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8화 〉 252 광산 마을 비자룩스
* * *
여자 친구들이 술병을 치우고 탁자를 정리하고 창문을 열어 텁텁하고 술 냄새 가득한 거실 공기를 환기한다.
그것을 바라보며 환인은 가설과 추론을 분류하고 정리해나갔다.
안느가 종족 선천 재능으로 알아낸 감정은 틀렸을 가능성이 없다. 거기에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를 합치면 비자룩스의 현 영주는 어질고 멀쩡한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인사불성 상태로 해롱거리는 에사르트에게 시선을 준다.
‘저자가 둔감해서 집안 돌아가는 꼴을 모르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영주는 영혼사를 초대하는 일에 에사르트를 보냈다. 저 동글동글하고 토실토실한 북극 여우 머리의 남자가 멍청하거나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고보니 로비에 몇 명의 직업자가 있었지. 군인 특유의 느낌이 들던데 에사르트의 호위겠군.
“유르파.”
=응~?=
위상력으로 바람을 일으켜 방안의 술냄새를 모두 날려버리고 있는 유르파를 불러 물었다.
혹시 미궁의 함정처럼 사람을 불러들여 상태 이상에 빠트리는 술법진이 성이나 저택에 설치될 수 있느냐고.
질문의 요지를 읽은 유르파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정신나간 편집증 환자가 아니고서야 자기 집에 술법 함정을 설치하지 않아. 설치도, 유지도 말 그대로 금화 잡아먹는 괴물이거든.=
수많은 사람이 돌아다니는 저택에 설치할 경우 피아 구분을 위한 술식이 정말 악 소리 날 정도로 방대해진다.
그걸 감안하면서까지 술법 함정을 설치한다 쳐도 술식의 유지 비용은 술식의 길이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아무리 부자에 호족이라 하더라도 저택이나 성 내부에 술법 함정을 설치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
=설치한다면 저택 담장이나 외벽 정도, 그마저도 7급 함정 전문 부여 술사는 되어야 설치할 수 있어. 인력과 재력이 방대한 주도의 성궁이면 내부에도 술법 함정을 설치해놓겠지?=
“불러놓고 함정을 쓴다는 것은 비상식적이라는 거군요.”
=맞아. 알드헬름의 엄마…… 이름이 스타에타랬나? 그 여자가 자기랑 우리한테 해코지 하려면 음식에 못된 짓을 하거나 야밤에 사람을 밀어 넣어 해치려 하거나 그 정도 수준이 전부일 거야.=
“…….”
=뭐 도령은 큰 걱정 없지 않아? 위상류가 있어 위상력 관련 공격은 거의 면역이나 다름없고 영혼 시야로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도 알 수 있으니까. 거기다 방벽도 있고.=
탁자를 정리하고 다가온 안느가 이야기하자 환인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나의 안위에 신경 쓰는 걸로 보이나.”
=응?=
=안느 아가씨도 참. 자기는 우릴 생각하는 거잖니.=
=……아.=
얼굴이 살짝 붉어진 안느가 겸연쩍어하고 있을 때 유르파가 조언한다.
=물리적 암습은 우리가 번갈아가면서 불침번을 서도 되고, 상태 이상 관련 공격은 이 부적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어지간한 건 전부 막을 수 있어. 음식 걱정은 자기의 신호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 초대받아도 괜찮지 않을까~?=
이야기를 들은 환인은 이실리테와 4시간 동안 밖에서 알아본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적어도 현 영주의 알려진 모습은 믿을만하다고.
“그 모습이 사실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고, 그것이 꾸며진 것이라 해도 타인의 시선에 크게 신경쓰는 부류일 테니 이쪽을 함부로 건드리지는 못할 겁니다. 상급 영혼사가 비자룩스로 향한다는 소문이 비자룩스 내에도 널리 퍼졌을 정도니까요. 그럼에도 건드린다면…….”
환인의 여자친구들은 순간적으로 사신처럼 어둡게 빛난 환인의 눈빛에 침을 꼴깍 삼켰다.
특히 종족 특성상 타인의 감정을 곧잘 읽는 안느는 환인이 오히려 영주가 공격해오길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심성에 실망하긴커녕 되려 그 기백과 패기가 멋지다며 안느의 콩깍지가 더욱 두껍게 쓰일 무렵 환인이 말을 이었다.
“일단은 초대는 받겠지만 성에 숙박하는 것까지는 거부할 예정입니다.”
영주가 장남을 직접 보내 초대할 정도다. 초대까지는 영주의 성의와 체면을 보아 따르겠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태에 영주성에서 며칠 머무를 수도 있는 일.
“유르파, 방금 말한 수호부를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나누어주십시오. 그리고 성에 들어가면 가급적 단독 행동은 금지하겠습니다. 음식은 제가 있는 장소에서만 드십시오. 이실리테는 보존 주머니 작은 것에 몇 끼 정도 때울 양만 따로 챙겨라.”
=응~.=
=네, 주인님.=
그런 상황에 대한 지시를 내린 환인은 안느에게 부탁했다.
“안느, 에사르트에게 해독을.”
=어.=
취기도 일종의 독이기에 안느의 해독 술법을 받은 에사르트가 즉시 정신을 차린다.
=……어.=
몇 초정도 눈을 끔뻑거리던 에사르트는 환인을 발견하곤 헉, 벌떡 일어나더니 머리를 깊게 숙였다.
=몹쓸 꼴을 보여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되려 제가 사과를 드려야겠군요. 제 연인들은 모두 주당들이다 보니 맞술 하기 어려우셨을 텐데……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모두 제 자제력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모자란 모습을 보여드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응? 여, 연인이라고?
에사르트의 은색 눈동자가 충격에 작게 떨렸다.
북극 여우종의 인호족 에사르트, 비자룩스 영주의 장남인 그는 존경하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마을을 방문하였다는 상급 영혼사를 성에 초대하기 위해 돌심장 호텔을 찾았다.
상급 영혼사, 그 이름만으로도 존경과 선망을 받는 위대한 영혼의 순례자.
만나뵙고 인사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는 분을 찾아뵈러 가는 중이지만, 에사르트의 마음은 썩 좋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언젠가 성을 방문한 떠돌이 상단에서 구매한 백귀야행이라는 책의 내용이 떠오른다.
책에서는 상급 영혼사를 이렇게 지칭했다.
영혼의 구세주. 혹은 영혼의 심판자.
전쟁과 전염병이 퍼진 장소에서 나타나 구세와 혼연을 이행하며 영혼의 성불을 이끌어 정화를 내리는 구세주가 상급 영혼사지만, 반대로 죄악이 만연한 곳에 나타나 영혼의 대행렬을 이루어 죄업으로 물든 땅의 모든 것을 정화해 무無로 되돌리는 무시무시한 존재도 상급 영혼사라고 책에 나와 있었다.
영도가 왜 사대 국가의 틀에 속해있지 않으면서도 경외를 받고 있는가.
영혼을 인도하는 능력뿐인 영혼사가 어찌하여 이다지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사대 국가의 존중을 받는가.
그것은 전부 상급 영혼사 때문이다. 신의 뜻을 받아 영혼을 정화하는 사자이기 때문이다!
후자의 심판 같은 경우 시중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심판이 벌어졌다는 것은 기록으로서 확실히 존재한다.
오구르의 불가사의한 대지 침식.
루기아텝의 사상지?上?.
헤멜 알기스의 떠오르지 않는 죽음의 호수.
모두 검푸른 하늘이 열려 혼의 재액이 쏟아져 대지에서 살아가던 모든 것을 영혼으로, 무無로 환원시킨 증거.
심판자가 땅에 내려온 증거다.
‘하아아…….’
백귀야행의 내용을 생각하며 영혼사님 일행이 계시다는 스위트 룸 앞에 도착한 에사르트는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분은 성문 경비소에서 자신을 소개하기로 영혼사라 하였다. 하지만 알려진 일행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그분이 상급 영혼사임은 틀림없다.
‘그 말은 아직 기회가 있다는 걸로 생각해도 될까.’
그 망할, 아니 미쳐버린 게 아닐까 싶은 동생이 저지른 짓을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던 에사르트는 황급히 주름진 미간을 눌러 편다.
동생이라 부르기에도 모멸스러운 놈의 일은 아버지께서 단죄하실 일. 자신은 당장 주어진 임무를 완벽히 수행해야 한다.
어흠, 헛기침한 에사르트는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누구야~?]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꾀꼬리같이 맑고 청아한 목소리.
귀에 박하를 쑤셔 넣은 것처럼 시원해지는 음색에 흠칫한 에사르트는 이어 문이 벌컥 열리며 드러난 여성의 미모에 영혼이 정수리를 통해 사출되는 것을 느꼈다.
=아, 아름답다…….=
=응?=
=……예?=
=예? 는 무슨. 너 누구냐고 내가 먼저 물었는데?=
내가 누구였지?
=……아! 죄송합니다, 아가씨의 아름다움에 순간 영혼이 성불 당하는 충격을 받아 정신이 나가버렸었군요. 저는 비자룩스를 다스리는 셀가 르 비자룩스 영주님의 장남인 에사르트 르마리테라고 합니다…….=
말하면서도 얼마나 가슴이 떨렸던가.
말 실수는 안 했지? 그보다 눈앞의 플뢰 아가씨는 영혼사님과 어떤 관계일까. 6급 희귀 아우라이니 영혼사님의 영혼 기사? 오늘 내가 어떤 옷을 입었더라? 여식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 내 순백의 모피에 흙먼지가 묻어 꼴불견을 연출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 뒤로 꿈결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영혼사님이 잠시 외출했다는 이야기,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내일 다시 찾아오는 것은 어떻겠냐는 이야기.
아니…… 오히려 좋아! 역사상 최고의 미녀라 불렸던 르아 베리아스의 환생이 아닐까 싶은 아가씨와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니!
숲의 정령보다도 아름다운 플뢰 아가씨는 가슴 떨릴듯한 미소로 술 좋아하느냐고 물었고, 에사르트는 사내답게 보이기 위해 독한 술도 무척이나 즐긴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미의 여신이라 칭해도 될 만큼 아름다운 아가씨에 비하면 손색이 있지만 순백이 눈처럼 깨끗한 미녀도 갑자기 나타났고…… 불을 놓으면 실제로도 불타는 독한 카드보가 아가씨의 주머니에서 쉴새 없이 나왔고…….
필름이 끊겼다.
그러다 정신을 차렸을 때 에사르트는 온통 흑색인 귀족 복장의 남자가 자신에게 시선을 주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앞의 사람은 남자.
……여긴 영혼사님이 빌린 객실.
……영혼사님 일행에 유일한 남자는 바로 영혼사님.
그러니 눈앞의 남자는 영혼사님이다.
=몹쓸 꼴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에사르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영혼사님을 뵈러 와서 이 무슨 추태를?! 영혼사님께 이런 몹쓸 꼴을 보여 드리다니! 으악,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난 죽었다!
“아니요. 되려 제가 사과를 드려야겠군요. 제 연인들은 모두 주당들이다 보니 맞술 하기 어려우셨을 텐데…… 미안합니다.”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 고풍스러우면서도 부드러운 단어의 연결. 그리고 충격적인 내용.
연인…… 연인들…… 주당…….
에사르트의 눈빛이 애처롭게 떨렸다.
실연의 시선이 같은 남자가 봐도 멋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 영혼사와, 한눈에 심장을 빼앗기고 만 안느 아가씨, 그녀 못지않게 아름다운…… 아니, 솔직히 안느 아가씨보다 더 아름다운 동족 여성에게 향했다.
“그만 앉으실까요.”
=…아. 네, 영혼사님.=
에사르트 르마리테 비자룩스. 인생 첫 실연과 상실의 아픔을 맛본 순간이었지만, 극도의 인내력을 발휘해 이러한 감정을 내리눌렀다.
아가씨들이 영혼사님의 연인인 이상 이런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크나큰 무례이자 결례다.
비자룩스의 이름에 먹칠을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이 감정은 모두 버려야 한다.
그러나 환인은 그 내심을 모두 읽은 뒤였다.
* * *