스타에타를 좌우에서 부축해 응접실을 나간다.
환인은 양팔을 잡혀 끌려나가는 스타에타를 무시하고 눈앞의 영주를 응시했다.
필요에 의해서 스타에타의 따귀를 올려붙였지만, 환인은 영주가 분노에 차서 자신을 사로 잡으라는 상황까지 각오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해왔다.
분명 자신이 부인의 뺨을 때렸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런 반응이라니.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 중 틀린 게 없다는 걸 환인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군주로서, 인간으로서는 만점일지 몰라도 가장으로서는 합격점 미만이다.
방금도 스타에타를 돌려보내 이 사건을 임시 봉합할 게 아니라 이 자리에서 해결을 보았어야 했다.
지금이야 얻어맞은 충격에 얼이 빠진 모습이지만, 그 사이코패스 기질을 가진 스타에타가 홀로 진정할 시간을 가진 뒤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악의가 먹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라 여럿 잡아먹고 말테지.
=헉.=
=……!=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던 환인은 기감에 셀가 영주가 한쪽 무릎을 꿇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집안 관리가 어설퍼 상급 영혼사님께 폐를 끼쳐 죄송을 금할 길이 없소이다. 이 셀가,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는 바이오.=
무릎 꿇은 영주의 늑대와 여우를 혼합한듯한 머리를 바라보던 환인은 가슴 속에 차있던 정체불명의 감정을 접어 마음 한곳에 치워두고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영주님이 어째서 제게 죄송해하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사과해야 할 인물과 사과를 받아야 할 인물은 따로 있을 텐데 말입니다.”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가족을 내칠 수 없어 입을 열 수 없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상급 영혼사로 알려진 자신의 직급을 우려해서인지.
환인은 입을 닫고 있는 셀가 영주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제게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 또한 당신의 세 번째 부인께 손찌검한 것을 사과하지 않겠습니다.”
=영혼사님…….=
“이 이상 제가 할 말은 없겠습니다. 기껏 초대받았음에도 이렇게 되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환인은 셀가 영주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준 뒤 정중히 인사하고 여자친구들과 함께 응접실을 나왔다.
그리고 알드헬름을 향한 분노, 알드헬름의 어미가 따귀를 맞은 데서 느낀 통쾌함으로 눈빛이 스산해진 시더에게 남들이 알지 못하게끔 신호를 보냈다.
알드헬름을 찾으러 가라고.
‘고성을 감싸는 성벽 외에 입구와 통로에 위상류를 자극하는 감각은 없었습니다. 성문은 언제나 열려있었고 병사가 지키고 있었으니 알드헬름을 찾은 뒤 정문을 통해 빠져나와 절 찾아오십시오.’
「예, 영혼사님.」
시더가 고성의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에 잠깐 시선을 주었던 환인은 고성을 빠져나오며 크라버리의 핏줄에 대해 생각했다.
이 세상에 와서 자신과 마찰을 일으킨 인간 중 크라버리의 인물은 하나같이 정신 상태가 심각했다.
길레스=벡슬은 크라버리의 성을 허락받지 못했지만 크라버리의 혈족이었음에도 미궁에서 살인강도짓을 벌였다.
알드헬름은 두말할 것 없고 스타에타도 사이코패스의 기질이 있었다.
경중을 따지자면 길레스는 80% 이상, 알드헬름은 70% 이상, 스타에타는 20%정도.
이쯤되면 크라버리 혈족의 피에 흐르는 유전적 형질에 사이코패스 인자가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정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사이코패스의 뇌 형상은 일반인들과 다르고 그런 형질은 유전으로 대를 이어 내려온다는 주장이 지구에 존재한다.
환인이 겪은 경험은 그 주장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
‘전대 영주와 크라버리의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사촌으로 존재하고, 현 영주와 스타에타 사이에서 난 자식들이 비자룩스의 요직을 차지해나가면…….’
비자룩스 가문도 점차 망가져 가겠지.
내성문 앞에 마차가 마부와 함께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환인은 그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걸어서 성문을 빠져나왔다.
약간 가파른 내리막길 너머로 해가 완전히 졌지만 불빛으로 환한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걱정할 것 없으니 긴장 풀어도 된다.”
=네, 주인님.=
=으응.=
환인은 평화로운 마을을 느긋이 구경하며 돌심장 호텔로 향했다.
스타에타에게 따귀를 날렸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충동적으로 한 짓이 아니라 계획의 일부였으니까. 거기다 셀가 영주를 본 환인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이번 일을 두고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을 거라고.
소규모라곤 해도 군대와 싸울 일이 없어졌으니 계획은 한결 편한 쪽으로 흘러갈 것이다.
거창하게 계획이라 했지만 별것 아니다.
영혼사에게 대들 정도로 아끼고 사랑하는 자식이 죽는 것을 본 스타에타는 이성을 잃고 뺨을 때린 자신에게 모든 원망과 원한을 부으며 무지성으로 날뛸 거다.
습격자를 망설임 없이 보내겠지.
그러면 그때 가서 습격의 증거를 제출한 뒤 친절하게 스타에타의 목을 쳐주면 끝나는 일이다.
환인은 속으로 피식 웃음을 흘리며 여자친구들과 함께 돌심장 호텔로 복귀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