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화 〉 253 광산 마을 비자룩스
* * *
순간적으로 다채로운 감정 변화가 북극여우처럼 귀엽고 하얀 얼굴을 스쳐 지나갔지만, 환인은 그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읽어냈다.
진심으로 결례를 끼쳤다는 생각.
이런 실수를 저질렀으니 자신을 볼 면목 없어 하는 생각.
돌아가면 아버지에게 크게 혼나겠다는 생각.
그리고 자신의 여자들에게 짧게나마 시선을 주었다가 실연의 아픔을 겪은 표정까지.
역시 어리석고 모자란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레심과 스사를 적당히 섞어놓은 듯 이해가 밝고 약간 약은 느낌. 하지만 어려서 감정을 숨기는 법이 미숙해 전부 읽힌다.
“…….”
때문에 환인은 에사르트가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딱히 분노하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자신이 그녀들의 연인이라는 걸 알게된 순간 깨끗하게 단념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환인은 미미한 감정마저도 억누르는 에사르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영주님의 자제분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영혼의 길을 따라 순례를 이어가는 환인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비자룩스를 다스리는 영주, 셀가 르 비자룩스의 맏이이자 장남인 에사르트 르마리테라고 합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러셨군요. 하필이면 길이 어긋나 시간 낭비를 많이 하셨을 것 같습니다.”
=아…… 그렇지 않습니다. 영혼 기사님께서 진귀한 술을 대접해주신 덕분에 염치없게도 그만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걸 뭐라고 사죄드려야 할지.=
“지루하지 않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환인을 잠시 멍청하게 바라본 에사르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곤 뒤에 시립한 아가씨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며 분위기를 풀려 노력했다.
영혼사님이 비자룩스로 온다는 이야기에 기대감을 품었던 이야기, 영혼 기사님들이 너무 아름다워 승천할 뻔했다는 이야기 등등.
그렇게 몇 분간 소소한 담화를 나눈 에사르트는 이제 본론을 꺼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사견과 사적 감정을 일체 담지 않고 아버지의 지시를 읊었다.
=제가 영혼사님을 이리 찾아뵌 이유는, 아버지께서 영혼사님과 일행 여러분을 성으로 초대하여 극진히 대접할 기회를 주십사 하여서입니다. 부디 바쁘신 걸음을 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토록 마을을 훌륭히 다스리시는 영주님의 초대는 저 역시 기쁘게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환인의 칭찬에 안색이 밝아졌던 에사르트는 이어진 접속 부사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제가 비자룩스를 찾아온 이유, 에사르트 씨는 알고 계십니까.”
=……여러모로 배움과 지식이 모자란 저로서는 영혼의 순례자이신 환인 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실례가 안된다면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알고 있는 것이 있지만 입에 담지 않는군.’
걱정과 우려가 미미하게 드러나는 에사르트의 표정에 환인은 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지금 꺼낼 이야기는 아닌듯하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보다 외출 준비를 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 아, 예…….=
방금 내가 대접이라고 확실히 말했었지? 그런데 외출이라고 굳이 말씀하신 건…… 성의 객실을 내어 드린다는 의미를 못 알아들으신 게 아니라 초대를 사양한 거라고 봐야…… 으음.
잠깐 고민했지만, 이 이상은 자신에게 권한이 없음을 인지한 에사르트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살짝 고개를 숙이며 1층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한 뒤 로비로 내려왔다.
=아사드, 아사드!=
=예, 도련님.=
=즉시 성으로 가 아버지에게 영혼사님과 영혼 기사님 세 분이 가신다고 전하라. 영혼사님께서는 성에서 숙박을 원치 않으시는 듯 하다는 의중도 전하도록. 급하다.=
=옛.=
=로레아와 아시네레는 나가서 마차와 출발을 준비하라.=
=네.=
호위들에게 전언을 들려보내고 지시를 내린 에사르트는 로비를 서성였다.
방금 영혼사님의 의미심장한 질문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자신에게 비자룩스를 찾아온 이유를 아느냐고 한 질문, 동생 놈이 오울링에서 벌인 일의 내막을 전부 알고 있지 않은 이상 나올 수 없는 질문이다.
거기다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뒤 질문을 거둔 모양새는…….
‘아무래도 영혼사님은 내 생각을 읽으신 거 같은데.’
순간적이지만 섬뜩할 정도의 날카로운 눈빛이 스쳐 지나간 것을 떠올린 에사르트는 초조함을 느끼며 그 망할 이복 동생과 그쪽 집안의 가계를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 가문보다 못한 집안은 버러지 취급하는 성정.
이득을 위해서라면 죄 없는 사람을 트집 잡아 죽여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사고방식.
‘저쪽 집안의 후손 중 남자들만 유독 정신병 증상이 드러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핏줄의 저주야.’
아버지는 여러 가지로 존경할만한 분이시지만 일가와 혈족에게만큼은 무른 게 단점이다.
알드헬름이 어렸을 때부터 보이던 그 싹을 확실히 자르고 단단히 교육했다면 광증도 억누를 수 있었겠지만, 동생 놈은 셋째 어머님의 치마폭에 늘 파묻혀 지낸데다 그 어머님의 극성에 제대로 교육을 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수백 명을 죽여놓고도 당연히 죽었어야 할 인간을 죽였을 뿐이라며 비웃는 개자식으로 성장했다.
만약 어렸을 때 훈육으로 비뚤어진 성정을 뜯어놓았다면…….
‘후회는 아무리 해도 늦다더니.’
골치가 아파 머리가 지끈거린다.
만약 오울링의 전말을 모두 알게 되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만약 뇌물을 주어 회유하려 든다면 통할 것인가.
=안 통해.=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마을 분위기를 보겠다며 나가셔서 4시간 동안이나 제 발로 걸어 다닌 분이다. 그런 사람이 권력이 주는 달콤함에 고개를 숙이고 안주할까?
영혼사들은 물욕과 세속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라고 알려졌다. 일반 영혼사도 그러할 텐데 상급 영혼사라면?
당연히 통하지 않는다.
‘제길.’
자신의 덜 여문 머리로는 이 일이 어떤 식으로 일파만파 퍼져 나갈지 도통 짐작되지 않는다.
에사르트는 부디 그 자식이 벌인 일로 가문에 암운이 드리우지 않길 짐승신님께 기도했다.
에사르트가 준비한 마차는 호족이 타기에 부족함이 없는 담백하지만 호화스러운 마차였다.
그것을 타고 성으로 향하며 환인은 에사르트의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했다.
=세상 사람들은 할아버지께서 내리신 용단에 비자룩스가 새로이 태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환경이 바뀌기 위해서는 한 명의 노력으로는 부족하죠. 그 환경에 속해있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모여야 변화가 유의미해지니까요.=
=결국 비자룩스가 이렇게 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마을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모여…….=
환인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에사르트는 자신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저렇게 두려워하며 비자룩스 마을과 가문의 이미지를 가꾸려 애쓰는 걸까.
겉으로 드러난 이쪽의 전력은 6급 성투사와 6급 비술사, 4급 전사에 힘없는 영혼사일 뿐인 일행이다.
영혼사의 명성을 두려워한다고 보기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비록 2급의 말단이라 해도 라드세아의 최상위 계층인 호족이니까.
환인은 짧게 생각해보다가 에사르트의 반응을 보기 위해 말을 던졌다.
“훌륭한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보기에 모두가 각자의 삶을 개인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보이지 않는 인연의 실이 무수하게 엉킨 장소이니까요.”
나비 효과와 혼돈 이론을 빗대어 악은 악순환을 일으키고 선은 선순환을 일으킨다는 주관을 짧게 설명하며 에사르트의 마음가짐을 칭찬한 환인은 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리는 것을 목격했다.
숨결도 거칠어졌지만 애써 가다듬는 모습. 그 모습에 환인은 확신했다.
‘오울링에서 벌어진 사건의 전말을 대강이지만 알고 있군.’
모른다면 착한 일은 보답 받고 나쁜 일은 처벌받는다는 이야기에 저토록 동요할 리 없다.
그후 마차는 파르히스트나 웨이포드만큼은 아니지만 웅장한 성에 도착했고, 에사르트는 환인을 손수 제1 응접실, 성에서 가장 화려하고 기품있는 장소로 안내했다.
=아버지를 모셔오겠으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하샤우가 영혼사님의 시중을 들어 드릴 겁니다.=
예법에 어긋나지 않은 동작으로 인사하고 응접실을 나온 에사르트는 참을 수 없는 기분에 복도를 뛰듯이 걸으며 곁에 따라붙는 전담 집사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는가.=
=이 시간이면 집무실에 계실 것입니다.=
=알드헬름은?=
=영주님의 지시에 따라 방에서 자숙 중이시며 바위 기사단 기사님 두 분께서 문을 지키고 계십니다.=
=밖으로 나온 적은 없겠지.=
=네.=
영주 집무실에 도달한 에사르트는 불안에 뛰는 심장을 심호흡으로 다스린 뒤 =에사르트입니다.= 들어오라는 말을 기다리지 않고 들어갔다.
그러자 약간 어두운 집무실 내부에서 업무를 보던 회색 늑대와 백색 여우가 섞인듯한 외모의 남자가 차분한 시선으로 에사르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늦었구나.=
=죄송합니다, 아버지. 질책은 이 일이 끝난 뒤에 받겠습니다.=
세 아들 중 가장 신뢰하는 장남의 긴장한 태도에 셀가=르=비자룩스, 비자룩스의 영주도 눈빛을 바꾸고 펜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아버지. 영혼사님은 알드헬름이 오울링에서 저지른 일을 알고 계신 눈치입니다.=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첫 번째로 오울링에서 성불행을 진행한 영혼사님 일행의 인상착의가 일치합니다. 두 번째로 영혼사님께서 제게 비자룩스를 방문한 이유를 아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질문의 어감은 결코 좋은 의미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셀가 영주는 피로가 눈 안쪽을 자극하는 느낌에 눈을 감고 진한 한숨을 흘렸다.
조바심이 일어난 에사르트는 그런 아버지를 재촉했다.
=아버지, 지금이라도 알드헬름에게 그에 합당한 벌을 내려야 합니다. 영혼사님은 강건한 분이십니다, 제가 호텔에 도착했을 때 영혼사님은 객실에 계시지 않으셨고, 4시간이나 마을을 둘러본 뒤에야 돌아오셨습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 거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비자룩스가 심판대 위에 올라갈……!=
=에사르트, 아직도 백귀야행이라는 책을 버리지 않았느냐.=
=어, 아니 그게…….=
순간 말문이 막혔던 에사르트는 되려 목소리를 높였다.
=백귀야행은 단순 허술한 가십거리 책이 아닙니다! 그에 합당한 증거가 라수비탄 대륙 곳곳에 있지 않습니까! 비자룩스는 아버님과 할아버님의 피와 땀이 스며든 곳! 정순하고 평화로운 곳이나 알드헬름이 저지른 일로 상급 영혼사이신 그분이 정말 심판자로서 이 땅에 강림한다면……!=
=…….=
강력한 의지를 피력하는 에사르트의 언행에 셀가 영주는 다시 긴 숨을 내쉬었다.
평소 똘똘해서 믿고 일을 맡기는 장남이지만, 그 똘똘함에 아직 어린 나이가 독이 되어 음모론에 쉽게 심취하는 게 단점이다.
영주의 자질로는 매우 나쁜 버릇이기에 그간 시간을 들여 훈육해 어느 정도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상급 영혼사의 방문이라는 큰 자극에 고질병이 도진듯하다.
=……그러니 죄 없는 비자룩스 마을의 영민들이 희생되지 않도록 영혼사님의 설득이 필요합니다!=
=네 발언이 마을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왔음은 잘 알겠다.=
=그러면……!=
=영혼사님이 그리 지혜롭고 선한 분이시라면 죄 없는 마을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심판을 내리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한다면 알드헬름과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아비에게 단죄를 내리실 테지.=
=……아버지.=
=나는 일단 영혼사님을 뵈러 가마.=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아니. 너는 백귀야행 책을 비롯한 가십 잡지를 전부 가져와 내 책상 위에 두어라. 이후 1년간 가십지를 보는 것도, 사는 것도 금지하겠다.=
=예? 아, 아버지!=
=…….=
=…예…….=
무언의 응시에 귀를 뒤로 젖히고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나가는 장남을 바라보던 셀가 영주는 문이 닫히고서야 쓴웃음을 지으며 웃옷을 걸쳤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셋째가 한 일은 호족법에 저촉되진 않는다고 하나 인륜을 저버린 행위는 맞다.
책임을 피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피하겠지만, 수십의 원한령을 만들어낸 행위를 보아넘겼다가는 괘씸죄에 걸려 비자룩스를 찾는 영혼사님들의 수가 급감할 것이며, 승령천제때 제사를 주도하실 영혼사님도 모시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 결과 영민들의 신뢰와 믿음은 추락하고 치안도 차츰 나빠지겠지. 아버님과 자신의 대에 이룩해놓은 100년의 결실이 망가질 거다.
게다가 크라버리에 감도는 폭동과 전란의 기운. 그 여파는 틀림없이 비자룩스에도 미칠 것인데…….
영주로서 셋째를 벌할 것인가, 아비로써 아들의 죄를 보듬을 것인가.
근심을 숨기며 집무실을 나선 셀가 영주는 시종 둘과 함께 제1 응접실로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했다.
장남이 한 말에 따르면 영혼 기사가 세 명뿐이라 하였지. 상급 영혼사라면 적어도 6인의 영혼 기사를 대동하고 다닐 터인데 세 명 뿐이라니, 무언가 사고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여건이 마땅치 않아 기사를 얼마 뽑지 못한 분일까.
‘그나저나 무휘광의 영혼사인가, 어찌 된 일인지.’
무휘광의 영혼사가 나타났다면 틀림없이 영도에서부터 큰 목소리가 나왔을 터인데 단락적인 소문조차 듣지 못했다.
이다지도 감감무소식이다가 어느 순간 활동을 개시한 상급 영혼사. 어떻게 된 일인지 의문이 든다.
게다가 셀가 영주가 들은 위령제 소식, 그곳에서 근 일백에 가까운 영혼이 사람들 앞에서 일제히 성불했다는 사건. 아마도 중부와 남부의 지배자는 빠짐없이 들었을 터.
셀가 영주는 순수하게 걱정되었다.
영혼사라는 직업은 만인의 존경을 받지만 모두가 존경하고 흠모하지만은 않는다.
세상 어딜 가든 정신 나간 미치광이 무리가 있지 않은가. 더욱이 무휘광이라 하니 몰지각하고 어리석은 자에게는 그게 무엇보다 큰 면피가 될 것이다.
‘태풍의 눈이 되겠어.’
구전으로 내려오는 지식을 되새기며 복도를 걷던 셀가 영주는 문득 예민하고 뛰어난 청각으로 작지만 불쾌한 소음을 포착했다.
시끄럽게 다투는 듯한 목소리. 찢어지는 듯한 여자의 고성.
=…….=
그 소리가 지금 가고 있는 방향에서 들려온다는 걸 깨달은 셀가 영주는 얼굴을 무섭게 굳히고 체통도 잊은 채 달리기 시작했다.
비자룩스의 영주성에 도착한 환인은 고풍스럽지만 무거운 석조 건물의 웅장함에 말없이 고성을 둘러보았다.
성은 성이지만 흔히 성하면 생각하는 귀족과 왕족의 성 같은 것이 아니라, 적의 침입에 맞서 싸우기 위한 킵keep과 타워로 이루어진 전투적인 성이었다.
석재를 쌓아 지었기에 억세고 강인한 느낌이지만 그만큼 전투에 유용해 보이는 기관 장치가 곳곳에 눈에 띈다.
그렇다고해서 풍경이 삭막하지는 않았다.
1000루멘은 될법한 발광석이 곳곳에 박혀 어둠을 물리치고 있었고 시의적절한 곳마다 적색이나 백색의 융단과 벽 깃발이 늘어져 성을 꾸미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색 석조 탓에 살벌해 보이는 색감을 관상수와 조경수로 중화하고 있는 것은 물론 미술품도 계산적으로 배치되어 품격을 끌어올리는 중.
에사르트의 뒤를 따라 성 내부를 구경하며 제1 응접실에 도착한 환인은 향기로운 차를 마시며 찾아올 영주를 기다렸다.
응접실이 고요해지자 내부를 힐끔거리던 이실리테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멋진 성이네.=
=응? 이슬이는 이런 성이 취향이야? 의외네.=
=왜, 왜. 멋있는 건 사실이잖아…….=
=그야 넌 동화 속 성이 어울리는 공주님처럼 생겼으니까?=
=…뭐야 그게.=
=난 이슬이 아가씨의 마음도 이해돼~. 그도 그럴게 극한의 실용성을 추구해서 만든 조형은 일견 예술의 경지로도 묘사되잖니.=
=그렇죠? 사람의 손길을 오래 탄 고성은 그것만의 중후한 멋이 있는 거 같아요.=
=응응.=
여자친구들의 작은 대화를 들으며 차를 즐기던 환인은 곁에서 주기적으로 한기를 뿜어내는 시더를 다독였다.
원수의 성에 들어왔다는 사실에, 원수가 이 성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에 당장에라도 알드헬름을 찾아 죽이고 싶어하는 시더.
하지만 아직 움직일 때가 아니다.
거사를 치른다면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야밤이어야 한다.
자신의 다독임에 분노를 가라앉히고 둥둥 떠다니던 시더가 갑자기 문쪽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환인도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고, 감각 확장으로 좋아진 청력이 신경질을 부리는듯한 여자의 목소리를 잡았다.
=응?=
그것을 루크랑보다 가청음이 뛰어나다는 플뢰 족인 안느도 들었는지 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콰당!
직후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검은 양뿔이 자란 여자가 바락 소리지르면서 응접실로 들어왔다.
=여기에 우리 아들을 야만인에 인성 파탄자로 만든 영혼사가 왔다고 들었어요! 누구죠?! 당장 나오세요!=
포실포실한 백발에 처진 남색 눈동자의 여인. 알드헬름의 모친일 게 분명한 여자를 무표정한 얼굴로 응시하자 그 시선에 양뿔 여자도 날선 눈으로 환인에게 눈길을 주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